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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132화 - 치름

우주관리자 2026. 7. 22.

 

제132화 「치름」

 

1. 한 번뿐인 저녁

 

공연장 문은 여섯 시 반에 열렸다.

 

소율은 무대 옆 좁은 통로에 서서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외투를 벗어 무릎에 얹는 소리, 낮게 주고받는 말소리. 어제 리허설에서 담요와 코트를 얹어 흉내 냈던 그 소리가 오늘은 진짜였다.

 

아흔여섯 석이 다 찼다.

 

건반이 통로 끝에서 손가락 셋을 펴 보였다. 삼 분 남았다는 뜻이었다.

 

"어제 지운 거 셋."

 

소율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코러스, 잔음, 왼손."

 

"오늘은 아무것도 더 안 넣기."

 

첫 곡은 무사히 지나갔다. 두 번째 곡의 두 번째 소절에서 건반이 처음으로 소율을 따라잡지 못했다. 반의 반 박쯤이었다. 객석은 아마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소율은 알았다.

 

세 번째 곡이 끝나고 물을 마시는 십 초 동안, 기타가 마이크를 손으로 덮고 짧게 말했다.

 

"빨라요."

 

"제가요?"

 

"곡 전체가요. 지금 이십 분 예정인데 십칠 분에 와 있어요."

 

소율은 자기가 서두르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천천히 부르고 있다고 느꼈다.

 

음향 담당이 무대 아래에서 손을 저었다. 나중에 그가 설명해 준 바로는, 그건 소율만의 일이 아니었다.

 

"무대에 서면 몸이 위험한 자리라고 판단해요. 심장이 빨라지고 감각이 예민해지죠. 그 상태에서는 같은 일 초가 더 길게 느껴져요. 몸 안의 시계가 빨리 돌면 바깥 시간이 느리게 느껴지고, 느리게 느껴지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당겨요. 리허설 때보다 빨라지는 건 긴장해서가 아니라, 긴장한 몸이 시간을 다르게 세기 때문이에요."

 

"그럼 어떡해요. 무대에서 시계를 볼 수도 없고요."

 

"시계 말고 숨으로 세세요. 심장은 무대에서 빨라지는데 숨은 소율 씨가 정할 수 있어요."

 

네 번째 곡의 앞에서 소율은 마이크를 잡지 않고 두 번 숨을 쉬었다. 객석에서는 그냥 뜸을 들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건반이 들어왔을 때 두 사람의 박이 처음으로 정확히 맞물렸다.

 

그리고 다섯 번째 곡, 후렴 직전의 두 마디가 왔다.

 

소율은 앞 소절을 물렸다. 기타가 잔음을 끊었다. 건반의 왼손이 올라갔다. 그리고 소율은 그 여린 반 박을 정말로 반만 냈다.

 

아흔여섯 명이 동시에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소리가 없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숨을 멈추면 방이 조용해지는 게 아니라, 방이 한 겹 두꺼워진다. 소율은 무대 위에서 그걸 처음 들었다.

 

연습에는 없던 일이 하나 있었다. 그 두 마디의 빈자리에, 공연장 밖 길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아주 얇게 들어왔다.

 

리허설이었다면 다시 했을 것이다. 소율은 그냥 두었다. 지우려고 소리를 내면 그 순간 두 마디는 사라진다. 그 자동차는 오늘 이 방에 들어온 소리였고, 오늘의 노래는 그 소리까지 포함한 노래였다.

 

곡이 끝나고 삼 초쯤 아무 박수도 없었다. 그다음에 왔다.

 

앙코르에서 소율은 마이크에서 반 뼘 물러섰다.

 

"이 노래는 원래 아무도 안 듣는 방에서 만들었어요."

 

"그 방에서는 제 목소리밖에 안 났거든요. 근데 오늘 여기서 제일 컸던 건 여러분이 숨을 멈춘 자리였어요."

 

"그거 제가 만든 게 아니에요."

 

끝나고 무대 뒤에서 건반이 물었다.

 

"오늘 어땠어요?"

