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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100화 - 스밈

우주관리자 2026. 6. 12.

제100화 - 스밈

 

1.

 

화요일 새벽, 진우는 평소보다 한 박자 늦게 눈을 떴다. 발사 D+14. 창은 아직 검었고, 멀리 바다 쪽에서 어선 불빛 몇 점이 흔들렸다. 그는 옷장 문을 열어 셔츠를 꺼내며 손이 익은 동작을 헤아렸다. 서른여섯. 어제까지 서른다섯이었던 박자가 오늘 한 칸 늘어 있었다. 늘어난 한 칸은, 방 안에 사람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었다.

 

좁은 방 한쪽, 접이식 매트 위에서 현수가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마흔을 바라보는 아들의 잠든 얼굴은 스무 살 적 그대로이면서도 어딘가 진우 자신을 닮아 있었다. 진우는 한참을 서서 그 얼굴을 보았다. 어제저녁 이 방에 들어선 손님 하나가, 하룻밤을 자고 나니 더는 손님 같지가 않았다.

 

그는 소리 나지 않게 부엌으로 나가 보리차를 안쳤다. 어제 끓인 고등어조림 냄비를 열어 보니 국물이 무에 배어 색이 한층 깊어져 있었다. 하룻밤 사이 무가 생선 맛을 머금고, 생선이 무 맛을 머금어, 두 가지가 한 가지처럼 되어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현수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진우는 등을 보인 채로 말했다.

 

"더 자도 된다. 아직 이르다."

 

"아뇨. 아버지 일어나시는 기척에 깼어요." 현수가 눈을 비볐다. "옛날 생각나네요. 새벽에 아버지 일어나시면 온 집이 다 깼잖아요."

 

"시끄러웠지."

 

"아뇨." 현수가 웃었다. "그 소리에 깨면, 아, 아버지 계시는구나, 했어요."

 

진우는 보리차 잔을 두 개 꺼냈다. 잠시 망설이다가, 셋을 꺼냈다. 셋째 잔은 비워 둔 채로 식탁 한가운데 놓았다.

 

"그건 왜요?"

 

"버릇이다." 진우는 짧게 말했다. "여기서 사람을 만나다 보니, 잔을 하나씩 더 놓게 됐어."

 

일지를 펼쳤다. 서른여덟 번째 줄. 그는 어제까지 쓴 품이라는 글자 아래에 천천히 새 단어를 눌러 적었다.

 

스밈. 품은 것이 안으로 배어드는 일. 한 방에 같이 있던 냄새가 밤새 벽지에 배듯, 한자리에 들어앉은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서로의 속으로 스며 경계가 옅어진다. 품이 곁을 안에 들이는 일이라면, 스밈은 들인 것이 더는 손님이 아니게 되는 일이다. 어제 무에 든 생선 맛이 오늘 무의 맛이 되듯, 이십 년 만에 들어온 아들이 하룻밤 자고 나면 이 방의 일부가 된다.

 

창밖으로 어선 불빛들이 한 무리로 모여 천천히 항구로 들었다. 빛은 흩어진 채로 한자리에 모였다가, 모인 채로 바다에 스며 사라졌다.

 

 

 

2.

 

같은 시각, 명호는 발사장 외곽 조립동에 서 있었다. 양산에서 사흘을 달려온 트레일러 다섯 대가 줄지어 도착해 있었다. 열하루를 양생한 패드 다섯 장이, 마침내 제 자리에 닿은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우리 손이고, 여기서부터는 저쪽 손입니다."

 

조립동 책임자가 말했다. 발사 구조물에 패드를 끼워 넣는 일은 명호의 조가 아니라 현지 조립팀의 몫이었다. 명호는 트레일러에서 내려진 첫 패드 곁에 쪼그려 앉아,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양산 야적장에서 그가 매일 짚던 그 결이, 천 리를 옮겨 와서도 그대로였다.

