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111화 - 담음

우주관리자 2026. 6. 29.

 

제111화 「담음」

 

들이는 일과 담는 일은 다르다. 들이는 건 문을 여는 일이고, 담는 건 들인 것을 어디에 둘지 정하는 일이다. 그릇이 있어야 담을 수 있고, 그릇은 비어 있어야 담을 수 있다. 그날, 여섯 사람은 저마다의 그릇을 꺼내 들었다.

 

1. 무엇에 담아 건넬까

 

진우는 현수의 방 책상 가운데에 둔 두 가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손바닥만 한 옛 라디오와, 모서리가 둥글게 닳은 놀이공원 사진. 어제는 버리지 않고 가운데 두기까지가 전부였다. 오늘은 그것을 어떻게 건넬지가 남았다. 스무이틀 뒤, 오 년 만에 마주 앉을 아들에게.

 

그는 신발장 위에서 빈 과자 상자를 하나 내렸다. 안을 닦고, 부드러운 천을 깔았다. 라디오를 눕히고, 사진은 구겨지지 않게 두꺼운 종이 사이에 끼워 옆에 두었다. 상자 뚜껑을 덮었다가, 다시 열었다. 닫아 두면 또 오 년을 모르고 지날 것 같아서.

 

"그렇게 한참을 보시네요."

 

김지수가 문턱에 서서 말했다. 아침 회진을 마치고 들른 길이었다.

 

"줄 건 정했는데, 무엇에 담아 건넬지를 못 정하겠어요."

 

진우가 상자를 매만졌다.

 

"상자에 담으면 선물 같고, 그냥 건네면 떠넘기는 것 같고."

 

"담는 그릇이 말을 대신할 때가 있어요."

 

김지수가 상자 안의 천을 손끝으로 폈다.

 

"이건 버리려던 게 아니라, 오래 두려고 깔아 둔 거잖아요. 그 마음이 그릇이에요."

 

진우는 뚜껑을 끝까지 덮지 않고, 손가락 한 마디만큼 틈을 남겨 두기로 했다. 담되, 닫지는 않게.

 

2. 탱크에 담은 채로 불을 켜다

 

발사 D-60. 명호는 추진제 로딩 리허설을 통과한 다음 관문 앞에 서 있었다. 정적 점화 시험. 묶어 둔 발사체를 땅에 단단히 붙들어 맨 채, 탱크에 담은 추진제로 엔진을 몇 초만 실제로 켜 보는 일이었다.

 

"날려 보지도 않을 거면서 왜 켭니까."

 

신참 엔지니어가 물었다.

 

"담아 두기만 한 추진제와, 실제로 태워 본 추진제는 달라."

 

명호는 고정 장치의 토크값을 손수 확인하며 답했다. 액체 산소 영하 백팔십삼 도, 메탄 영하 백육십이 도. 두 액체가 연소실에서 만나 불이 되기까지의 짧은 순간을, 발사 없이 미리 한 번 겪어 두는 일이었다.

 

"탱크에 담은 게 진짜 쓸 수 있는 건지, 켜 봐야 알지."

 

카운트가 내려갔다. 점화기가 먼저 불씨를 만들고, 그 위로 산화제와 연료가 정해진 순서로 밀려들었다. 점화. 굉음과 함께 화염이 아래로 쏟아졌다. 화염 굄돌을 타고 수천 리터의 물이 쏟아져 소리와 열을 받아 냈다. 발사체는 한 뼘도 움직이지 않았다. 땅에 붙들린 채 제 안에 담은 힘만 다 토해 냈다. 삼 초, 사 초, 오 초. 컷오프.

 

데이터가 올라왔다. 연소실 압력은 정해진 값에서 진폭 일 퍼센트 안으로 떨렸고, 추력 곡선은 켜지는 순간의 봉우리만 빼면 평탄했다. 터보펌프 회전수, 노즐 출구 온도, 고정 장치가 받아 낸 하중까지 모두 규격 안. 명호는 점검표에 동그라미를 쳤다.

 

"담아만 두면 그저 차가운 액체야. 한 번 켜 보고 나서야, 이게 우리가 담은 게 맞구나 한다."

 

신참이 물탱크 쪽을 보며 물었다.

 

"안 날렸는데도 한 일이 된 겁니까."

 

"묶인 채로 한 번 타 봤잖아."

 

명호가 짧게 답했다. 날지 않고도 날 자격을 얻은 발사체가, 화염이 식은 자리에서 김을 올리고 있었다.

 

3. 받은 것을 담아 옮기다

 

동현의 옆자리에 새로 온 직원이 첫 일을 시작했다. 어제 동현이 의자를 내주고, 연필만 제 필통으로 옮기고, 박영자의 손수건은 그 자리에 둔 채로 비워 준 자리였다.

 

신입은 책상에 놓인 손수건을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

 

"이거, 제가 써도 되는 건가요?"

 

"손수건은 거기 두고요."

 

동현이 머그잔 하나를 신입의 책상에 올려 두었다. 떠난 동료의 자리에서 받은 온기를, 제 컵에 담아 옮겨 온 셈이었다.

 

"대신 이걸 드릴게요. 펜 같은 거 꽂아 두세요."

 

머그잔 안에는 연필 한 자루가 미리 꽂혀 있었다. 동현이 자기 필통에서 옮겨 둔 그 연필이었다.

 

신입은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가 책상 모서리에 가지런히 놓았다.

 

"비어 있던 자리인 줄 알았는데."

