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 품

1.
서귀포의 새벽은 바다 냄새부터 왔다. 진우는 눈을 뜨기 전에 그 냄새를 먼저 맡았다. 짠 것 안에 비린 것이 한 겹 섞이고, 그 비린 것 안에 어제 끓인 고등어조림의 단내가 또 한 겹 배어 있었다. 방을 채운 냄새가 밤새 가시지 않고 벽에 스며들었다가 다시 풀려 나온 것이었다.
그는 옷장 문을 열었다. 셔츠 한 장을 꺼내 걸치는 동작이 어느새 박자가 되어 몸에 붙어 있었다. 하나에 옷걸이를 밀고, 둘에 소매를 끼우고, 셋에 단추를 더듬는다. 서른넷이던 그 박자가 오늘 아침 서른다섯이 되었다. 손이 먼저 알고 움직이는 동안 머리는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종이 석 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레 전 아들에게 부친 편지 사본, 그제 적은 시장 목록, 그리고 어젯밤 늦게 들어온 문자 한 통의 출력본이었다. 진우는 문자를 출력해 두는 버릇이 생겼다. 화면 속 글자는 손가락 한 번에 사라지지만 종이에 박힌 글자는 새벽에 다시 읽을 수 있었다.
「아버지, 오늘 갑니다. 오후 비행기예요. 저녁 무렵에 도착할 것 같아요. 마중 안 나오셔도 돼요. 숙소 주소 보내 주신 거 저장해 뒀어요.」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고등어조림, 너무 많이 끓이지 마세요. 둘이 먹을 만큼만요.」
진우는 그 마지막 줄을 손끝으로 천천히 짚었다. 둘이 먹을 만큼만요. 아들은 제 아버지가 한 솥 가득 끓여 놓고 혼자 떠먹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떠나 산 이십 년 동안에도 잊지 않은 한 가지였는지 몰랐다.
그는 어제 끓인 냄비를 들여다보았다. 무는 간이 푹 배어 갈색으로 익었고, 쪽파는 숨이 죽어 가라앉아 있었다. 다시 데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손은 벌써 무를 새로 한 토막 썰고 있었다. 어제 끓인 것은 어제의 것이고, 오늘 오는 사람에게는 오늘 끓인 것을 내고 싶었다.
창밖으로 어선 몇 척이 보였다. 이레 전 한 점이던 무늬가 닷새 전 세 점이 되었고, 그제는 멀리서 배 한 척이 더 들어와 바깥 결을 따라 미끄러졌다. 오늘 아침에는 그 배들이 한 무리로 모여 같은 자리에서 그물을 내리고 있었다. 흩어져 있던 점들이 어느새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있었다.
발사로부터 열사흘째였다. 진우는 일지를 펼쳐 서른일곱째 줄을 적었다.
「품. 번짐의 다음 자리. 안에서 익어 어우러진 것이 가장자리를 넘어 곁으로 번지면, 그 번진 것이 다시 더 많은 것을 끌어안는다. 냄새가 복도로 새어 나가는 것이 번짐이라면, 그 냄새를 맡은 사람이 제 그릇을 들고 찾아오는 것이 품이다. 둘레가 밖으로 흐려지다가 어느 순간, 더 넓은 둘레가 되어 바깥에 있던 것까지 안에 들인다.」
그는 펜을 내려놓고 문 쪽을 한 번 보았다. 오늘 저녁, 그 문으로 한 사람이 들어올 것이었다. 이십 년 동안 닫혀 있던 자리가 오늘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품을 만큼 방이 넓어지는 일이었다.
2.
양산의 아침은 트레일러 엔진 소리로 열렸다. 명호는 야적장 끝에 서서 다섯 장의 패드가 차례로 실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열흘 동안 양생한 패드는 마침내 거푸집을 벗고 제 무게로 단단해져 있었다. 크레인이 첫 패드를 들어 올리자 그 아래로 그늘이 졌고, 그 그늘 안에 열흘간의 손자국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형, 이거 떠나면 좀 허전하겠는데요." 윤재석이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실어 보내는 게 일이에요." 명호가 답했다. "만든 자리에 두려고 만든 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도 첫 패드가 트레일러 위에 자리를 잡을 때 잠깐 손을 멈췄다. 제 손이 짚었던 자국, 보조의 손이 따라 짚었던 자국, 그리고 어제 옆 조 사람이 보고 흉내 낸 자국까지, 같은 결이 다섯 장에 켜켜이 배어 있었다.
