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3화 「들음」
1. 멈춘 사람
발사까지 서른여덟 날.
명호가 통제실에 들어섰을 때, 어제 시계를 멈춘 관제사가 이미 문 앞에 서 있었다. 밤을 새운 얼굴이었다.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앉아서 해."
"어젯밤에 계산을 다시 해 봤습니다. 그 누설량이면 발사까지 견뎠을 수도 있습니다. 압력 강하가 시간당 눈금 삼분의 일이니까, 여덟 시간을 다 채워도 규정선 안입니다."
그는 종이를 내밀었다. 숫자가 빼곡했다.
"제가 너무 일찍 멈춘 것 같습니다. 여덟 시간짜리 리허설을 한 사람 판단으로 날린 겁니다."
명호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계산은 정확했다. 정말로 견뎠을 것이다.
팀장이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네가 지금 나한테 뭘 물어보는지 알아?"
관제사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잘못한 건지 물어보는 겁니다."
"그 질문에 내가 한 번이라도 대답하면, 다음부터 아무도 안 멈춰."
팀장은 종이를 도로 밀어 놓았다.
"멈춘 뒤에 옳았는지 따지기 시작하면, 사람은 멈추기 전에 따지게 돼. 손을 들기 전에 계산기부터 두드려. 그 계산이 삼십 초 걸리면 삼십 초를 잃는 거고, 계산이 애매하면 그냥 손을 안 들어. 그게 제일 무서워."
항공 쪽에는 오래된 규칙이 하나 있다. 자기 실수를 스스로 보고한 사람은 처벌하지 않는다. 대신 보고하지 않은 것만 처벌한다. 판단의 정확도를 따지지 않고 보고의 유무만 따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정확도를 따지기 시작한 조직에서는 보고가 사라지고, 보고가 사라진 조직은 무엇이 잘못됐는지 영영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명호는 절차서를 폈다. 그리고 맨 앞장 여백에 한 줄을 적었다.
"멈춘 판단은 사후에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멈춘 뒤에 무엇이 나왔는지만 적는다."
그날 오전에 나온 것은 이랬다. 시트 실링의 머리카락 굵기 누설은 부품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묶음으로 들어온 부품 전체의 문제였다. 같은 묶음에서 온 실링이 발사체에 네 군데 더 있었다. 뜯어 보니 그중 두 군데가 이미 같은 방식으로 눌려 있었다.
명호는 네 군데를 모두 갈았다.
오후에 그는 관제사를 다시 불렀다.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 그의 어깨가 굳어 있었다.
"어제 그 값 말이야. 계기판에 뜬 건 규정선 안이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멈출 생각을 했어?"
"안인데 안 돌아와서요."
"그 말을 어디서 배웠어?"
"아무 데서도요. 그냥 십오 분 동안 보고 있었더니 그렇게 보였습니다."
명호는 수첩을 꺼내 그 말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절차서 어디에도 "안인데 안 돌아온다"는 문장은 없었다. 그것은 목록에 없는 값이었고, 목록이 서른한 줄로 짧아진 뒤에야 누군가의 눈에 들어온 값이었다.
"한 사람이 멈춰서 네 군데를 고쳤어."
명호가 말했다.
"자네 계산이 맞아. 견뎠을 거야. 그런데 견디는 거랑 안 새는 거는 다른 일이야."
2. 순서를 건네다
개정 승인 공고가 아침에 사내 게시판에 올라왔다. 신청 양식의 칸 아홉 개 중 다섯 개가 사라졌다는, 아무도 읽지 않을 법한 세 줄짜리 공고였다.
그런데 오후에 낯선 사람이 동현의 자리로 찾아왔다.
"육층인데요. 공고 보고 왔습니다. 저희 쪽 양식도 좀 봐 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는 칸이 열넷이거든요."
동현은 잠깐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안 봐 드릴 겁니다."
상대의 얼굴이 굳었다.
"대신 이걸 드릴게요."
종이에는 세 줄이 적혀 있었다. 먼저 가서 앉는다. 묻고 기다린다. 그쪽 손으로 하게 만든다.
"이게 전부입니까?"