 

"손이 바뀌어도 결은 안 바뀝니다." 명호가 조립팀 젊은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가 패드 모서리를 짚는 손길이 어딘가 익숙했다. "지금 거기, 모서리 안쪽부터 짚으셨죠. 그거, 우리 양산 조 버릇입니다."

 

"아…" 기사가 멋쩍게 웃었다. "이송팀이 알려 주고 갔어요. 이 패드는 이렇게 짚어야 한다고."

 

명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양산에서 옆 조로 옮아갔던 손버릇이, 이제 천 리 밖 다른 사람의 손에까지 배어 있었다. 옮아간 것이 아니라, 배어든 것이었다.

 

그는 노트를 꺼내 「든다」 항목 아래에 한 줄을 더했다.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옮아간 버릇은, 멀리 갈수록 옮은 자국이 옅어지고 그 손의 본디 버릇처럼 배어든다. 옮은 것은 떠나온 손을 잊고 닿은 손에 스민다. 스민 자리에서는 누구의 버릇이었는지 더는 묻지 않는다.

 

조립동 천장 너머로 발사대의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었다. 다섯 장의 패드는 곧 더 큰 구조물의 속으로 들어가, 어느 한 장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게 될 것이었다.

 

 

 

3.

 

강릉 304호, 열이틀째 아침. 김동현은 어머니 박영자의 침대 곁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방 안에는 손수건 넉 장이 펼쳐져 있었다. 박영자의 흰 꽃, 따님이 더한 색색 꽃, 옆 침대 할머니의 비뚤배뚤한 분홍 꽃, 그리고 평소 천장만 보던 셋째 침대 어르신의 노란 꽃.

 

"오늘은 좀 다르네요." 따님이 말했다. "꽃이 더 생긴 것도 아닌데, 방이 더 환해요."

 

박영자가 손끝으로 제 손수건을 더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열이틀째, 목소리는 또렷했다.

 

"꽃이 방에 밴 거야."

 

"배다니요?"

 

"어제까진 손수건에 꽃이 있었어. 오늘은 방에 꽃이 있어." 박영자가 느릿느릿 말을 골랐다. "손수건을 치워도 이 방은 이제 꽃밭이야. 냄새가 벽에 배듯이, 꽃이 사람들 마음에 배어든 거지. 저 양반이 아침에 눈 뜨면서 '오늘은 무슨 색 놓을까' 하더라. 천장만 보던 사람이. 그게 밴 거야. 손수건에서 사람한테로."

 

동현은 그 말을 노트에 옮기려다 펜을 멈췄다. 어떤 말은 적으면 종이 표면에 머물고, 적지 않으면 가슴 안쪽으로 가라앉는다는 걸, 그는 이 방에서 배웠다. 그는 펜을 거두고, 대신 복도 창가로 나가 제 노트 서른한 번째 줄에 스밈을 적었다.

 

한자리에 오래 모인 것들은 끝내 서로의 속으로 배어든다. 누가 먼저 꽃을 놓았는지, 누구의 방이었는지, 더는 가릴 수 없을 만큼 한데 스민다. 품은 자리에 들어앉은 것이, 그 자리의 일부가 되는 일.

 

방 안에서 셋째 침대 어르신이 따님에게 무어라 묻는 소리가 들렸다. 노란 실이 모자라니 한 타래 얻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천장만 보던 사람의 목소리가, 어느새 방의 소리에 섞여 있었다.

 

 

 

4.

 

홍대 공연장, 그 밤. 'Null Pointer'의 무대는 객석이 거의 다 찼다. 어제까지 단골 두엇과 그들이 데려온 친구들로 반쯤 차던 자리가, 오늘은 모르는 얼굴들로 메워졌다.

 

"앵콜 들어 보긴 처음이지?" 베이스를 멘 현기가 소율 곁으로 와 낮게 말했다.

