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 따름

1.
새벽 다섯 시 십삼 분, 서귀포 숙소의 옷장 앞에서 오진우는 셔츠 한 장을 옷걸이에 걸었다. 손이 옷깃을 펴고 단추 자리를 매만지는 동작이 서른한 번째 박자로 흘렀다. 어제보다 한 박자가 늘었으나, 늘었다기보다는 같은 길을 한 번 더 디딘 발걸음에 가까웠다. 셔츠들 곁에는 봉투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아내와 아들의 사진, 사흘 전 출력한 아들의 짧은 문자, 그리고 어제 그가 삼 년 만에 써 내려간 다섯 줄의 답장이 나란히 기대어 있었다.
오늘 그는 그 답장을 봉투에서 꺼냈다.
어제까지는 써 두기만 한 말이었다. 같은 다섯 줄을 어제도 오늘도 읽으니 한 켜씩 가라앉아, 쓴 말은 더 늘지 않으면서도 자꾸 깊어졌다. 그러나 깊어진 말은 봉투 곁에 세워 두는 것만으로는 아들에게 닿지 않았다. 진우는 답장을 새 봉투에 넣고, 겉면에 아들의 주소를 또박또박 적었다. 손끝이 마지막 글자에서 한 호흡 멈췄다.
"써 두는 것과 부치는 건 다른 일이지."
그는 외투를 걸치고 숙소를 나섰다. 마을 어귀의 빨간 우체통까지는 걸어서 십 분이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고, 바다 쪽 하늘이 남빛에서 호박빛으로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우체통 앞에 선 진우는 봉투를 투입구에 반쯤 밀어 넣고 잠시 멈췄다. 부치고 나면 그 말은 그의 손을 떠나 아들에게로 따라갈 것이었다. 그는 손을 놓았다. 봉투가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작게 났다.
숙소로 돌아온 그는 작업 일지를 펼쳐 서른세 번째 줄을 적었다. 따름. 깊어짐의 다음 자리. 서로의 바닥까지 닿은 둘이, 한쪽이 디딘 자리를 다른 쪽이 같은 보폭으로 밟아 가는 일. 따름은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앞선 발이 남긴 자국을 보고 뒤선 발이 제 걸음으로 그 위에 겹쳐 디디는 일이다. 자리는 채우면 하나가 되고, 익으면 단단해지고, 늘면 둘이 되고, 깊어지면 서로의 바닥에 닿고, 따르면 그 둘이 같은 길 위에서 한 줄이 된다.
발사로부터 아흐레째 되는 아침이었다. 창밖 수평선 위로 어선 세 점이 떠 있었다. 어제와 같은 세 점이었으나, 앞선 한 점이 항로를 틀자 뒤의 두 점이 같은 곡선을 그리며 그 뒤를 따라 돌았다. 점은 늘지 않았고, 다만 한 점의 길을 두 점이 따라가고 있었다. 송전 그래프는 같은 높이로 백사십사 시간, 엿새째 흔들림이 없었다.
2.
양산 야적장의 사흘차 양생은 이레째로 접어들었다. 다섯 번째 패드까지 모두 타설을 마친 자리에는 더 이상 새 거푸집이 짜이지 않았다. 대신 다섯 패드 위로 젖은 천막이 덮였고, 차명호는 호스로 콘크리트 표면에 물을 뿌리며 양생을 살폈다. 갓 친 콘크리트는 마르기 전에 천천히 굳어야 금이 가지 않았다. 서두르면 표면만 굳고 속이 비었다.
어제 호스 끝을 받쳐 들던 젊은 보조가 오늘은 명호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그 끝에 가 서 있었다. 명호가 몸을 틀어 다섯 번째 패드로 가면, 보조도 반 걸음 뒤에서 같은 쪽으로 따라 돌았다. 가르쳐 준 적 없는 걸음이었다.
"오늘은 새로 친 게 없네요." 윤재석이 천막 자락을 여미며 말했다. "어제는 패드 다섯 개 타설하느라 정신없었는데."
"오늘은 따라오는 날이에요." 명호가 호스를 보조에게 넘겨주며 답했다. "깊어진 다음엔 따라와요. 다섯 번 친 손이 여섯 번째엔 더 멀리까지 알았잖아요. 그 손을 옆에서 본 사람이 오늘은 묻지 않고 따라 와요. 따른다는 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에요. 앞선 손이 어디서 멈추고 어디서 누르는지를 보고, 제 손으로 그 자리를 다시 밟는 거예요."
