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맡김」
1. 반을 비워 두는 노래
공연이 나흘 앞으로 다가온 날, 소율은 후렴 직전의 그 여린 반 박에서 자꾸 손을 놓지 못했다. 어제 정한 대로 거의 안 내는 속삭임으로 부르다가, 뒷줄이 걱정되어 자기도 모르게 반음쯤 소리를 얹어 채웠다. 건반이 연주를 멈췄다.
"방금 그거, 채우셨어요."
그가 말했다.
"안 들릴까 봐 소율 씨가 그 자리를 다 메우신 거예요. 근데 그러면 듣는 사람은 채울 게 없어져요."
음향 담당이 빈 객석 한가운데서 손을 들었다.
"재미있는 게 있어요. 사람 귀는 소리가 반쯤 지워져도 앞뒤 흐름으로 빈 데를 저 혼자 메워서 들어요. 학자들이 문장 한 음절을 기침 소리로 덮어 놓고 들려주면, 사람들은 그 음절이 분명히 들렸다고 우겨요. 없었는데도요. 뇌가 채운 거예요."
그러니 두 마디 빈칸을 소율이 다 부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오히려 다 부르면 듣는 사람의 귀가 할 일이 없어진다.
"소율 씨가 반만 부르면, 나머지 반은 저 뒷사람이 제 안에서 불러요. 그게 그 사람 노래가 되는 거고요."
소율은 그 여린 음을 정말로 반만 냈다. 나머지 반은 방에,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이백 명에게 맡겼다. 빈칸 두 마디가 지나가는 동안, 소율은 처음으로 그 침묵이 무섭지 않았다. 채우지 않은 자리가 텅 빈 게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비워 둔 자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2. 마지막 사람은 네가 되어라
발사까지 마흔사흘. 명호는 리허설 관제실 뒤에 서서 열두 개의 콘솔을 한눈에 훑는 버릇을 오늘도 반복하고 있었다. 어느 계통이 반 박 늦으면 그의 눈이 먼저 알아챘다. 그런데 오늘 팀장이 그 습관을 지적했다.
"자네가 다 보고 있으면, 자네가 못 보는 순간 아무도 안 보는 거야."
명호는 그 말을 곱씹었다. 발사 지휘에서 제일 무서운 건 한 사람에게 모든 판단이 몰리는 구조였다. 그 한 사람이 놓치면 전체가 놓친다. 그것이 '단일 실패점'이었다. 로켓의 밸브도, 센서도, 절대 하나에만 기대지 않는데, 정작 사람만 한 명에게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명호는 각 콘솔에 제 계통의 마지막 판단권을 넘겼다. 압력을 보는 사람이 '노 고'라고 외치면, 명호가 뭐라 하든 카운트다운은 멈춘다. 그 사람이 그 계통의 마지막 사람이 되는 것이다.
"네가 네 계통의 끝이야."
명호가 젊은 관제사에게 말했다.
"위를 올려다보지 마. 위엔 아무도 없어. 네가 손을 안 들면 아무도 안 들어."
오후 리허설에서 명호는 일부러 자기 자리를 비웠다. 삼번 라인에 가짜 이상이 심어졌고, 잠깐의 정적 뒤에 그 젊은 관제사가 손을 들어
"노 고"
를 외쳤다. 시계가 멈췄다. 명호가 없는 자리에서, 멈춰야 할 것이 제때 멈췄다. 명호는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며 손을 뗐다. 맡긴다는 건 눈을 감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이 볼 것을 믿고 내 눈을 하나 접는 일이었다.
3. 대신 하지 않는 일
동현은 삼층에서 받아 온 열일곱 건을 책상에 펼쳐 놓았다. 석 달 동안 접수되지 못한 채 손으로 적혀 있던 것들이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하나하나 대신 처리하려는데, 후배가 조심스레 말했다.
"과장님이 이걸 다 해 주시면, 삼층은 다음 담당자가 또 그만두면 똑같아지지 않을까요."
동현의 손이 멈췄다. 맞는 말이었다. 석 달간 그곳이 조용했던 건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물어볼 담당자가 없어서였다. 열일곱 건을 자기가 다 치워 주면 이번 석 달은 넘어가지만, 다음 석 달은 또 아무도 모르게 쌓인다.
"급한 건 오늘 내가 밀어 줄게."
동현이 말했다.
"근데 나머지는 삼층 사람들 손으로 넣게 가르치자. 물고기를 잡아 주는 게 아니라, 낚싯대를 쥐여 주는 거야."
동현은 삼층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접수를 맡을 담당자를 한 사람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신청 방법을 처음부터 적어 건넬 종이를 준비했다. 대신 해 주는 일에는 끝이 없지만, 스스로 하게 만드는 일에는 끝이 있었다.
저녁에 그는 흐름표 마지막 칸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삼층에 담당자 세움. 다음부터는 그 손으로."
박영자의 손수건 위에 놓인 명찰 세 장 옆에, 그는 아직 이름을 모르는 네 번째 자리를 마음속으로 비워 두었다.
4. 물음은 아드님 몫입니다
재회가 닷새로 좁혀졌다. 진우는 밤마다 종이 뒷면을 들여다보았다. 앞면에는 두 줄,
"왔구나"
와
"미안하다"
가 있었고, 뒷면은 늘 비어 있었다. 어제 김지수가 그 빈 면을 '듣는 자리'라고 불렀다. 그런데 오늘 밤 진우는 그 뒷면에 무언가를 적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현수가 물을 법한 것들과, 거기에 대한 답이 자꾸 떠올랐다.
