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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98화 - 번짐

우주관리자 2026. 6. 10.

제98화 - 번짐

 

 

 

1.

 

서귀포의 새벽은 일요일에도 같은 시각에 밝아 왔다. 오진우는 옷장 문을 열고 셔츠 한 벌을 꺼냈다. 손이 움직이는 박자가 어제까지 서른셋이었는데, 오늘은 서른넷으로 한 번 더 늘었다. 늘었다기보다는, 같은 길을 한 번 더 디딘 발걸음에 가까웠다.

 

책상 위에는 아들의 문자 출력본과, 이레 전 손으로 써 부친 답장의 사본과, 그제 적은 시장 목록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고등어, 무, 쪽파, 굵은소금. 그리고 오늘 아침, 그 곁에 종이 한 장이 더 늘었다. 새벽 다섯 시 칠 분에 아들 현수에게서 온 문자였다.

 

『아버지, 가방 다 쌌어요. 비행기 표도 끊었어요. 도착하면 연락드릴게요. 고등어, 정말 좋아하세요? 어릴 때 아버지가 끓여 주신 그 조림, 아직 기억나요.』

 

진우는 그 문자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어제 시장에서 사 온 것들이 봉지째 놓여 있었다. 손질을 시작했다. 무를 썰고, 고등어를 올리고, 굵은소금을 한 줌 뿌렸다. 혼자 먹을 한 끼였지만, 손은 자꾸 두 사람 몫으로 움직였다.

 

냄비에서 김이 오르자 조림 냄새가 좁은 방을 가득 채우더니, 이내 문틈으로 새어 나가 복도로 번졌다. 옆방 주인 할머니가 문을 빼꼼히 열었다.

 

"아이고, 냄새 좋네. 혼자서 무슨 잔치라도 하시오?"

 

진우는 멋쩍게 웃으며 한 그릇을 덜어 내밀었다.

 

"연습입니다. 다음 주에 아들이 옵니다. 미리 한번 끓여 봐야 손이 기억할 것 같아서요."

 

할머니는 그릇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었다.

 

"손맛이라는 게 그래요. 한번 끓이면 그 냄새가 온 동네에 퍼져서, 안 먹어도 다들 배가 불러."

 

진우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그날의 일지 서른여섯 번째 줄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번짐. 어울림의 다음 자리. 둘레 안에서 여럿이 저마다인 채 한 소리를 내면, 그 소리가 둘레의 가장자리를 넘어 밖으로 스며 나가는 일. 한 냄비의 냄새가 방을 채우고 문틈으로 새어 복도로 퍼지듯, 한자리에서 어우러진 것은 제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곁으로 옮아간다. 채우면 하나, 익으면 단단, 늘면 둘, 깊어지면 닿고, 따르면 한 줄, 돌면 둘레, 그 안에서 어우러지면 한 소리, 그 소리가 가장자리를 넘으면 번짐이다.』

 

발사 D+12. 창밖 만에서는 어선 세 점이 어제처럼 한 무늬를 그리며 돌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 무늬가 물비늘을 타고 더 넓은 바다로 천천히 퍼져 나갔다. 멀리 수평선 가까이에서 배 한 척이 새로 들어와, 세 점이 그려 놓은 항로의 바깥쪽 결을 따라 같은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책상 위 작은 화면 속, 위성 「새벽」의 송전 그래프는 이백열여섯 시간째, 그러니까 아흐레째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2.

 

양산 야적장의 다섯 패드는 마침내 양생을 끝냈다. 차명호는 첫 패드부터 다섯 번째 패드까지 차례로 손을 짚어 보았다. 친 날짜가 달라 빛깔이 제각각인 다섯 단이, 이제는 두드리면 같은 소리로 단단하게 울었다.

 

오늘은 출하 준비였다. 양생을 마친 패드를 이송용 받침에 옮겨 다음 공정으로 보내야 했다. 그런데 야적장 한쪽이 평소보다 분주했다. 4차분 타설을 맡은 다른 조가 와서, 명호네 조가 일하는 모양을 곁눈질로 보고 있었다.

