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의새벽106 [영겁의 새벽] 제121화 - 디딤 제121화 「디딤」소율은 발매 사흘째 아침에도 숫자를 먼저 열지 않았다. 대신 지도 앱을 켰다. 어제 온 첫 라이브 문의에 "작은 자리라도 좋다"고 답을 보낸 뒤로, 밤새 머릿속에 무대 하나가 자꾸 그려졌기 때문이다. 방 안에서만 울리던 목소리가, 이제는 두 발로 찾아올 누군가 앞에 서야 했다. 발매가 끝이 아니라, 그 위에 무대를 올려 세울 첫 발판이 된 셈이었다.명호의 벽면 카운터는 오늘 처음으로 반백 자리 숫자를 띄웠다. D-50. 발사까지 딱 오십 일. 팀은 이 날을 하나의 관문으로 삼아, 발사체가 하늘을 오르며 스스로를 벗어 던지는 그 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기로 했다. 같은 시각, 진우는 오 년 만에 목소리를 들은 여운을 안고 강가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머리로만 그리던 자리를, 오늘은 두 .. 웹소설 2026. 7. 11. [영겁의 새벽] 제120화 - 오름 제120화 「오름」소율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폰을 켜지 않았다. 대신 창을 열고 물 한 컵을 마셨다. 어제 자정에 문을 연 곡이 밤새 저 혼자 어디까지 걸어갔는지, 숫자를 먼저 보면 그 숫자에 마음이 매일 것 같아서였다. 커피를 내리고 나서야 화면을 열었다. 재생수는 밤사이 조용히 올라 있었다. 폭발하듯이 아니라, 물이 그릇 벽을 타고 천천히 차오르듯이. 그보다 눈이 오래 머문 것은 코멘트 아래로 새로 달린 줄들이었다."후렴 직전에 반 박 흔들리는 데서,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어요." "그 흔들림이 위로가 될 줄 몰랐어요." 낯선 이름들이, 하나같이 같은 자리에서 멈춰 서 있었다. 마스터링에서 큰 봉우리를 눌러 살려 둔 그 작은 숨, 미리듣기로 먼저 열어 보인 그 자리였다. 그 자리를 감추지 않고 먼저.. 웹소설 2026. 7. 9. [영겁의 새벽] 제119화 - 엶 제119화 「엶」1. 자정에 열리는 문자정이 오는 걸 소율은 시계로 보지 않았다. 창밖의 도시가 한 칸씩 불을 끄는 걸로 알았다. 예약을 걸어 둔 시각이 남은 자리에서 저 혼자 다가오고 있었다. 손은 이미 떠난 곡을 위해 할 일이 없었고, 그래서 그녀는 그냥 앉아 있었다. 봉해서 우체통에 넣은 편지처럼, 이제 곡은 정해진 문 앞에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화면 구석의 시각이 넘어갔다. 예약 표시가 사라지고, 대신 '공개됨'이라는 작은 글자가 떴다. 그게 전부였다. 팡파르도, 불꽃도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부터,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재생 버튼을 누르면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수 있게 되었다. 닫혀 있던 방문 하나가 소리 없이 안쪽으로 열린 것 같았다.첫 재생은 스스로 눌러 보지 않았다. .. 웹소설 2026. 7. 8. [영겁의 새벽] 제118화 - 채비 제118화 「채비」채비란 떠날 사람보다 맞을 사람이 먼저 하는 일이다. 오는 것은 저쪽 몫이고, 맞는 것은 이쪽 몫이라, 손님이 문을 열기 전에 방은 벌써 데워져 있어야 했다. 열닷새 뒤에 올 얼굴을 위해, 아직 오지 않은 소리를 위해, 이 도시의 몇 사람은 저마다 제 자리를 데우고 있었다.1. 내보낼 채비소율은 마스터 파일을 마지막으로 열었다. 커버는 정해졌고, 삼십 초짜리 미리듣기는 이미 세상에 걸려 있었다. 남은 것은 곡을 진짜로 내보내는 채비였다.유통사에서 요구한 규격은 까다로웠다. 스물넉 비트, 사만 팔천 헤르츠의 원본 마스터 한 벌과, 어디서나 흘러나오도록 압축한 파일 한 벌. "원본은 창고에 넣어 두는 거고, 흘려보내는 건 압축한 쪽이에요." 