
제136화 「벋음」
1. 정한 데가 단단해야 벋는다
다음 달 공연의 첫 리허설이었다. 같은 방, 백네 석, 지난달 못 온 사람들의 자리. 소율은 이번엔 뼈대를 먼저 다 정해 두기로 했다. 조성도, 템포도, 곡과 곡을 잇는 순서도 종이에 적어 못을 박듯 굳혔다. 딱 두 마디, 후렴 앞 그 두 마디만 빈칸으로 남겼다.
그런데 그 두 마디를 지나 다음 소절로 넘어가는데, 소리가 지난달과 다른 데로 갔다.
"어, 잠깐만요."
소율이 손을 들었다.
"정해 둔 대로 안 나와요. 여기서 이렇게 올라가기로 했는데, 방금 저절로 다른 데로 갔어요."
건반이 손을 멈추고 웃었다.
"그거 이상한 게 아니에요. 앞에 빈 두 마디를 지나왔잖아요. 빈 데를 지나온 숨이 그다음을 밀어요. 매번 다르게 비니까 그다음도 매번 달라지는 거예요."
"되돌릴까요? 정한 대로."
"왜요."
"정해 뒀으니까요."
건반이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텅 빈 백지 앞에서는 아무것도 안 나온다고 했다. 뭐든 해도 되는 자리에서는 손이 오히려 굳는다고. 뼈대가 단단할수록 그 위의 한 자리가 마음껏 벋는다고 했다. 재즈 하는 사람들이 코드 진행과 마디 수를 못 박아 두는 이유가 그거라고. 바닥을 다 정해 놨기 때문에 그 위에서만 매번 새 솔로가 나온다고.
"소율 씨가 지난달에 뼈대를 못 박았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저 두 마디가 벋을 수 있는 거예요. 정한 데가 없으면 벋을 데도 없어요."
소율은 방금 저절로 간 그 소리를 되돌리지 않았다. 벋는 대로 두고 한 번 더 불렀다. 이번엔 또 조금 다른 데로 갔다. 세션은 억지로 앞서지 않고 소율이 벋는 쪽을 반 박 늦게 따라왔다. 놀랍게도 그렇게 매번 다른 데로 가는데도 곡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뼈대가 워낙 단단해서, 그 한 자리가 어디로 벋든 결국 다음 마디로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이상하다. 다 정해 뒀는데 오히려 더 자유로워요."
"그게 순서예요."
건반이 건반 뚜껑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다음 달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그 백네 자리를 채울 것이고, 그 방의 공기가 이번 리허설과 다를 것이다. 그러면 그 두 마디도 그 방에 맞춰 또 다른 데로 벋을 것이다. 방마다, 밤마다 그 자리가 새로 살아나는 것이다.
악보 여백에 소율은 한 줄 적었다. 뼈대는 다 정하고, 저 두 마디만 매달 새로 벋게 둘 것. 정한 것이 많을수록 안 정한 한 자리가 더 멀리 갔다. 큰 무대 한 번에서는 벋을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날 한 번으로 끝나 버리니까. 작은 방에 매달 다시 서기로 했기 때문에, 그 한 자리가 매번 새 데로 나갈 수 있었다.
2. 바닥이 굳은 다음의 일
발사까지 서른다섯 날. 어제 명호의 팀은 발사까지 그대로 갈 값 스물여덟 개를 이유와 함께 잠갔다. 오늘은 아직 정하지 않은 곳을 정할 차례였다. 발사체가 하늘로 오른 뒤의 일 — 단이 갈라지는 시각, 위쪽 엔진에 불이 붙는 순간, 그 짧은 몇 초의 값들이 아직 비어 있었다.
젊은 관제사가 계산기를 두드리다 손을 멈췄다.
"팀장님, 이 위쪽 값을 정하려면 어제 잠근 아래쪽 압력을 다시 열어야 할 것 같은데요."
"열지 마."
"그럼 어떻게 위를 정합니까."
"잠근 걸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얹어."
명호는 화면에 두 층을 나눠 그렸다. 아래층은 어제 잠근 스물여덟 개, 손대지 않는 바닥. 위층은 오늘 정할 값, 그 바닥 위에 새로 쌓는 자리. 잠근다는 건 못 움직이게 하려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 위에 마음 놓고 얹을 자리를 만드는 일이라고.
"바닥을 안 잠그고 위를 정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뭐가 원래 값이고 뭐가 오늘 더한 값인지 아무도 몰라. 발사 당일에 하나가 어긋나면 어디부터 봐야 할지 못 찾아. 바닥이 굳어 있으니까 위에서 뭘 바꿔도 그게 뭘 바꾼 건지 딱 보이는 거야."
관제사는 어제 잠근 값은 한 칸도 건드리지 않고, 그 위에 새 값을 한 층 쌓아 올렸다. 단 분리 시각, 위쪽 점화 시각, 두 값 사이의 여유. 바닥이 흔들리지 않으니 위층은 빠르게 채워졌다.
