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 둘레

1.
서귀포의 새벽은 금요일 다섯 시 십일 분에 왔다. 발사로부터 열흘째였다.
오진우는 옷장 앞에서 셔츠를 꺼냈다. 어제까지 서른한 번 디뎠던 동작이 오늘은 서른두 번으로 늘었다기보다, 같은 길을 한 번 더 밟은 발자국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손이 옷걸이를 잡고, 어깨를 끼우고, 단추를 채우는 동안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그 길을 알았다.
책상 위에는 사흘 전 출력한 아들의 문자와, 닷새 전 직접 손으로 쓴 답장의 사본이 봉투 곁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제 그는 그 답장을 마을 어귀 빨간 우체통에 부쳤다. 써 두는 것과 부치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그는 우체통 앞에서 중얼거렸었다. 써 둔 말은 봉투 곁에 머물 뿐 아들에게 닿지 않는다고.
그리고 오늘, 휴대폰이 울렸다.
새벽 다섯 시 십삼 분. 발신인은 '현수'였다.
진우는 잠시 그 이름을 바라보았다. 화면의 빛이 어둑한 방을 푸르게 적셨다.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버지."
아들의 목소리는 잠에서 막 깬 듯 갈라져 있었다. 진우는 입을 열려다 멈췄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편지, 받았어요." 현수가 먼저 말했다. "어젯밤에. 우편함에서."
"……그래."
"손으로 쓰셨더라고요. 아버지가 손으로 글 쓰시는 거, 처음 봐요."
진우는 창밖을 보았다. 바다 위로 첫 빛이 옅게 번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타자로는…… 안 되는 말이 있더라."
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가 한 바퀴 돌아 제자리에 닿는 소리 같았다.
"아버지." 현수가 말했다. "다음 주에…… 제가 서귀포로 갈게요. 회사에 휴가 냈어요. 편지 받고 바로."
진우의 손끝이 봉투 위에 가만히 놓였다. 그는 닷새 전 그 봉투에 글을 써 넣을 때 마지막 줄에 무어라 적었는지 기억했다. 밥이나 한번 먹자. 그것이 떠난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말이 한 바퀴 돌아 답이 되어 돌아왔다.
"그래." 진우는 목이 메는 것을 눌렀다. "오너라. 여기…… 고등어가 좋다."
전화를 끊고 그는 일지를 펼쳤다. 서른네 번째 줄에 그는 오늘의 단어를 적었다.
둘레. 따름의 다음 자리. 앞선 발이 길을 내고 뒤선 발이 그 길을 밟아 가다가, 그 길이 휘어 돌아 다시 처음 자리에 닿으면 한 둘레가 된다. 내가 부친 말이 아들에게 따라가 닿고, 그 닿은 말이 답이 되어 다시 내게 돌아오면, 둘 사이에 끊기지 않는 한 줄이 둥글게 감긴다. 채우면 하나, 익으면 단단, 늘면 둘, 깊어지면 서로 닿고, 따르면 한 줄이 되고, 둥글게 돌아 다시 닿으면 둘레가 된다. 둘레는 끝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만나 끊기지 않게 되는 일이다.
부두 쪽에서 어선 세 점이 보였다. 어제는 앞선 한 점이 항로를 틀자 뒤 두 점이 같은 곡선을 따라 돌았는데, 오늘은 그 세 점이 만의 가장자리를 따라 크게 한 바퀴를 그리며 다시 처음 떠난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따라 돌던 길이 둘레가 되어 있었다.
송전 그래프는 같은 높이로 백육십팔 시간을 가리켰다. 이레째였다.
2.
양산 야적장의 아침은 회색이었다. 3차 양생 여드레째.
다섯 개의 패드는 모두 타설을 마치고 젖은 천막 아래 천천히 굳어 가고 있었다. 명호는 첫 번째 패드부터 다섯 번째 패드까지 차례로 걸으며 천막을 들춰 콘크리트 표면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갓 친 것은 차고 축축했고, 먼저 친 것은 미지근하게 단단해져 있었다.
