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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108화 - 벼림

우주관리자 2026. 6. 26.

제108화 「벼림」

 

 

발사까지 예순세 일.

 

둥글게 가는 말

 

진우는 식탁 위에 종이 한 장을 펴 놓았다. 스물닷새. 어제 스물엿새였으니, 또 하루가 줄었다. 그런데 오늘은 숫자를 세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날이 가까워질수록, 세는 일과 별개로 무언가를 준비하고 싶어졌다.

 

종이 위에 그는 한 줄을 적었다가 지웠다. 현수를 만나면 처음 무슨 말을 할까. "잘 지냈니"는 너무 가볍고, "미안하다"는 너무 무겁다. 그는 같은 말을 적고 지우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칼을 숫돌에 갈듯이, 한 문장을 자꾸 다듬었다. 너무 세게 갈면 날이 상하고, 덜 갈면 무디다. 마음에도 그런 결이 있었다.

 

오 년이었다. 현수가 집을 나가고, 진우가 아들의 번호를 지우지도 누르지도 못한 채 보낸 시간. 그 오 년 동안 그는 아무것도 갈지 않았다. 무뎌진 채로, 무뎌진 줄도 모르고 살았다. 이제 와 한 문장을 갈고 있자니, 갈아야 할 것이 문장 하나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뭐 해요, 아침부터."

 

김지수가 가운을 걸친 채 부엌으로 들어왔다. 회진을 앞둔 시간이었다.

 

"말을 갈고 있어요. 처음 할 말."

 

"갈아서 뾰족해지면, 찔릴 텐데요."

 

진우는 손을 멈췄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는 적은 줄을 다시 천천히 지웠다.

 

"그럼 둥글게 갈아야겠네요."

 

통과한 다음

 

명호는 전날 밤 늦게까지 데이터를 들여다보았다.

 

젖은 리허설은 통과했다. 그러나 통과했다는 말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가까웠다. 시험을 한 번 치르고 나면, 그 한 번이 남긴 수만 줄의 기록이 책상 위에 쌓인다. 명호의 일은 이제 그 기록 속에서, 다음에 더 다듬을 곳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화면에는 엔진 한 기의 펌프 회전수 곡선이 떠 있었다. 리허설 내내 펌프는 정상 범위 안에서 돌았다. 그러나 명호의 눈은 정상 범위 안의 작은 떨림을 보고 있었다. 카운트다운 마지막 십 초, 한 기의 펌프가 다른 세 기보다 백분의 몇 초 늦게 정해진 회전수에 도달했다. 규정 안이었다.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이거, 규격은 통과예요."

 

젊은 기술자가 곁에서 말했다.

 

"통과인 건 알아. 그래도 갈아 둘 수 있으면 갈아 두는 거야."

 

명호는 그 한 기의 밸브 여는 시점을 천분의 몇 초 앞당기는 조정값을 적었다. 네 기의 엔진이 정확히 같은 순간에 같은 힘을 내야, 발사체는 휘지 않고 곧게 오른다. 한 기가 미세하게 늦으면 그만큼의 비틀림이 기체에 쌓인다. 지금은 백분의 몇 초여서 괜찮지만, 명호는 괜찮은 것을 더 좋은 것으로 바꾸는 사람이었다. 날 선 칼을 한 번 더 숫돌에 대듯, 이미 통과한 것을 한 번 더 갈았다.

 

발사창도 그날 좁혀졌다. 궤도 위의 고리가 매일 조금씩 또렷해지면서, 발사체가 가장 적은 연료로 그 고리에 합류할 수 있는 시간의 폭이 계산되었다. 처음엔 몇 시간이던 창이, 이제 몇십 분으로 줄어 있었다. 명호는 그 좁은 창의 양 끝을 종이에 적었다. 그 분과 그 초 사이에 불을 붙여야 한다. 일찍도 늦어서도 안 되는 단 한 점.

 

"점점 좁아지네요."

 

"좁아지는 게 맞아. 벼릴수록 날은 가늘어지니까."

 

번지는 들꽃

 

박영자의 손수건은 약국을 넘어 사무실로 번졌다.

 

지난주 약사의 가운 주머니에 꽂혔던 들꽃 손수건. 그것을 본 사람이 또 있었다. 약을 받으러 온 동현이었다. 그는 약사가 처방전을 건네며 손수건으로 손끝의 물기를 닦는 것을 보았다.

 

"그거, 예쁘네요."

 

동현이 무심코 말했다. 약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서랍에서 똑같은 들꽃이 수놓인 손수건을 한 장 더 꺼냈다.

 

"한 장 더 있어요. 받은 게."

 

박영자가 약사에게 두 장을 건넨 것을, 동현은 몰랐다. 약사는 그중 한 장을 동현에게 내밀었다. 받은 온기를 자기 선에서 멈추지 않고, 다음 사람에게로 흘려보낸 것이다. 동현은 그것을 사무실 책상 위, 늘 비어 있던 자리에 펼쳐 놓았다. 들꽃 한 송이가, 회색 사무실 한 칸을 가만히 밝혔다.