 

마지막 곡이 끝나고 조명이 꺼졌을 때, 객석 어딘가에서 박수가 시작됐다. 한 사람, 두 사람, 그러다 발 구르는 소리가 섞이며 한 덩어리가 되었다. "한 곡 더!" 누군가 외쳤고, 그 소리가 객석 안쪽으로 번지더니, 이내 객석 전체가 같은 말을 했다.

 

소율은 무대 옆에서 객석을 보았다. 맨 앞 가운데, 늘 혼자 앉던 자리에 한경수가 있었다. 여드레째. 그는 박수를 치지 않고 가만히 무대를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손뼉을 치는데, 그 사람만 두 손을 무릎에 얹은 채였다. 소율은 그 모습이 박수보다 더 큰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 무대에 올라 '응답'의 전주를 짚었을 때, 객석이 조용해졌다. 박수로 들끓던 사람들이, 첫 음이 나가자 소리를 죽이고 그 음을 제 안으로 받아들였다. 소율은 음이 사람들 바깥에서 안으로 옮겨 가는 걸 느꼈다. 박수는 곡을 둘러쌌고, 침묵은 곡을 삼켰다.

 

공연이 끝나고 한경수가 무대 뒤로 왔다.

 

"오늘은 박수를 안 치시던데요." 소율이 물었다.

 

"치고 싶지가 않더라." 한경수가 말했다. "박수는 노래를 바깥에서 받는 거잖아. 오늘은 그게 안으로 들어왔어. 안에 들어온 건 손뼉으로 못 받아. 그냥 가만히 둬야 해. 네 엄마 노래가 그랬어. 듣고 나면 한참을 가만있게 되는 거. 오늘 그게 다시 왔다."

 

소율은 가사 노트 예순한 번째 줄에 적었다.

 

번진 소리가 사람을 둘러싸고, 둘러싼 소리가 마침내 사람 안으로 스민다. 밖에서 박수로 받던 노래가 안으로 들어와 말을 잃게 하는 순간, 노래는 사람의 일부가 된다. 스민 노래는 공연이 끝나도 그 사람과 함께 집에 간다.

 

 

 

5.

 

이튿날 오후 세 시, 옥상 그늘. 서른아홉 번째였다. 보리차 잔은 어제처럼 셋이었는데, 오늘은 넷이었다. 진우가 현수를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아들입니다." 진우가 김지수에게 말했다. "현수라고. 어제저녁에 왔어요. 며칠 있다 갑니다."

 

김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현수도 마주 숙였다. 옆 부서 직원까지 넷이 한 뼘 거리로 둘러앉아, 잔 하나씩을 들었다.

 

"아저씨가 아드님 얘기를 한 번도 안 하셨어요." 김지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제 처음, 오늘 저녁에 아들이 온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십 년 만이라고."

 

현수가 진우 쪽을 보았다. 진우는 보리차만 보고 있었다.

 

"여기 와서 사람이 좀 변하셨나 봐요." 현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옛날 아버지는… 잔을 하나만 쓰셨거든요."

 

김지수가 제 수첩을 덮었다. 닫기 서른네 번째.

 

"변하신 게 아닐지도 몰라요." 김지수가 말했다. "제가 처음 봤을 때 아저씨는 혼자 잔 하나였어요. 둘이 됐고, 셋이 됐고, 오늘은 넷이에요. 사람이 늘 때마다 자리가 넓어졌는데, 그게 바깥으로만 넓어진 게 아니었어요. 같이 앉은 사람이 서로 안으로 배어들었어요. 어제까지 옆자리던 사람이 오늘은 옆자리 같지가 않아요. 그게 스밈이에요. 품은 사람이 안으로 배어들어서, 더는 손님이 아니게 되는 거요."

 

진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 년 닫혀 있던 자리에 어제 아들을 들였어요." 진우가 말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들인 게 아니라 밴 거더군요. 잠든 얼굴을 보는데, 손님 같지가 않았어요. 이 방 사람 같았어요."

