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물러섬」
1. 반 발 물러선 반주
공연 사흘 앞이었다. 소율은 어제 정한 그 음을, 후렴 직전의 여린 반 박을 정말 반만 냈다. 나머지 반은 방에 맡기기로 한 그 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자리가 통째로 사라졌다.
"안 들려요."
뒷줄에 앉아 있던 음향 담당이 손을 들었다.
"어제는 들렸는데 오늘은 아예 없어요."
"똑같이 불렀는데요."
소율이 마이크에서 입을 뗐다.
"그 음은 똑같았어요. 그 앞이 달라졌어요."
음향 담당이 무대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직전 소절을 오늘 훨씬 세게 부르셨거든요. 큰 소리가 난 직후에는요, 사람 귀가 잠깐 먹먹해져요. 백분의 몇 초에서 몇 십분의 일 초 사이, 그 뒤에 오는 여린 소리를 못 들어요. 소리끼리 겹치지 않아도 그래요. 앞선 소리가 뒤에 오는 소리를 덮는 거예요."
건반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뒤를 키워야 하나요."
"키우면 어제 찾은 게 없어져요."
음향 담당이 고개를 저었다.
"뒤를 키우지 말고 앞을 물리세요."
소율은 직전 소절을 반 발 물러서서 불렀다. 힘을 뺀 게 아니라, 낼 수 있는 걸 다 내지 않았다. 건반과 기타도 그 두 마디 앞에서 소리를 반쯤 접었다. 그러자 뒤이어 오는 여린 반 박이, 아무것도 더하지 않았는데 또렷하게 방을 건넜다.
"들려요."
뒷줄에서 목소리가 왔다.
소율은 마이크 스탠드를 짚은 채 잠깐 서 있었다. 무언가를 들리게 하려고 그동안 자기가 해 온 일은 전부 더하는 일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들리게 하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2. 뒤에 서지 않는 일
발사 마흔이틀 전. 어제 명호는 열두 콘솔에 각자의 마지막 판단권을 넘겼다. 오늘 아침 리허설에서 그는 어제와 똑같이 삼번 라인에 가짜 이상을 심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계기판에는 분명히 값이 떴다. 담당 관제사의 눈이 그 숫자에 닿는 것도 명호는 보았다. 그런데 그 관제사는 숫자를 보고, 그다음 뒤를 돌아보았다. 명호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제는 했잖아."
리허설을 끊고 명호가 물었다.
"어제는… 팀장님이 자리에 안 계셨습니다."
젊은 관제사가 겨우 대답했다.
뒤에서 팀장이 낮게 웃었다.
"그게 답이야. 비행기 사고 기록 읽어 보면 절반은 그거야. 부기장이 다 알고 있었어. 기장한테 말을 못 했을 뿐이지. 윗사람이 옆에 있으면 아랫사람 입은 저절로 닫혀. 자네가 권한을 넘긴 건 맞는데, 자네가 뒤에 서 있으면 그 권한은 종이야."
명호는 헤드셋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이번에는 송신 스위치를 내리고 수신만 남겼다. 그리고 통제실 뒤쪽 유리문 밖으로 나가 복도에 섰다. 안이 보이긴 했지만, 안에서는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두 번째 시험에서, 가짜 이상이 뜨고 사 초 만에 목소리가 왔다.
"삼번 라인 이상. 노 고."
시계가 멈췄다. 명호는 복도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들어가면 다음번에 또 뒤를 돌아볼 테니까.
3. 손을 대지 않는 오전
삼층에 새로 세운 접수 담당자가 제 손으로 첫 서류를 넣는 날이었다. 동현은 후배와 함께 옆에 서 있었다.
담당자가 칸을 채워 나가는 걸 보다가 동현의 손이 움찔했다. 세 번째 칸에 들어갈 부서 코드가 틀렸다. 저대로 넣으면 반려다.
동현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서류는 오전 중에 반려되어 돌아왔다. 후배가 못 참고 옆구리를 찔렀다.
"과장님, 아까 아셨잖아요. 그냥 알려 주시지."
"알려 줬으면 오늘 접수는 됐겠지."
동현이 반려된 서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내일은 또 나한테 물었을 거고. 저 사람이 석 달 동안 신청을 못 한 건 방법을 몰라서였어. 방법은 반려 사유서에 제일 정확하게 적혀 있어."
두 사람은 삼층으로 올라가 반려 사유서를 담당자와 같이 읽었다. 동현은 읽어 주지 않고 읽게 했다. 담당자가
"아, 여기 코드가 저희 부서 게 아니네요"
하고 스스로 짚었을 때, 동현은 고개만 끄덕였다.
두 번째 서류는 오후 세 시에 통과됐다. 삼층에서 석 달 만에 제 손으로 넣어 통과시킨 첫 건이었다.
동현은 자리로 돌아와 서랍을 열었다. 박영자의 손수건 위에 명찰이 세 장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며칠째 이름 없이 비워 둔 네 번째 자리가 있었다. 그는 삼층 담당자의 이름을 적어 그 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흐름표에 한 줄을 더했다.
"오늘 한 일: 아무것도 안 함."
4. 그날, 저는 안 갑니다
재회까지 나흘이었다.
진우는 회진이 끝난 김지수를 복도에서 붙잡았다. 며칠 전부터 목에 걸려 있던 말이었다.
