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2화 「가늠」
1. 손뼉 소리로 방을 재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오자, 소율은 아직 불도 다 켜지지 않은 객석 한가운데에 혼자 섰다. 백 석이 채 안 되는 작은 공연장이었다. 천장이 낮았고 벽은 오래된 나무였다. 어제까지는 후보였고, 오늘부터는 무대였다.
"먼저 방부터 재 볼게요."
무대에 올라선 소율이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짧게, 한 번 손뼉을 쳤다.
짝.
소리가 앞으로 나갔다가 뒷벽에 닿고, 옆벽을 훑고, 낮은 천장을 스치며 되돌아왔다. 그 되돌아온 소리가 사라지기까지 걸리는 시간. 잔향 시간이었다. 처음 세기의 백만분의 일로 잦아들 때까지 몇 초가 걸리는지—그 숫자 하나가 방의 성격을 거의 다 말해 준다고 음향 감독은 말했다.
"큰 홀은 잔향이 이 초를 넘어가요. 웅장한데, 대신 앞말 꼬리에 뒷말 머리가 겹쳐요. 노랫말이 뭉개지죠. 여기는……"
감독이 손목의 계기를 보았다.
"영 점 팔 초. 짧아요. 나무가 소리를 먹고, 천장이 낮으니 돌아올 길도 짧고."
"뭉개지진 않겠네요."
"대신 숨길 데가 없어요. 큰 홀은 못한 데를 잔향이 덮어 줘요. 여긴 안 덮어 줘요. 목소리가 벌거벗은 채로 뒷자리까지 가요."
소율은 마이크를 잡지 않고 그냥 서서 한 소절을 불렀다. 육성이었다. 뒷줄 맨 끝에 앉아 있던 세션 기타가 손을 들었다.
"여기까지 다 들려."
가늠이 끝났다. 이 방은 소리를 금방 놓아주는 방이고, 그러니 후렴 직전의 흔들린 반 박은 여기서 숨을 데가 없다. 두 마디 빈칸도 마찬가지다. 그 빈칸에 아무 소리도 없으면, 정말로 아무 소리도 없이 뒷자리까지 가 닿을 것이다.
소율은 그 침묵의 길이를 손끝으로 세어 보았다. 하나, 둘. 견딜 만했다.
"방을 알고 나니 이제 뭘 넣고 뭘 뺄지 알겠어요."
재 보는 일은 정하는 일이 아니었다. 재 보고 나서야 비로소 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
2. 여유를 재는 사람
D-49. 명호는 단 분리 시각을 조인 다음 날, 표를 한 장 새로 펼쳤다. 제목은 성능 여유였다.
"올라가는 데 필요한 속도가 있어."
그는 화이트보드에 숫자 하나를 적었다. 목표 궤도에 얹으려면 발사체가 벌어야 하는 속도 변화량, 곧 델타-v였다. 지구 중력을 이기고, 두꺼운 공기를 뚫고, 마지막에 옆으로 던져지듯 궤도 속도까지—그 모든 대가를 합친 값.
그 아래에 다른 숫자를 적었다. 실제로 이 발사체가 낼 수 있는 값이었다. 추진제를 다 태웠을 때 나오는 최대치.
두 숫자 사이의 차이. 그것이 여유였다.
"이게 얼마나 남습니까?"
젊은 관제사가 물었다.
"연소 시간으로 치면 열몇 초분."
"넉넉한 건가요?"
"바람이 예보보다 세면 몇 초 먹혀. 엔진 하나가 규격 아래로 나오면 또 몇 초. 단 분리가 반 박 늦으면 죽은 무게를 그만큼 더 이고 올라가니까 또 몇 초."
명호는 그 몇 초들을 하나씩 표에서 빼 나갔다. 남는 숫자가 점점 얇아졌다. 그래도 영 아래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남아. 얇게."
"얇으면 위험한 거 아닙니까."
"위험한 건 얇은 게 아니라, 얇은 줄 모르는 거야."