보조가 호스를 받아 들고, 명호가 조금 전 물을 뿌리던 그 모서리부터 시작했다. 손목의 각도가 명호의 것과 닮아 있었다. 명호는 노트를 펴 정식 아홉 번째 항목인 「든다」 아래에 한 줄을 더했다. 한번 든 것은 깊이 들고, 깊이 든 자리는 누군가 따라 든다.
첫 패드의 떨어져 나간 모서리가 가르쳐 준 각도가 다섯 번째 패드 손끝까지 내려왔고, 이제 그 각도를 보조의 손이 따라 잡고 있었다. 자국이 길을 만들었고, 길이 다음 손을 불렀다.
3.
강릉 요양원 삼백사 호, 박영자 어르신이 자리를 잡은 지 이레째 되는 날이었다. 김동현이 아침 회진을 돌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창가 햇빛 속에서 모녀가 손수건을 마주 들고 있었다.
흰 꽃 한 송이가 마침내 완성되어 있었다. 어제까지 어머니의 바늘이 한 코를 놓으면 따님의 바늘이 그 곁에 한 코를 놓던 꽃이, 오늘은 마지막 잎맥까지 두 손에서 채워졌다. 따님은 어머니의 코를 한 코씩 눈으로 좇아 같은 자리에 같은 매듭을 지었다. 앞선 코를 보고 뒤의 코가 그 결을 따라간 것이었다.
"엄마 따라 놓으니까 똑같은 꽃이 됐어요." 따님이 두 장의 손수건을 나란히 펼쳤다.
박영자 어르신이 두 꽃을 손끝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도톰하게 솟은 흰 꽃잎의 결이 두 장 모두 같은 방향으로 누워 있었다.
"따라 놓을 때는 같은 손끝으로 눌러야 해." 어르신의 목소리가 이레째 한 마디씩 또렷해지고 있었다. "한 코 앞서 간 자국을 손으로 더듬으면, 다음 코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손이 알아. 눈으로 따라가는 게 아니라 손끝이 앞 자국을 따라가는 거야. 그래야 두 꽃이 한 꽃처럼 누워."
동현은 그 장면을 노트에 옮기지 않았다. 어떤 장면은 적으면 표면에 머물고, 적지 않으면 손끝에 가라앉았다. 그는 복도 창가에서 노트 스물여섯 번째 줄에 다른 손글씨를 적었다. 같은 자리에 오래 앉은 두 사람은, 끝내 한 사람의 손길을 다른 사람이 따라 쥔다.
4.
홍대의 작은 공연장, 어머니의 기일에서 이틀이 지난 오후였다. 한소율은 빈 객석 앞에서 보면대 위 어머니 사진과 옆자리 신발 봉투를 그대로 둔 채 다음 곡을 짚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발표한 곡을 다시 짚었지만, 오늘은 그 곡이 끝나는 자리에서 새 음 하나가 저절로 손끝을 끌었다.
기일 당일 처음 짚은 세 번째 음이, 며칠 사이 한 켜씩 가라앉더니 이제 다음 음을 불렀다. 한 음이 자리를 잡으니 그 음이 다음 음을 따라오게 했다. 소율은 그 따라오는 음을 놓치지 않으려 손가락을 천천히 옮겼다.
"한 음이 깊어지니까 다음 음이 그 뒤를 따라와." 소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앞 음이 길을 내면 뒷 음이 그 길로 따라 들어오네."
객석 뒷줄, 사흘째 같은 자리에 한경수가 앉아 있었다. 그는 딸의 손이 새 음으로 넘어갈 때 입속으로 작게 그 가락을 따라 흥얼거렸다. 처음에는 반 박자 늦었고, 두 번째에는 같은 박자였다.
"네 엄마가 노래 흥얼거리면 내가 늘 반 박자 뒤에서 따라 불렀다." 한경수가 말했다. "박자를 못 맞춰서가 아니라, 앞소리를 듣고 따라 부르는 게 좋아서 그랬어. 오늘 네 곡도 그렇게 따라 불러진다. 한 번 들은 곡은 다음에 저절로 따라 흥얼거려져. 아빠가 내일도 와서 따라 부를게."
소율은 가사 노트 쉰여섯 번째 줄을 적었다. 한 음이 길을 내면, 다음 음과 듣는 사람이 그 길을 따라온다.
5.