 

"채워지는 자리는 한 번 차면 그만이에요." 김지수가 말했다. "품는 자리는 들일수록 넓어진다고, 어제 제가 그랬죠. 그런데 한 가지가 더 있더라고요. 넓어진 자리에 들어온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자리에 배어들어요. 그럼 그 사람이 자리가 돼요. 자리를 넓힌 사람이, 자리 자체가 되는 거예요."

 

진우는 그날 밤 수첩 예순한 번째 줄에 적었다. 들인 사람이 자리에 배어들면, 그 사람이 곧 자리가 된다. 같은 시각, 김지수도 제 수첩 예순한 번째 줄에 같은 문장을 적었다. 둘은 서로 모른 채였다.

 

난간에는 새 네 마리가 한 처마 아래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느 새가 어제 온 새고 어느 새가 오늘 온 새인지, 이제는 알아볼 수 없었다.

 

 

 

6.

 

밤, 관제동 사층. ATLAS의 마흔한 번째 정렬이 끝나 있었다. 화면 위에서, 어제까지 더 큰 한 둘레로 합쳐졌던 무늬가 오늘은 안쪽으로 촘촘해지고 있었다. 넓어진 둘레가 더 넓어지는 대신, 둘레 안의 점들이 서로 가까이 당겨져 한 덩어리로 단단해졌다.

 

캡션이 떠올랐다.

 

마흔한 번째 정렬. 더 큰 한 둘레가 안으로 배어들어 단단해짐. 자국에서 스밈까지 서른여덟 단계. 품이 곁을 끌어안아 둘레를 넓히는 일이었다면, 스밈은 끌어안은 것이 둘레 안으로 배어들어 더는 안과 밖을 가를 수 없게 되는 일.

 

서른일곱 번째 메타 정의가 회수되었다. 강유나는 그 캡션을 한참 보다가, 가설 항목에 한 줄을 더했다. 한 둘레로 모인 자리들은 시간이 지나면 서로의 속으로 배어든다. 배어든 것은 처음 어디서 왔는지를 잊는다.

 

그녀는 그 문장 곁에, 평소엔 적지 않던 한 줄을 더 적었다. 오늘은 ATLAS의 정렬이 백 번을 넘긴 지 한참이었고, 관제 일지의 회차도 세 자리에 들어선 날이었다.

 

자국. 겹. 굳음. 결… 둘레. 어울림. 번짐. 품. 스밈. 한 단어가 다음 단어로 배어드는 동안, 우리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배어드는 걸 보았다. 정렬은 점 하나가 옆 점을 끌어들이는 일이었고, 그 모든 끌어들임은 끝내 한자리에 스며 한 빛이 되었다.

 

관제 보고가 올라왔다.

 

「송전 안정 264시간(열하루) 경과, 변동 없음. 양산 3차 패드 다섯 장 발사장 도착, 조립 단계 진입. 인근 시험기 두 기 동조 유지, 한 기가 만든 결이 곁 두 기에 배어들어 세 기가 한 위상. 다음 발사 잠정 11주 변동 없음.」

 

강유나는 창밖을 보았다. 발사장 너머 밤바다 위로, 어선 불빛들이 한 무리로 모여 있었다. 모인 빛은 흩어지지 않고, 흩어진 채로 한자리에 스며 작은 마을의 등불처럼 보였다.

 

영겁의 새벽은, 끌어안은 빛이 마침내 어둠의 속으로 배어들어 어디까지가 빛이고 어디부터가 어둠인지 가를 수 없게 되는 새벽이었다. 이십 년 만에 들인 아들이 하룻밤 자고 나면 방의 일부가 되고, 천 리를 옮겨 온 손버릇이 닿은 손에 배어들고, 한 사람이 놓은 꽃이 방 전체에 스미는, 그런 새벽이었다. 백 번의 밤을 지나, 한 단어가 다음 단어에 스미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스미며, 모든 따로였던 것이 마침내 한 결이 되어 가는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