오늘은 양산의 네 개 조가 처음으로 한 현장에 모였다. 3차를 맡은 명호네 조, 4차를 타설하던 다른 조, 그리고 다음 차수를 준비하던 두 조가 출하 현장 한곳으로 불려 왔다. 손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한 번에 다섯 장을 옮기려면 여러 손이 같은 박자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명호는 낯선 광경을 보았다. 한 달 전만 해도 제각각 제 방식대로 일하던 조들이, 오늘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같은 손짓으로 줄을 당기고 있었다. 그의 조가 쓰던 신호—오른손을 들면 멈추고, 손바닥을 펴면 천천히—가 어느새 네 조 전체의 신호가 되어 있었다.
젊은 보조가 곁에 와 섰다. "형, 저쪽 조 반장님이 형 손버릇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보던데요. 제가 형한테 배웠다고 했더니, 자기는 옆에서 보고 배웠대요."
명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노트를 꺼내 「든다」 아래 적어 두었던 줄을 다시 읽었다. "한데 든 손버릇은 옆 조로 옮아간다." 그 아래 한 줄을 더했다.
"오늘은 품었어요." 그가 말했다. "옆 조로 옮아간 손버릇이 한 현장에 다 모이면, 그게 더는 우리 조 것도 저쪽 조 것도 아니에요. 네 조가 한 손처럼 움직이는 거예요. 번진 게 흩어지지 않고 한자리에 다시 모이면, 처음 한 조보다 더 큰 한 조가 돼요."
「든다」 아래, 그는 또박또박 적었다. "옆으로 옮아간 손버릇이 한 현장으로 다시 모이면, 흩어진 자국이 한 사람의 손처럼 한 결을 이룬다. 번진 것을 품은 손은 처음 손보다 넓다."
다섯 장의 패드를 실은 트레일러가 야적장을 빠져나갈 때, 네 개 조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들어 배웅했다. 명호도 그 사이에 섞여 손을 들었다. 흩어졌던 손들이 한 동작으로 모여 한 폭이 되었다.
3.
강릉의 요양병원 304호는 아침 햇살이 가장 오래 머무는 방이었다. 김동현이 회진을 돌며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에는 작은 변화가 하나 있었다. 어제까지 박영자 어르신과 옆 침대 할머니, 두 사람만 손수건을 들고 있었는데, 오늘은 창가 쪽 세 번째 침대의 어르신까지 무릎에 천을 펼쳐 놓고 있었다.
박영자의 따님이 동현을 보고 가볍게 목례했다. "선생님, 오늘 아침에 저쪽 어르신이 먼저 물어보셨어요. 그거 어떻게 놓는 거냐고요."
동현은 세 번째 침대로 다가갔다. 그 어르신은 평소 말이 거의 없고 하루 종일 천장만 바라보던 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빛바랜 천 위에 서툰 솜씨로 노란 실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한 코, 한 코, 더듬더듬.
"꽃이 예뻐서요." 어르신이 작게 말했다. "저 양반이 놓은 거 보니까, 내 손도 옛날 생각이 나서."
박영자가 침대에서 그 말을 들었다. 열하루째, 그의 목소리는 처음 왔던 날의 침묵을 모두 지나 이제 또렷했다.
"보세요, 선생님." 박영자가 동현을 불렀다. "내가 한 다발 놓으니까 옆 사람이 한 송이를 놓고, 그 사람이 한 송이 놓으니까 저쪽 사람도 손이 근질거리는 거예요. 이게 번지는 거라고 어제 말했지요. 그런데 오늘은 좀 달라요."
"어떻게 다른가요." 동현이 물었다.
