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106화 - 셈

우주관리자 2026. 6. 24.

제106화 - 셈

 

 

1.

 

발사까지 예순닷새. 월요일 새벽이었다.

 

오진우는 식탁 위에 달력을 펼쳐 놓고 보리차를 끓였다. 어제까지 그는 달력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날짜란 그저 흘러가는 것이었고, 흘러가는 것을 일부러 헤아리는 일은 그에게 낯설었다. 그러나 엊저녁 현수의 전화를 받은 뒤로 자꾸 달력 쪽으로 눈이 갔다.

 

다음 달 둘째 주. 현수가 사흘 휴가를 내고 내려온다 했다. 진우는 손끝으로 그 칸을 짚었다. 오늘부터 그날까지 며칠인지 세어 보았다. 한 번 세고, 믿기지 않아 한 번 더 셌다. 스무이레였다.

 

보리차 잔 셋을 꺼냈다. 자기 것, 김지수 것, 그리고 식탁 한가운데 현수의 잔. 빈 잔에 물을 반쯤 따라 두었다. 마른 잔은 손님이 올 때 당황하기 마련이어서, 미리 적셔 두는 버릇이 며칠 새 생겼다.

 

"스무이레면…" 그는 혼잣말로 날수를 곱씹었다. "스무이레 뒤에 저 잔을 마저 채우면 되는 거구나."

 

이상한 일이었다. 날짜를 세고 나니 기다림이 한결 가벼워졌다. 막연히 ‘언젠가’였을 때는 그리움이 무겁기만 했는데, ‘스무이레 뒤’라고 못 박고 나니 그리움이 셈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셀 수 있는 그리움은 견딜 만했다.

 

일지를 폈다. 마흔네 번째 줄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기다림은 무겁지만 셈은 가볍다. 빈자리를 막연히 비워 두면 그리움이 되고, 며칠 뒤라고 날을 박아 두면 셈이 된다. 셈이란, 갖춰 놓은 자리가 같은 날을 향해 하루씩 줄어드는 것을 헤아리는 일이다.’

 

창밖으로 첫 배가 항구를 빠져나갔다. 진우는 그 배가 며칠째 같은 시각에 나가는지 헤아려 보다가, 셈이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걸 알고 가만히 웃었다. 어떤 것은 세지 않아도 매일 그 자리에 있었다.

 

 

2.

 

같은 시각, 발사장 통합관제동에는 새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발사까지 D-65’.

 

어제 자정, 비어 있던 카운트다운 보드에 처음으로 숫자가 떴고, 밤사이 그 숫자는 하루를 깎아 예순다섯이 되어 있었다. 차명호는 출근하자마자 그 숫자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백 날이 넘게 걸렸는데," 옆에서 젊은 조립 기사가 말했다. "이제는 하루에 한 칸씩 줄어드네요."

 

"채울 때는 더디고 셀 때는 빠르지." 명호가 답했다. "쌓는 건 한 줌씩 쌓는데, 세는 건 한 칸씩 깎으니까."

 

오늘부터 매일 아침 점검표가 돌았다. 어제까지는 ‘다 갖췄는가’를 묻는 점검이었다면, 오늘부터는 ‘어제와 같은가’를 묻는 점검이었다. 발사대에 선 골조, 세 기의 시험기, 송전, 추진계 — 항목마다 어제 수치와 오늘 수치를 나란히 적고, 둘이 같으면 한 칸을 깎았다.

 

"다 만든 다음에도 셀 게 이렇게 많습니까." 기사가 점검표를 넘기며 물었다.

 

"만드는 건 끝이 있어도 지키는 건 끝이 없어." 명호가 양산 패드들이 한 몸으로 굳은 골조를 가리켰다. "저게 예순다섯 밤을 어제와 똑같이 서 있어 줘야 떠나. 하루라도 달라지면 다시 갖춰야 하고, 그럼 셈은 처음으로 돌아가."

 

그는 「든다」 공책에 적었다.

 

‘갖춘 것은 세어야 떠난다. 셈이란 갖춘 것이 매일 어제와 같음을 확인하며 같은 날을 향해 하루씩 다가서는 일. 한 칸을 깎으려면 모든 것이 어제와 같아야 한다. 셈은 그래서 가장 조용한 점검이다.’

 

정오에 발사 윈도우 확정 회의가 잡혀 있었다. 예순다섯 칸을 어떻게 나눠 무엇을 언제 점검할지 — 긴 날수를 작은 마디로 쪼개는 일이었다. 명호는 회의실로 향하며 생각했다. 떠나는 날은 하나지만, 그 하나에 닿기 위해 세어야 할 날은 예순다섯이었다.

