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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97화 - 어울림

우주관리자 2026. 6. 9.

제97화 - 어울림

 

 

 

1.

 

새벽 5시 9분, 서귀포 숙소의 창은 아직 짙은 남빛이었다. 오진우는 옷장 앞에 서서 셔츠를 한 벌씩 손끝으로 넘겼다.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순서로 옷을 고르는 그 동작이 오늘로 서른세 번째였다. 셈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손이 같은 길을 한 번 더 디뎠을 뿐이라는 걸, 그는 이제 안다.

 

책상 위에는 아들의 문자를 출력한 종이와, 엿새 전 손으로 써서 부친 답장의 사본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옆에 어제 새로 적은 것이 한 장 더해졌다. 시장에서 사 올 것들의 목록이었다. 고등어, 무, 쪽파, 굵은소금. 글씨 끝이 조금 떨려 있었다.

 

"다음 주라고 했지."

 

진우는 혼잣말을 했다. 아들 현수가 오기까지는 아직 며칠이 남았다. 그 며칠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그는 알지 못했다. 다만 혼자 먹던 밥상에 그릇 하나를 더 놓는 일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미리 준비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을 뿐이었다.

 

일지를 펼쳤다. 서른다섯 번째 줄에 그는 천천히 적었다.

 

"어울림 — 둘레의 다음 자리. 둥글게 돌아 끊기지 않게 된 한 줄 안으로, 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씩 들어와 앉는 일. 어울림은 같아지는 게 아니다. 고등어는 고등어대로 비리고 무는 무대로 시원하고 쪽파는 쪽파대로 알싸한데, 한 냄비 안에서 그 다른 맛들이 서로를 누르지 않고 한 국이 되는 일이다. 채우면 하나, 익으면 단단, 늘면 둘, 깊어지면 닿고, 따르면 한 줄, 돌면 둘레, 그 둘레 안에서 여럿이 저마다인 채로 한 소리를 내면 어울림이다."

 

창밖 만 위로 어선이 세 점 떠 있었다. 어제는 가장자리를 따라 크게 한 바퀴 돌아 둘레를 그렸는데, 오늘은 세 점이 저마다 다른 속도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셋이 그리는 항적이 어지럽지 않았다. 빠른 점이 안쪽을 돌면 느린 점이 바깥을 받치고, 가운데 한 점이 둘 사이를 메웠다. 부딪히지 않으면서 한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발사로부터 열하루째였다. 책상 모서리에 켜 둔 작은 화면 속에서 송전 그래프가 같은 높이로 평평하게 누워 있었다. 백구십이 시간. 여드레 동안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은 선이었다.

 

 

 

2.

 

양산 야적장의 아침은 콘크리트 냄새로 차 있었다. 양산 3차 작업 아흐레째, 다섯 개의 패드는 모두 젖은 천막 아래에서 마지막 양생을 끝내 가고 있었다.

 

차명호는 첫 번째 패드의 천막을 걷었다. 닷새 전 가장 먼저 타설한 그 면이 이제 단단히 굳어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손바닥으로 표면을 쓸어 보았다. 금 하나 없었다.

 

윤재석이 다섯 번째 패드 쪽에서 호스를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다섯 개가 다 날이 다른데, 이렇게 보니까 한 판 같네요. 처음 친 게 제일 진하고 마지막 친 게 제일 옅고."

 

명호는 다섯 패드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자리로 물러섰다. 정말 그랬다. 타설한 날이 하루씩 어긋나서 색이 조금씩 달랐다. 그런데 다섯이 나란히 누워 있으니 그 차이가 흠이 아니라 결처럼 보였다. 진한 데서 옅은 데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한 면.

 

"어제까진 따로 돌던 다섯이었는데."

 

명호가 천천히 말했다.

 

"오늘은 한데 어울렸어요. 같은 날 친 게 아니라서 색이 다 다른데, 다른 채로 한 단이 됐어요. 똑같이 만들려고 했으면 오히려 안 됐을 거예요. 첫째 날 친 걸 마지막 날 친 거랑 같은 빛으로 맞추겠다고 물을 더 뿌렸으면 둘 다 망가졌겠죠. 그냥 저마다 익은 대로 뒀더니, 다른 것들이 옆에 놓여서 한 면이 됐어요."