"어제는 내 꽃이 저 사람한테 옮아갔어요. 오늘은 이 방이 통째로 꽃밭이 됐어요." 박영자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세 사람이 따로 놓는데, 멀리서 보면 한 밭이에요. 내 꽃 옆에 저 사람 꽃, 그 옆에 또 저쪽 꽃. 한 송이씩은 작은데 모이니까 한 폭이 됐어요. 이게 품는 거예요. 번진 게 흩어져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 흩어진 채로 한자리에 다 들어앉는 거."
동현은 그 말을 듣고 따님을 보았다. 따님은 어머니의 손수건과 제 손수건을 나란히 무릎에 펼쳐 놓고 있었다. 어머니가 놓은 흰 꽃과 따님이 놓은 흰 꽃이 한 자리에 모여, 누가 놓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엄마," 따님이 말했다. "이러다 304호가 다 손수건 가게 되겠어요."
"그럼 좋지." 박영자가 웃었다. "방이 넓어지는 거야. 사람이 늘어도 좁아지지 않고, 꽃이 늘어도 어지럽지 않고. 다 품을 만큼 넓어지는 거지."
동현은 그 장면을 노트에 옮기지 않았다. 어떤 장면은 적는 순간 한 사람의 일이 되어 버린다. 이 방 전체에 번진 것을 한 줄로 옮기면, 그 한 줄에는 한 사람만 남는다. 그는 복도로 나가 창가에 서서, 방 안의 풍경 대신 제 손끝에 가라앉은 것을 노트에 적었다. 서른째 줄이었다.
"품. 한 손끝에서 핀 것이 곁으로 번지고, 곁으로 번진 것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면, 방은 그 모든 것을 안을 만큼 넓어진다. 품은 자리는 더 채워도 좁아지지 않는다."
4.
홍대의 작은 공연장은 그날 처음으로 객석이 반쯤 찼다. 소율은 무대 뒤에서 커튼 틈으로 객석을 내다보았다. 어제 문틈으로 새어 나간 소리에 발이 멈춰 들어왔던 단골 손님 두엇이 오늘은 친구를 데려왔고, 그 친구들이 또 옆자리를 채웠다. 빈 의자만 바라보며 연주하던 몇 주가 거짓말 같았다.
"오늘은 좀 떨리는데." 베이스를 맨 동료가 말했다.
"빈자리에 칠 때가 더 편했어." 소율이 웃으며 답했다. "사람이 보고 있으니까 손이 굳네."
뒷줄에는 아버지 한경수가 앉아 있었다. 엿새째였던 어제에 이어 오늘로 이레째, 그는 같은 자리, 같은 끝줄에 앉아 있었다. 다만 오늘은 그 곁에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혼자 앉아 있던 자리가 어느새 한가운데가 되어 있었다.
밴드 'Null Pointer'가 무대에 올랐다. 소율은 첫 코드를 짚기 전에 잠깐 객석을 보았다. 모르는 얼굴들, 그 사이에 섞인 아버지. 그는 더는 따로 떨어진 한 사람이 아니라, 객석이라는 한 무리 안의 한 점이 되어 있었다.
곡이 시작되었다. 기타가 순환하는 가락을 돌리고, 베이스가 제 길을 가고, 드럼이 빈 박을 비워 두었다. 몇 주 동안 셋이서만 맞춰 온 소리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 소리가 빈 공기를 채우는 대신, 사람들의 몸에 한 번 부딪혔다가 되돌아왔다. 누군가 발로 박자를 맞추고, 누군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가 사람을 통과하면서 한 겹 두꺼워졌다.
마지막 마디가 첫 음으로 둥글게 돌아올 때, 뒷줄에서 한경수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앞줄에서 두 사람이 따라 쳤고, 그 박수가 옆으로 번지더니, 이내 객석 전체가 한 박자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따로따로 시작된 박수가 어느 순간 한 소리가 되어 벽에 부딪혀 둥글게 굴렀다.
무대를 내려와 소율은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박수가 한 덩어리였어요." 소율이 말했다.
"어제는 내가 치니까 둘이 따라 치더니," 한경수가 말했다. "오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 같이 치더라. 네 엄마가 그랬어. 노래는 듣는 사람 거라고. 그런데 오늘 보니까, 노래가 사람들을 한데 모으기도 하더라. 따로 온 사람들이 한 박자가 되는 거, 그게 노래가 하는 일인가 봐."