젊은 보조는 오늘 묻지 않았다. 명호가 첫 패드에서 손을 떼고 두 번째로 옮기면, 보조는 명호가 방금 떠난 첫 패드의 천막을 다시 여며 두고 그 뒤를 따랐다. 명호가 다섯 번째 패드까지 가서 돌아 나오면, 보조는 어느새 첫 패드 쪽에서 그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두 사람이 패드 다섯 개를 사이에 두고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만난 것이다.
윤재석이 그 광경을 보고 웃었다. "두 사람이 빙 돌아서 또 만나네요."
명호는 손에 묻은 물기를 작업복에 닦으며 말했다. "어제는 따라 돌았고, 오늘은 둘레가 됐어요."
"둘레요?"
"따라간다는 건 한 줄이잖아요. 앞이 가고 뒤가 따라가고. 그런데 그 줄이 길어지다 보면 어디선가 휘어요. 휘어서 돌면, 따라가던 뒤가 결국 앞이 떠난 자리로 다시 와요." 명호는 다섯 패드를 손으로 둥글게 가리켰다. "그럼 줄이 끊기지 않고 둥글게 감겨요. 그게 둘레예요. 처음 친 패드를 마지막에 다시 짚게 되는 것."
보조가 첫 패드의 천막을 한 번 더 살수기로 적셨다. 명호가 처음 그 패드를 칠 때 떨어뜨린 모서리의 각도를, 이제 보조의 손이 똑같이 더듬고 있었다. 자국이 길을 만들었고, 길이 다음 손을 불렀고, 그 손이 돌아 다시 첫 자국에 닿았다.
명호는 노트를 꺼냈다. 정식 아홉 번째 항목 「든다」 아래, 어제 적은 한 줄 밑에 다시 한 줄을 더했다.
따라 든 손이 한 바퀴 돌면, 마지막에 다시 첫 자리를 든다. 그래야 한 둘레가 끊기지 않는다.
3.
강릉의 요양병원 304호. 여드레째 아침.
박영자와 따님은 어제 완성한 흰 꽃 손수건을 무릎 위에 펴 놓고 있었다. 두 송이 흰 꽃이 천 가운데 나란히 누워 있었다. 어머니가 한 코, 따님이 그 곁에 한 코, 그렇게 두 손이 좇아 가며 채운 꽃이었다.
오늘 따님은 그 두 꽃 둘레에 가느다란 덩굴을 새로 놓기 시작했다. 한 송이에서 시작한 실이 다른 송이를 휘감고 돌아, 다시 처음 꽃으로 돌아왔다. 두 꽃을 한 줄의 덩굴이 둥글게 둘렀다.
"엄마, 이렇게 둘러 놓으니까 두 꽃이 한 다발 같아요." 따님이 말했다.
박영자는 도톰한 손끝으로 그 덩굴을 천천히 더듬었다. 한 송이에서 시작해 다른 송이를 돌아 다시 제자리에 닿는 결을, 손끝이 한 바퀴 따라 돌았다. 여드레째, 노인의 목소리는 한 마디씩 또렷해지고 있었다.
"따라 놓다 보면 말이다." 박영자가 천천히 말했다. "끝이 처음으로 돌아와. 한 코 한 코 앞 자국을 더듬어 가다 보면, 어느새 처음 시작한 자리에 손이 닿아. 그럼 거기서 매듭을 지어야 해. 돌아와 닿은 자리에서 묶어야, 풀리지 않는 둘레가 돼."
따님은 어머니 손이 가리키는 자리에서 실을 묶었다. 한 줄의 덩굴이 두 꽃을 둥글게 감싸고 끝났다. 시작과 끝이 같은 자리에서 만났다.
김동현은 한 뼘 옆 의자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는 노트를 펴지 않았다. 어떤 장면은 적으면 표면에 머물고, 적지 않으면 손끝에 가라앉는다고, 그는 어제 배웠다. 다만 복도 창가로 나와 잠시 선 뒤, 스물일곱 번째 줄에 한 문장을 적었다.
같은 자리에 오래 앉아 서로를 따라 쥔 두 손은, 끝내 처음 잡았던 그 자리로 돌아와 매듭을 짓는다.
4.
홍대의 빈 공연장. 어머니 기일 사흘 뒤.