아침에 그 얘기를 하자 김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 적으시면, 그건 이제 아버님이 하실 말이 돼요. 듣는 자리가 없어지는 거예요."
김지수는 잠시 그를 보았다.
"물음은 아드님 몫이에요. 아버님이 답까지 미리 지으시면, 아드님이 닷새 동안 지고 올 짐을 아버님이 뺏어 지는 거예요."
진우는 처음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들을 위해 준비하는 게 어째서 뺏는 것인가. 김지수가 말을 이었다.
"그날은 둘이 나눠 지는 자리예요. 아버님 혼자 다 지고 가시면, 아드님은 제 몫을 내려놓을 데가 없어요. 아버님 몫은 딱 두 줄이랑, 비워 둔 자리 하나예요. 나머지 반은 아드님한테 맡기세요."
그날 오후, 현수에게서 짧은 문자가 왔다.
"그날, 몇 시에 뵐까요."
진우는 예전 같으면 시각 뒤에 밥은 먹었는지, 몸은 괜찮은지, 길은 아는지를 줄줄이 붙였을 것이다. 이번엔 시각 하나만 적어 보냈다. 손끝이 몇 번 망설였지만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 이상은 아들이 채울 자리였다.
밤에 그는 종이 뒷면을 다시 꺼내 보았다. 여전히 비어 있었다. 진우는 그 빈 면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아무것도 적지 않고 도로 접어 넣었다. 비워 두는 일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일인 줄, 그는 몰랐다.
5. 붙잡아 주지 않는 손
화분 물주기는 오늘 진우 차례였다. 이름표 뒤에는 '내일은 김지수 차례'라고 적혀 있었다. 어제 김지수가 지지대 실을 풀고 젓가락을 뽑아냈고, 오늘은 화분 옆에 아무 버팀목도 없었다. 진우는 뽑아 둔 젓가락을 손에 쥐고, 다시 꽂아 줄까 한참을 망설였다.
"이제 얘 몫이에요."
김지수가 말했다.
"우리가 다시 세워 주면, 얘는 제 힘으로 서는 법을 잊어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지대에 오래 기댄 줄기는 흔들릴 일이 없어서, 저를 버티게 할 단단한 속조직을 안 만든다. 그러다 지지대를 떼면 제 무게도 못 이기고 휜다. 반대로 며칠 동안 바람에 흔들리며 스스로 굵어진 줄기라야, 버팀목이 사라져도 혼자 선다. 어제 젓가락을 뽑았는데도 줄기가 반 뼘도 안 흔들린 건, 그동안 흔들린 만큼 속이 여물었기 때문이었다.
아침 바람이 창으로 들어와 줄기가 크게 휘청였다. 진우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그 손을 도로 내렸다. 줄기는 몇 번 출렁이더니 스스로 제자리로 돌아와 곧게 섰다. 잎 여섯 장은 여전히 창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였다.
"잡아 주고 싶은 걸 참는 게, 오늘 물주기예요."
김지수가 웃었다. 진우는 물만 얇게 주고 손을 뗐다. 젓가락은 창턱 구석에 그냥 두었다. 붙잡던 물건이 그냥 옆에 놓인 물건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어젯밤 종이 뒷면에서 뗀 손을, 오늘 아침 화분 앞에서 한 번 더 뗐다.
6. 짐을 넘기는 일
ATLAS 예순아홉 번째 정렬. 메타 예순여섯 단계, '맡김'. 어제 네 번째 문을 열었지만 짐은 주지 않았다. 기울기를 제일 가파르게 걸어 두어서, 그 문은 계전기만 닫힌 채 아무것도 나르지 않았다. 대신 그 문은, 짐을 안 진 덕에 자기 소음이 없어서, 앞선 세 문이 이틀 동안 못 잡은 스물세 시간 주기의 미세한 흔들림을 잡아냈다. 어제 그 문이 한 일은 나르는 게 아니라 듣는 일이었다.
오늘은 그 문에 짐을 조금씩 넘길 차례였다. 관제사가 네 번째 문의 드룹 기울기를 한 눈금 눕혔다. 완만해진 만큼 그 문이 부하를 조금 더 짊어졌고, 앞선 세 문의 짐이 그만큼 가벼워졌다. 계기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가 곧 가라앉았다.
"한꺼번에 눕히지 마."
팀장이 말했다.
"저 문이 갑자기 다 짊어지면, 나머지 셋이 놀라서 제 짐을 확 놓아 버려. 그럼 또 파도가 쳐."
그래서 한 눈금씩이었다. 넷의 부하가 고르게 사분의 일씩 될 때까지, 눈금마다 주파수가 평평해지길 기다렸다가 다음 눈금을 눕혔다. 네 번째 문은 짐을 지면서도, 어제 잡아낸 스물세 시간 성분을 놓지 않고 계속 따라갔다. 나르는 일과 듣는 일을 함께 하고 있었다.
팀장이 계기판을 보며 말했다.
"맡긴다는 건 짐을 던지는 게 아니야. 저쪽이 받을 만큼만 건네고, 건넨 다음엔 저쪽이 지는 방식을 믿고 손을 떼는 거지. 다 지고 있으면 아무한테도 못 맡겨. 그리고 맡기지 못하면, 문이 넷이어도 늘 셋만 일해."
격자는 예순아홉 번째 정렬에서 오차 0.1밀리미터를 지켰다. 송전은 서른아홉 날째, 구백서른여섯 시간 무중단. 네 개의 문이 처음으로 같은 무게를 나눠 지고, 그 위로 궤도의 빛이 고르게 흘러 지상의 저녁을 밝혔다. 맡김이란 짐을 덜어 내는 일이 아니라, 상대가 그 짐을 질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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