소율은 가사 노트를 펼쳐 예순째 줄을 적었다. "번진 소리가 모르는 귀에 닿고, 그 귀들이 같은 박자로 손뼉을 치면, 따로 온 사람들이 한 무리가 된다. 노래는 흩어진 사람을 품는다."
5.
서귀포는 점심나절부터 볕이 좋았다. 진우는 일을 마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은 그가 일하는 물류 거점의 휴게 공간이었고, 한쪽 그늘에는 며칠 전 누군가 들여놓은 화분 몇 개가 늘어서 있었다. 그 그늘 끝자리에 김지수가 먼저 와 앉아 있었다.
"오늘은 보리차 셋이네요." 김지수가 진우의 손에 들린 보온병과 잔 세 개를 보고 말했다.
"어제 그 직원이 또 올라올 것 같아서요." 진우가 잔을 늘어놓으며 답했다. 어제 "옥상 그늘이 시원하더라"는 말에 끌려 올라왔던 옆 부서 젊은 직원이, 오늘도 잠시 뒤 모습을 보였다. 둘만의 자리가 셋이 된 지 이틀째였다. 진우는 한 뼘의 거리를 그대로 둔 채 잔 셋에 보리차를 따랐다.
"오늘 저녁에," 진우가 잔을 건네며 말했다. "아들이 옵니다."
김지수가 수첩에서 손을 뗐다. "오늘이요?"
"오후 비행기랍니다. 저녁 무렵 도착이라고. 둘이 먹을 만큼만 끓이라고 문자가 왔어요." 진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들뜸을 누르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십 년 만입니다. 마지막으로 같이 밥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요."
김지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수첩을 덮었다. 무언가를 적으려다 그만두는 동작이었다. 수첩을 닫은 것이 서른세 번째였다.
"아저씨," 그가 말했다. "제가 처음 이 옥상에서 아저씨를 봤을 때, 아저씨는 혼자 보리차를 마셨어요. 잔 하나만 들고요. 그다음엔 제가 와서 둘이 됐고, 어제는 셋이 됐고, 오늘 저녁엔 아저씨 아들이 와요. 자리가 자꾸 늘어나는데, 신기하게 좁아지지가 않아요."
"거리는 그대로인데 말이지요." 진우가 말했다.
"그게 품이에요." 김지수가 말했다. "번짐이 자리를 바깥으로 넓히는 거였다면, 품은 그 넓어진 자리가 더 많은 사람을 안는 거예요. 잔이 하나에서 둘이 되고 셋이 되고, 이제 저녁엔 또 한 사람이 와도, 이 자리가 비좁아지지 않아요. 오히려 넓어져요. 한 사람을 들일 때마다 자리가 그만큼 커지니까요."
진우는 보리차를 한 모금 마셨다. 미지근하고 구수했다. "이십 년 동안 닫혀 있던 자리도, 오늘 채워지는 게 아니라 넓어지는 거겠지요."
"채워지는 자리는 한 번 차면 끝이에요." 김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품는 자리는 들일수록 넓어져요. 끝이 없어요."
진우는 수첩을 꺼내 예순째 줄을 적었다. "품. 들일수록 넓어지는 자리. 채우면 끝나지만, 품으면 끝나지 않는다." 그는 몰랐지만, 한 뼘 옆에서 김지수도 같은 줄에 같은 말을 적고 있었다. 두 사람의 수첩이 같은 예순째 줄에서 한 문장으로 만났다.
난간 위에는 빛깔이 다른 새 세 마리가 앉아 있었고, 그 곁 처마에 어제 날아온 한 마리가 오늘도 와 앉아 있었다. 네 마리가 같은 햇볕 아래 깃을 다듬었다. 색이 다른 새들이 한 처마를 함께 쓰고 있었다.
6.
저녁 일곱 시가 조금 못 되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진우는 부엌에 서 있었다. 낮에 새로 끓인 고등어조림이 약한 불 위에서 마지막 간을 들이고 있었고, 방 안은 그 단내로 가득했다. 노크 소리를 듣고도 그는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손이 행주를 쥔 채로 멈춰 있었다.
