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다가섬」

발사까지 예순넉 일.
세는 사람 자리
진우는 달력 앞에서 잠깐 멈췄다. 어제 처음으로 동그라미를 그린 칸 옆에, 오늘은 줄을 하나 그었다. 스물엿새. 아들 현수를 다시 만나기로 한 날까지, 이제 스물엿새가 남았다. 어제는 스무이레였으니, 하루가 줄었다.
그게 전부였다. 하루가 줄었다는 것. 그런데 그 한 칸이 묘하게 가벼웠다. 안 세던 사람이 세기 시작하면, 처음 며칠은 숫자가 멀게만 보인다. 손에 잡히지 않는 먼 날.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면, 어느 순간 그 날이 저쪽 끝에서 이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멀리 있던 것이 가까워지는 일. 진우는 그 가까워짐의 첫 자국을, 오늘 아침 달력 위에서 보았다.
부엌에서 물이 끓었다. 진우는 잔을 두 개 꺼냈다.
"하나는 누구 거예요?"
김지수가 현관에서 신을 벗으며 물었다. 아침 회진 전에 잠깐 들렀다고 했다. 그녀는 진우가 두 잔을 나란히 놓은 것을 보았다.
"하나는 빈 자리예요. 현수 자리."
"그럼 저는 어디 앉아요?"
진우는 잠깐 웃었다. 잔을 하나 더 꺼냈다.
"여기. 세는 사람 자리."
젖은 리허설
명호는 그날을 오래 기다렸다.
발사대 위에 세워진 발사체는 이제 비어 있지 않았다. 어제 자정부터 추진제 충전이 시작되었다. 액체 산소와 메탄. 영하 백팔십삼 도와 영하 백육십이 도. 탱크 벽에 서리가 끼고, 배관에서 하얀 김이 흘러내렸다. 발사체가 차갑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오늘은 '젖은 리허설'이었다. 실제로 추진제를 가득 채우고, 발사 당일과 똑같은 순서로 카운트다운을 진행하다가, 점화 직전 마지막 초에서 멈추는 시험. 불은 붙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한 초 전까지의 모든 것은 진짜다. 밸브가 열리고, 펌프가 돌고, 컴퓨터가 수천 개의 값을 일 초에 수백 번씩 읽으며 하나라도 어긋나면 스스로 멈춘다.
추진제를 가득 채우는 일부터가 시험이었다. 메탄은 영하 백육십이 도, 산소는 더 차가운 영하 백팔십삼 도. 두 액체를 탱크에 옮겨 담는 동안, 강철은 줄어들고 배관은 수축했다. 어제 계산한 수축량이 오늘 실제 수축량과 같은지, 명호는 탱크 옆구리에 붙은 변형 측정기의 값을 한 줄 한 줄 확인했다. 종이 위의 숫자가 차가운 금속 위에서 같은 값을 내야, 비로소 그 계산이 진짜가 된다.
추진제가 차오르면 발사체의 무게는 열 배 넘게 불어났다. 빈 몸으로 서 있을 때와, 수백 톤의 액체를 품고 서 있을 때는 다른 물건이었다. 바람 한 점에도 흔들리는 폭과, 발사대를 누르는 힘과, 무게 중심의 위치가 전부 바뀌었다. 명호가 두려워한 것은 점화가 아니라 바로 이 '가득 찬 채로 서 있는 시간'이었다. 가장 위험한데 가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T 마이너스 십 분."
관제실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명호는 화면 가득한 숫자들을 보았다. 탱크 압력, 추진제 온도, 배관 유량, 짐벌 각도. 어제까지는 종이 위의 계획이었던 것들이, 오늘은 실제 액체의 무게로 발사대를 누르고 있었다.
"T 마이너스 일 분."
명호의 옆에서 젊은 기술자가 숨을 죽였다. 숫자가 줄어들수록, 발사라는 말이 머릿속의 단어에서 벗어나 몸으로 다가왔다. 이 진동, 이 김, 이 차가움. 발사는 더 이상 달력에 적힌 먼 날이 아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와 있었다.
"T 마이너스 십 초. 구, 팔, 칠……"
명호는 자기도 모르게 숫자를 따라 세었다. 일곱, 여섯, 다섯.
"……삼, 이, 일. 정지. 카운트다운 정지."
점화는 없었다. 컴퓨터가 마지막 일 초를 남기고 시퀀스를 멈추고, 밸브들이 차례로 닫혔다. 펌프가 잦아들었다. 가득 찼던 추진제는 다시 천천히 탱크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발사체는 무게를 덜며, 다시 조용히 서리를 두른 채 서 있었다.
"전 항목 통과입니다."
젊은 기술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명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젖은 리허설을 한 번 통과했다는 건, 발사 당일 일어날 일의 거의 전부를 이미 한 번 겪어 봤다는 뜻이었다. 남은 것은 마지막 일 초, 그 한 초에 불을 붙이는 일뿐이었다.
