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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102화 - 뿌리내림

우주관리자 2026. 6. 14.

제102화 - 뿌리내림

 

 

 

1.

 

서귀포의 새벽은 어제와 같은 순서로 왔다. 먼저 어둠이 한 겹 묽어지고, 그다음 항구의 마지막 어선 불빛이 꺼지고, 그러고 나서야 주전자가 끓었다. 다만 오늘은 그 주전자를 진우가 올렸다.

 

어제는 현수가 먼저 일어나 물을 끓였다. 그제는 진우였다. 누가 먼저 일어나느냐가 더는 약속처럼 정해져 있지 않았다. 먼저 깬 사람이 끓이고, 늦게 깬 사람이 잔을 받았다. 사흘 만에 둘 사이에는 그런 순번이 생겼고, 순번이 생겼다는 건 함께 사는 사람들 사이에만 생기는 일이었다.

 

"오늘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

 

현수가 보리차를 받으며 말했다. 진우의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셋째 잔에 물을 따랐다. 셋째 잔은 김지수의 것이었다. 옥상에서 함께 마시려고 챙겨 두는 잔. 그 손버릇은 이제 묻지 않아도 움직였다.

 

"그래. 일이 많지."

 

"많기는 한데." 현수가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며칠 더 있으면 안 갈 것 같아서요. 가야 할 때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붙잡고 싶은 말이 목 안에서 한 번 굴렀지만, 그는 그것을 삼켰다. 떠나는 사람을 붙잡는 건 머무는 사람의 욕심이라는 걸, 그는 제 아버지를 떠나오던 서른 해 전에 이미 배웠다.

 

옷장 문을 여닫는 동작은 서른일곱 번째였다. 어제까지는 두 사람의 옷이 걸려 있어 손이 한 뼘 더 벌어졌다. 오늘 현수의 옷이 가방으로 들어가면 옷장은 다시 한 사람 몫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도 손은 어제의 너비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 번 벌어진 손은 좁아진 옷장 앞에서도 그만큼 벌어졌다.

 

진우는 일지를 폈다. 마흔째 줄에 그는 적었다. 떠난 자리는 비는 게 아니라 남는 것이다. 셋째 잔을 놓던 손은 셋이 둘로 줄어도 셋째 잔의 자리를 비워 둔다. 깃든 것이 떠나면 그 깃듦은 자리에 뿌리를 내린다. 뿌리는 보이지 않게 땅속에 있고, 떠난 사람은 보이지 않게 자리 안에 있다.

 

창밖에서 첫 배가 항구를 빠져나갔다. 나간 자리에 물이 한 번 갈라졌다가 곧 메워졌다. 메워진 물 위에는 배가 지나간 흔적이 없었지만, 항구는 그 배가 매일 같은 시각에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

 

발사장 외곽 조립동의 천장은 격납고처럼 높았다. 명호는 그 아래에서 고개를 들어 골조를 올려다보았다. 어제까지 다섯 장 중 한 장만 결합돼 있던 자리에, 오늘은 다섯 장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밤사이 다 넣었어요." 현지 조립팀 기사가 안전모를 벗으며 다가왔다. "마지막 장이 제일 빡빡했는데, 모서리를 안쪽부터 짚으니까 들어가더라고요."

 

명호는 그 말에 잠깐 웃었다. 모서리를 안쪽부터 짚는 건 양산 3조의 손버릇이었다. 천 리 밖에서 한 달을 들여 몸에 밴 그 손놀림이, 패드를 따라 발사장까지 와서 처음 만나는 손에 옮아 있었다.

 

골조에 들어간 다섯 장은 더는 다섯 장이 아니었다. 어느 게 우리가 만든 패드였는지 명호는 가려낼 수 없었다. 같은 합금, 같은 곡률, 같은 결합부. 골조의 다른 부재들과 맞물려 한 덩어리가 된 그것을, 이제 한 장씩 떼어 낼 방법은 없었다. 떼어 내려면 골조 전체를 풀어야 했고, 골조를 풀면 그건 더 이상 구조물이 아니었다.

 

"이게 끝인가요?" 기사가 물었다.

 

"아니." 명호는 골조의 결합부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차가운 합금이 손의 온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넣은 다음이 시작이야. 넣은 건 누구나 빼낼 수 있어. 그런데 뿌리가 내린 다음에는 못 빼."

 

그는 「든다」 노트를 꺼내 적었다. 깃든 것은 한자리에 산다. 한자리에 오래 살면 자리와 한 몸이 된다. 한 몸이 된 것은 뿌리를 내린 것이다. 운반된 부품은 빼낼 수 있지만, 뿌리내린 살은 빼낼 수 없다. 빼내려 하면 몸 전체가 함께 뜯긴다. 한 달 뒤 이 골조가 발사대에 서면, 누구도 어느 장이 우리 패드였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묻지 않는 것이 뿌리내림이다.