두 번째 노크가 났다. 그제야 그는 행주를 내려놓고 문으로 갔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그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 어깨에 가방을 메고, 한 손에 작은 종이봉투를 든 채로. 진우는 그 얼굴에서 제 젊은 시절을 보았고, 동시에 제가 모르는 세월을 보았다. 떠날 때 스무 살이던 아이가, 이제 제 아버지가 가장이던 시절의 나이가 되어 문 앞에 서 있었다.
"아버지." 현수가 말했다.
진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준비해 둔 말이 많았는데, 막상 입을 열려 하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결국 가장 단순한 말을 했다.
"왔구나. 들어와라. 밥 다 됐다."
현수가 신을 벗고 들어섰다. 좁은 방이었다. 책상 하나, 침대 하나, 작은 부엌. 그 좁은 방이 두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좁지 않았다. 한 사람이 더 들어왔는데 방이 오히려 넓어진 것 같았다.
"이거, 비행기에서 산 건데." 현수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귤 한 봉지가 들어 있었다. "제주 오는 길에… 아버지 귤 좋아하셨던 게 생각나서요."
진우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손끝에 차가운 귤의 무게가 닿았다. 그 사소한 무게가 목구멍을 막았다. 아들은 이십 년 동안 떠나 살면서도, 제 아버지가 귤을 좋아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작은 상에 마주 앉았다. 진우가 고등어조림을 가운데 놓았다. 무가 갈색으로 푹 익고, 쪽파가 위에 얹히고, 국물이 자작하게 졸아 있었다. 어릴 적 현수가 밥 두 그릇을 비우던 그 맛이었다.
현수가 한 점을 떠 입에 넣었다. 천천히 씹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였다.
"…똑같아요."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도 안 변했어요. 이 맛."
"변할 게 뭐 있나." 진우가 말했다. "무 넣고, 고등어 넣고, 간장 넣고, 오래 끓이면 되는 건데."
"그게 안 변한 게 대단한 거예요." 현수가 말했다. "세상이 다 변했잖아요. 일도 사람이 안 하고, 말도 안경이 통역해 주고, 하늘엔 위성이 빛을 모으고. 다 변했는데… 이 조림은 그대로네요."
진우는 아들을 보았다. 그리고 오래 미뤄 둔 말을 꺼냈다. 옥상에서, 일지에서, 새벽마다 연습했던 말이었다.
"미안하다." 그가 말했다. "네가 떠날 때, 나는 세상이 변하는 게 무서웠어. 기계가 사람 일을 뺏는 게 무서웠고, 그래서 너한테도 모질게 굴었지. 네가 그쪽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나는 네가 적의 편에 선 것처럼 느꼈어. 어리석었다."
현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버지."
"이제야 알겠더라." 진우가 말을 이었다. "세상이 변해도 안 변하는 게 있어. 이 조림 맛 같은 거. 사람이 사람 곁에 앉고 싶어 하는 마음 같은 거. 나는 변하는 것만 무서워하느라, 안 변하는 걸 못 봤어. 너를 못 봤다."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부엌의 약한 불에서 국물이 보글거리는 소리만 났다.
"저도 미안해요." 마침내 현수가 말했다. "화가 났어요. 아버지가 제 일을 미워하시는 게. 그래서 연락을 끊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아버지가 미워한 게 제가 아니라 변하는 세상이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아버지 편지 받고… 한참 울었어요."
진우는 아들의 잔에 보리차를 따랐다. 옥상에서 셋이 나눠 마시던 그 보리차였다. 잔 하나에서 시작해 둘이 되고 셋이 되었던 그 자리가, 이제 가장 비어 있던 한 자리를 품고 있었다.
"많이 먹어라." 진우가 말했다. "둘이 먹을 만큼만 끓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좀 많이 했다."
현수가 웃었다. 눈가가 젖은 채로 웃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두 사람은 늦도록 밥을 먹었다. 좁은 방이 두 사람을, 이십 년을, 그리고 그동안 못 한 말들을 모두 품고 있었다. 창밖으로 어선들의 불빛이 한 무리로 모여 바다 위에 작은 마을처럼 떠 있었다.