관제실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누군가 작게 손뼉을 쳤다. 명호는 손뼉을 치지 않았다. 대신 화면에 뜬 한 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전 항목 정상. 발사 시퀀스 검증 완료.’
오늘, 발사가 한 걸음 다가왔다. 숫자가 줄어서가 아니라, 그 숫자를 몸으로 한 번 통과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번지는 들꽃
박영자의 손수건은 이제 여러 사람의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오늘은 새 한 장을 놓았다. 모서리에 작은 들꽃을 수놓은 손수건. 그녀는 그것을 단골 약국의 약사에게 건넸다. 늘 진우의 약을 지어 주던, 손이 거칠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이런 걸 왜……."
약사가 손수건을 받아 들고 머뭇거렸다.
"받으세요. 그냥, 가까이 지내자는 뜻이에요."
약사는 손수건을 한참 보더니, 처방전을 싸 주던 봉투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다음 날 박영자가 다시 약국에 들렀을 때, 약사의 가운 주머니에서 그 손수건의 들꽃 모서리가 살짝 비어져 나와 있었다. 멀던 사람이, 한 칸 가까이 와 있었다.
떨림째로
소율은 빈 연습실에서 첫 소절을 불러 보았다.
녹음까지 이레가 남았다. 어제까지는 여드레였다. 완성한 곡을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녹음하기로 한 날이, 하루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이크도, 청중도 없는 방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첫 음을 냈다. 목소리가 빈방의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그 되돌아온 소리 속에서, 소율은 자기 노래가 낯설게 들리는 순간을 만났다. 머릿속에서 수백 번 부른 곡인데, 막상 입 밖으로 내니 어딘가 어색했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왜 떨려."
혼잣말이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멀리 있을 때는 두렵지 않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떨린다. 발표든, 만남이든, 녹음이든. 가까워진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두려움도 함께 가까워지는 것.
소율은 다시 첫 음을 냈다. 이번에는 떨림을 누르지 않고, 떨림째로 불렀다. 떨리는 목소리도 제 목소리였다. 이레 뒤에는, 이 떨림조차 노래의 일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같은 숫자
저녁, 진우와 김지수는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오늘 며칠 남았어요?"
김지수가 물었다. 진우는 달력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스물엿새."
"외우고 있네요."
"어제 처음 외웠어요. 안 세던 사람이라."
김지수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첫 장을 펼치니, 거기에도 같은 숫자가 적혀 있었다. 스물엿새. 그 위에 어제의 숫자, 스무이레가 지워져 있었다.
"저도 셌어요."
진우가 그녀를 보았다.
"같이 세도 된다고 했잖아요. 어제."
그 말은 어제 그녀가 먼저 꺼낸 말이었다. 같이 세도 되느냐고. 오늘은 그녀가 정말로 같은 숫자를 세어 와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은 날을 향해,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걸음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두 점이, 같은 날을 향해 동시에 가까워질 때, 두 점 사이의 거리도 함께 줄어든다는 것을 진우는 그제야 알았다.
"고마워요."
진우가 말했다. 김지수는 대답 대신, 수첩의 스물엿새 옆에 작은 점을 하나 찍었다. 내일이면 그 점 옆에 스물닷새라고 적힐 것이다.
다가서는 고리
그 시각, 궤도 위에서는 ATLAS가 마흔여덟 번째 정렬을 마치고 있었다.
흩어져 있던 반사 격자들이 한 칸씩 서로에게 다가섰다. 어제보다 격자 사이의 간격이 조금 더 좁혀졌다. 거대한 고리가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격자 하나하나가 제 옆 격자에게 미세하게 몸을 기울여야 했다. 너무 가까우면 부딪히고, 너무 멀면 빛이 샌다. 가까워짐에도 정확한 거리가 있었다.
지상의 관제 화면에는 한 줄이 떠 있었다. ‘메타 45단계 — 다가섬. 격자 간 정렬 오차 일 밀리미터 이내. 송전 사백삼십이 시간 무중단.’
송전은 끊기지 않았다. 마흔여덟 번의 정렬을 거치는 동안, 궤도의 거울들이 모은 햇빛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 빛이 도시의 불을 켜고, 명호의 관제실 화면을 밝히고, 소율의 빈 연습실 형광등을 비추고, 진우의 식탁 위 두 잔을 데웠다.
발사창이 좁혀지고 있었다. 발사체가 궤도의 고리에 가장 효율적으로 합류할 수 있는 시간의 창. 지구가 돌고 궤도가 돌면서, 그 창이 매일 조금씩 또렷해졌다. 예순넉 일 뒤, 그 창이 활짝 열리는 단 몇 분 동안, 발사체는 땅을 떠나 저 위의 고리에게로 다가갈 것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날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발사일을 향한 발사체처럼, 재회를 향한 아버지처럼, 녹음을 향한 노래처럼. 멀리 있던 모든 것이, 오늘 하루만큼 가까워졌다.
내일이면, 또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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