 

소율은 한참 대답을 못 했다. 넉 달을 준비했는데 정작 남은 건 이십 분이었다. 다시 할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고, 저장해 둔 파일처럼 열어 볼 수도 없었다.

 

"연습은 몇 번이고 다시 했잖아요."

 

소율이 말했다.

 

"오늘은 한 번이었어요. 그게 이렇게 다른 일인 줄 몰랐어요."

 

2. 멈춘 시계

 

발사까지 서른아홉 날.

 

명호는 오늘 처음으로 중간에 멈추지 않는 카운트다운을 걸었다.

 

지금까지 열두 번의 리허설은 전부 조각이었다. 여기서 삼십 분, 저기서 사십 분, 문제가 나오면 세우고 고치고 다시 그 지점부터. 오늘은 T 마이너스 여덟 시간부터 T 제로까지, 여덟 시간을 통째로 끊지 않고 흘려보내기로 했다.

 

어제 이백열네 줄에서 서른한 줄로 줄인 마지막 삼 분 절차서를 실제로 쓰는 첫날이기도 했다.

 

"오늘 규칙 하나."

 

팀장이 통제실 앞에서 말했다.

 

"내가 아무것도 안 심어. 오늘은 가짜 없어."

 

"그럼 뭘 보십니까."

 

젊은 관제사가 물었다.

 

"진짜가 나오는지 보는 거지."

 

여섯 시간은 지루할 만큼 조용히 지나갔다. 추진제 충전이 예정대로 끝났고, 계통 점검이 순서대로 통과됐고, 열두 콘솔이 각자 제 계통의 끝에 앉아 있었다. 명호는 뒤에 서지 않았다. 통제실 뒤 유리문 밖 복도에서 수신만 켜고 들었다.

 

T 마이너스 사십칠 분에 사번 밸브의 압력 값이 규정선 안에서 아주 조금 눕기 시작했다.

 

떨어진 게 아니었다. 경보가 울릴 만한 폭도 아니었다. 십오 분에 걸쳐 눈금 하나의 삼분의 일쯤.

 

"사번 라인, 값이 계속 한쪽으로 갑니다."

 

"규정선 안입니다."

 

"안인데 안 돌아옵니다."

 

이 초쯤 침묵이 있었다.

 

"노 고."

 

시계가 멈췄다.

 

명호는 복도에서 그 소리를 듣고도 들어가지 않았다. 손이 유리문 손잡이까지 갔다가 내려왔다.

 

삼십 분 뒤에 정비반이 사번 밸브의 시트 실링에서 머리카락 굵기의 누설을 찾아냈다. 오늘 잡히지 않았다면 발사 당일에 샜을 종류의 것이었다. 규정선 안에서 천천히 눕는 값은 어느 경보에도 걸리지 않는다.

 

명호가 통제실로 들어갔을 때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 여덟 시간짜리 리허설이 T 마이너스 사십칠 분에서 멎었으니, 기록상으로는 실패였다.

 

"오늘 완주 못 했습니다."

 

명호가 말했다.

 

"응. 잘됐어."

 

팀장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통과한 리허설에서 우리가 배우는 게 뭔 줄 알아? 없어. 아무것도 없어. 통과했다는 건 우리가 이미 아는 것만 확인했다는 뜻이거든. 오늘 여덟 시간을 끝까지 흘려보내고 박수 치고 집에 갔으면, 저 밸브는 발사 당일 아침에 알아서 우리한테 인사했을 거야."

 

"그래도 절차서는 서른한 줄로 잘 돌았습니다."

 

"그거 확인하러 오늘 한 것도 아니야."

 

팀장이 화면의 멈춘 시계를 가리켰다.

 

"조각으로 하면 못 나오는 게 있어. 여덟 시간을 이어 붙이면 사람도 여덟 시간을 이어서 앉아 있게 되거든. 삼십 분짜리 시험에선 아무도 안 피곤해. 오늘 저 친구가 사십칠 분 남기고 그 값을 잡았을 때, 이미 여섯 시간 반을 앉아 있었어. 그게 오늘 얻은 진짜 데이터야."