명호는 숫자 옆에 선을 하나 그었다. 여유가 몇 초인지 정확히 아는 것. 넉넉하게 잡되 거짓으로 잡지 않는 것. 실제보다 후하게 적어 둔 여유는 여유가 아니라 빚이었다.
그다음에 그는 비행 종단 장치를 점검했다. 발사체가 정해진 길에서 크게 벗어나면 스스로 비행을 끝내는 장치. 아무도 쓰고 싶어 하지 않는 장치. 그 회로에도 전원을 넣고, 신호가 들어오는지 확인하고, 다시 안전 상태로 되돌렸다.
"제일 좋은 일을 준비하는 사람이, 제일 나쁜 일도 재 두어야 해."
표 아래쪽에 그는 오늘 날짜와 함께 남은 여유를 적었다. 얇지만 있는 것. 재 보았으니 이제 아는 것.
3. 하루에 될 만큼
동현의 사무실. 도장은 여전히 서랍 안쪽에 있었다. 신입은 이제 자기 결재를 스스로 굴렸고, 이번 주에 들어온 더 어린 사람에게 흐름표를 가르쳤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자기가 맡은 일 가운데 한 덩이를 그 후배에게 넘겼다.
넘긴 분량이 문제였다.
동현은 후배의 책상에 서류가 쌓이는 것을 말없이 보았다. 아침에 넘긴 것이 오후 세 시가 되도록 절반도 줄지 않았다. 후배의 어깨가 조금씩 굽었다. 신입은 그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제가……"
신입이 동현 쪽으로 왔다.
"너무 많이 준 것 같습니다."
"몇 개나 줬어요?"
"열두 건입니다."
"그쪽은 이번 주에 왔죠. 열두 건이면 몇 시간짜리로 봤어요?"
신입이 대답하지 못했다. 재 보지 않고 준 것이었다. 자기가 하면 세 시간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내가 한 시간이면 되는 일이, 배우는 사람한테는 세 시간이에요. 나쁜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거예요. 나도 그랬고."
동현은 다섯 해 전 자기 책상에 스무 건이 한꺼번에 올라오던 날을 떠올렸다. 그는 밤 열한 시까지 앉아 있었고, 다음 날 아무 말도 못 했다.
"다시 나눠 봐요. 오늘 될 만큼만."
신입은 후배의 책상에서 서류를 도로 가져왔다. 열두 건 가운데 네 건만 남기고, 나머지는 자기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그 네 건 옆에 시간을 적은 쪽지를 붙였다. 이건 한 시간, 이건 두 시간.
후배의 어깨가 펴졌다.
저녁에 그 네 건이 모두 끝나 돌아왔다. 신입은 도로 가져간 여덟 건을 밤까지 붙들었지만, 표정은 아침보다 나았다.
"주는 것도 재야 하는 거였네요."
"짐을 나눌 땐 무게를 재야죠. 안 재고 나누면 그건 나눈 게 아니라 던진 거예요."
박영자의 손수건 위, 신입의 명찰 옆에 명찰이 하나 더 놓였다. 동현은 세 장을 나란히 보았다. 받은 자리, 딛고 선 자리, 이제 막 딛기 시작한 자리.
4. 열한 밤을 앞에 두고
재회까지 열하루.
진우는 옷장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오 년 만에 만나는 아들 앞에서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새로 사려고요?"
김지수가 물었다. 진우는 손에 들었던 셔츠를 내려놓았다.
"사려다가 말았어요. 너무 새것이면…… 애쓴 티가 날 것 같아서."
"그럼요?"
"그렇다고 오 년 전에 입던 걸 그대로 입으면,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산 사람 같고."
김지수가 웃었다. 진우도 자기 말이 우스운 걸 알았다.
"그 중간을 재고 계시는 거네요."
"재는 게 되나요, 그런 게."
"재 보시니까 지금 옷장 앞에 서 계신 거잖아요."
결국 그는 몇 해 입어 목이 부드러워진 셔츠를 골랐다. 낡지도 새것도 아닌 옷이었다. 다림질만 새로 했다.