엔지니어가 말했다. "다만 압축해도 그 흔들린 반.. 웹소설 2026. 7. 7. [영겁의 새벽] 제117화 - 선보임 제117화 「선보임」고르게 눌러 두었던 것들이, 오늘 처음으로 저마다의 얼굴을 바깥으로 내밀었다. 다듬는 일이 끝나면 언젠가 내보이는 날이 온다. 감춰 두었던 것을 먼저 꺼내 보이는 사람이, 결국 가장 멀리 걸어간다.1. 처음 내미는 얼굴마스터링이 끝난 뒤 소율에게 남은 건 커버 한 장뿐이었다. 디자이너가 펼쳐 놓은 시안은 여남은 장이었다. 노을을 태운 것, 금박을 두른 것, 소율의 옆얼굴을 크게 앉힌 것. 소율은 화려한 것부터 하나씩 밀어냈다. 손끝이 멈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는, 새벽빛 한 겹만 얇게 깔린 담백한 한 장이 있었다."제일 밋밋한 걸 고르시네요." 디자이너가 웃었다."흔들린 음 하나를 안 지우고 그대로 둔 노래예요. 표지가 저보다 잘나면, 노래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서요." 소율은 표지 아.. 웹소설 2026. 7. 6. [영겁의 새벽] 제116화 - 고름 제116화 「고름」1. 여러 방을 한 집으로어제 소율은 흔들린 음에 옅은 리버브를 얹어, 지우지 않고 방만큼 울려 주었다. 오늘 아침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엔지니어는 어제와 다른 화면을 띄워 두고 있었다. 곡선 하나가 좌우로 길게 누워 있고, 그 위로 눈에 거의 안 보이는 그물눈이 그어져 있었다."믹싱이 방을 만드는 일이었다면," 엔지니어가 말했다. "마스터링은 그 여러 방을 한 집처럼 고르게 하는 일이에요."소율은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들었다. 첫 소절은 숨소리만큼 작고, 후렴은 벽을 밀 만큼 컸다. 좋다고 느꼈던 그 낙차가, 이어폰을 빼고 작은 스피커로 옮겨 듣자 달라졌다. 조용한 데는 아예 안 들리고, 큰 데는 귀를 때렸다."사람들은 이 노래를 다 다른 데서 들어요. 버스에서, 이어폰으로, 부엌.. 웹소설 2026. 7. 4. [영겁의 새벽] 제115화 - 울림 제115화 「울림」1. 되울려 오는 소리소율은 스튜디오 조종실 의자에 앉아 어제 녹음한 소리를 처음으로 되들었다. 부스에서 한 호흡으로 부른 목소리가 이제는 스피커 두 대 사이 허공에서 되울려 나왔다. 어제는 자기 몸 안에서 밀어낸 소리였는데, 오늘은 그 소리가 바깥을 한 바퀴 돌아 되돌아와 귀를 두드렸다."이게 믹싱이에요." 엔지니어가 페이더 여러 개를 나란히 세우며 말했다. "따로 담은 트랙들을 한 공간에 풀어놓고, 각자 얼마나 울리게 할지 저울질하는 거예요. 목소리, 피아노, 현, 룸 톤. 다 같은 방에 있던 것처럼 들리게."소율은 후렴 직전 흔들린 음이 지나갈 자리를 유심히 들었다. 어제 정직하게 살려 둔 그 음이었다. 엔지니어가 그 대목에 리버브를 아주 옅게 얹자, 흔들림이 사라지는 대신 넓은 .. 웹소설 2026. 7. 3. [영겁의 새벽] 제114화 - 펼침 제114화 「펼침」1. 한 호흡으로 펼치다본 녹음의 아침이었다. 소율은 부스 문을 열기 전에 잠시 손잡이를 쥔 채로 서 있었다. 며칠 동안 곡을 토막내지 않고 한 호흡으로 부르는 연습을 했고, 어제는 세션 연주자들과 다섯 사람의 시작점을 한 점으로 모았다. 오늘은 그 모든 준비를 비로소 펼쳐 낼 차례였다. 접어 두었던 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엔지니어가 유리 너머에서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룸 톤부터 삼십 초 받을게요. 그다음에 바로 갈 겁니다." 아무도 소리 내지 않는 삼십 초 동안, 마이크는 부스 안의 고요 그 자체를 먼저 담았다. 나중에 흔들린 음을 다듬을 때, 그 고요가 이어 붙이는 자리의 밑바탕이 될 거라고 했다.소율의 목소리가 공기를 밀면, 마이크 안의 얇은 막이 그만큼 떨렸다... 웹소설 2026. 7. 2. [영겁의 새벽] 제113화 - 다짐 제113화 「다짐」1. 