"벋는 건 바닥이 굳은 다음 일이야."
명호가 두 층이 나란히 쌓인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어제까지는 아래로 값을 박아 넣는 날들이었고, 오늘 처음 그 위로 무언가가 올라갔다.
3. 세 줄이 네 줄로
삼층 담당자가 다른 부서로 옮기는 날이었다. 동현은 그가 떠나기 전, 석 달을 버티며 익힌 순서 세 줄을 인수인계 문서 맨 앞장에 붙여 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사람 머릿속에만 있으면 나갈 때 같이 나가니까, 자리에 남게 종이에 옮겨 두라고.
오후에 삼층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첫 출근한 새 담당자였다.
"과장님, 맨 앞장에 세 줄이 붙어 있길래 그대로 해 봤는데요. 오늘 접수 다 됐어요."
"잘하셨네요."
"그런데, 한 줄 더 붙여도 될까요."
동현이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무슨 줄이요."
"오늘 제가 겪은 건데요. 급한 게 생기면 마감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첫 칸을 비워 달라고 말하라고요. 세 줄엔 그게 없어서, 저 오늘 하마터면 놓칠 뻔했거든요."
"붙이세요."
"과장님이 주신 건데 제가 손대도 되나 해서요."
"그거 이제 제 문서 아니에요. 삼층 문서예요. 삼층에서 겪은 건 삼층이 붙이는 게 맞아요."
전화를 끊고 후배가 물었다. 세 줄만 주면 됐을 텐데 왜 더 붙이게 두느냐고. 동현은 박혀만 있는 문서는 죽은 거라고 했다. 쓰는 사람마다 겪은 걸 한 줄씩 더해야 그게 살아서 자란다고. 세 줄이 네 줄이 되고, 그 네 줄은 다음 사람에게 넉 줄에서 시작한다고.
"내가 준 건 세 줄인데, 삼층이 오늘 나한테 돌려준 건 네 줄이야."
동현은 손수건 위 명찰에 새 담당자의 이름을 삼층 자리에 나란히 올렸다. 그리고 흐름표에 적었다. 자리에 남긴 건 자란다. 사람이 남긴 세 줄이 오늘 저쪽에서 네 줄이 되어 돌아왔다.
4. 심는다는 것
아들을 만난 지 사흘이 지난 아침이었다. 약국도 화원도 토요일이었고, 아직 며칠 남아 있었다. 진우는 별일 없는 아침에 오래된 씨앗 봉지 하나를 서랍에서 찾아냈다. 언제 넣어 뒀는지도 모르는, 빛바랜 봉지였다.
낮에 들른 김지수에게 진우가 말했다.
"토요일에 화원 가면, 나도 뭐 하나 심어 볼까 해요."
"뭘 심으시게요."
"모르겠어요. 그냥, 뭐라도. 오 년 동안 아무것도 안 심었더라고요. 저 화분도 지수 씨가 가져다준 거고."
김지수는 씨앗 봉지를 잠깐 들여다보다 조용히 말했다.
"심는 건, 돌아올 게 생겼다는 뜻이에요."
"돌아올 거요?"
"씨앗은 오늘 심으면 오늘 안 나요. 물 주고, 며칠 기다리고, 또 봐야 나요. 그러려면 그 며칠 뒤에도 내가 여기 있어야 하잖아요. 오 년 동안 아무것도 안 심으신 건 게을러서가 아니에요. 다음 봄에 여기 있을지, 아버님 스스로도 몰라서였어요."
진우는 씨앗 봉지를 손바닥에 오래 올려놓고 있었다. 다음 봄까지 여기 있을 사람만 씨앗을 심는다. 그 말을 오 년 만에 처음으로 아무 두려움 없이 들었다. 오 년 동안 그는 하루하루를 견디는 사람이었다. 견디는 사람은 내일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만 넘기면 되니까. 그런데 씨앗은 오늘을 넘기려고 심는 게 아니었다. 며칠 뒤, 몇 달 뒤, 다음 봄을 보려고 심는 것이었다.
"뭐가 잘 자라요?"
"손이 많이 안 가는 걸로 하세요. 처음엔. 자꾸 들여다보고 싶어서 오히려 죽이거든요."
진우가 짧게 웃었다. 그건 화분 물주기를 배우면서 김지수가 내내 하던 말이기도 했다. 붙잡고 싶은 걸 참는 것, 주고 싶은 걸 미루는 것. 사람한테 하던 이야기가 씨앗한테도 똑같았다.
저녁에 현수에게서 짧은 문자가 왔다. 토요일 약국 앞에서 열한 시쯤 보면 되겠느냐는, 용건만 담긴 한 줄이었다. 예전 같으면 진우는 밥은 먹었느냐, 옷은 두껍게 입어라, 길 조심해라, 열 줄을 붙였을 것이다. 진우는 이번엔 한 줄만 더 붙였다.