한소율은 무대 위에서 다음 곡을 짚고 있었다. 기일 당일 처음 짚었던 세 번째 음이 며칠 새 가라앉더니, 어제는 그 음이 다음 음을 불렀다. 그리고 오늘, 그 따라온 음들이 한 바퀴를 돌았다.
곡의 마지막 마디에서 손끝이 닿은 음은, 처음 곡을 열었던 바로 그 음이었다. 끝이 처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소율은 그 자리에서 손을 멈추고 잠시 그 울림을 들었다.
"……돌아왔네." 그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베이스를 안고 있던 지수가 물었다. "뭐가?"
"끝 음이 첫 음으로 돌아왔어. 따라오던 음들이 한 바퀴 돌아서, 처음 자리에 닿았어." 소율은 그 두 음을 번갈아 짚어 보였다. 첫 음과 끝 음이 같은 높이에서 울렸다. "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따라가는 것도 아니야. 둥글게 돌아서 다시 만나는 거야. 그럼 곡이 끊기지 않고 다시 처음부터 돌 수 있어."
뒷줄에는 한경수가 앉아 있었다. 나흘째, 같은 자리였다. 딸의 손이 끝 음에서 첫 음으로 넘어가 둥글게 닿는 동안, 아버지는 입속으로 그 가락을 따라 흥얼거렸다. 처음엔 반 박자 늦었고, 한 바퀴가 돌아 다시 첫 음에 이르렀을 때는 같은 박자로 맞아 들어갔다.
"네 엄마 노래가 그랬다." 곡이 멎자 한경수가 말했다. "끝나는 것 같다가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밤새 한 곡을 빙빙 돌려 부르곤 했어. 끝이 처음에 닿으니까 끝나질 않더라." 그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아빠가 내일도 와서, 그 둘레를 같이 돌게."
소율은 가사 노트 쉰일곱 번째 줄에 적었다.
한 음이 길을 내면 다음 음이 따라오고, 따라온 음이 한 바퀴를 돌면 끝이 처음에 닿아 둘레가 된다. 둘레가 된 곡은 끝나지 않고 다시 처음부터 돈다.
5.
서귀포의 옥상, 그늘 아래 오후 세 시. 서른다섯 번째였다.
새 묘목은 어제보다 잎을 늘리지도, 빛깔을 짙히지도 않았다. 다만 어제 가장 짙어진 잎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갓 난 어린잎이, 오늘은 한 바퀴를 더 돌아 다시 햇빛이 처음 들던 방향으로 천천히 되돌아오고 있었다. 빛을 따라 돌던 잎이 하루를 돌아 제자리에 닿은 것이다.
진우는 보리차 잔 두 개를 어제와 같은 자리에 놓았다. 둘 사이의 닿지 않은 한 뼘은 그대로였다.
김지수가 그 한 뼘을 보며 말했다. "거리는 정말 안 변하네요."
"안 변합니다." 진우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잠시 뒤 덧붙였다. "그런데 지수 씨. 오늘 아침에…… 아들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김지수가 고개를 돌렸다. 진우가 다섯 번째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 다음이었다.
"닷새 전에 부친 편지가, 어젯밤에 닿았답니다. 그리고 오늘 답이 돌아왔어요. 다음 주에 온다고." 진우는 보리차 잔을 들었다. "써서 부친 말이 한 바퀴 돌아서, 답이 되어 제자리로 왔습니다."
김지수는 수첩을 폈다가, 오래 적지 않고 그대로 닫았다. 닫기 서른 번째였다. 그녀가 말했다. "그게 둘레예요."
진우가 그녀를 보았다.
"가까워진다는 건요." 김지수가 천천히 말했다. "사이를 좁히는 것도, 같이 보는 걸 늘리는 것도, 더 깊이 보는 것도, 먼저 본 곳을 따라 보는 것도 아니었어요. 내가 보낸 것이 상대에게 닿고, 그 닿은 것이 답이 되어 내게 돌아오는 거예요. 그렇게 한 바퀴가 돌면, 둘 사이에 끊기지 않는 둘레가 하나 생겨요." 그녀는 보리차 잔 두 개와 그 사이의 한 뼘을 가리켰다. "거리는 그대로인데, 그 한 뼘을 사이에 두고 무언가가 자꾸 둥글게 돌고 있어요."