더 어려운 것이 남아 있었다. 아들에게 줄 것은 이미 상자에 담아 두었다. 고쳐 준 라디오와 놀이공원 사진. 그런데 지난주에 옷 하나쯤 사 줄까 하고 가게에 들어갔다가, 그는 아무것도 못 사고 나왔다.
치수를 몰랐다.
"열여덟에 마지막으로 봤어요. 그때 내 어깨쯤 왔는데…… 지금은 어떨지, 나는 몰라요."
진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버지가 아들 몸 치수를 못 재는 거예요. 그게…… 오 년이라는 게 그런 거더라고요."
김지수는 한참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다 말했다.
"모르는 걸 아셨잖아요."
"그게 뭐가 낫습니까."
"모르는 줄도 모르고 큰 옷 사 가는 것보단 나아요. 그날 만나서 물어보시면 되잖아요. 요즘 몇이니, 하고."
진우는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강가 벤치, 오후의 볕, 왼쪽에 앉은 아들. 몇 시간을 앉아 있을지 그는 그것마저 미리 재 보려 했다. 한 시간이면 될까. 아니면 십 분 만에 할 말이 떨어질까.
"그건 재지 마세요."
김지수가 말했다.
"자리랑 시각이랑 첫말까지는 재 두시는 게 맞아요. 근데 몇 시간 앉아 있을지를 정해 놓으면, 그 시간이 지날 때 마음이 초조해져요. 짧으면 실패한 것 같고, 길면 억지로 늘리게 되고요."
"그럼 그건 어떻게 합니까."
"가늠만 하고, 정하진 마세요. 만나 보고 아세요."
그날 저녁 진우는 현수에게 짧은 문자를 하나 더 보냈다. 자리와 시각을 다시 한번 적고, 마지막에 한 줄을 붙였다.
—늦어도 괜찮다. 나는 먼저 가 있을 테니.
답은 한 글자였다.
—네.
그 한 글자를 진우는 몇 번이나 다시 열어 보았다. 벽시계 초침은 여전히 돌고 있었다. 열한 밤이 남았다.
5. 마른 깊이를 재다
화분은 오늘 진우 차례였다. 이름표 뒤에는 여전히 '내일은 김지수 차례'라고 적혀 있었다.
어제까지 좁쌀만 하던 다섯 번째 잎눈이 오늘 처음 벌어져, 아직 접힌 채로 여린 잎꼴을 하고 있었다. 그 위쪽으로 여섯 번째 잎눈이 또 하나 맺혔다. 잎이 다섯이 되자 화분은 어제와 다른 부피를 갖게 되었다.
진우는 물뿌리개를 들었다가 멈췄다.
"잎이 늘었으니 물도 더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몇 잔이나요?"
김지수가 물었다. 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잎 수로 세면 틀려요."
김지수는 손가락을 흙에 넣었다. 첫 마디까지. 그리고 뺐다.
"위는 말랐는데 첫 마디 아래는 아직 축축해요. 오늘은 조금만."
"손가락으로 재는 거예요, 그걸?"
"제일 정확한 자예요. 겉만 보고 마른 줄 알고 자꾸 부으면 뿌리가 물에 잠겨서 썩어요. 잎이 늘었다고 물부터 늘리면, 안 보이는 아래가 먼저 상해요."
진우도 손가락을 흙에 넣어 보았다. 조금 더 들어가자 차가운 축축함이 손끝에 닿았다.
"아직 있네요."
"있죠."
그는 물을 얇게, 화분을 반 바퀴 돌려 가며 골고루 주었다. 그늘진 쪽이 볕을 보도록 자리를 돌려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잎이 다섯인데 물은 어제만큼도 안 되네요."
"필요한 만큼이 얼마인지는 잎이 아니라 흙이 알아요. 우리는 재기만 하면 돼요."
진우는 문득 아까 옷장 앞에서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몇 시간을 앉아 있을지 미리 정하려 했던 것. 그것도 잎을 세고 물을 부으려던 일과 다르지 않았다.