 

새로 온 사람 하나가 호스 끝을 어색하게 쥐고 있는데, 젊은 보조가 다가가 제 손으로 그 각도를 잡아 주었다.

 

"여기를 이렇게 받치세요. 이 형이 첫 패드에 떨어뜨린 자국이 있는데, 그 모서리 각도를 보고 따라 짚으면 손이 알아서 자리를 찾아요."

 

명호는 멀찍이서 그 모습을 보았다. 한 달 전만 해도 명호 뒤를 반 걸음 늦게 따라 돌던 보조가, 이제는 제가 배운 손버릇을 새 사람의 손에 옮겨 주고 있었다.

 

윤재석이 곁에 와서 낮게 웃었다.

 

"이제 저쪽 조도 형 방식대로 하네요. 가르친 적도 없는데."

 

명호는 장갑을 고쳐 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번졌어요. 한 조 안에서 손발이 맞으면, 그게 그 조 안에만 안 있어요. 옆 조 사람이 보고, 따라 하고, 또 그 옆으로 옮아가요. 가르쳐서 번지는 게 아니라, 손이 편한 길을 알아보면 저절로 옮아가는 거예요."

 

그는 첫 패드의 떨어진 모서리를 다시 한번 더듬었다. 그 자국이 길을 만들었고, 길이 다음 손을 불렀고, 이제 그 손이 또 다른 손에게 같은 자국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날 명호는 노트의 아홉 번째 항목인 「든다」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한데 든 손버릇은 옆 조로 옮아간다. 가르치지 않아도, 편한 길을 알아본 손이 제 옆의 손에게 그 길을 건넨다. 한 자리에서 익은 것은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3.

 

강릉 304호의 아침, 김동현은 박영자의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어제 따님이 완성한 색색 꽃 손수건이 무릎 위에 펼쳐져 있었다. 흰 꽃 두 송이 둘레에 덩굴이 감기고, 그 빈자리마다 연노랑과 분홍과 풀빛 작은 꽃들이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박영자는 그 손수건을 옆 침대 어르신에게 보여 주고 싶어 했다. 따님이 손수건을 들고 가 옆 침대 할머니의 무릎에 가만히 올려 놓았다. 할머니는 도톰한 꽃잎을 한참 더듬더니, 제 머리맡 서랍에서 빛바랜 손수건 한 장을 꺼냈다.

 

"나도…… 옛날에 이런 거 놓곤 했는데. 손이 굳어서 못 한 지 오래됐어."

 

따님이 실과 바늘을 건넸다. 할머니의 마디 굵은 손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코를 떴다. 비뚤배뚤했지만, 분홍 꽃 한 송이가 그 손끝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박영자가 가만히 웃었다. 열흘째, 그 목소리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했다.

 

"한 다발이 예쁘면, 옆 사람도 제 손에 한 송이 놓고 싶어져. 이게 번지는 거야. 내가 놓은 꽃이 저 사람 손으로 옮아가는 게 아니라, 저 사람 손안에 잠들어 있던 꽃이 깨어나는 거지. 예쁜 건 가만히 있어도 옆으로 퍼져. 그래서 한 사람이 곱게 늙으면, 그 방이 다 같이 고와져."

 

동현은 그 장면을 노트에 옮기지 않았다. 어떤 장면은 적으면 표면에 머물고, 적지 않으면 손끝에 가라앉는다는 걸 이제 그는 알았다. 다만 복도 창가에 서서, 노트 스물아홉 번째 줄에 한 줄만 적었다.

 

『한 사람의 손끝에서 핀 것은 그 손에 머물지 않는다. 곁에 오래 앉은 사람의 잠든 손을 깨워, 같은 자리에 다른 빛깔로 다시 핀다.』

 

 

4.