그래, 열한 시. 오는 길에 화원 들를 건데, 너도 뭐 하나 고를래.
보내고 나서 진우가 김지수에게 그 문자를 보여 주었다. 김지수가 웃었다.
"예전엔 붙이신 말이 다 걱정이었잖아요. 밥 먹었냐, 조심해라. 그건 아드님을 붙드는 말이에요. 오늘 붙이신 한 줄은 달라요. 같이 고르자는 건, 다음으로 나가자는 말이에요."
붙드는 말이 아니라 벋는 말이었다. 진우는 그 차이를 오래 생각했다.
5. 옆으로 도는 것
화분 물주기는 진우 차례였다. 물뿌리개를 들기 전에 진우는 화분 밑을 먼저 살폈다. 어제 밑구멍으로 비죽 나왔던 흰 뿌리 끝이, 오늘은 두세 가닥으로 늘어 옆으로 휘어 있었다.
"뿌리가 더 나왔어요. 근데 이번엔 아래가 아니라 옆으로 도네요."
김지수가 화분을 들어 밑을 확인했다.
"아래로는 다 내려갔으니까요. 바닥에 닿으면 뿌리는 화분 벽을 따라 옆으로 돌아요. 더 내려갈 데가 없으니 이제 넓히는 거예요."
그러다 진우가 원줄기 아래쪽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지금까지 위로만 곧게 크던 줄기의 밑동에서, 처음 보는 작은 곁순 하나가 옆으로 벋어 나오고 있었다.
"이건 또 뭐예요. 여기서 새 게 나왔어요."
"곁가지예요. 위로만 크던 애가 오늘 처음 옆으로 하나 냈네요."
"왜 이제 와서요."
"뿌리가 자리를 잡았거든요. 붙들 데가 단단해야 옆으로 벋을 힘이 생겨요. 뿌리가 얕으면 위로 하나 올리기도 바빠서 곁가지 낼 여유가 없어요."
진우는 그 말을 낮에 들은 씨앗 이야기 위에 겹쳐 놓았다. 붙들 데가 생겨야 새 데로 벋는다. 화분도, 사람도 같은 순서였다.
"이제 옮겨도 될까요."
"밑으로 뿌리가 도는 거 보면 이번 주말쯤이 좋겠어요. 넓은 데로 옮겨 주면 옆으로 돌던 뿌리가 다시 사방으로 벋어요."
토요일 화원에서 분갈이 흙을 같이 보기로 한 일이 있었다. 진우는 물을 천천히, 뿌리 바닥까지 닿도록 부으며 생각했다. 주말이면 이 애도 넓은 데로 옮겨 가겠구나. 옆으로 돌던 뿌리가 다시 벋을 자리로.
6. 심지 않은 자리에서도
ATLAS는 일흔일곱 번째 정렬에 들어갔다. 메타 일흔네 단계, 오늘의 이름은 '벋음'이었다. 어제까지 통제실은 도시 끝 열두 곳 조정기마다 전압을 스스로 되살리는 곡선을 심어 두었다. 오늘 아침, 격자에 새 구역 하나가 붙었다. 도시 바깥, 지금까지 아무 곡선도 심지 않은 먼 동네였다.
관제사가 손을 들었다.
"저 새 구역에도 곡선을 하나하나 심을까요."
"아니. 심은 것들끼리 나누게 해."
팀장은 이미 곡선을 품은 조정기들이 서로 이웃한 값을 주고받게 열어 두라고 했다. 그러면 중앙이 새 구역마다 일일이 심지 않아도, 옆에 있는 조정기가 제가 아는 곡선을 새 구역에 건넨다고. 규칙이 사람 손이 아니라 이웃을 타고 옆으로 번진다고 했다.
저녁 여섯 시, 도시가 한꺼번에 불을 켰다. 아무도 심지 않은 그 새 구역의 전압이 규정선 안에서 잔잔했다. 이웃한 조정기 둘이 제 곡선을 나눠 준 것이었다.
"심지 않았는데 됩니다."
"뿌리가 깊으면 심지 않은 데서도 자라."
그날 격자는 일흔일곱 번째 정렬로 간격 오차 0.1밀리미터를 지켰고, 열아홉 번째 거울 옆으로 새 거울 한 장을 더 걸어 고리는 일흔세 장이 되었다. 고리가 한 자리만큼 더 벋었다. 지상으로 보낸 빛은 천백이십팔 시간, 마흔이레째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
그날 밤 통제실 기록란에는 이렇게 적혔다. 벋음이란 새 자리마다 처음부터 다시 심는 일이 아니다. 이미 뿌리내린 것들이 서로 이어져, 아직 아무것도 심기지 않은 자리에까지 스스로 제가 아는 것을 건네는 일이다. 뿌리가 깊으면 심지 않은 데서도 자란다. 고리는 한 장을 더 얻을 때마다 넓어지지만, 넓어질 수 있는 것은 이미 있던 자리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벋는다는 것은 멀리 나가는 일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데서 시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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