 

명호는 수첩을 열어 한 줄을 적었다.

 

조각으로 백 번 하는 것과 통으로 한 번 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오늘 멈춘 시계는 발사 당일에 멈추지 않을 시계다.

 

3. 이름을 걸고

 

동현이 어제 자기 이름으로 올린 양식 개정 요청은 오늘 오전 열 시 심의에 걸렸다.

 

심의라고 부르지만 실은 회의실에 다섯 명이 앉아 종이 한 장을 보는 자리였다. 총무과장, 감사 담당, 전산 담당, 그리고 동현과 후배.

 

"아홉 칸을 넷으로 줄이자는 거죠."

 

총무과장이 종이를 넘기며 말했다.

 

"삼 년을 쓴 양식인데요."

 

"그 삼 년 동안 그 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물어봤습니다."

 

동현이 말했다.

 

"부서명, 부서코드, 담당자명, 내선번호. 이 넷은 사번만 넣으면 시스템이 이미 알고 있는 값입니다. 사람이 손으로 다시 적으면 시스템이 아는 값과 다르게 적힐 수만 있지, 더 정확해지지는 않습니다."

 

"관리 코드는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만든 사람이 삼 년 전에 퇴사했고, 인수인계 문서에 없고, 전산에도 그 값을 받는 항목이 없습니다. 어제 하루 종일 찾았습니다."

 

감사 담당이 볼펜을 놓았다.

 

"그래도 빼자는 건 위험하지 않습니까. 있던 걸 없애는 거니까요.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요."

 

이 질문을 동현은 예상하고 있었다. 어제 저녁에 후배에게 미리 말해 두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제일 무서운 문장은 반대가 아니라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이라고.

 

"두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동현이 종이 두 번째 장을 넘겼다.

 

"먼저 지금 생기고 있는 문제입니다. 지난 석 달, 사층에서 이 다섯 칸 때문에 반려된 서류가 예순 건입니다. 한 건이 반려되면 신청자가 다시 쓰고, 저희가 다시 받고, 다시 돌려보냅니다. 예순 건이면 백팔십 번입니다. 이건 나중이 아니라 이미 생긴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요."

 

"되돌리는 데 하루 걸립니다."

 

동현이 말했다.

 

"칸을 다시 넣는 작업은 전산에 한 줄 요청하면 끝납니다. 어제 확인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 아닙니다. 석 달 써 보고 정말 그 칸이 필요했다는 게 밝혀지면 그날 다시 넣겠습니다. 제 이름으로요."

 

"제 이름으로요, 라는 말은 왜 붙이십니까."

 

총무과장이 물었다.

 

"이 칸들이 삼 년을 살아남은 이유가 그거라서요."

 

동현이 말했다.

 

"누구도 뺄 이유가 없어서 남은 게 아니라, 뺐다가 잘못되면 자기 이름이 남으니까 아무도 손을 안 댄 겁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유를 모르는 칸이 삼 년을 삽니다. 저는 지금 그 이름을 제가 쓰겠다는 겁니다."

 

개정안은 조건부로 통과했다. 석 달 뒤 재검토, 그때까지 반려 건수를 동현이 집계해서 올릴 것.

 

회의실을 나오면서 후배가 물었다.

 

"과장님, 만약에 석 달 뒤에 그 칸이 필요했던 걸로 밝혀지면요?"

 

"그럼 내가 틀린 거지."

 

"그건 안 무서우세요?"

 

"무서운 건 그게 아니야."

 

동현이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틀리는 건 석 달 뒤에 밝혀지고 하루면 고쳐져. 근데 아무도 이름을 안 쓰면 그 칸은 십 년을 더 살아. 그동안 반려는 계속 나오고, 매번 신청한 사람이 자기가 잘못 쓴 줄 알고 미안해해. 그게 무서운 거야."

 

자리로 돌아온 동현은 손수건을 폈다. 명찰 넉 장은 그대로 있었다. 어제 다섯 번째 자리에 접어 두었던, 지운 다섯 칸을 적은 쪽지를 꺼내 뒷면에 오늘 날짜를 적고 다시 접어 놓았다.