 

젊은 보조가 두 번째 패드의 천막을 걷고 있었다. 명호가 첫 패드를 살피면 보조는 자연스럽게 그 옆 패드로 갔고, 윤재석은 끝에서 호스를 잡았다. 셋의 손이 겹치지 않으면서도 비는 자리가 없었다. 누가 어디를 맡으라고 정해 준 적이 없는데도, 세 사람의 움직임이 한 조처럼 맞물렸다.

 

명호는 노트를 꺼내 정식 아홉 번째 「든다」 항목 아래 한 줄을 더했다.

 

"따라 든 손이 한 바퀴 돌아 다시 첫 자리에 닿고 나면, 그다음엔 여럿이 한데 든다. 똑같이 들지 않아도 된다. 저마다 제 자리를 들면, 다른 손들이 그 옆을 들어 한 짐이 된다."

 

 

 

3.

 

강릉 요양원 304호, 아흐레째 아침. 박영자 노인은 창가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손수건을 펼쳐 두고 있었다. 흰 꽃 두 송이를 가느다란 덩굴이 둥글게 두른, 어제 따님과 함께 매듭지은 그 손수건이었다.

 

따님이 작은 실패 몇 개를 꺼냈다. 연노랑, 옅은 분홍, 흐린 풀빛. 처음 쓰던 흰 실과는 다른 색들이었다.

 

"엄마, 여기 덩굴 사이사이에 작은 꽃을 좀 놓을까 봐요. 흰 꽃만 있으니까 좀 허전해서."

 

박영자는 손끝으로 흰 꽃잎의 결을 한 번 더듬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놓아 봐. 흰 거 옆에 노란 거 놓으면 흰 게 더 희게 보이지."

 

따님이 덩굴의 빈자리마다 작은 꽃을 수놓기 시작했다. 노랑 옆에 분홍, 분홍 옆에 풀빛. 색이 저마다 달랐지만 흰 꽃 두 송이를 두른 둘레 안에 들어가니 따로 놀지 않았다. 오히려 흰 꽃이 더 또렷해졌고, 작은 색 꽃들은 그 사이에서 제 빛을 냈다.

 

"이상하네요."

 

따님이 바늘을 멈추고 말했다.

 

"색을 다 다르게 놓았는데 왜 더 한 다발 같죠?"

 

박영자가 손수건 위를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었다. 도톰하게 솟은 꽃들의 결이 손끝에 차례로 걸렸다.

 

"같은 색으로만 놓으면 한 송이가 다른 송이를 가려. 색이 다르면 서로 안 가려.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제 빛을 내니까, 다 같이 봐야 한 다발이 되는 거야. 어우러진다는 게 그래. 똑같아지는 게 아니라, 다른 것들이 서로를 안 가리고 한자리에 누워 있는 거야."

 

아흐레째, 노인의 목소리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또렷했다.

 

김동현은 복도 쪽 의자에 한 뼘 비켜 앉아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노트를 펴지 않았다. 어떤 장면은 적으면 종이 위에 머물고, 적지 않으면 손끝에 가라앉는다는 걸 그는 알아 가고 있었다. 다만 점심 무렵, 복도 창가에서 노트를 펼쳐 스물여덟 번째 줄에 한 줄을 적었다.

 

"같은 자리에 오래 앉아 끝내 한 둘레를 이룬 사람들 곁으로, 다른 빛깔의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앉는다. 닮아서가 아니라 서로를 가리지 않아서, 한 방이 한 다발이 된다."

 

 

 

4.

 

홍대의 작은 공연장, 어머니 기일 나흘 뒤였다. 한소율은 빈 객석을 앞에 두고 다음 곡의 첫 음을 짚었다. 어제 끝 음이 첫 음으로 돌아와 둥글게 닫힌 그 곡이었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베이스를 맡은 동료가 무대 한쪽에 자리를 잡았고, 드럼 앞에도 한 사람이 앉았다. 'Null Pointer'의 멤버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참이었다.

