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 여묾

1.
발사 D+18, 토요일.
서귀포의 아침은 어제보다 조금 더 환했다. 진우는 빈 방에서 눈을 떴다. 어제 아침에는 옆자리에 현수가 자고 있었고, 그제 아침에도 그랬다. 오늘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텅 빈 느낌이 아니었다. 방은 며칠 사이에 두 사람의 냄새를 다 익혀 둔 뒤였고, 한 사람이 떠났다고 해서 그 냄새가 한꺼번에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진우는 일어나 보리차를 끓였다. 잔은 셋을 꺼냈다. 하나는 자기 것, 하나는 김지수 것, 그리고 가운데 빈 잔 하나. 어제까지는 그 빈 잔에 물을 따르지 않았는데, 오늘은 손이 먼저 움직여 반쯤 따라 두었다. 따라 놓고 나서야 진우는 자신이 무얼 했는지 알아차렸다.
"이제 비워 두는 게 아니라, 채워 두는구나."
빈 잔에 물을 따르는 일은 어제까지는 어색했다. 오늘은 어색하지 않았다. 떠난 자리가 비어 있는 동안에는 그 자리가 슬펐는데, 그 자리에 물을 채워 두자 슬프지 않았다. 떠난 사람이 돌아올 자리를 미리 준비해 두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휴대폰이 울렸다. 현수였다.
"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그래. 너는 잘 올라갔고."
"네. 오늘 회사 안 나가서, 좀 늦게까지 잤어요." 잠깐 뜸을 들이더니 현수가 말했다. "그 잔, 아직 두고 계세요?"
진우는 식탁 가운데 반쯤 채운 잔을 내려다보았다.
"두고 있다. 비워 두지도 않고."
"……채워 두셨어요?"
"채워 뒀다. 네가 오면 마시라고."
전화 너머에서 한참 말이 없었다. 진우는 아들이 울고 있다는 걸 소리 없이도 알았다. 그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다 익은 것은 흔들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지는 법이라고, 그는 언제부턴가 그렇게 믿게 되었다.
2.
명호는 발사장 발사대 아래에 서 있었다.
어제 수직으로 일으켜 세운 골조가 오늘은 그 자리에 단단히 거치되어 있었다. 어제까지는 '일으켜 세웠다'는 말이 맞았는데, 오늘 보니 '서 있다'가 맞았다. 일으켜 세운 것과 서 있는 것은 달랐다. 세운 것은 아직 손이 받치고 있는 것이고, 서 있는 것은 손을 떼어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통합 들어갑니다."
조립팀장의 목소리에 따라, 발사대에 거치된 골조 안으로 시험기 세 기가 차례로 결합되기 시작했다. 따로 만들어진 골조와 따로 시험을 마친 시험기가, 오늘 처음으로 한 몸이 되는 작업이었다. 명호는 그 광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부품이 모이는 것과 부품이 한 몸이 되는 것은 달랐다. 모인 것은 아직 흩어질 수 있고, 한 몸이 된 것은 흩어지면 부서졌다.
명호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든다」 노트를 꺼내 적었다.
— 모인 것은 흩어질 수 있으나, 여문 것은 흩어지면 부서진다. 따로 든 손들이 한 골조로 일어서고, 일어선 골조 안에 시험기가 들어와 한 몸이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모인 것이 아니라 여문 것이다. 여문 것은 떼어 낼 수 없다.
관제에서 무전이 들어왔다.
"발사 잠정 십 주에서, 카운트다운 본격 진입 검토 들어갑니다. 통합 시험 결과 보고 나면 날짜 확정됩니다."
명호는 고개를 들어 발사대 끝을 보았다. 하늘을 향해 선 한 몸이 거기 있었다. 흔들리지 않았다. 다 여문 것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3.
강릉 304호. 박영자가 이 방에 든 지 열닷새째였다.
박영자는 사무실 쪽 복도를 지나다가 걸음을 멈췄다. 신입 복지사의 책상에 흰꽃 손수건이 걸려 있었고, 그 옆에 또 다른 손수건이 걸려 있었다. 어제까지는 두 장이었는데, 오늘은 세 장이 되어 있었다. 그 옆자리 직원이 자기 것도 한 장 걸어 둔 것이었다.
"세 장이 됐네." 박영자가 중얼거렸다.
마침 지나가던 김동현이 멈춰 섰다. "어머님 덕분이에요. 한 장이 두 장 되고, 두 장이 세 장 되고."
"이게 세 장에서 멈추겠어?" 박영자가 웃었다. "옆으로 옆으로 가다 보면, 어느 날 이 사무실이 통째로 꽃밭이 되는 거야. 그러다 멈출 자리가 오면, 그때가 다 여문 거지."
"여문다는 게요?"
"퍼지기만 하면 안 익어. 퍼지다가 어느 날 자리가 다 차면, 그때부터는 안으로 단단해지는 거야. 꽃이 피었다가 지면서 씨를 맺잖아. 그 씨가 여문 거지. 우리 동현 씨도 언젠가 여물어." 박영자가 동현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동현은 그날 밤 노트에 적었다.
— 여묾(2). 번진 것이 자리를 다 채우고 나면, 더는 밖으로 퍼지지 않고 안으로 단단해진다. 꽃이 씨를 맺듯이. 박영자 어르신은 그것을 "다 여문 것"이라 불렀다.
4.
홍대의 그 작은 공연장은 닷새째 만석이었다.