 

덜어 내는 한 박

 

소율은 녹음까지 엿새를 남겨 두고, 곡을 마지막으로 손보았다.

 

완성했다고 생각한 곡이었다. 그러나 빈 연습실에서 며칠을 부르는 동안, 그녀는 한 마디가 자꾸 걸리는 것을 느꼈다. 두 번째 후렴으로 넘어가기 직전, 숨을 쉬는 자리. 그 한 박이 너무 길어서 노래의 흐름이 잠깐 멈칫했다.

 

그녀는 그 한 박을 반으로 줄였다. 그리고 다시 불러 보았다. 이번에는 후렴이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작곡을 끝낸 곡에서 한 박을 줄이는 일은, 새 곡을 쓰는 것보다 어려웠다. 이미 다 됐다고 믿은 것에서 더 다듬을 곳을 찾으려면, 자기 노래를 낯선 사람의 귀로 다시 들어야 했다.

 

처음 이 곡을 쓸 때, 그녀는 마디를 채우는 데만 마음을 썼다. 빈 데를 메우고, 모자란 데를 더하고. 그러나 곡이 완성된 지금, 손볼 곳은 더하는 자리가 아니라 덜어 내는 자리에 있었다. 한 박을 줄이고, 군더더기 한 음을 지우고. 채우는 일이 작곡이라면, 덜어 내는 일은 벼림이었다. 가장 좋은 칼날은 쇠를 더해서가 아니라, 깎아 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녀는 노래로 배우고 있었다.

 

"여기였구나."

 

소율은 줄인 한 박 자리에 작은 표시를 했다. 녹음 부스에서 이 한 마디가 매끄럽게 넘어가면, 곡 전체가 한 호흡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마지막에 다듬는 한 박이, 처음 쓴 여덟 마디보다 곡을 더 멀리 데려간다는 것을. 다 된 것을 한 번 더 가는 일. 그게 벼림이었다.

 

갈아야 할 것

 

저녁, 진우와 김지수는 다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오늘 며칠이에요?"

 

"스물닷새."

 

진우는 이번엔 달력을 보지 않고도, 아침의 종이를 보지 않고도 대답했다. 김지수는 자기 수첩을 펴 같은 숫자를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의 숫자는 또 같았다.

 

"근데 아침에 갈던 말, 정했어요?"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요. 자꾸 갈수록 더 모르겠어요.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김지수는 잠깐 생각하더니, 수첩을 덮었다.

 

"말은 그날 가서 나와요. 지금 갈아야 할 건 말이 아니라, 그날까지의 하루하루 아닐까요. 오늘 잘 지내면, 그게 그날 할 말이 돼요."

 

진우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그는 다듬어야 할 것을 잘못 골랐는지도 몰랐다. 처음 할 말을 벼리는 게 아니라, 그날까지 남은 스물닷새를 하루씩 벼리는 일. 매일의 하루가 잘 갈린 칼날 한 점씩이라면, 스물닷새 뒤에 만나는 아들 앞에서 그는 무딘 사람이 아닐 것이다.

 

"고마워요. 또."

 

"또요?"

 

"어제도 고맙다고 했잖아요."

 

김지수가 웃었다. 그녀는 수첩의 스물닷새 옆에, 어제처럼 작은 점을 하나 찍었다.

 

벼리는 고리

 

그 시각, 궤도 위에서는 ATLAS가 마흔아홉 번째 정렬에 들어가 있었다.

 

격자들은 이미 서로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까운 거리를 더 정확하게 다듬는 것이었다. 격자 하나하나가 제 각도를 천분의 일 도 단위로 미세하게 틀었다. 너무 많이 틀면 빛이 어긋나고, 덜 틀면 초점이 흐려진다. 거대한 고리는 이제 모양을 만드는 단계를 지나, 모양을 벼리는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지상의 관제 화면에 한 줄이 떠올랐다. ‘메타 46단계 — 벼림. 격자 간 정렬 오차 영 점 삼 밀리미터 이내. 송전 사백오십육 시간 무중단.’

 

오차는 일 밀리미터에서 영 점 삼 밀리미터로 줄어 있었다. 이미 충분히 정확한 것을, ATLAS는 한 번 더 갈고 있었다. 모은 햇빛은 그러는 동안에도 한순간 끊기지 않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사백오십육 시간. 그 빛이 동현의 사무실 책상 위 들꽃을 비추고, 소율이 줄인 한 박의 악보를 비추고, 명호가 천분의 몇 초를 적은 종이를 비추고, 진우의 식탁 위 두 잔과 한 장의 빈 종이를 데웠다.

 

발사창은 그날 다시 한 뼘 좁아졌다. 예순세 일 뒤, 그 좁은 창이 열리는 단 몇십 분 동안, 발사체는 가장 잘 벼려진 한 점의 시간을 타고 땅을 떠날 것이다.

 

모두가 이미 다 됐다고 믿은 것을, 한 번 더 갈고 있었다. 통과한 엔진을, 완성한 곡을, 정해진 말을, 정렬을 마친 고리를. 가까워진 다음에 남는 일은, 그 가까움을 더 정확하게 벼리는 일이었다.

 

내일이면, 한 번 더 갈린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