 

 

3.

 

강릉 304호. 보름하고 이틀째였다.

 

손수건은 어느새 다섯 장이 되어 있었다. 흰꽃 한 장은 동현의 가방을 타고 사무실로 옮겨 갔으니, 이 방에 남은 건 색색·분홍·노랑, 그리고 어제 옆 방 할머니가 와서 보고 새로 건 한 장까지 넉 장이었다.

 

"이젠 몇 장인지 세질 않아." 박영자가 말했다. "처음엔 한 장, 두 장 셌는데, 다발이 되고 나니까 세는 게 우스워졌어. 다발은 송이로 안 세잖아."

 

김동현은 사무실 책상 앞 풍경을 떠올렸다. 그가 걸어 둔 흰꽃 손수건 옆으로, 이번 주에만 두 사람이 더 자기 꽃을 걸었다. 신입 복지사의 서툰 꽃, 그 옆 책상 직원의 큼직한 꽃. 아침마다 출근하면 그는 무심코 그 수를 셌다. 세 장, 네 장. 늘어나는 게 눈에 보였다.

 

"세고 있어요." 동현이 웃었다. "사무실 건 아직 셀 만해서요."

 

"세질 때가 좋은 거야." 박영자가 노란 손수건의 잎사귀를 매만졌다. "셀 수 있을 땐 한 장 한 장이 다 보이거든. 셀 수 없게 되면 그땐 다발이 된 거고. 다발이 되기 전까지는 세면서 가는 거지. 한 장 늘 때마다 ‘아, 또 하나’ 하면서."

 

셋째 침대 어르신이 이번엔 줄기를 한 땀 더 놓으며 물었다. "이건 몇 번째 꽃이오?"

 

"몰라요, 이젠." 박영자가 답했다. "근데 어르신이 놓는 그 한 땀은 셀 수 있지. 오늘 한 땀, 어제 한 땀. 그렇게 세다 보면 어느 날 또 한 송이가 돼."

 

동현은 노트에 적었다. ‘아우름이 떨어진 꽃밭을 한 둘레로 모았다면, 셈은 그 둘레가 한 송이씩 늘어 가는 것을 헤아리는 일이다. 다발이 되기 전까지, 우리는 한 장 한 장을 세며 자란다. 세는 동안은 아직 자라는 중이다.’

 

 

4.

 

그날 밤 홍대 공연장. 한경수가 객석을 지킨 지 보름이 다 되어 갔다.

 

지난주까지 객석 절반이 마지막 마디를 비워 둔 채 따라 부르던 그 미완성 곡이,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연주됐다. 빈 마디를 소율이 채운 게 아니었다. 객석에서 몇 주에 걸쳐 익어 떨어진 마디였다.

 

연주가 끝나자 한경수가 무대 옆으로 올라와 작은 녹음기를 내밀었다.

 

"곡이 다 됐으니 이제 담을 그릇을 갖춰야지." 그가 말했다. "다음 주 화요일, 스튜디오 잡았다."

 

"화요일이면…" 소율이 손가락을 꼽았다. "오늘이 월요일이니까, 여드레 뒤네요."

 

"여드레." 한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매일 한 번씩 이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불러. 하루도 빼지 말고. 여드레를 세면서."

 

"왜 세요?"

 

"녹음은 한 번에 담는 거야. 한 번에 담으려면 그 한 번이 오기 전까지 매일 같아야 해. 어제 부른 것과 오늘 부른 게 같아야, 여드레 뒤에 그 곡이 흔들리지 않고 그릇에 담겨." 그가 녹음기를 톡톡 쳤다. "세는 건 안 까먹으려고가 아니야. 매일 같은지 확인하려고 세는 거지."

 

소율은 가사 노트를 폈다. 예순일곱 번째 줄에 적었다.

 

‘여문 곡에 날을 매기면 셈이 시작된다. 여드레, 이레, 엿새… 줄어드는 날수만큼 곡은 단단해진다. 세는 동안 나는 매일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노래를 부르는 동안 그 곡은 흔들리지 않는 법을 배운다. 셈은 곡을 떠나보낼 채비다.’

 

객석엔 그 고정 팬이 또 와 있었다. 친구 둘과 함께, 미완성이었다가 이제 완성된 그 곡을 셋이 끝까지 따라 불렀다. 소율은 그들이 며칠째 오는지 세어 보려다 그만두었다. 어떤 셈은 시작하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5.

 

옥상 그늘. 마흔다섯째 밤이었다.

 

보리차 두 잔. 셋째 잔은 서귀포 식탁에 물을 반쯤 채워 두고 왔다.