소율은 무대 위에서 미완성으로 두었던 곡을 연주했다. 처음 이 곡을 객석에 들려준 날에는 몇 사람만 입 모양으로 따라 불렀는데, 오늘은 객석 절반이 후렴을 따라 불렀다. 끝을 내지 않은 채로 둔 곡이, 사람들 사이를 며칠 돌고 돌아 다시 객석으로 모여 든 결과였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후렴이 끝나갈 무렵, 소율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며칠 동안 비워 두었던 마지막 마디가, 무대 위에서 저절로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채워 넣은 게 아니라, 여문 열매가 떨어지듯 흘러나온 마디였다. 곡이 끝났다. 처음으로 끝까지 다 연주된 곡이었다.
객석이 잠깐 숨을 멈췄다가, 박수가 터졌다.
공연이 끝나고 한경수가 다가왔다. 열이틀째 그는 객석 맨 뒤에 앉아 있었다.
"오늘 곡, 끝냈네."
"끝낼 생각 없었는데, 마지막 마디가 그냥 나왔어요."
"그게 여문 거야." 한경수가 말했다. "억지로 끝내려고 하면 안 여물어. 절반인 채로 사람들 손에 돌고 돌다가, 다 돌고 나면 마지막 마디가 저절로 떨어져. 네가 채운 게 아니라, 곡이 다 익어서 떨어진 거지."
소율은 가사 노트를 펼쳐 예순다섯 번째 줄에 적었다.
— 여묾. 절반인 채로 사람들 사이를 다 돌고 나면, 마지막 마디는 저절로 떨어진다. 다 익은 곡은 손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제 무게로 떨어진다.
5.
진우와 김지수는 옥상에서 보리차를 마셨다. 마흔세 번째 저녁이었다.
진우는 잔을 둘 따랐다. 셋째 잔은 따르지 않았다. 대신 서귀포 숙소 식탁에 반쯤 채워 둔 잔 이야기를 했다.
"아들 올 자리를, 비워 두는 게 아니라 채워 두고 왔어요."
김지수는 잠깐 진우를 바라보다가, 수첩을 펼쳤다. "저도 오늘 아침에 비슷한 걸 적었어요."
두 사람은 동시에 각자의 수첩을 펼쳐 예순다섯 번째 줄을 마주 보았다. 어젯밤 처음으로 둘이 같은 줄을 쓰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뒤, 오늘은 펼치기 전부터 같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진우의 줄: 떨어진 자리들이 한 둘레로 모이고 나면, 그 둘레는 빈 곳을 채우며 안으로 단단해진다. 다 여문 둘레는 흔들어도 흩어지지 않는다.
김지수의 줄도 거의 같았다. "여묾은, 아우른 다음이에요." 김지수가 닫기 서른여덟 번째로 수첩을 덮으며 말했다. "멀리 있는 자리들이 한 둘레로 모이는 게 아우름이었으면, 그 둘레가 빈 곳 없이 차서 단단해지는 게 여묾이에요. 아드님 자리도, 어머님 자리도, 제 자리도, 이 둘레 안에서 다 여물어 가는 중이고요."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묻지 않고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는 늘 같은 걸 쓰고 있었던 게 아니라, 같은 걸 쓰면서 같이 여물고 있었던 거네요."
김지수가 웃었다. 난간에는 새 네 마리가 앉아 있었다. 어제의 새인지 오늘의 새인지, 이제는 묻지 않았다.
6.
그날 밤, 관제실의 강유나는 ATLAS의 마흔다섯 번째 정렬 보고를 받았다.
ATLAS는 보고했다. 아우른 한 둘레가, 빈 곳을 안으로 채우며 격자 밀도를 높였습니다. 떨어진 격자들이 한 둘레로 손을 잡은 뒤, 그 둘레 안쪽의 빈 셀들이 차례로 채워져 단단해졌습니다. 이제 한 점을 흔들어도 둘레는 흩어지지 않습니다. 자국에서 여묾까지, 마흔두 단계입니다.
강유나는 일지에 적었다. 메타 흐름의 마흔한 번째 회수였다.
— 여묾. 모인 것은 흩어질 수 있으나, 여문 것은 흩어지면 부서진다. 한 둘레가 빈 곳을 채워 단단해지면, 그것은 더 이상 모인 무리가 아니라 한 몸이 된다. 다 여문 것은 떼어 낼 수 없다.
관제 화면의 숫자들이 차분히 흘렀다. 송전 안정 360시간 — 열닷새째 무중단이었다. 양산 3차 골조는 발사대에 거치된 채 시험기 세 기와 통합 작업에 들어갔고, 시험기 세 기는 한 위상으로 완전히 동조되어 한 기를 멈춰도 나머지 둘이 그 자리를 채웠다. 발사 잠정 십 주는, 통합 시험 결과만 나오면 카운트다운으로 넘어갈 참이었다.
강유나는 옆자리 연구원에게 가설을 말했다.
"아우른 자리들은 이제 빈 곳을 안으로 채우면서 여물고 있어요. 떨어진 격자가 한 둘레로 손을 잡았으면, 그다음은 그 둘레가 통째로 단단해지는 일이에요. 다 여물면, 흔들어도 흩어지지 않아요. 그게 발사할 수 있는 상태예요."
창밖으로 새벽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백네 번째 밤이 지나고 있었다. 떨어진 채로 한 둘레로 모인 모든 것이, 빈 곳을 안으로 채우며 단단히 여물어 가는 새벽이었다.
'웹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겁의 새벽] 제106화 - 셈 (1) | 2026.06.24 |
|---|---|
| [영겁의 새벽] 제105화 - 갖춤 (0) | 2026.06.23 |
| [영겁의 새벽] 제103화 - 아우름 (0) | 2026.06.20 |
| [영겁의 새벽] 제102화 - 뿌리내림 (0) | 2026.06.14 |
| [영겁의 새벽] 제101화 - 깃듦 (0) | 2026.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