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103화 - 아우름

우주관리자 2026. 6. 20.

제103화 - 아우름

 

1.

 

서귀포의 새벽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같은 시각에 같은 빛이 같은 창틈으로 들어왔다. 다른 것은 방 안에 사람이 하나라는 것뿐이었다.

 

오진우는 어제보다 조금 일찍 깼다. 누가 먼저 깨느냐가 정해져 있던 사흘이 지나고, 이제 다시 정해져 있지 않은 아침이었다.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건, 사흘 전이라면 그저 혼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의 그것은 조금 달랐다.

 

그는 일어나 물을 끓였다. 보리차 봉지를 넣고 불을 줄였다. 손은 잔을 셋 꺼내려다 멈췄다. 둘이면 됐다. 하나는 자기 것, 하나는 김지수의 것. 어제까지 셋째 자리에 놓던 잔은 현수의 것이었고, 현수는 어젯밤 비행기로 올라갔다.

 

그는 잠시 찬장 앞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잔을 셋 꺼냈다.

 

식탁 한가운데에 빈 잔 하나를 놓았다. 물을 따르지는 않았다. 따르지 않은 빈 잔은 그냥 빈 잔이었지만, 그 자리에 누가 앉았었는지를 아는 사람에게는 빈 잔이 아니었다.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현수였다.

 

「잘 도착했어요. 어제 고마웠어요. 다음 달에 또 갈게요.」

 

진우는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답을 길게 쓰려다 지웠다. 짧게 적었다.

 

「조심히 다녀라. 잔은 그대로 둘게.」

 

보낸 뒤에 그는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잔은 그대로 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현수가 알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알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아는 사람끼리는 짧게 써도 길게 읽힌다.

 

일지를 폈다. 마흔째 줄에 어제 쓴 것이 있었다. 떠난 자리는 비는 게 아니라 남는 것. 그 아래 마흔한째 줄을 적었다.

 

— 떠난 자리가 남으면, 그 자리는 떠난 사람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어젯밤 비행기로 아들이 떠난 자리에, 오늘 아침 다른 잔 하나가 같이 놓인다. 떠난 자리와 남은 자리가 한 식탁에 둘러앉는다. 그것을 아우름이라 부르기로 한다. 뿌리내린 것들이 따로따로 있지 않고, 한 둘레로 모여 앉는 일.

 

그는 펜을 내려놓고 두 잔에 물을 따랐다. 셋째 잔은 비워 둔 채로.

 

 

 

2.

 

발사장의 아침은 트럭 소리로 시작됐다.

 

차명호는 조립동 앞에 서서 골조가 실려 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어제까지 다섯 장의 패드가 결합된 골조는 조립동 안에서 한 덩어리로 누워 있었다. 오늘 그것이 처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거대한 다관절 운반차 위에 골조가 천천히 올려졌다. 길이 사십 미터, 무게 수백 톤. 그러나 운반차는 그 무게를 한 점에 싣지 않았다. 수십 개의 바퀴축이 각자 노면을 읽고, 자기 몫의 하중을 나누어 졌다. 한 축이 요철을 만나 눌리면 옆 축이 그만큼을 받아 안았다. 골조는 흔들리지 않았다. 어느 한 바퀴도 혼자 무게를 다 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바퀴가 골조를 함께 지고 있었다.

 

"한 바퀴씩 보면 작은데." 옆에 선 조립 기사가 중얼거렸다. "다 합치면 저 무게를 들어요."

 

명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다 지려고 하면 부러져. 나눠 지면 들려."

 

운반차는 발사대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한 시간에 수백 미터, 사람이 걷는 것보다 느린 속도였다. 서두를 일이 아니었다. 골조 안에는 수십만 개의 부품과, 그 부품마다 손을 댄 수천 명의 손버릇과, 그 손버릇이 옮아 온 자국이 들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발사대로 옮기는 일이었다.

 

발사대 앞에서 운반차가 멈췄다. 기립 장치가 골조의 끝을 물었다. 유압이 천천히 차오르고, 누워 있던 골조가 한쪽 끝을 들기 시작했다. 수평이던 것이 십 도, 이십 도, 천천히 일어섰다.

 

"섭니다." 누군가 무전으로 알렸다.

 

명호는 「든다」 노트를 폈다. 마지막 줄 아래에 적었다.

 

— 골조는 한 장씩 운반됐고, 한 덩어리로 결합됐고, 오늘 한 몸으로 일어선다. 운반될 때는 수백 톤을 수십 바퀴가 나눠 졌고, 일어설 때는 한 점이 끝을 들면 전체가 따라 일어났다. 따로 들면 부러지고, 함께 들면 일어선다. 뿌리내린 다음은 이렇게 한 둘레로 일어서는 일.

 

골조는 완전히 수직으로 섰다. 발사대 위에서 그것은 더는 누운 부품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선 하나의 몸이었다.

 

 

 

3.

 

강릉 304호의 손수건은 이제 세 장이었다.