"열네 칸 중에 뭐가 필요 없는지는 제가 모릅니다. 육층 일을 저는 한 번도 안 해 봤으니까요. 그건 그 열넷을 삼 년 동안 채워 온 사람들이 압니다. 저는 그 사람들한테 어떻게 물어보는지만 압니다."
그가 종이를 접어 넣고 돌아간 뒤에 후배가 물었다.
"가서 봐 주시면 반나절이면 되잖아요."
"내가 가면 육층이 내 부서가 돼."
동현이 흐름표를 펼치며 말했다.
"다음 주에 칠층이 오면 나는 두 군데를 가야 해. 그다음에 팔층이 오면 세 군데. 나는 언젠가 못 가. 아프거나, 다른 일이 생기거나, 아니면 그냥 지쳐서. 못 가는 날 그 세 군데는 전부 처음으로 돌아가."
"그럼 아무것도 안 바뀌잖아요."
"바뀌지. 저 사람이 육층에서 저 세 줄을 해내면, 다음에 칠층이 물어보러 가는 데는 여기가 아니라 육층이야."
네 시쯤 전화가 울렸다. 삼층 담당자였다. 서류 얘기가 아니었다.
"과장님, 아까 사층에서 저희한테 물어보러 왔었어요. 접수를 어떻게 하느냐고요. 제가 알려 줬는데, 그게 맞게 알려 준 건지 몰라서요."
"맞게 알려 줬어요?"
"제가 반려 사유서 읽는 법을 알려 줬습니다."
동현은 수화기를 잠시 들고 있었다.
"그럼 맞게 알려 준 겁니다."
전화를 끊고 그는 서랍을 열었다. 박영자의 손수건 위에 명찰 넉 장이 놓여 있었다. 그는 다섯 번째 자리에 접어 두었던 쪽지를 치우고, 오늘 찾아온 육층 사람의 이름을 적어 올렸다.
그리고 여섯 번째 자리는 비워 두지 않았다.
흐름표 맨 아래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자리를 미리 비워 두는 걸 그만둔다. 자리는 이제 저쪽에서 만들어서 온다."
3. 녹음에 없는 두 마디
공연 다음 날 오후, 소율은 스튜디오에서 어제의 실황 녹음을 처음 들었다.
첫 곡부터 좋았다. 지운 셋은 끝까지 지켜졌고, 열 마디로 늘려 익힌 이음매는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열일곱 분 사십 초. 예정보다 이 분 이십 초 빨랐지만 급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섯 번째 곡의 그 두 마디에서 소율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파형은 바닥에 붙어 있었고, 바닥 위로 얇게 지나가는 것은 밖을 지나던 자동차 소리 하나뿐이었다. 어제 그 방에서 소율은 분명히 무언가를 들었다. 방이 조용해진 게 아니라 한 겹 두꺼워졌다고 느꼈다. 아흔여섯 명이 동시에 숨을 멈추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녹음에는 없었다.
"당연하죠."
엔지니어가 말했다.
"마이크는 공기가 흔들린 걸 적어요. 그런데 어제 그 자리에서 일어난 일은 공기가 흔들린 게 아니라 사람들이 흔들기를 그만둔 거잖아요. 그만둔 건 안 적혀요."
숨을 멈추는 일에는 소리가 없다. 아흔여섯 사람이 한꺼번에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일에도 소리가 없다. 그날 그 방을 두껍게 만든 것은 소리가 아니라 주의였고, 주의는 음압이 아니어서 마이크에 담기지 않는다. 마이크는 그 자리에 있던 것을 다 적은 게 아니라, 적을 수 있는 것만 적은 것이다.
"여기에 리버브를 살짝 얹을까요? 잔향을 조금만 늘리면 비어 있는 느낌이 나요."
"비어 있는 느낌을 만들려고요?"
"네."
"거기 진짜로 비어 있는데요."
소율은 웃었다.
"뭘 얹으면 제가 그 자리를 채우는 게 되잖아요. 어제 안 채워서 된 건데요."
그는 그 트랙을 손대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음반에 실을 때 그 두 마디에 아무 표시도 하지 않기로 했다. 설명하지 않으면 처음 듣는 사람은 그냥 지나갈 것이다. 지나가도 상관없다고 소율은 생각했다.