"그날, 같이 가 주시면 안 될까요."
김지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창가로 두 걸음 걸어가 강 쪽을 한참 보다가 돌아섰다.
"안 갑니다."
진우의 얼굴이 굳었다. 김지수는 그걸 보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거기 있으면요, 아버님도 저를 의식하고 아드님도 저를 의식해요. 오 년을 건너뛰는 말은 둘일 때만 나와요. 셋이 앉아 있으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남 듣기 좋은 말을 골라요. 아드님이 나흘 동안 지고 올 그 물음도, 제가 앉아 있으면 반쯤 다듬어서 물을 거예요."
"무섭습니다."
진우가 솔직하게 말했다.
"혼자면 또 오 년 전처럼 소리를 지를까 봐요."
"오 년 전엔 아버님이 다 말했고, 이번엔 다 들으실 거잖아요. 소리를 지르려면 할 말이 많아야 하는데, 아버님 주머니엔 지금 두 줄밖에 없어요."
김지수가 처음으로 웃었다.
"그날 저녁에 오세요. 끝나고요. 아무 말 안 하셔도 돼요. 그냥 앉아 계셔도 되고요."
진우는 그 자리에서 한 발 물러서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붙잡아 주는 것보다 물러서는 게 더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날 밤 그는 종이를 꺼냈다. 앞면에는 두 줄이 그대로 있었다. 뒷면은 여전히 비어 있었고, 이제 그 비어 있음이 두 사람 몫이라는 걸 알았다.
5. 물을 미루는 손
화분 이름표 뒤에는 오늘 김지수의 차례라고 적혀 있었다. 김지수는 물뿌리개를 들었다가, 손가락을 흙에 넣어 보고 그대로 내려놓았다.
"안 주게요?"
진우가 물었다.
"아직 촉촉해요. 손가락 한 마디 아래까지요."
"그래도 차례잖아요."
"차례라고 주는 게 제일 나쁜 물주기예요."
김지수가 물뿌리개를 창턱 아래, 뽑아 둔 젓가락 옆에 놓았다.
"위가 늘 젖어 있으면 뿌리가 아래로 안 내려가요. 코앞에 물이 있는데 뭐 하러 힘들게 내려가요. 그러면 뿌리가 죄다 표면에만 깔려요. 그러다 하루만 볕이 세게 들면 그 얕은 뿌리가 통째로 마르는 거예요."
"마르게 두는 게 도와주는 거라는 말씀이시네요."
"위쪽이 좀 말라야 뿌리가 물을 찾아서 아래로 내려가요. 깊이 내려간 뿌리는 그다음부터는 웬만한 날엔 저 혼자 견뎌요."
김지수는 잎 여섯 장을 한 번 훑어보았다. 잎들은 여전히 창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지지대 없이 곧게 서 있었다.
"얘는 어제 혼자 서는 걸 배웠고, 오늘은 혼자 찾는 걸 배우는 거예요."
진우는 빈손으로 창가에 서 있는 게 어색해서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어제는 붙잡고 싶은 걸 참았고, 오늘은 주고 싶은 걸 참았다.
이름표를 뒤집으니 내일은 진우의 차례였다.
6. 남겨 두는 힘
궤도에서는 일흔 번째 정렬이 진행되고 있었다. 메타 육십칠 단계, 오늘의 이름은 물러섬이었다.
네 개의 문이 마침내 사분의 일씩 고르게 짐을 나눠 지고 있었다. 계기판의 네 막대는 키를 맞춘 형제처럼 나란했다. 관제사가 들뜬 얼굴로 물었다.
"네 개가 다 여유가 있는데요. 더 뽑아 쓸까요? 지금 각 문이 낼 수 있는 힘의 사분의 삼밖에 안 쓰고 있습니다."
"하나 떨어지면 어쩔 건데."
팀장이 되물었다.
"…나머지 셋이 받으면 됩니다."
"받을 힘을 지금 다 써 버렸으면?"
관제사가 입을 다물었다. 팀장은 네 막대를 손끝으로 짚어 나갔다.
"넷이 각자 사분의 삼만 쓰는 건 게을러서가 아니야. 하나가 빠졌을 때 그 몫을 셋이 나눠 받으려면, 셋한테 미리 그만큼 안 쓴 자리가 남아 있어야 해. 그 안 쓴 자리가 이 시스템에서 제일 비싼 부분이야. 평소엔 아무 일도 안 하지."
시험은 오후에 했다. 두 번째 문을 일부러 떨어뜨렸다. 주파수가 눈금 하나만큼 내려앉았고, 남은 세 문이 남겨 둔 여유를 조금씩 꺼내 쓰며 그 자리를 메웠다. 지상의 전등은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이 분 뒤 두 번째 문을 다시 잇자, 셋은 꺼내 썼던 만큼을 도로 접어 넣고 다시 사분의 삼으로 돌아갔다.
격자는 일흔 번째 정렬에서도 오차 0.1밀리미터를 지켰고, 무중단 송전은 960시간, 사십 일을 넘겼다.
팀장이 기록지에 마지막 줄을 적었다.
"물러섬이란 힘이 모자라 뒤로 가는 게 아니다. 낼 수 있는 힘을 다 내지 않고 남겨 두는 일이다. 그 남긴 자리는 평소에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누군가 무너지는 날에는 그 자리가 전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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