 

흐름표 마지막 칸에는 이렇게 적었다.

 

오늘은 아무 서류도 처리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처리하지 않아도 될 서류 예순 건을 지웠다.

 

4. 자지 않아도 되는 밤

 

내일이었다.

 

진우는 그 사실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알았다. 세는 사람은 잠에서 깨는 순간 숫자를 먼저 안다.

 

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방은 데워 두었고, 시각은 정해졌고, 벤치는 세 번 다녀왔고, 옷은 꺼내 걸어 두었고, 가방은 어제 비워서 옷걸이에 걸었다. 주머니에는 두 줄이 적힌 종이 한 장. 뒷면은 비어 있었다.

 

오후 진료가 끝나고 김지수가 들렀을 때, 진우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물어보실 게 없으신가 봐요."

 

김지수가 말했다.

 

"하나 있어요."

 

"네."

 

"오늘 밤에 잠이 안 오면 어떡하죠."

 

김지수가 웃었다.

 

"안 오실 거예요."

 

"위로를 안 해 주시네요."

 

"위로가 제일 나쁠 때가 있어서요."

 

김지수가 맞은편에 앉았다.

 

"자야 한다고 생각하면 더 안 자요. 잠은 애써서 되는 게 아니라 애를 안 써야 오는 거라서, 자려고 노력할수록 몸은 그걸 해야 할 일로 받아들여요. 그러면 각성이 올라가요. 침대에 누워서 시계를 보는 순간부터는 자는 게 아니라 자는 걸 감시하는 거예요."

 

"그럼 뭘 하죠."

 

"안 자도 된다고 정하세요."

 

"그게 돼요?"

 

"내일 아버님이 하실 일이 뭐죠?"

 

진우는 잠깐 생각했다.

 

"듣는 거요."

 

"그래서 안 자도 돼요."

 

김지수가 말했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날이면 제가 억지로라도 재웠을 거예요. 말은 잠이 모자라면 헝클어지거든요. 근데 듣는 건 좀 달라요. 밤새 뒤척인 사람은 다음 날 말이 줄어요. 말이 줄면 남의 말이 들어올 자리가 늘어요. 내일은 그게 나쁘지 않아요."

 

"그러다 졸면요."

 

"오 년 만에 아드님 앞에 앉아서 조실 것 같으세요?"

 

진우가 처음으로 소리를 내서 웃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진우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이상한 말 하나 해도 돼요?"

 

"네."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어요."

 

진우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자기가 부끄러워졌다. 스무 날 넘게 세어 온 사람이 할 말이 아니었다.

 

"그 말 하실 줄 알았어요."

 

김지수가 말했다.

 

"그거 세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안 세는 사람은 내일이 오든 말든 아무 생각이 없어요. 아버님은 스무 날 넘게 그날을 크게 키우셨잖아요. 크게 키운 걸 내일 열어 봐야 하니까 무서운 거고요."

 

"그럼 잘못 키운 걸까요."

 

"아니요. 다만 내일이 되면 그건 원래 크기로 돌아갈 거예요."

 

"원래 크기요?"

 

"아드님이랑 아버님이 마주 앉는 크기요. 그거 생각보다 작아요. 탁자 하나예요."

 

아홉 시 사십 분에 문자가 왔다. 현수였다.

 

내일 뵙겠습니다.

 

진우는 그 한 줄을 오래 보았다. 예전 같으면 여기에 열 줄을 붙였을 것이다. 늦지 않게 오라고, 저녁은 먹고 오라고, 길이 막히면 연락하라고, 아버지가 미리 나가 있겠다고.

 

진우는 두 글자를 보냈다.

 

그래.

 

보내고 나서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잠들기 전에 종이를 한 번 꺼냈다. 앞면에는 두 줄. 뒷면은 비어 있었다. 어제는 뒷면이 위로 오게 뒤집어 두고 잤는데, 오늘은 그대로 접어서 내일 입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불을 끄고 누워서 진우는 시계를 보지 않았다.