봉하기 전에진우는 편지를 다 쓰고도 봉투를 곧장 붙이지 못했다. 어제 깊게 눌러 새긴 글자들이 종이 뒷면까지 도드라져 있었다. 손끝으로 그 자국을 더듬으면 무슨 말을 썼는지 눈을 감고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한 번 더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덜어 낼 문장은 어제 이미 덜어 냈다. 오늘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었다."이제 붙이기만 하면 되는데." 진우가 풀을 든 채 말했다. "이상하게 손이 안 가요."김지수가 맞은편에서 화분 흙을 매만지다 고개를 들었다. "붙이면 못 고치니까 그렇죠. 새기는 거랑 봉하는 건 달라요. 새기는 건 나한테 남기는 거고, 봉하는 건 남한테 보내겠다고 정하는 거잖아요."진우는 그 말을 곱씹었다. 새겨 두기만 할 때는 마음을 바꿀 여지가 있었다. 봉투를 붙.. 웹소설 2026. 7. 1. [영겁의 새벽] 제112화 - 새김 제112화 「새김」1. 글자가 되는 말진우는 천을 깐 상자 뚜껑을 한 마디만큼 열어 두고, 그 곁에 빈 종이를 펼쳤다. 라디오와 놀이공원 사진을 담는 일은 어제로 끝냈지만, 담은 것만으로는 부족한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입으로 하면 흩어질 말. 그래서 그는 펜을 들었다."말은 공기를 흔들었다 사라지지만, 글자는 종이에 자국으로 남잖아요." 김지수가 식탁 건너에서 자기 몫의 종이를 마주 놓으며 말했다. "새긴다는 건, 사라질 걸 사라지지 않게 붙들어 두는 일이고요."진우는 첫 줄을 썼다 지웠다. 펜촉이 종이를 누르는 미세한 저항이 손끝으로 올라왔다. 깊게 눌러 쓴 자국은 종이 뒷면까지 도드라졌다. 다섯 해 동안 입 밖에 내지 못한 문장이, 처음으로 형태를 얻어 한 글자씩 남았다. 재회까지 스무하루. 그는 .. 웹소설 2026. 6. 30. [영겁의 새벽] 제111화 - 담음 제111화 「담음」들이는 일과 담는 일은 다르다. 들이는 건 문을 여는 일이고, 담는 건 들인 것을 어디에 둘지 정하는 일이다. 그릇이 있어야 담을 수 있고, 그릇은 비어 있어야 담을 수 있다. 그날, 여섯 사람은 저마다의 그릇을 꺼내 들었다.1. 무엇에 담아 건넬까진우는 현수의 방 책상 가운데에 둔 두 가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손바닥만 한 옛 라디오와, 모서리가 둥글게 닳은 놀이공원 사진. 어제는 버리지 않고 가운데 두기까지가 전부였다. 오늘은 그것을 어떻게 건넬지가 남았다. 스무이틀 뒤, 오 년 만에 마주 앉을 아들에게.그는 신발장 위에서 빈 과자 상자를 하나 내렸다. 안을 닦고, 부드러운 천을 깔았다. 라디오를 눕히고, 사진은 구겨지지 않게 두꺼운 종이 사이에 끼워 옆에 두었다. 상자 뚜껑을 덮었.. 웹소설 2026. 6. 29. [영겁의 새벽] 제110화 - 들임 제110화 「들임」 1. 들이는 첫 숨오 년 닫아 두었던 방의 공기는 바깥보다 반 박자 차가웠다. 진우는 어제 처음 연 문을 오늘은 망설임 없이 밀었다. 어제는 흩어진 것을 모으느라 손이 바빴고, 오늘은 그 모은 것을 하나씩 안으로 들이는 차례였다.책상 맨 아래 서랍이 반쯤 열린 채 걸려 있었다. 오 년 동안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자리였다. 진우는 서랍을 끝까지 당겼다. 안에는 현수가 중학생 때 쓰던 손바닥만 한 라디오와, 그 옆에 접힌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종이를 펴자 삐뚤빼뚤한 글씨가 나왔다. 아빠한테. 이거 고쳐 줘서 고마워요. 날짜는 적혀 있지 않았다. 진우는 그 라디오를 고쳐 준 날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오래 가슴을 눌렀다.그는 라디오의 작은 스위치를 밀어 보았다... 웹소설 2026. 6. 28. 이전 1 2 3 4 ··· 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