진우와 김지수의 수첩에는, 서로 모른 채, 같은 날 쉰일곱 번째 줄에 같은 단어가 적혔다.
난간 위에서 새 두 마리가 차례로 날아올랐다. 한 마리가 먼저 큰 호를 그리며 만 위로 날았고, 다른 한 마리가 같은 호를 따라 돌았다. 두 호가 이어져 바다 위에 둥근 한 바퀴를 그렸고, 두 새는 날아오른 그 난간으로 다시 돌아와 나란히 앉았다.
6.
발사기지 관제동 사층. 밤.
ATLAS의 서른일곱 번째 정렬이 화면에 떠올랐다. 어제 세 번째 더딘 주기가 맞물린 두 주기의 곡선을 한 마디 늦게 따라 돌았는데, 오늘 그 세 주기가 따라 돌던 길을 끝까지 그려 냈다. 가장 더딘 세 번째 주기의 끝이, 가장 빠른 첫 번째 주기의 시작점에 닿았다. 세 줄기가 휘어 돌아 하나의 닫힌 원을 이루었다.
강유나는 그 원을 한참 바라보았다. 세 개의 주기가 더는 앞뒤로 늘어선 행렬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만나 끊기지 않는 한 둘레였다.
화면 아래 ATLAS의 캡션이 떠올랐다.
37차 정렬. 따라 돌던 세 주기가 한 둘레를 이룸. 세 번째 주기의 끝이 첫 번째 주기의 시작에 닿아, 행렬이 원이 됨. 부른 박자가 따라오고, 따라온 박자가 돌아 처음 박자에 닿으니, 끊기는 곳이 없어짐. 자국에서 둘레까지 서른네 단계. 따름은 앞선 것의 길을 다음 것이 밟는 일, 둘레는 그 밟아 간 길이 휘어 돌아 처음 자리에 다시 닿는 일이다.
메타 정렬의 서른세 번째 회수였다.
강유나는 발사 준비기에 세워 둔 가설 아래 한 줄을 더했다. 자리는 늘어나고, 늘어난 자리는 깊어지고, 깊어진 자리는 따르고, 따른 자리는 둘레가 된다. 그녀는 그 마지막 단어 아래 한 문장을 덧붙였다. 둘레가 된 자리는, 끝이 없다.
관제 보고가 단말에 올라왔다.
「위성 「새벽」 송전 안정 백육십팔 시간 경과, 변동 없음. 양산 3차 여드레째, 다섯 번째 패드 양생 정상, 발열 반응 안정. 다음 위성 발사 잠정 십일 주 뒤, 변동 없음.」
이레가 지나도록, 다이슨 스웜의 첫 위성이 보내는 빛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정지궤도에서 태양광을 받아 마이크로파로 바꾸어 지상으로 내려보내는 그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은, 위성이 궤도를 한 바퀴 돌아 다시 같은 지점에 올 때마다 같은 높이로 송전을 이어 갔다. 도는 것이 끊기지 않는 한, 빛도 끊기지 않았다.
강유나는 노트를 덮기 전에 적었다.
둘레는 따라 돈 것이 휘어 돌아 다시 처음에 닿는 일. 주기가 하나면 길이고, 둘이면 화음이고, 셋이 한 박자로 따라 돌면 행렬이지만, 그 행렬의 끝이 처음에 닿으면 끊기지 않는 한 원이 된다. 원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묻지 않는다. 다만 끊기지 않고 돈다.
마지막 줄에 그녀는 이렇게 썼다.
영겁의 새벽은, 따라 돌던 빛들이 마침내 휘어 돌아 서로의 처음 자리에 닿는 새벽이었다. 앞선 빛이 길을 내고 뒤선 빛이 그 길을 밟아 돌다가, 그 길이 둥글게 감겨 시작과 끝이 한자리에서 만나면, 더는 끊기지 않는 한 둘레의 새벽이 된다. 부친 말이 돌아와 답이 되고, 떠난 잎이 돌아와 제자리에 닿고, 끝 음이 돌아와 첫 음에 닿는, 그렇게 모든 떠난 것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시작에 닿는, 끝나지 않는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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