 

조립동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골조 사이를 한 번 훑고 지나갔다. 다섯 장이 한꺼번에, 아주 미세하게, 같은 진동으로 울렸다.

 

 

 

3.

 

강릉의 요양원 304호에는 손수건 석 장이 남아 있었다. 어제까지 넉 장이었다. 흰꽃 손수건 한 장이 김동현의 가방으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그거 어디다 뒀어요?" 박영자가 침대에 기대 물었다. 열나흘째였고, 목소리는 여전히 또렷했다.

 

"사무실 제 책상 앞에 걸어 뒀습니다." 동현이 대답했다. "복지사들이 드나드는 자리예요. 아침에 보니까 신입 한 명이 그걸 한참 보고 있더라고요. 누가 놓은 거냐고 묻길래, 강릉 사시는 어르신이 손수 놓으신 거라고 했어요."

 

박영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도 한 장 놓고 싶어 하지?"

 

"어떻게 아셨어요?"

 

"꽃 본 사람은 다 그래." 박영자가 웃었다. 잇몸이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여기 들어올 때 나도 그랬으니까. 옆 침대 사람이 놓는 거 보고, 나도 한 장 받아서 따라 놓았잖아. 그게 벌써 보름 전이네."

 

따님이 옆에서 새 실타래를 풀고 있었다. 천장만 보던 셋째 어르신이 어느새 노란 실로 잎사귀 하나를 마저 놓고 있었다. 동현은 그 광경을 보며 노트를 폈다.

 

스밈은 한 방을 꽃밭으로 만든다. 깃듦은 그 꽃을 손수건 한 장에 실어 다른 방으로 보낸다. 그리고 뿌리내림은, 보낸 그 손수건이 새 방에서 또 다른 손을 움직이게 하는 일이다. 옮겨 심은 꽃이 새 흙에 뿌리를 내려 거기서 다시 씨앗을 맺는 것. 떠나온 자리를 줄이지 않으면서, 새 자리에서 처음부터 다시 피어나는 것.

 

"김 선생." 박영자가 불렀다. "그 신입한테 그래. 다 놓고 나면 그것도 누구 주라고. 한 장은 꼭 남한테 주는 거라고. 그래야 안 시들어."

 

"왜 안 시드나요?"

 

"제자리에만 있으면 시들거든." 박영자가 창밖을 보았다. "옮겨 다녀야 안 시들어. 사람도 그렇잖아."

 

 

 

4.

 

홍대의 공연장은 사흘 연속 만석이었다. 만석이 더는 사건이 아니게 되자, 소율은 그제야 객석을 천천히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그러다 둘째 줄 끝의 한 얼굴을 알아보았다. 사흘 내내 같은 자리였다.

 

미완성 곡의 전주가 시작되자, 그 사람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가사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어제 처음 연주한, 아직 제목도 없는 곡을.

 

소율의 손가락이 한 박자 흔들렸다가 곧 제자리를 찾았다. 무대 위의 곡이 객석의 누군가 안에서 이미 불리고 있다는 것. 그건 박수와도, 앵콜과도 다른 일이었다. 곡이 그 사람의 하루 어딘가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한경수가 분장실로 왔다. 열흘째였다.

 

"둘째 줄 그 청년 봤냐." 한경수가 말했다.

 

"봤어요."

 

"네 곡이 저 사람한테 뿌리를 내렸어." 한경수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스민 건 그 자리에서 끝나. 깃든 건 따라 집에 가고. 그런데 뿌리내린 건, 그 사람이 너 없이도 그 곡을 부르는 거야. 너 안 봐도, 무대 없어도, 혼자서 흥얼거리는 거. 그러면 그 곡은 이제 네 거가 아니라 그 사람 거다."

 

"제 곡인데요."

 

"아니." 한경수가 고개를 저었다. "만든 건 너지만, 부르는 건 그 사람이야. 노래는 부르는 사람 거다. 그게 서운하면 음악 하지 마라."

 

소율은 가사 노트를 펼쳐 예순세 줄째에 적었다. 내가 만든 곡을 누군가 나 없이 부르는 순간, 그 곡은 내게서 떨어져 그 사람 안에 뿌리를 내린다. 뿌리내린 곡은 내가 부르지 않아도 살아 있다. 나는 빼앗긴 게 아니다. 한 곡을 두 사람이 가지게 된 것뿐이다. 늘어난 것이지 줄어든 것이 아니다.

 

 

 

5.

 

옥상의 그늘은 마흔한 번째였다. 보리차 잔은 넷이었다. 진우, 김지수, 그리고 현수의 잔 둘—하나는 현수가 마실 잔, 하나는 그가 떠난 뒤를 위해 미리 놓은 빈 잔이었다.