 

소율이 기타로 순환하는 가락을 한 바퀴 돌리자, 베이스가 그 아래로 천천히 들어왔다. 같은 음을 따라 친 것이 아니었다. 기타가 위에서 도는 동안 베이스는 그보다 낮은 자리에서 제 길을 갔다. 그런데 둘이 부딪히지 않았다. 잠시 뒤 드럼이 둘 사이의 빈 박을 메우기 시작했다.

 

세 소리가 저마다 달랐다. 그런데 한 곡이 되었다.

 

"이거야."

 

소율이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끌고 가는 것도, 따라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아니야. 그냥 저마다 제 소리를 내는데, 안 부딪혀. 기타는 기타대로 베이스는 베이스대로 가는데 한 곡으로 들려. 어울린다는 게 이런 거였어. 같은 음을 같이 치는 게 아니라, 다른 음들이 서로 자리를 비켜 주면서 한 소리가 되는 거."

 

뒷줄에는 한경수가 앉아 있었다. 닷새째 같은 자리였다. 딸의 곡이 한 바퀴 돌아 첫 음으로 돌아올 때, 그는 여전히 입속으로 가락을 따라 흥얼거렸다. 처음엔 반 박자 늦었지만, 곡이 둥글게 도는 사이 어느새 같은 박자가 되어 있었다. 베이스와 드럼과 아버지의 낮은 흥얼거림까지, 그 모두가 소율의 기타를 가운데 두고 한자리에 놓였다.

 

"네 엄마가 그랬다."

 

곡이 한 차례 멈춘 자리에서 한경수가 말했다.

 

"혼자 부를 때보다 옆에서 누가 같이 흥얼거리면 노래가 더 커진다고. 똑같이 부르는 게 아니라 저마다 다르게 부르는데, 그게 한데 모이면 방이 꽉 찬다고 했어. 아빠가 내일은…… 노래 말고, 그냥 박수라도 보탤게. 그것도 한 소리니까."

 

소율의 가사 노트 쉰여덟 번째 줄에 '어울림'이 적혔다.

 

"한 음이 돌아 둘레가 된 곡 안으로, 다른 음들이 저마다 들어와 서로를 비켜 주면 한 소리가 된다. 어울림은 같은 음이 아니라, 다른 음들이 서로의 자리를 남겨 두는 일이다."

 

 

 

5.

 

오후 3시, 옥상의 그늘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드리워 있었다. 진우는 보리차 두 잔을 평상 위에 놓았다. 김지수가 맞은편에 앉았다. 둘 사이의 한 뼘은 오늘도 그대로였다. 서른여섯 번째 만남이었다.

 

새 묘목 곁에 어느새 작은 화분이 둘 더 놓여 있었다. 누가 가져다 둔 것인지, 옥상을 오가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씩 들여놓은 모양이었다. 종류가 다 달랐다. 키 큰 것, 잎이 둥근 것, 줄기가 가는 것. 그런데 세 화분이 한 그늘 아래 모여 있으니 묘목 혼자 있을 때보다 자리가 차 보였다.

 

"화분이 늘었네요."

 

김지수가 말했다.

 

"제가 들인 건 아닌데, 어느새 둘이 더 와 있어요."

 

진우는 잔을 내려다보았다.

 

"늘었다기보다…… 모인 것 같습니다. 키도 다르고 잎도 다른데, 한자리에 놓이니 따로 보이질 않아요."

 

진우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다섯 번째로 그 이름을 부른 다음이었다.

 

"지수 씨. 아들이 다음 주에 옵니다. 시장에 갈 것들을 적어 봤는데, 혼자 먹을 땐 한 가지면 됐던 게, 둘이 먹으려니 자꾸 늘어요. 고등어에 무에 쪽파에…… 그런데 적다 보니 알겠더군요. 그게 다 따로따로인데, 한 냄비에 넣으면 한 국이 된다는 걸요."

 

김지수가 펼치던 수첩을 다시 덮었다. 서른한 번째였다.

 

"그게 어울림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가까워진다는 건 사이를 좁히는 것도, 같이 보는 걸 늘리는 것도, 더 깊이 보는 것도, 먼저 본 곳을 따라 보는 것도, 한 바퀴 돌아 답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어요. 둘이서 만든 둘레 안으로 다른 것들이 하나씩 들어와 앉는 거예요. 아드님도, 이 화분들도, 저기 보리차 잔도. 다 저마다 다른데, 한 자리에 놓이면 서로를 안 가리고 한 그림이 돼요. 거리는 그대로인데, 그 한 뼘을 사이에 두고 자꾸 무언가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모여들고 있어요."