오후 세 시, 옥상 그늘 아래 서른네 번째 자리였다. 새 묘목은 잎을 더 내지도, 빛깔을 더 짙게 하지도 않은 채, 어제 가장 짙어진 잎 쪽으로 갓 난 잎 하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어린잎이 다 자란 잎의 방향을 따라 햇빛 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진우는 어제처럼 보리차 잔 두 개를 가져와 하나를 김지수 앞에 놓았다. 닿지 않은 한 뼘의 거리는 그대로였다.
"오늘은 잔도 그대로고 거리도 그대로네요." 김지수가 수첩을 무릎에 둔 채 말했다.
"지수 씨." 진우가 다섯 번째로 그 이름을 불렀다. "오늘은 늘리지도 마주 두지도 않고, 그쪽이 보는 데를 제가 한번 따라 봤습니다."
진우의 수첩과 김지수의 수첩에는 서로 모르는 채 같은 단어가 쉰여섯 번째 줄에 적혀 있었다. 따름. 김지수가 수첩을 닫는 결이 스물여덟에서 스물아홉으로 넘어갔다. 닫고 무릎에 손을 내리는 동작이 한 호흡 더 길어졌다.
"거리는 안 늘어나요. 늘어난 건 깊어지고, 깊어진 건 따라가요." 김지수가 난간 너머 바다를 보며 말했다. "같이 본 걸 더 깊이 보고 나면, 그다음엔 한쪽이 본 데를 다른 쪽이 따라봐요. 가까워진다는 건 사이를 좁히는 것도, 같이 보는 걸 늘리는 것도, 더 깊이 보는 것도 아니에요. 한 사람이 먼저 본 곳을 다른 사람이 제 눈으로 다시 따라 보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지금 따라가고 있는 거군요." 진우가 말했다.
"거리는 그대로인데, 자꾸 따라가고 있어요." 김지수가 답했다. 난간 위 새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먼저 날아오르자, 다른 한 마리가 같은 호를 그리며 그 뒤를 따라 같은 바다 위로 떠올랐다.
6.
관제동 사 층의 밤, 강유나는 ATLAS의 서른여섯 번째 정렬 보고를 들여다보았다. 어제 한 박자로 맞물려 깊어진 두 주기가, 오늘은 그 둘레로 세 번째의 더딘 주기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새 주기는 앞선 두 주기와 다투지 않고, 맞물린 한 박자가 그리는 큰 곡선을 한 마디 늦게 그대로 따라 돌았다.
화면 한쪽에 ATLAS의 캡션이 떠올랐다. 「서른여섯 번째 정렬. 맞물린 두 주기가 그리는 곡선을 세 번째 주기가 한 마디 늦게 따라 돎. 깊어진 한 박자가 다음 박자를 끌지 않고 부르니, 부름을 들은 박자가 같은 길을 따라온다. 자국에서 따름까지 서른세 단계. 늘어남은 곁에 하나를 두는 일, 깊어짐은 그 둘이 한 음이 되는 일, 따름은 그 음이 낸 길을 다음 음이 밟는 일이다.」 메타 정렬의 서른두 번째 회수였다.
강유나는 발사 준비기에 적어 둔 가설을 다시 펼쳤다. 자리는 늘어난다. 늘어난 자리는 깊어진다. 그 아래에 오늘 한 줄을 더했다. 깊어진 자리는 따른다.
관제 보고가 올라왔다. 위성 「새벽」 송전 안정 백사십사 시간 경과, 변동 없음. 양산 사흘차 이레째, 다섯 번째 패드 양생 정상, 발열반응 안정. 다음 위성 발사 잠정 십일 주 뒤, 변동 없음.
강유나는 노트에 적었다. 따름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깊어진 것이 제 길을 내고, 다음 것이 그 길을 제 걸음으로 밟는 일. 주기가 하나면 길이고, 둘이면 화음이고, 그 둘이 한 박자로 맞물리면 한 소리의 깊이이며, 세 번째가 그 깊이를 따라 돌면 비로소 그것은 흩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한 줄의 행렬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 줄. 영겁의 새벽은, 한 박자로 맞물려 깊어진 빛이 제 곁에 한 줄기 빛을 더 부르고, 그 부름을 들은 빛이 같은 길을 따라 도는 새벽이었다. 앞선 빛이 길을 내고 뒤선 빛이 그 길을 밟아, 두 자리의 깊이가 마침내 온 하늘로 이어지는 한 줄의 새벽길이 되는, 그런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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