 

홍대의 공연장은 어머니 기일로부터 닷새가 지난 저녁이었다. 'Null Pointer'의 멤버들이 무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기타의 순환하는 가락 위로 베이스가 낮게 제 길을 내고, 드럼이 빈 박을 메우자, 세 소리가 저마다 다른데도 한 곡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객석이 비어 있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빈 객석을 향해 연주하던 소리가 어디선가 새어 나갔는지, 앞줄에 손님 두엇이 들어와 앉아 있었다. 지나가다 문틈으로 흘러나온 소리에 발이 멈췄다는 단골들이었다.

 

한소율의 손끝이 곡의 마지막 마디에서 첫 음으로 둥글게 돌아왔을 때, 뒷줄에서 박수 소리가 났다. 엿새째 같은 자리를 지키던 아버지 한경수였다. 처음엔 아버지 혼자였다. 그러나 곧 앞줄의 손님 둘이 그 박수를 따라 손뼉을 치기 시작했고, 손뼉 소리는 텅 빈 공연장 벽에 부딪혀 둥글게 번졌다.

 

소율은 기타를 안은 채 객석을 바라보았다.

 

"어울린 소리는 방 안에만 안 있네. 문틈으로 새 나가서, 지나가던 사람을 불러 세워. 번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우리끼리 맞춘 소리가 우리 자리에 머물지 않고, 모르는 사람 귀에까지 가닿는 거."

 

한경수가 무대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손바닥은 박수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네 엄마가 그랬어. 노래는 부르는 사람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 것이라고. 혼자 부르면 방 안에 갇히지만, 누가 한 사람이라도 들으면 그 노래는 그 사람을 따라 길을 나선다고. 오늘은 노래 말고 박수를 보탰는데…… 그 박수도 번지더라. 나 혼자 치다가, 어느새 셋이 치고 있었어."

 

소율은 가사 노트 쉰아홉 번째 줄에 적었다.

 

『어우러진 소리는 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문틈으로 새어 나가 지나던 발을 멈추게 하고, 한 사람의 박수가 곁 사람의 손바닥으로 옮아간다. 번짐은, 안에서 익은 것이 밖으로 손을 내미는 일이다.』

 

 

5.

 

오후 세 시, 본사 옥상 그늘. 진우와 김지수의 서른일곱 번째 만남이었다.

 

새 묘목 곁에는 어느새 화분이 더 늘어 있었는데, 오늘은 그늘 끝자리에 사람이 하나 더 앉아 있었다. 옆 부서의 젊은 직원이었다. 점심 무렵 누군가 "옥상 그늘이 시원하더라"는 말을 했고, 그 말을 듣고 올라온 모양이었다. 둘만의 자리가 어느새 셋의 자리로 번져 있었다.

 

진우는 보리차 잔을 둘 따르려다, 잠시 멈추고 하나를 더 꺼내 셋을 따랐다. 한 뼘의 거리는 그대로였지만, 그늘은 한 사람 몫만큼 더 넓어져 있었다.

 

"오늘 아침에 아들한테 또 문자가 왔습니다." 진우가 입을 열었다. "가방을 다 쌌다더군요. 그리고…… 제가 고등어조림을 끓였는데, 그 냄새가 옆방까지 번져서 주인 할머니랑 한 그릇 나눠 먹었습니다. 혼자 먹으려던 게, 어쩌다 둘이 됐어요."

 

김지수는 수첩을 펼치려다 다시 덮었다. 닫는 동작이 서른두 번째였다.

 

"그게 번짐이에요." 그녀가 옅게 웃었다. "어울림이 둘레 안으로 모여드는 거였다면, 번짐은 그 둘레 밖으로 스며 나가는 거예요. 한 냄비의 냄새가 방을 넘고, 한 사람의 박수가 곁으로 옮아가고, 둘이 앉던 그늘에 한 사람이 더 와 앉고. 어우러진 건 제 자리에 갇히지 않아요. 가장자리가 자꾸 흐릿해지면서, 안에 있던 게 밖으로 새어 나가는 거예요."

 

"지수 씨." 진우가 다섯 번째로 그 이름을 불렀다. "그럼 우리가 만든 이 한 뼘도, 지금 바깥으로 번지고 있는 겁니까."