"어차피 그건 거기 있던 사람들 거예요."
다음 달 추가 회차 이야기가 나왔다. 같은 방, 백네 석이 더 남아 있었다.
"큰 데로 옮기자는 얘기 또 나오면요?"
기획자가 물었다.
"어제 제일 좋았던 게 녹음이 안 됐잖아요."
소율이 말했다.
"녹음이 안 되니까 다음 달에 또 해야 하는 거예요. 그거 하나 때문에요."
4. 탁자 하나
오후 두 시 사십 분, 진우는 약속 장소에서 두 골목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방은 어제 옷걸이에 걸어 두었고, 외투 오른쪽 주머니에 접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스무 날 넘게 세어 온 날이 오늘이었다.
오는 길에 약국 앞을 지났다. 오래 다닌 집이었다. 유리문에 붙은 영업시간이 예전과 같았다. 그는 잠깐 서 있다가 그냥 지나갔다.
찻집 창가에 현수가 먼저 와 있었다.
오 년이었다. 열여덟이던 아이가 스물셋이었다. 어깨가 넓어져 있었고 앉은 자세가 낯설었다. 진우가 알던 몸이 아니었다.
현수가 일어섰다. 진우는 주머니 속 종이를 한 번 눌렀다.
"왔구나."
두 줄 중 첫 줄이었다.
"네."
둘은 앉았다. 탁자는 작았다. 김지수가 어제 말한 그대로였다. 스무 날 동안 그렇게 크게 키워 놓았던 날이, 앉고 나니 탁자 하나 크기였다.
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차가 좀 오래 걸렸어요. 이 근처는 다 유료더라고요."
"그래."
"여기 오래된 집이네요."
"그렇다더라."
진우는 목까지 올라온 말들을 삼켰다. 어디에 세웠느냐, 밥은 먹었느냐, 회사는 다닐 만하냐, 오는 데 얼마나 걸렸느냐. 하나같이 물어보고 싶었고 하나같이 이 자리에 필요 없는 것이었다.
현수는 잔을 두 번 돌리고 창밖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 숨을 골랐다.
진우는 그 자리를 알아보았다. 어제 김지수가 시시한 얘기를 하다가 만들어 두었던 자리와 같은 모양이었다. 첫 시도에 십일 초 만에 끼어들었던 그 자리. 그때 김지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 숨 자리에 진짜 하려던 말이 들어 있어요.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현수가 잔에서 손을 떼었다.
"그날, 제가 어디 있었는지 아세요?"
진우는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오 년 전 장례식장에서 그는 열여덟 살 아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네 엄마 죽는데 너는 어디 있었느냐. 그 문장에는 물음표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물음이 아니었다. 대답을 받을 생각이 조금도 없는 문장이었고, 그래서 오 년 동안 그는 한 번도 그 답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아들은 오 년 동안 그 답을 들고 있었다.
"몰랐다."
진우가 겨우 말했다.
"한 번도 안 물어봤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왔다.
벽시계 초침이 지나갔다. 진우의 손이 종이 쪽으로 갔다가 도로 내려왔다. 도와주고 싶었다. 뭐라도 먼저 말해서 이 조용함을 걷어 내고 싶었다. 어제 물뿌리개를 들었다가 내려놓던 손이 떠올랐다.
그는 그냥 두었다.
일 분이 지났다. 이 분이 지났다.
5. 그 약, 드셨어요
"엄마가 시켰어요."
현수가 말을 시작했다.
"그날 아침에요. 네 아버지 약 좀 받아 와라, 이틀째 안 드셨다, 그러셨어요."
진우의 손이 탁자 위에서 멈췄다.
"처방전이 없어서 약국에서 안 된다고 했어요. 병원 가서 다시 받아 오라고요. 병원 갔더니 선생님이 오전 진료가 끝나서 오후에 오라고 하고, 오후에 갔더니 대기가 밀려 있고요. 세 시간 반 걸렸어요."
그는 잔을 보고 있었다.
"돌아왔을 때는 이미 끝나 있었어요."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날 아버지가 저한테 소리 지르실 때요."
현수가 고개를 들었다.
