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60 [영겁의 새벽] 제64화 - 겹 제64화 - 겹 1. 수요일 새벽 다섯 시 사십칠 분, 진우는 호텔 옷장 문을 한 번 열었다 닫았다. 월요일 아침에 입었던 옅은 회색 셔츠 한 장이 가운데 옷걸이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옆 옷걸이는 비어 있었다. 진우는 그 빈 옷걸이를 옆 자리로 옮기지 않았다. 비어 있는 채로 두는 일이 비어 있는 채로 둔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핸드폰을 열자 한경수의 새벽 문자가 어제 새벽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비워 두신 자리를 잘 받겠습니다라고 답했던 자기 답신도 그 아래 그대로였다. 진우는 답신을 다시 읽었다. 답신은 어제의 답신인데, 오늘 다시 읽으니 다른 답신이 되어 있었다. 일지를 폈다. 같은 답신을 두 날에 걸쳐 읽으면, 같은 답신이 두 답신이 된다. 두 답신은 같은 자리에 겹쳐 있는데, 겹쳐 있.. 웹소설 2026. 4. 30. [영겁의 새벽] 제63화 - 자국 제63화 - 자국 1. 화요일 새벽 여섯 시 사십 분, 진우는 김포공항 6번 게이트에 앉아 있었다. 어제 입고 자고 일어난 셔츠를 그대로 입은 채였다. 호텔 옷장에는 한 장의 셔츠 자국이 옷걸이 하나 분량으로 남아 있을 터였다. 가져온 셔츠는 가방에 다시 넣지 않고, 그대로 입은 채로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어제 한 끼를 같이 든 사람의 곁에서 냄새를 묻혀 온 옷이라고, 그 옷을 한 번 더 입고 제주에 내려가는 길은 한 끼의 자리를 한 번 더 통과하는 길이라고 진우는 생각했다. 탑승 안내 방송이 흐르기 직전, 진우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왔다. — 어제 저희 집사람이 좋아하던 자리였습니다. 곰탕집 미닫이문 앞 세 박자도, 보리차 한 잔도. 다음에 한 끼 드시러 오시면, 그쪽에 자리를 비워 두겠습니다. .. 웹소설 2026. 4. 29. [영겁의 새벽] 제62화 - 한 끼 제62화 - 한 끼 1. 새벽 다섯 시 사십 분, 제주공항 청사 앞은 고요했다. 오진우는 옅은 회색 셔츠 위에 짙은 회색 재킷을 걸치고 카운터 앞에 섰다. 어깨에 멘 가방은 가벼웠다. 바뀐 옷 한 벌과 일지 노트 한 권, 그게 전부였다. 어제 명호와 함께 다림질한 셔츠는 옷장 손잡이에 한 장 그대로 남아 있었다. 탑승 수속은 빨랐다. 아직 청사가 깨어나지 않은 시간이라 줄도 짧았다. 진우는 보안 검색대를 지난 뒤, 게이트 옆 의자에 앉았다. 전광판의 김포행 출발 시간은 06:35. 휴대전화 화면에 명호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형, 비행기 잘 타세요. 첫 마디는 비행기 안에서도 안 정해도 돼요." 진우는 답을 적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끝내 한 줄만 남겼다. "고맙다." 전광판의 시간이 한 칸 넘어갔.. 웹소설 2026. 4. 28. [영겁의 새벽] 제61화 - 사이 제61화 - 사이 1. 일요일 오전 아홉 시. 서귀포 시뮬레이션 센터 공작실은 평일과 다르게 사람이 적었다. 환풍기가 평소보다 한 단계 낮은 회전수로 돌아가는 소리가, 오히려 이 방의 공기를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차명호는 다섯 번째 사파이어 원판을 작업대 위에 올렸다. 두께 12밀리미터, 직경 280밀리미터. 지난 네 장과 같은 규격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한 장 뒤에는 이제 더 이상 같은 라인의 원판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오늘 다섯 번째예요." 