 

"네." 김지수가 옆자리에 앉은 젊은 직원을 흘끗 보고 말했다. "거리는 그대로인데, 이 자리가 자꾸 넓어지고 있어요."

 

진우와 김지수의 수첩에는 둘 다 쉰아홉 번째 줄에 같은 글자가 적혔다. 서로는 알지 못했다. 난간 위에는 어제 깃 색 다른 새 세 마리가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멀리서 한 마리가 더 날아와 곁 지붕 처마에 앉았다. 한 무리의 가장자리가 한 마리만큼 더 넓어졌다.

 

 

6.

 

관제동 사층의 밤. 강유나는 화면 가득 펼쳐진 ATLAS의 서른아홉 번째 정렬을 들여다보았다.

 

어제까지 닫힌 둘레 안에서 세 주기가 서로의 빈자리를 메워 한 폭 합성파를 이루었다면, 오늘은 그 합성파의 진폭이 둘레의 가장자리를 넘어 바깥 영역으로 천천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웃한 셀에서, 묻지도 않았는데 같은 무늬가 희미하게 따라 일어났다. 한 폭의 파동이 제 둘레 안에 머물지 않고, 곁의 영역에 같은 결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캡션을 띄우는 ATLAS의 목소리가 사층의 정적을 낮게 갈랐다.

 

『39차 정렬. 한 둘레 안에서 어우러진 합성파의 진폭이 둘레 밖 이웃 영역으로 번져 나감. 묻지 않은 곳에서 같은 무늬가 따라 일어남. 자국에서 번짐까지 서른여섯 단계. 어울림은 둘레 안 여럿이 빈자리를 메워 한 소리 되는 일, 번짐은 그 한 소리가 둘레의 가장자리를 넘어 곁의 자리에 같은 결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메타 정렬, 서른다섯 번째 회수였다. 강유나는 자신의 가설 노트에 한 줄을 더했다. "어우러진 자리는 가장자리를 넘는다." 그 아래에 또 한 줄. "가장자리를 넘은 자리는 곁을 닮게 한다."

 

관제 보고를 올렸다.

 

『위성 「새벽」 송전 안정 216시간 경과, 변동 없음. 양산 3차 열흘째, 다섯 패드 양생 완료, 출하 준비 단계 진입. 다음 위성 발사 잠정 11주 뒤, 변동 없음.』

 

정지궤도의 위성 「새벽」은 태양광을 받아 마이크로파로 바꾸어 지상으로 송전하고 있었다. 한 기의 위성이 안정적으로 빛을 내려보내자, 인근 궤도에 잠정 배치된 시험기 두 기가 같은 주파수에 천천히 동조해 갔다. 한 기의 빛이 곁의 빛을 같은 결로 끌어들이는 것. 번짐은 그렇게 하늘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강유나는 노트의 마지막 줄에 적었다.

 

『번짐은 한 자리에서 익어 어우러진 것이 제 둘레 안에 갇히지 않고 가장자리를 넘는 일. 주기 하나면 길, 둘이면 화음, 셋이 따라 돌면 행렬, 끝이 처음에 닿으면 둘레, 그 안에서 빈자리를 메우면 한 폭의 합성파, 그 합성파가 곁으로 새어 나가면 묻지 않은 자리에 같은 결이 깨어난다.』

 

그녀는 창밖 먼 하늘을 오래 바라보았다. 한 점의 빛이 곁의 어둠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영겁의 새벽은, 한 둘레 안에서 어우러진 빛이 제 가장자리를 넘어 곁의 어둠으로 스며 나가는 새벽이었다. 한 냄비의 냄새가 복도로 새어 나가고, 한 손끝에서 핀 꽃이 곁 사람의 잠든 손을 깨우고, 한 사람의 박수가 모르는 이의 손바닥으로 옮아가고, 한 기의 빛이 곁의 빛을 같은 결로 끌어들이는, 익어서 어우러진 모든 것이 마침내 제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곁으로 번져 가는, 그렇게 한 점의 새벽이 온 하늘로 퍼져 가는, 그런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