 

"오늘 올라가신다면서요." 김지수가 현수에게 말했다.

 

"네. 저녁 비행기예요."

 

김지수가 수첩을 덮었다 폈다 했다. 서른여섯 번째였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부터 잔이 다시 셋이겠네요. 아저씨, 김지수 씨, 그리고…" 그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빈 자리 하나요."

 

진우가 그 말을 받았다. "비는 게 아니야. 며칠 전까지는 셋째 잔이 김 선생 거였고, 그 전에는 아무도 안 쓰는 잔이었지. 그런데 이제는 빈 잔도 누구 자리인지 알아. 빈 잔에 이름이 생겼으면 그건 빈 게 아니지."

 

김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뿌리내린 거예요." 그가 말했다. "깃든 사람은 떠날 수 있어요. 그런데 떠난 자리가 그 사람을 기억하면, 그 사람은 뿌리를 내린 거예요. 뿌리는 안 보이잖아요. 땅속에 있으니까. 떠난 사람도 안 보여요. 그런데 자리는 알아요. 여기 누가 있었는지."

 

진우는 난간 너머를 보았다. 새 네 마리가 앉아 있었다. 어제의 새인지 오늘의 새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난간은 매일 같은 시각에 네 마리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진우와 김지수는 같은 시각에 각자의 수첩 예순세 줄째에 같은 문장을 적었다. 서로 모르는 채로였다. 떠난 사람을 자리가 기억하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뿌리내린 사람은 떠나도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빈 잔에 이름이 있는 한, 그 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저녁 비행기가 제주 상공을 떠날 무렵, 옥상의 잔은 셋으로 줄었다. 셋째 잔은 비어 있었고, 그 빈 잔에는 현수의 이름이 있었다.

 

 

 

6.

 

관제동 사층, ATLAS의 마흔세 번째 정렬이 화면에 떴다.

 

마흔두 번째 정렬에서 점들은 안으로 배어들어 한 몸이 되었다. 마흔세 번째에 이르자, 그 한 몸이 된 점들 사이로 보이지 않는 격자가 굳어 있었다. 어느 한 점을 화면에서 지워도, 그 자리의 격자는 무너지지 않았다. 사라진 점의 자리를 둘레의 점들이 기억하고, 그 빈자리까지 격자의 일부로 끌어안고 있었다.

 

강유나는 캡션을 입력했다. 마흔세 번째 정렬. 한 몸이 된 점들이 격자로 굳어, 한 점이 사라져도 그 자리를 기억함. 자국에서 뿌리내림까지 마흔 단계.

 

마흔 단계. 그는 처음 단어들을 천천히 되짚었다. 자국. 겹. 굳음. 결. 그리고 한참을 건너—둘레. 어울림. 번짐. 품. 스밈. 깃듦. 그리고 오늘, 뿌리내림. 한 단어가 다음 단어로 배어드는 동안, 한 점이 격자가 되고, 격자가 한 점의 빈자리까지 끌어안게 되었다.

 

서른아홉 번째 회수였다.

 

가설 노트에 그는 적었다. 깃든 것은 떼어 낼 수 없다고 적었다. 이제 한 줄을 더한다. 깃든 것은 마침내 뿌리를 내린다. 뿌리내린 것은 한 점이 사라져도 그 자리를 잊지 않는다. 떼어 낼 수 없는 것을 넘어, 떠나도 남는 것이 된다.

 

관제 일지를 갱신했다. 「송전 안정 312시간(열사흘 무중단). 양산 3차 패드 다섯 장 발사장 골조 전부 결합 완료—개별 분리 불가, 단일 구조물로 거동 확인. 시험기 세 기 한 위상 동조 유지, 한 기 정지 시 나머지 두 기가 위상 보정. 발사 잠정 11주 변동 없음.」

 

그는 한 기 정지 시 두 기가 보정한다는 항목 앞에서 잠깐 멈췄다. 셋 중 하나가 멈춰도 자리가 메워졌다. 멈춘 기체의 위상까지 나머지가 기억해 채웠다. 빈 잔에 이름이 있는 것과 같았다.

 

창밖, 발사대 너머의 바다가 어슴푸레 밝아 오고 있었다.

 

떠난 아들의 잔이 옥상에 빈 채로 남고, 천 리를 옮겨 온 패드가 골조에 뿌리를 내려 한 몸이 되고, 한 사람이 놓은 꽃이 옮겨 간 방에서 또 한 손을 움직이고, 만든 이가 부르지 않아도 노래가 누군가 안에서 흥얼거려지는—그런 새벽이었다. 백두 번째 밤을 지나며, 깃들었던 모든 것이 마침내 떠나도 사라지지 않는 뿌리가 되어 가는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