윤재석이 장갑을 끼면서 말했다. "어떻게 갈까요. 1, 2, 4번처럼 숫자로 갈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이름을 줄까요." 명호는 잠시 원판을 들여다보았다. 사파이어의 표면은 어제 네 번째 장과 거의 같은 결을 가지고 있었지만, 빛이 들어가는.. 웹소설 2026. 4. 27. [영겁의 새벽] 제59화 - 이름 제59화 - 이름 1.새벽 여섯 시의 공작실은 네 번째 비슷한 아침이었다. 차명호는 세 번째 사파이어 원판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가장자리에 묻은 미세한 먼지를 마른 솔로 세 번 쓸었다. 블레이드를 장착하는 윤재석의 손이 익숙해졌다는 것이 옆에서 보였다. 어제의 두 번째 장이 남긴 학습은 숫자로 옮겨져 있었다. 각도 -0.02도. 모서리 경로 -1밀리미터. 그 숫자 밑에, 어제 오후에 보인 8시 방향의 새 얼룩 좌표가 한 줄 더 적혀 있었다. "오늘 건, 이름 있어요?" 윤재석이 블레이드를 고정하며 물었다. 바라보지 않고 묻는 질문이었다. 명호는 공책을 넘겨 31번째 줄이 될 자리를 손가락으로 찾았다. "없어요." "없는 게 불편하면 제가 하나 지어드릴까요." "아뇨. 오늘은 없는 채로 가 보려구요.".. 웹소설 2026. 4. 25. [영겁의 새벽] 제58화 - 자리 제58화 - 자리 1.새벽 여섯 시, 공작 파트의 형광등이 한 번 깜빡이고 제자리를 찾았다. 윤재석은 어제 잘라 둔 두 번째 사파이어 원판을 조심스럽게 지그에 올렸다. '마중'이라 이름 붙은 첫 장은 별도의 보관 케이스에 놓여 있었고, 이제 두 번째 장 '배웅'의 엣지 폴리싱이 시작될 차례였다. 명호는 블레이드 각도를 확인했다. 어제보다 0.02도 좁힌 상태, 모서리 경로는 안쪽으로 1밀리미터 들어가 있었다. 첫 장에서 내부 개재물이 드러난 지점을 지도로 삼은 결과였다. "여기부터 시작하면 돼요?" 윤재석이 물었다. "응. #3000부터. 어제랑 같은 순서로." 연마기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명호는 공책을 펼치고 새 줄에 기록을 시작했다. 6시 07분. 두 번째 장 '배웅' #3000 엣지. 블레이.. 웹소설 2026. 4. 24. [영겁의 새벽] 제57화 - 배합 제57화 - 배합 1. 새벽 여섯 시. 서귀포 센터 공작실. 사파이어 두 번째 원판이 플라텐 위에 얹혔다. 윤재석이 냉각수를 뿌리고 다이아몬드 블레이드의 각도를 0.02도 더 좁혔다. "어제 첫 장은 모서리에서 얼룩이 나왔죠." "네. 내부 개재물이었어요." "두 번째는 모서리 경로를 안쪽으로 1밀리 당깁니다. 개재물이 같은 위치에 있을 확률은 낮지만, 있어도 우리 손이 닿지 않는 자리에 두면 되니까요." 명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책을 꺼내 29번째 줄에 적었다. 두 번째 장은 첫 장의 얼룩을 피해 간다. 피한 자리에는 첫 장의 모양이 남는다. 블레이드가 돌기 시작했다. 사파이어의 결이 숨을 들이마시듯 쪼개졌다. 윤재석은 여전히 번호를 매기지 않았다. 명호는 자신의 공책 귀퉁이에 연필로 '배웅'이라.. 웹소설 2026. 4. 23. [영겁의 새벽] 제56화 - 첫 장 제56화 - 첫 장1. 목요일 새벽 여섯 시, 서귀포 센터 공작 파트의 불이 켜져 있었다. 윤재석은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는 작업대 앞에 서서 팔을 접었다 펴기를 몇 번 반복했다. 차명호가 들어서자, 그는 고개만 까딱했다. "시작합시다." 작업대 위에는 어제 절단된 사파이어 원판 다섯 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제일 왼쪽이 '마중', 그 옆이 '배웅', 나머지 셋에는 3, 4, 5라는 숫자가 잉크로 쓰여 있었다. 이름과 숫자가 나란히 있는 공정이 좋다, 라고 명호는 공책에 적어두었다. "첫 장은 #3000부터 갑니다. 단계 올리면서 #8000까지. 중간에 얼룩 나오면 말해 주세요. 저는 숫자 안 세니까." 윤재석이 다이아몬드 페이스트를 꺼내며 말했다. 