"제 주머니에 그 약이 있었어요."
찻집 어디선가 잔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왜 말을 안 했느냐."
진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말하면 변명이 되니까요."
현수가 말했다.
"그리고 그때 저는 아버지 말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어디 있었냐고 물으시는데,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던 건 사실이잖아요. 이유가 있으면 없었던 게 있었던 게 되나요. 안 되잖아요."
"현수야."
"아버지, 이제 물어볼게요."
현수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말했다.
"그 약, 드셨어요?"
진우는 지난 스무 날 동안 백 개의 물음을 지었고 백 개의 답을 지었다. 어머니가 마지막에 무슨 말을 했느냐, 왜 그랬느냐, 아버지는 나를 용서했느냐. 그 백 개 어디에도 이 물음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답을 알고 있었다.
"안 먹었다."
진우가 말했다.
"그날도 안 먹었고, 그해 내내 안 먹었다. 약국에도 안 갔다. 이 년쯤 지나서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먹었다고 하면 아들이 세 시간 반 동안 뛰어다닌 일이 헛되지 않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순간 이 자리가 끝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오늘은 듣는 자리였다. 듣는 자리에서 하는 거짓말은 듣지 않은 것과 같았다.
현수는 오래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외투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약 봉지였다. 종이가 삭아 모서리가 부드러워져 있었고, 접힌 자리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인쇄된 날짜가 오 년 전이었다.
"이거 못 버렸어요."
현수가 말했다.
"이사를 세 번 했는데 세 번 다 챙겼어요. 왜 챙기는지도 모르면서요."
진우는 손을 뻗지 않았다.
"제가 오늘 물어보러 온 게 그거예요."
현수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이거 버려도 돼요?"
진우는 봉지를 보았다.
어제 김지수는 탁자 위에 물건이 올라오면 그날은 끝난 거라고 했다. 물건이 올라오면 설명이 시작되고, 설명이 시작되면 듣는 자리가 없어진다고. 그래서 진우는 앨범도 상장도 시계도 다 빼고 왔다.
그런데 물건을 올린 것은 아들이었다.
진우는 봉지를 집어 들었다. 가벼웠다. 안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
그는 그것을 열어 보았다. 알약이 색이 바래 있었다. 오 년이면 먹을 수 없는 약이었다.
"이건 이제 못 먹는다."
진우가 말했다.
"약도 오래되면 못 쓴다. 버려야 한다."
현수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진우는 봉지를 접어서 탁자 가운데에 도로 놓았다.
"그런데 약은 새로 받으면 된다."
그는 아들을 보았다. 주머니 속 종이에는 두 줄이 적혀 있었고 그중 하나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필요한 말은 그 줄이 아니었다.
"다음 주에, 같이 가 볼래."
현수가 고개를 들었다.
"약국에요?"
"그래. 오는 길에 지나왔다. 아직 있더라."
아들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우는 그제야 남은 한 줄을 꺼냈다.
"미안하다."
현수는 울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오래 보았고, 진우는 아들이 창밖을 보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시간을 예정하고 나온 자리였는데 두 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저녁에 진우는 김지수의 집으로 갔다.
나흘 전에 잡아 둔 약속이었다. 끝나고 오세요, 아무 말 안 하셔도 돼요. 김지수는 정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국을 데워 놓고 마주 앉아서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진우가 말했다.
"다음 주에 아들이랑 약국에 같이 가기로 했어요."
김지수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럼 다 된 거예요."
"그것밖에 안 정했는데요."
"다음이 생겼잖아요. 오늘 하실 일이 그거였어요."
물주기는 김지수 차례였다. 화분은 창턱에 있었다.
일곱 번째 잎이 다 펴져 있었다. 어제까지 반쯤 말려 있던 것이 오늘은 완전히 펼쳐져서, 다섯 장의 짙은 잎 사이에서 혼자만 노르스름한 연둣빛이었다. 종이보다 얇았다.
"아직 색이 옅네요."
"색은 며칠 걸려요."
김지수가 흙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물뿌리개를 들지 않았다.
"다 펴진 다음에 들어와요. 굳는 것도 그다음이고요. 순서가 그래요. 펴지고, 받고, 굳고."