 

5. 연한 것

 

오늘 물주기는 진우 차례였다.

 

창턱으로 가면서 진우는 물뿌리개를 들지 않았다. 먼저 손가락을 흙에 넣었다. 그저께 김지수가 하던 대로, 어제 자기가 배운 대로.

 

한 마디쯤까지 바슬바슬했다. 그 아래는 아직 서늘했다.

 

"줘도 될 것 같은데요."

 

진우가 말했다.

 

"저한테 안 물으시고요."

 

"흙한테 물었어요."

 

김지수가 웃었다.

 

물을 붓다가 진우가 손을 멈췄다.

 

"이거 좀 보세요."

 

어제까지 좁쌀만 하게 부풀어 있던 일곱 번째 잎눈이 벌어져 있었다. 아직 완전히 펴진 건 아니고, 반쯤 말린 채로 위를 향해 서 있었다.

 

그런데 색이 이상했다. 다른 다섯 장은 짙은 초록인데, 이 새 잎만 노르스름한 연둣빛이었다. 만져 보니 종이보다 얇았다.

 

"얘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진우가 물었다.

 

"어제 뗀 잎도 노랬잖아요."

 

"그거랑 반대예요."

 

김지수가 잎 아래로 손바닥을 받쳐 들여다봤다.

 

"어제 뗀 건 다 보낸 잎이라 노랬고, 이건 아직 안 받은 잎이라 연해요. 잎에서 초록색을 내는 건 엽록소인데, 새 잎은 그게 아직 다 안 만들어졌어요. 세포도 다 안 굳었고요."

 

"약해 보여서요."

 

"약한 게 아니라 안 굳은 거예요."

 

김지수가 말했다.

 

"잎눈 안에 잎이 돌돌 말려서 들어 있잖아요. 그게 펴지려면 세포벽이 늘어나야 해요. 다 자란 잎처럼 단단하면 못 펴요. 찢어지거든요. 그래서 펴는 동안만 일부러 연하게 있는 거예요. 다 펴고 나서 굳어요."

 

진우가 잎을 건드리려다 손을 뗐다.

 

"만지면 안 되겠네요."

 

"네. 오늘이 제일 잘 찢어지는 날이에요."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 연한 잎을 보았다. 잎 다섯 장은 여전히 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고, 여섯 번째 자리는 어제 떼어 낸 뒤로 비어 있었고, 일곱 번째는 이제 막 나오는 중이었다.

 

"내일 이 얘기 하실 거죠."

 

진우가 말했다.

 

"제가 안 해도 아시잖아요."

 

김지수가 말했다.

 

"오 년 동안 못 한 말이 내일 나오면요, 그거 굳어서 나오지 않아요. 헝클어지고 반쯤 말려 있고 색도 옅을 거예요. 아드님 말도 그럴 거고 아버님 말도 그럴 거예요. 그걸 보시고 아직 덜 됐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연한 건 안 굳은 거지 약한 게 아니다."

 

"네. 그리고 그날은 만지는 날이 아니에요. 펴지는 걸 그냥 보는 날이에요."

 

진우는 물을 밑구멍으로 배어 나올 때까지 천천히 부었다. 다 붓고 나서도 손을 씻지 않고 흙 묻은 손끝을 한참 들여다봤다.

 

6. 시험이 아닌 저녁

 

궤도에서는 일흔세 번째 정렬이 끝났다. 메타 칠십 단계였다.

 

오늘의 고리는 일흔두 장이 아니라 일흔한 장이었다. 어제 접어 눕힌 열아홉 번째 거울은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기록란에는 어제 적은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은 빠져 있음. 고쳐서 돌아올 것.

 

오후 다섯 시 사십 분, 지상 관제소로 연락이 왔다.

 

"오늘 저녁 피크, 그쪽으로 넘깁니다."

 

통제실이 조용해졌다.