그의 폴리싱 패드는 마치 안경 렌즈를 닦는 천처럼 오.. 웹소설 2026. 4. 22. [영겁의 새벽] 제55화 - 배웅 제55화 - 배웅 1. 수요일 새벽 여섯 시. 제주의 하늘은 회청색에서 연분홍으로 갈아입는 중이었다. 차명호는 공작 파트 작업실로 걸어 들어갔다. 방 안은 서늘했고, 작업대 위에는 사파이어 원판 다섯 장이 얇은 초록색 보호지에 싸여 나란히 놓여 있었다.윤재석이 이미 와 있었다. 안경을 한 번 닦고, 작업복 단추를 채우는 중이었다."일찍 오셨네요.""첫 장을 자르는 날은, 저는 늘 한 시간 먼저 옵니다."명호가 공책을 폈다. 22번째 줄에 오늘 날짜를 적었다. 줄 아래에는 공정표가 붙어 있었다. 1번 공정: 사파이어 원판 절단 → 엣지 폴리싱 → CVD 다이아몬드 층 접합 → 박막 증착. 하루에 한 공정씩. 다섯 장 동시 진행이지만, 첫 장은 기준이 되는 장이었다."첫 장은 제일 느리게 자르겠습니다." 윤.. 웹소설 2026. 4. 21. [영겁의 새벽] 제54화 - 파도 제54화 - 파도 1. 아침 일곱 시 오십 분, 소나무숲 어귀에는 아직 바람이 차게 남아 있었다. 소율은 회색 후드를 머리 끝까지 올리고 숙소 쪽에서 걸어 나왔다. 기타는 가져오지 않았다. 가방은 가벼웠다. 가벼운 가방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느리게 걷게 했다. 벤치 옆에 진우가 먼저 서 있었다. 등산 점퍼를 반쯤 여민 채, 두 손은 주머니에 꽂고, 바다 쪽을 보고 있었다. 소율이 다가가는 소리에 진우가 고개를 돌렸다. "왔어?" "왔어요." 어제 공항 기둥 옆에서 한 말과 같은 두 마디가 다시 반복되었다. 소율은 같은 말이 이틀 연속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이상하게 다행스러웠다. 숲길은 좁고 솔잎이 두껍게 쌓여 있어 걸음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진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제 가사 쓴 거 있어?" ".. 웹소설 2026. 4. 20. [영겁의 새벽] 제53화 - 마중 제53화 - 마중 1. 수요일 새벽 다섯 시. 제주도 서귀포 ATLAS 시뮬레이션 센터 자료실은 아직 조명을 절반만 켜둔 채였다. 차명호는 어제 공식 승인을 받은 '창 버전 A'의 제작 세부 설계도를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사파이어 3.0mm, CVD 다이아몬드 0.4mm, 다층 박막 14층, 미러 코팅 0.08mm. 총 두께 4.05mm, 무게 8.4킬로그램, 방사선 차폐율 82퍼센트, 가시광 투과율 88퍼센트. 숫자는 확정되었다. 이제 그 숫자를 물건으로 바꾸는 단계였다. 명호는 공책 열다섯 번째 줄을 적었다. 설계는 숫자로 끝나지만 제작은 손으로 시작한다. 그는 화성팀 공작 파트의 책임자 윤재석에게 전달할 사양서를 점검했다. 접합 방식, 열팽창 계수 오차 허용 범위, 검사 기준. 회복실용 창 60.. 웹소설 2026. 4. 19. [영겁의 새벽] 제52화 - 너머 제52화 - 너머1. 오전 열 시, 센터 본관 3층 회의실. 창밖으로 서귀포 바다가 가늘게 보였다. 명호는 '창 제안서' 38페이지짜리 PDF를 위원장과 다섯 명의 심사위원에게 순서대로 설명했다.사파이어 3.0mm. CVD 다이아몬드 0.4mm. 다층 박막 열네 층. 미러 코팅 0.05mm. 네 층이 겹쳐 하나의 창이 되었다. 방사선 차폐 76.2퍼센트, 가시광 투과 91.5퍼센트, 중량 7.8kg. 세 기준을 모두 넘었다.위원장이 말했다."방사선 차폐 기준은 원래 80퍼센트였습니다.""알고 있습니다. 저는 76.2퍼센트입니다. 넉 퍼센트 모자랍니다. 대신 중량이 기준보다 0.2kg 가볍습니다. 미러 코팅을 0.08mm까지 두껍게 하면 차폐를 82퍼센트로 올릴 수 있습니다. 대신 중량은 8.4kg으로 늘.. 웹소설 2026. 4. 18.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