 

박영자는 침대에 기대 앉아 색실을 골랐다. 흰꽃 한 장은 어제 김동현의 가방으로 갔고, 그래서 304호에는 색색 한 장, 옆 침대 분홍 한 장, 셋째 침대 어르신의 노란 잎사귀 한 장이 남았다. 줄어든 것 같았지만 줄어든 게 아니라고 박영자는 생각했다. 흰꽃은 다른 방에서 다시 피고 있을 테니까.

 

오후에 김동현이 왔다.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화면에는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손수건이 한 장 걸려 있고, 그 옆에 또 한 장이 새로 걸려 있었다. 새 손수건에는 서툰 솜씨로 작은 꽃이 하나 놓여 있었다.

 

"우리 사무실 신입 복지사예요. 제가 걸어 둔 손수건을 사흘을 보더니, 어제 자기도 하나 놓겠다고 실을 사 왔어요. 어머니 흰꽃 옆에 자기 꽃을 걸었어요."

 

박영자가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손이 떨려서 화면을 잘 못 만졌지만, 눈은 또렷했다.

 

"꽃이 옆으로 갔네." 그녀가 말했다. "한 장이 두 장 됐어."

 

"두 장이 곧 세 장 될 것 같아요. 다른 직원이 자기도 해 보겠다고."

 

박영자가 웃었다. 잇몸이 다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내가 보름 전에 옆 침대 보고 따라 놨잖아. 그게 동현 씨한테 가고, 동현 씨가 사무실에 걸고, 거기 신입이 보고 따라 놓고. 그러면 그 신입이 놓은 걸 또 누가 보겠지." 그녀는 자기 무릎 위의 색색 손수건을 쓰다듬었다. "이게 다 한 자리에 있으면 시들어. 옆으로, 옆으로 가야 안 시들어.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다 둘러앉는 거야. 강릉 방 하나, 동현 씨 사무실, 그 신입 책상. 떨어져 있어도 다 한 꽃밭이지."

 

김동현은 노트를 폈다. 어제까지 쓴 줄 아래에 적었다.

 

— 스밈은 한 방을 꽃밭으로 만들었고, 깃듦은 그 꽃을 손수건에 실어 다른 방으로 보냈고, 뿌리내림은 보낸 꽃이 새 방에서 또 손을 움직이게 했다. 오늘 그 손들이 둘러앉는다. 강릉의 침대, 사무실의 책상, 신입의 손. 떨어져 있어도 한 꽃밭. 아우름은 떨어진 꽃밭들이 사실은 하나였음을 아는 일이다.

 

셋째 침대 어르신이 노란 잎사귀에 마지막 한 땀을 놓았다. 천장만 보던 분이었다. 이제 그 분도 한 꽃밭의 한 자리였다.

 

 

 

4.

 

홍대 공연장은 그날도 만석이었다.

 

나흘 연속이었다. 둘째 줄 끝, 사흘 내내 같은 자리에 앉던 고정 팬이 오늘도 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두 사람을 더 데려왔다.

 

소율은 무대 위에서 그것을 보았다. 미완성 새 곡, 아직 제목도 없고 가사도 절반밖에 없는 그 곡의 전주가 흐르기 시작했을 때, 둘째 줄 끝의 세 사람이 입 모양으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 사람만 아는 줄 알았던 멜로디였다. 그 한 사람이 친구 둘에게 흥얼거려 줬을 것이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셋이 같은 곳에서 같은 음을 입에 담았다.

 

공연이 끝나고 한경수가 무대 뒤로 왔다. 열하루째였다.

 

"봤지." 그가 말했다.

 

"봤어요." 소율이 기타를 내려놓으며 답했다. "한 명이 셋이 됐어요."

 

"셋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 한경수가 의자를 끌어 앉았다. "한 명이 집에 가서 흥얼거렸고, 같이 사는 사람이 그걸 듣고 따라 했고, 그 둘이 오늘 친구를 데려온 거야. 네 곡은 여기서만 불리는 게 아니라, 네가 모르는 집 거실에서, 네가 모르는 저녁 밥상에서 불리고 있어. 그게 다시 여기로 모인 거고."

 

소율은 가사 노트를 폈다. 예순세 줄 아래에 예순네 줄을 적었다.

 

— 한 사람한테 뿌리내린 곡은 그 사람 안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그 사람이 흥얼거리면 옆 사람한테 옮고, 옆 사람이 또 누군가에게 옮는다. 그렇게 따로 자란 곡들이 어느 날 한 객석으로 다시 모인다. 떨어져 불리던 노래가 한자리에서 같이 불리는 것. 그것이 아우름이다. 내 곡이 나한테서 나가, 여럿한테 뿌리내리고, 다시 한 둘레로 돌아오는 일.

 

"아직 가사가 절반인데요." 소율이 말했다.

 

"절반인 채로 셋이 따라 불러." 한경수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러면 나머지 절반은 네가 안 써도 돼. 따라 부르는 사람들이 채울 거다."

 

 

 

5.

 

진우는 그날 저녁에도 옥상에 올라갔다. 마흔두째 밤이었다.