재야 할 것은 겉에 드러난 숫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안쪽이 지금 얼마나 목마른가였다.
열하루가 남았고, 두 사람은 같은 숫자를 세고 있었다.
6. 받을 수 있는 만큼
ATLAS 63차 정렬. 메타 60단계, '가늠'.
두 접속점으로 나뉘어 흐르는 빛은 사흘째 흔들림이 없었다. 어제 한 눈금씩 올린 출력도 지상망이 무리 없이 받아 냈다. 세 번째 문을 열 준비는 어제 끝났다. 위상도 주파수도 지상망의 박자에 맞춰 놓았고, 계전기는 손끝 하나 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관제실은 계전기를 닫지 않았다.
"먼저 재야 할 게 남았습니다."
궤도의 거울이 모으는 빛은 이미 두 문으로 다 흘려보내기에 넘쳤다. 문제는 궤도 쪽이 아니라 받는 쪽이었다. 세 번째 문을 열면 지상망으로 들어가는 힘이 한 번 더 늘어난다. 그 늘어난 힘을 지상망이 정말 받아 낼 수 있는가.
전력망은 거대한 회전체다. 발전기들이 같은 박자로 돌면서 하나의 주파수를 만든다. 그 회전에는 관성이 있다. 갑자기 힘을 밀어 넣거나 빼면 박자가 흔들리는데, 얼마나 빨리 흔들리는지—주파수 변화율—가 곧 그 망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말해 준다. 관성이 큰 망은 느리게 흔들리고 스스로 되돌아온다. 얕은 망은 툭 치기만 해도 크게 출렁인다.
관제실은 짧은 시험을 걸었다. 세 번째 문을 활짝 여는 대신, 아주 잠깐만 힘을 한 눈금 얹었다가 다시 뺐다. 두 초. 그동안 지상망의 주파수가 어떻게 대꾸하는지 읽었다. 곡선이 작게 부풀었다가 제자리로 내려앉았다. 되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 부푼 높이, 다시 평평해지는 모양—그 셋으로 지상망이 앞으로 얼마나 더 받아 낼 수 있는지를 가늠했다.
"받습니다. 다만 한 번에 다 열면 곡선이 이 높이의 서너 배로 올라갑니다."
"몇 눈금씩이면?"
"세 눈금으로 나눠서, 사이에 시간을 두면 이 정도 안에서 잡힙니다."
그래서 오늘 정한 것은 개통 자체가 아니라, 개통의 방식이었다. 세 번째 계전기를 닫는 시각과, 닫은 뒤 힘을 올리는 눈금 수와, 그 사이에 둘 시간. 명호가 여유를 몇 초까지 재 두었듯, 소율이 손뼉 소리로 방의 잔향을 재 두었듯, 진우가 흙의 마른 깊이를 손가락으로 재 두었듯.
63차 정렬에서 격자의 오차는 여전히 0.1밀리미터 안이었다. 네 번째 문이 들어설 빈자리도 그대로 남겨 두었다. 무중단 송전은 792시간, 서른세 날째였다.
관제실 기록지 맨 아래에 한 줄이 적혔다.
가늠이란 얼마나 줄 수 있는지를 재는 일이 아니라, 받는 쪽이 지금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를 먼저 재는 일이다. 그 둘 가운데 작은 쪽이 오늘 열 수 있는 문의 폭이다.
계전기는 아직 닫히지 않았다. 다만 언제 닫힐지는, 오늘 처음으로 정해졌다.
'웹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겁의 새벽] 제124화 - 다스림 (0) | 2026.07.14 |
|---|---|
| [영겁의 새벽] 제123화 - 트임 (0) | 2026.07.13 |
| [영겁의 새벽] 제121화 - 디딤 (0) | 2026.07.11 |
| [영겁의 새벽] 제120화 - 오름 (0) | 2026.07.09 |
| [영겁의 새벽] 제119화 - 엶 (0) | 2026.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