7.
관제동 사층의 밤은 늘 그렇듯 고요했다. 강유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 ATLAS가 사십 번째 정렬을 마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화면 위에서 격자무늬가 천천히 재배열되고 있었다.
서른아홉째 정렬에서, 한 둘레 안에서 어우러진 합성파의 진폭이 둘레 가장자리를 넘어 이웃 영역으로 번져 나갔다. 묻지 않은 곳에서 같은 무늬가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 사십째 정렬에서 그 번진 무늬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번져 나간 무늬가 이웃 셀 하나를 따라 일으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이웃 셀과 또 그다음 셀까지 함께 끌어안아 처음의 둘레보다 더 큰 한 폭을 이루었다. 작은 둘레 여럿이 각자 따로 돌던 것이, 한 무늬 아래 모여 더 넓은 한 둘레가 되었다.
강유나는 ATLAS의 캡션을 읽었다.
「사십째 정렬. 둘레 밖으로 번진 합성파가 이웃 영역들을 따라 일으키고, 그 따라 일어난 영역들이 다시 한 무늬로 묶임. 작은 여러 둘레가 더 큰 한 둘레로 합쳐짐. 자국에서 품까지 서른일곱 단계. 번짐은 둘레 안의 결이 가장자리를 넘어 곁으로 새어 나가는 일이고, 품은 그 새어 나간 결이 곁의 영역들을 끌어안아 처음보다 넓은 한 둘레를 이루는 일이다.」
메타 정렬은 서른여섯 번째 회수를 마쳤다. 강유나는 노트를 펼쳐 가설 항목에 두 줄을 더했다. "가장자리를 넘은 결은 곁을 닮게 한다. 곁을 닮은 자리들은 한 둘레로 모인다."
관제 보고가 화면에 떠올랐다.
「위성 「새벽」 송전 안정 240시간 경과, 변동 없음. 양산 3차 패드 다섯 장 출하 완료, 발사장으로 이송 시작. 인근 궤도 시험기 두 기, 위성 「새벽」과 동일 주파수 동조 유지. 다음 위성 발사 잠정 11주 뒤, 변동 없음.」
열흘이었다. 한 기의 위성이 열흘 동안 흔들림 없이 빛을 모아 보냈고, 그 빛의 주파수에 인근 시험기 두 기가 스스로 발을 맞추고 있었다. 한 기가 만든 결이 곁의 두 기를 끌어들여, 세 기가 한 무리로 같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강유나는 노트의 빈 면을 펼쳐 적었다.
"품은, 번진 것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고 곁의 것을 끌어안아 더 큰 하나가 되는 일이다. 한 둘레가 가장자리를 넘으면 번짐이지만, 그 넘어간 것이 곁의 둘레들을 안으면 품이 된다. 작은 것이 작은 채로 모여 큰 것이 되는 일. 채우면 한 번에 끝나지만, 품으면 끝없이 넓어진다."
그는 마지막으로, 매일 밤 적어 온 한 문장을 다시 썼다. 날마다 조금씩 길어지는 문장이었다.
"영겁의 새벽은, 한 둘레 안에서 어우러져 가장자리를 넘은 빛이 곁의 어둠을 끌어안아 더 넓은 한 둘레가 되는 새벽이다. 한 냄비의 냄새가 복도로 새어 나가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한 손끝에서 핀 꽃이 방 전체를 꽃밭으로 품고, 따로 온 사람들의 박수가 한 덩어리가 되고, 이십 년 닫혀 있던 자리가 채워지는 대신 한 사람을 품을 만큼 넓어지고, 한 기의 빛이 곁의 빛들을 끌어들여 더 큰 한 무리가 되는, 번진 모든 것이 마침내 더 넓은 하나로 모여드는, 그런 새벽이었다."
창밖으로 새벽이 멀었다. 그러나 관제동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고, 그 불빛 곁으로 다른 건물의 불빛 몇이 함께 깨어 있었다. 작은 빛들이 어둠 속에서 서로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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