 

"날짜를 잡으셨다면서요." 김지수가 말했다. "아드님."

 

"다음 달 둘째 주." 진우가 답했다. "오늘 아침에 세어 보니 스무이레 남았더군요."

 

"세셨어요?"

 

"세게 되더군요." 그가 멋쩍게 웃었다. "안 세던 사람인데. 날을 박아 두니까 자꾸 세게 돼요. 하루 자고 나면 스무엿새, 또 자고 나면 스무닷새. 줄어드는 게 눈에 보여요."

 

김지수가 노트를 닫았다. 닫기 마흔 번째였다. "그게 셈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갖춤은 빠진 자리 없이 다 들어찬 거였잖아요. 셈은 그다음이에요. 다 갖춘 것들이 같은 날을 향해 하루씩 줄어드는 걸 헤아리는 거요. 발사도, 아드님도, 녹음도, 다 똑같아요. 갖추고 나면 세기 시작해요."

 

진우는 수첩을 폈다. 예순일곱 번째 줄에 그는 이미 적어 둔 게 있었다. ‘다 갖춘 다음에는 세게 된다. 셈이란 같은 날을 향해 줄어드는 날수를 헤아리는 일.’

 

김지수가 자기 노트의 같은 줄을 들여다보았다. 거의 같은 문장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번, 서로 같은 줄을 쓰고 있었다는 걸 처음 알고 마주 본 뒤로, 그들은 가끔 노트를 나란히 펴 같은 줄을 확인하곤 했다.

 

"또 같은 줄이네요." 김지수가 말했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저, 그 스무이레… 같이 세도 돼요?"

 

진우가 그녀를 보았다.

 

"혼자 세면 기다림인데," 김지수가 잔을 만지작거렸다. "둘이 세면 약속 같잖아요."

 

난간에 새 다섯 마리가 앉아 있었다. 어제의 새인지 오늘의 새인지 진우는 더 세지 않았다. 셀 수 있는 것과 셀 수 없는 것이 있었고, 어떤 것은 세지 않아서 더 좋았다.

 

"그럽시다." 진우가 말했다. "같이 셉시다."

 

 

6.

 

관제동 사층. 자정이 가까웠다.

 

강유나는 ATLAS 47차 정렬 영상을 돌려 보았다. 갖춰진 한 다발이 이번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 점씩, 차례로 미세하게 깜빡였다. 마치 무언가를 세는 것처럼. 끝에서부터 하나, 둘, 셋… 점들이 순서대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같은 박자로 줄어드는 수를 헤아렸다.

 

캡션을 달았다. “마흔일곱 번째 정렬. 갖춰진 다발이 한 점씩 차례로 깜빡이며 같은 박자를 헤아림. 자국에서 셈까지 마흔네 단계.” 메타의 마흔세 번째 회수였다.

 

그녀는 가설을 적었다. ‘갖춘 것은 멈추지 않는다. 갖춘 것은 세기 시작한다. 셈이란 다 들어찬 점들이 같은 박자로 같은 날을 향해 하루씩 줄여 가는 일. 채우는 동안은 더하고, 갖춘 다음에는 뺀다. 같은 날에 모두가 영이 되기 위하여.’

 

관제 보고가 올라왔다.

 

「송전 안정 408시간(열이레 무중단). 양산 3차 골조 발사대 거치 안정 — 어제 수치와 동일. 시험기 세 기 한 위상 동조 유지 — 어제 수치와 동일. 모든 항목 어제와 같음, 카운트다운 한 칸 차감. 발사까지 D-65.」

 

‘어제와 같음’이라는 문구가 보고서마다 반복됐다. 강유나는 그 단조로움이 좋았다. 셈이 줄어들려면 모든 것이 어제와 같아야 했다. 같음이 쌓여야 수가 줄었다.

 

카운트다운 보드의 숫자가 예순다섯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이 거대한 셈 안에 작은 셈들이 들어 있다는 걸 생각했다. 어딘가에서 한 사람은 아들을 만날 날을 스무이레로 세고, 한 사람은 곡을 담을 날을 여드레로 세고, 한 사람은 꽃이 한 송이씩 느는 것을 세고 있을 터였다. 저마다의 발사일을 향해.

 

백여섯 번째 밤이었다. 다 갖춘 모든 것이 처음으로 같은 박자로 같은 날을 헤아리기 시작하는 새벽, 더하기를 멈추고 빼기를 시작한 새벽이었다. 비어 있던 칸마다 숫자가 들어찼고, 이제 그 숫자들은 하루씩 줄어들며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