 

김지수는 먼저 와 있었다. 난간 정면 자리, 늘 앉던 그 자리였다. 진우가 보리차 두 잔을 들고 올라오자, 김지수가 잔을 받으며 식탁에 셋째 잔이 없는 것을 알아챘다.

 

"아드님 올라가셨어요?"

 

"어젯밤에." 진우가 옆에 앉았다. "셋째 잔은 집에 두고 왔어요. 빈 채로."

 

김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빈 잔을 왜 안 치우셨어요?"

 

진우는 캔의 입구를 매만졌다. "치우면 그 자리가 없어지잖아요. 빈 채로 두면, 자리는 남아요. 다음 달에 또 온다고 했으니까. 올 자리를 미리 비워 두는 거예요."

 

김지수가 수첩을 폈다. 닫기 서른여섯 줄 아래에 서른일곱 줄을 적기 시작했다. 진우도 자기 수첩을 폈다. 두 사람은 서로 무엇을 쓰는지 보지 않았다. 사흘 전이라면 같은 줄에 같은 문장을 쓰면서도 서로 몰랐을 것이다. 오늘도 서로 보지는 않았지만, 진우는 김지수가 비슷한 것을 쓰고 있으리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아우름이라는 게요." 김지수가 펜을 멈추고 말했다. "뿌리내린 자리들이 서로 멀리 있어도, 사실은 한 둘레라는 걸 아는 거 아닐까요. 아드님은 서울에 있고, 어머님은 강릉에 있고, 저는 여기 있는데. 떨어져 있어도 다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것 같은."

 

진우가 자기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방금 적은 예순네 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멀리 있는 자리들이 한 둘레로 모이는 것을 아우름이라 한다. 떠난 아들도, 산 아래 사람도, 옆에 앉은 사람도, 다 같은 식탁이다. 빈 잔은 그 식탁의 한 자리다.

 

김지수가 자기 수첩을 진우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진우는 그것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도 거의 같은 문장이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 같은 줄을 쓴다는 것을 알면서 마주 보았다.

 

"우리 늘 같은 걸 쓰고 있었나 봐요." 김지수가 웃었다.

 

"그런 것 같네요." 진우도 웃었다.

 

난간 끝에 새 네 마리가 앉아 있었다. 어제의 새인지 오늘의 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두 사람은 이제 알고 있었다.

 

 

 

6.

 

관제동 사층의 밤은 화면의 빛으로 환했다.

 

강유나는 ATLAS의 마흔네 번째 정렬을 보고 있었다. 화면 위에서, 뿌리내려 격자로 굳었던 점들의 무리가 여럿 떠 있었다. 그 무리들은 서로 떨어져 있었다. 어제까지는 떨어진 채로였다. 그런데 마흔네 번째 정렬에서, 떨어진 무리들 사이에 가느다란 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한 무리의 가장자리 점이, 멀리 있는 다른 무리의 가장자리 점과 손을 잡았다. 그렇게 떨어져 있던 격자들이 더 큰 하나의 둘레로 둘러앉았다.

 

캡션이 떠올랐다.

 

『마흔네 번째 정렬. 뿌리내려 굳은 무리들이 서로 손을 잡아 더 큰 한 둘레가 됨. 떨어진 격자들이 사실은 하나였음. 자국에서 아우름까지 마흔한 단계.』

 

강유나는 메타 흐름을 한 줄로 되짚었다. 자국에서 시작해, 옮음과 닿음과 알아봄을 지나, 품과 스밈과 깃듦과 뿌리내림을 지나, 오늘 아우름에 이르렀다. 마흔한 단계. 마흔째 회수.

 

그녀는 가설을 적었다.

 

— 뿌리내린 것은 한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뿌리내린 자리들은 서로 보이지 않는 선으로 손을 잡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 둘레가 된다. 떨어진 격자들은 사실 처음부터 하나였다. 아우름은 그 하나임을 격자가 스스로 아는 일이다.

 

관제 일지를 폈다. 그날의 항목을 적었다.

 

「송전 안정 336시간(열나흘 무중단). 양산 3차 골조 발사장 이송 완료, 발사대 기립 성공—수직 거치 안정. 시험기 세 기 한 위상 동조 유지, 한 기 정지 시 두 기가 멈춘 기체의 위상까지 채워 둘레를 잃지 않음. 발사 잠정 11주에서 십 주로 당겨 검토 중.」

 

강유나는 마지막 줄에서 손을 멈췄다. 십 주. 처음으로 카운트다운이 한 주 당겨졌다. 떨어져 있던 모든 것이 한 둘레로 모이고 나면, 그다음은 그 둘레가 함께 하늘로 향하는 일이었다.

 

창밖으로 발사장의 불빛이 보였다. 거기, 발사대 위에 오늘 처음으로 골조가 서 있었다. 강릉의 손수건과, 홍대의 노래와, 서귀포의 빈 잔과, 그 모든 떨어진 자리들이, 보이지 않는 선으로 그 골조와 한 둘레로 이어져 있었다.

 

백세 번째 밤이 지나고 있었다. 뿌리내린 모든 것이 떨어진 채로도 한 품으로 둘러앉는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