 

지금까지 마흔세 날 동안 ATLAS가 지상으로 보낸 전력은 언제나 시험이었다. 지상 망은 늘 자기 발전소를 켜 둔 채로 ATLAS의 몫을 받았고, 만약 궤도 쪽이 흔들리면 지상 발전소가 그 자리를 즉시 메웠다. 넘어지면 받아 줄 손이 늘 아래에 있었다.

 

오늘 저녁 여섯 시부터 두 시간, 그 손이 없었다.

 

"부하 전량, 우리 겁니다."

 

관제사가 말했다.

 

"몇 세대분입니까."

 

"도시 하나 저녁이요."

 

여섯 시가 되자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건 계기판에서 곡선 하나로 보였다. 전등이 켜지고, 밥솥이 올라가고, 난방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 궤도의 화면 위에서 완만하게 솟는 선 하나가 되었다.

 

네 개의 문이 사분의 일씩 짊어졌다. 각 문은 여전히 낼 수 있는 힘의 사분의 삼만 쓰고 있었다. 남긴 사분의 일은 오늘도 아무 일을 하지 않았다.

 

여섯 시 오십이 분에 그 남긴 자리가 처음으로 쓰였다.

 

지상 예보에 없던 상승이었다. 저녁 기온이 예보보다 사 도 낮았고, 사람들이 동시에 난방을 올렸다. 곡선이 예상선 위로 튀었다.

 

"규정선 내려앉습니다."

 

"규칙 돌았습니다."

 

어제 각 문의 제어기에 새겨 넣은 한 줄짜리 조건이 작동했다. 얼마나 빨리 떨어졌는지는 묻지 않고, 지금 모자란가만 묻는 그 조건이었다. 네 문이 각자 남겨 둔 자리에서 모자란 만큼만 꺼냈다.

 

십일 초 만에 주파수가 규정선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지상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전등은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고, 그 도시의 누구도 오늘 저녁 자기 집 불빛이 궤도에서 왔다는 것을, 그리고 여섯 시 오십이 분에 그 불빛이 한 번 흔들릴 뻔했다는 것을 몰랐다.

 

여덟 시에 지상 발전소가 다시 병렬로 들어왔다. 두 시간이 끝났다.

 

통제실에서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젊은 관제사가 화면을 보며 말했다.

 

"시험이랑 똑같았습니다. 어제 열 가지 해 본 거랑 아무 차이도 없었습니다."

 

"차이가 하나 있었지."

 

팀장이 말했다.

 

"오늘은 실패해도 다시 못 했어."

 

"결과는 같은데요."

 

"결과가 같아서 다행인 거야. 근데 오늘 우리가 한 일은 어제랑 달라. 어제까지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걸 확인했어. 오늘은 그걸 실제로 했어. 그 둘은 계기판에 똑같이 찍히는데 완전히 다른 일이야."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저 아래 사람들은 오늘 저녁 밥을 먹었고 애들 숙제를 봐 줬고 텔레비전을 봤어. 우리가 잘했다고 아무도 안 알아. 그게 오늘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제일 좋은 평가야."

 

기록에는 이렇게 남았다.

 

격자 일흔세 번째 정렬. 오차 0.1밀리미터. 거울 일흔한 장. 무중단 송전 1032시간. 지상 부하 단독 인수 2시간, 예비력 실사용 1회, 부하 차단 없음.

 

그 아래에 오늘의 문장이 적혔다.

 

치름이란 준비한 것을 다시 한번 시험해 보는 일이 아니다. 준비한 것을, 되돌릴 수 없는 자리에 한 번 내놓는 일이다. 시험은 몇 번이고 다시 할 수 있어서 언제나 조금씩 안전하고, 그래서 무엇을 준비했는지는 알려 주어도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끝내 알려 주지 않는다. 치르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 한 번이 지나가야만,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를 보고 나서야, 그동안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아흔여섯 명이 숨을 멈춘 이십 분도, 사십칠 분을 남기고 멎은 시계도, 다섯 칸이 지워진 종이 한 장도, 오늘 저녁 두 시간 동안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도시의 전등도, 모두 오늘 한 번 치러졌다.

 

그리고 내일, 오 년을 건너온 두 사람이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