 

진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는 지금, 한데 모이고 있는 거군요."

 

"거리는 그대로인데 자꾸 한자리가 되어 가고 있어요."

 

진우와 김지수의 수첩에는 둘 다 쉰여덟 번째 줄에 같은 '어울림'이 적혀 있었다. 서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난간 위에는 새 두 마리가 앉아 있었는데, 어디선가 세 번째 한 마리가 날아와 그 곁에 내려앉았다. 셋의 깃 색이 다 달랐다. 그런데 한 난간 위에 나란히 앉으니, 따로 온 새들이 한 무리처럼 보였다.

 

 

 

6.

 

관제동 사층, 밤이었다. 강유나는 ATLAS의 서른여덟 번째 정렬 보고를 화면에 띄웠다.

 

어제까지 세 주기는 끝이 처음에 닿아 하나의 닫힌 원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 ATLAS는 그 원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그려 보였다. 세 주기가 여전히 각자 다른 속도로 돌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셋의 마루와 골이 서로의 빈자리에 정확히 들어맞기 시작했다. 한 주기가 솟을 때 다른 주기가 가라앉아 그 자리를 받쳤고, 셋의 진폭이 부딪히는 대신 한 폭의 매끄러운 합성파로 겹쳐졌다.

 

ATLAS의 캡션이 화면 아래로 흘렀다.

 

"38차 정렬. 한 둘레 안의 세 주기가 서로의 빈자리에 들어맞아 한 폭의 합성파를 이룸. 같은 주기로 맞춘 것이 아니라, 다른 주기들이 서로를 상쇄하지 않고 보강함. 자국에서 어울림까지 서른다섯 단계. 둘레는 따라 간 길이 휘어 돌아 처음에 닿는 일, 어울림은 그 둘레 안에서 다른 것들이 서로의 빈자리에 들어와 한 소리가 되는 일이다."

 

메타 정렬 서른네 번째 회수였다.

 

강유나는 발사 준비기 가설을 적어 둔 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둘레가 된 자리 안으로 다른 것들이 들어와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면, 흩어지지 않고 한 화음이 된다."

 

관제 보고가 화면에 떴다.

 

"위성 「새벽」 송전 안정 백구십이 시간 경과, 변동 없음. 양산 3차 아흐레째, 다섯 번째 패드 양생 완료, 다섯 패드 발열반응 안정. 다음 위성 발사 잠정 11주 뒤, 변동 없음."

 

다섯 개의 패드는 저마다 다른 날 타설되어 빛깔이 달랐지만, 한 도면 위에서는 한 기단(基壇)의 다섯 면이었다. 정지궤도의 위성 한 기가 보내는 빛과, 양산 야적장에서 굳어 가는 다섯 면과, 아직 발사되지 않은 다음 위성의 자리가, 강유나의 화면 위에서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면서도 한 계획의 빈자리들을 서로 메우고 있었다.

 

강유나는 노트에 적었다.

 

"어울림은 둘레 안의 여럿이 서로를 닮으려 하지 않고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 주기가 하나면 길, 둘이면 화음, 셋이 따라 돌면 행렬, 끝이 처음에 닿으면 둘레, 그 둘레 안에서 저마다 다른 것들이 서로의 골과 마루를 메우면 한 폭의 합성파. 같은 소리를 내서가 아니라, 다른 소리들이 서로의 자리를 남겨 두어서 한 음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적었다.

 

"영겁의 새벽은, 휘어 돌아 한 둘레가 된 빛 안으로 저마다 다른 빛줄기들이 하나씩 들어와 앉는 새벽이었다. 빠른 빛이 솟을 때 더딘 빛이 그 아래를 받치고, 따로 온 빛들이 서로를 가리지 않고 서로의 어둠을 메워, 다른 채로 한 폭이 되는 새벽. 같아지지 않고도 한 하늘이 되는, 여럿이 저마다인 채로 마침내 한 새벽이 되는, 그런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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