진우는 외투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앞면의 두 줄은 오늘 둘 다 썼다. 뒷면은 여전히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뒷면에 결국 아무것도 못 적었어요."
"적을 게 없었던 게 아니에요."
김지수가 말했다.
"거기 들어온 건 종이에 안 적혀요."
진우는 종이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으려다 말고,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넣었다.
스무 날 만에 처음으로 그는 그것을 몸에 지니지 않고 잠들었다.
6. 우리 계기판이 한 말
아침에 지상에서 연락이 왔다.
어제 저녁 여섯 시부터 여덟 시까지, 도시 남쪽 끝 어느 골목의 상가 몇 집이 불빛이 어두웠다고 했다. 형광등이 평소보다 누렇고, 냉장고 압축기 도는 소리가 무거웠다고.
통제실은 조용해졌다. 어제 그 두 시간은 ATLAS가 도시의 저녁을 단독으로 받아 낸 시간이었고, 계기판은 완벽했다. 주파수는 규정선 한가운데였고 전압은 눈금 한 칸도 벗어나지 않았다. 열한 초 만에 되돌린 급증까지 포함해서, 기록상 흠이 하나도 없는 두 시간이었다.
"우리 값은 다 정상입니다."
젊은 관제사가 말했다.
"어디서 잰 값인데?"
팀장이 물었다.
"수광부 출력단입니다."
"그 골목은 거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지?"
전기는 선을 타고 가면서 조금씩 깎인다. 선에도 저항이 있고, 흐르는 전류가 클수록, 거리가 멀수록 깎이는 양이 커진다. 저녁 여섯 시에 도시 전체가 한꺼번에 불을 켜면 전류가 커지고, 전류가 커지면 가장 먼 끝에서 가장 많이 깎인다. 보내는 자리에서 규정선 한가운데였던 값이 받는 자리에서는 아래쪽 끝에 걸려 있을 수 있다. 두 값 다 진짜다. 다만 재는 자리가 다를 뿐이다.
"우리가 어제 잘했다는 거 말이야."
팀장이 계기판을 가리켰다.
"저게 한 말이야. 우리가 우리한테 물어보고 우리가 대답한 거지. 마흔네 날 동안 우리는 한 번도 저쪽 자리에 가서 재 본 적이 없어."
그날 오전 내내 그들이 한 일은 출력을 올리는 것도 조정을 다듬는 것도 아니었다. 규정을 판단하는 기준점을 옮기는 일이었다. 발전단이 아니라 가장 먼 말단에서 잰 값을 기준으로 삼기로 했고, 도시 끝 열두 곳의 계기를 통제실 큰 화면에 띄웠다.
화면이 켜졌을 때 관제사들이 조용해졌다.
여태 자로 그은 것처럼 판판하던 선이, 울퉁불퉁했다. 열두 개가 다 다르게 오르내렸고, 그중 둘은 어제 저녁 두 시간 동안 아래쪽 규정선에 계속 붙어 있었다.
"계기판이 못생겨졌습니다."
"좋네."
팀장이 말했다.
"이제야 진짜가 보이네."
같은 날 오후, 열아홉 번째 거울이 돌아왔다. 이틀 전에 빼서 눕혀 두었던 그 한 장이었다. 표면의 미세한 휨을 다시 재고 지지점 세 곳을 다시 잡아 제자리에 세웠다. 고리는 일흔두 장으로 돌아왔고, 지상 수광부의 상은 얼룩 없이 밝았다. 기록란에는 두 글자만 적혔다.
돌아옴.
격자 정렬 74차, 오차 0.1밀리미터. 무중단 송전 1,056시간, 마흔네 날째. 거울 일흔두 장. 판단 기준점 이설 완료.
그날 밤 팀장의 기록에는 이런 문장이 남았다.
들음이란 상대가 소리를 낼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내 자리에서 재던 것을 그만두고, 재는 자리를 상대의 자리로 옮기는 일이다. 우리는 마흔네 날 동안 우리 계기판을 보며 잘하고 있다고 말해 왔다. 그 계기판은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한 번도 저쪽 자리의 값을 말한 적이 없었을 뿐이다. 물어보지 않은 것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여태, 물어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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