 

그가 컵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비워 둔 게 아니라, 담아 둔 거예요."

 

동현이 자기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보낸 사람의 자리에 들인 사람이 오고, 들인 사람의 컵에 보낸 사람의 연필이 담겼다. 받은 온기는 사라지지 않고, 그릇을 바꿔 가며 옮겨 담겼다.

 

4. 한 그릇에 담는 목소리

 

소율의 녹음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가이드 녹음을 하는 날이었다. 정식 녹음 전에, 곡 전체를 한 번 거칠게 담아 두는 밑그림 같은 작업.

 

엔지니어가 헤드폰 너머로 말했다.

 

"토막 내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담아 봐요. 틀려도 멈추지 말고."

 

소율은 눈을 감았다. 며칠 동안 한 호흡으로 잇는 연습을 했고, 어제는 메아리 없는 부스에서 제 소리가 그대로 들이쳐 담기는 걸 배웠다. 이제는 그 소리를 한 그릇에 담을 차례였다. 첫 음을 냈다. 후렴에서 한 박을 덜어 낸 자리가 비어 있었지만, 그 빈 자리가 오히려 다음 소리를 받을 그릇이 되었다.

 

한 번에 끝까지 불렀다. 중간에 음이 살짝 흔들린 데가 있었다. 멈추지 않았다.

 

"가이드인데 이대로 써도 되겠는데요."

 

엔지니어가 재생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스피커에서 방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이크가 받은 소리는 한 번에 음원이 되지 않는다. 떨림이 막에 닿아 전기가 되고, 그 전기가 잘게 쪼개져 숫자로 담긴다. 소율이 부른 한 호흡이, 보이지 않는 그릇 안에 차곡차곡 담기는 동안 그는 숨을 죽였다. 완성품이 아니라, 완성으로 가는 길이 한 그릇에 통째로 담겨 있었다. 소율은 제 목소리를 처음으로 바깥에서 들었다. 안에서 낼 때는 몰랐던 떨림과 머뭇거림까지 고스란히.

 

"사흘 뒤엔, 이 그릇을 더 단단한 걸로 바꾸기만 하면 되겠네요."

 

흔들린 한 음까지, 일단은 담아 두기로 했다. 덜어 내는 건 그다음이었다. 담아 두지 않은 건 고칠 수도 없으니까.

 

5. 같이 담을 화분

 

저녁, 진우와 김지수는 현수의 방으로 가져온 빈 화분 앞에 앉았다. 어제 둘이 화분을 들이기로 했고, 오늘은 거기에 무엇을 담을지를 정하는 날이었다. 진우의 수첩에는 스무이틀, 같은 숫자가 김지수의 손바닥에도 적혀 있었다.

 

"흙부터 담아요."

 

김지수가 봉지를 열었다. 진우가 화분 바닥에 자갈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부었다. 물이 빠질 길을 먼저 내고, 담을 자리를 만들었다.

 

"뭘 심을까요."

 

진우가 물었다.

 

"오래 가는 걸로요. 스무이틀 뒤에도, 그 뒤에도 있을."

 

김지수가 작은 모종을 흙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둘이 함께 흙을 모아 뿌리를 덮었다. 화분 하나에 두 사람의 손이 같이 담겼다.

 

"비우는 게 정리인 줄 알았는데."

 

진우가 흙 묻은 손을 털며 말했다.

 

"비운 자리에 뭘 담는 게 정리네요."

 

그는 책상 가운데 둔 상자를 흘끗 보았다. 라디오와 사진이 담긴, 뚜껑을 다 덮지 않은 상자. 그리고 지금 막 모종을 담은 화분. 빈방이 조금씩, 담는 방이 되어 가고 있었다. 물을 주는 건 내일부터, 둘이 번갈아 가며 하기로 했다.

 

6. 빛을 담는 고리

 

ATLAS 쉰두 번째 정렬. 메타 49단계 '담음'. 어제까지 격자는 받아들인 빛을 그대로 지상으로 흘려보냈다. 오늘의 과제는 그 빛을 잠시 담아 두었다가 고르게 내보내는 일이었다.

 

"들인 빛을 바로 흘리면, 구름 한 점에도 송전이 출렁입니다."

 

관제사가 곡선을 가리켰다. 들쭉날쭉한 입력선.

 

"받은 빛을 잠깐 담아 두는 완충 고리를 거치면, 출력선이 평평해집니다."

 

격자 한 줄이 각도를 틀어, 모은 빛을 곧장 내보내지 않고 중계 거울에 한 번 담았다가 흘려보내는 경로를 만들었다. 빛은 잠시 고리 안에 머물렀다 나갔다. 입력이 흔들려도, 담아 둔 만큼이 출렁임을 받아 냈다. 출력 곡선이 칼로 그은 듯 평평해졌다.

 

송전 누적 오백이십팔 시간. 무중단. 변동 폭은 절반으로 줄었다. 관제실의 누군가가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들이기만 하던 고리가, 이제 담을 줄도 아네."

 

격자는 받은 빛을 흘려보내지 않고, 한 번 품었다가 고르게 나누어 주었다. 담는다는 건, 흘러가 버릴 것을 붙들어 두었다가 필요한 만큼 내주는 일이었다. 묶인 채 한 번 타 본 발사체처럼, 한 그릇에 담긴 목소리처럼, 빈방에 담긴 화분처럼.

 

발사까지 예순 날. 재회까지 스무이틀. 녹음까지 사흘. 저마다 제 그릇을 꺼내, 흘러가던 것을 담기 시작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