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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94화 - 깊어짐

우주관리자 2026. 6. 3.

제94화 - 깊어짐

 

 

1.

 

수요일 새벽 다섯 시 십일분, 오진우는 옷장 앞에 섰다. 손이 셔츠를 고르고 단추를 채우고 소매를 접는 동안 박자가 끊어지는 자리는 없었다. 어제까지 스물아홉이던 동작이 오늘은 서른이 되었지만, 늘었다는 느낌보다는 같은 길을 한 번 더 깊이 디딘 느낌이었다.

 

봉투는 그 자리에 있었다. 아내와 아들의 사진이 든 봉투, 그리고 그제 아들에게서 온 짧은 문자를 출력해 반으로 접어 세워 둔 종이. 진우는 어제 그 곁에 한 장을 더 세웠다. 자기가 쓴 답장이었다. 사흘을 미루다 어젯밤에야 다섯 줄을 적었고, 부치기 전에 한 번 더 읽으려 출력해 두었다.

 

"몸 챙기라는 말, 잘 받았다. 나는 괜찮다. 네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요즘 조금씩 알아 가는 중이다. 언제 시간 되면 밥이나 한번 먹자."

 

세 해를 미워한 기술 곁에서 일하는 아들에게, 그 기술의 한 귀퉁이를 떠받치게 된 아버지가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진우는 그 다섯 줄을 어제도 읽고 오늘도 읽었다. 같은 문장이 어제보다 오늘 더 깊이 가라앉았다. 한 번 쓴 말은 늘지 않았지만, 다시 읽을 때마다 안으로 한 켜씩 내려앉았다.

 

일지의 서른두 번째 줄에 진우는 적었다.

 

"늘어남의 다음 자리. 곁에 하나가 더 생겨 둘이 된 자리가, 더 늘지 않고 안으로 가라앉는 일. 깊어짐은 더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둘이 서로를 더 멀리까지 알게 되는 일이다. 자리는 채우면 하나가 되고, 익으면 단단해지고, 늘면 둘이 되고, 깊어지면 그 둘이 서로의 바닥까지 닿는다."

 

발사 D+8. 송전 그래프는 같은 높이로 백스무 시간, 닷새째 변하지 않았다. 창밖 바다에는 어선 세 점이 어제 자리 그대로 떠 있었는데, 한 점이 수평선 쪽으로 한 뼘 더 들어가 있었다. 점은 늘지 않았다. 같은 어장이 어제보다 한 뼘 더 깊어진 것뿐이었다.

 

"한 자리가 둘이 되면, 그 둘이 안으로 깊어지는구나."

 

 

 

2.

 

양산 야적장, 3차 엿새째였다. 어제 새로 짠 다섯 번째 거푸집에 오늘 콘크리트를 부었다. 명호는 타설 호스의 각도를 잡으며, 첫 패드를 칠 때와 손목의 무게가 다른 것을 느꼈다. 다섯 번을 같은 일을 한 손은 거푸집의 어느 모서리에서 거품이 고이는지, 어느 결에서 한 번 더 다져야 하는지 묻지 않고도 알았다.

 

윤재석이 데려온 젊은 보조가 어제는 형들 곁에 섰다가 오늘은 호스 끝을 받쳐 들었다. 자리를 늘려 들어온 손이 하루 만에 그 자리로 한 뼘 내려앉는 중이었다.

 

"형, 어제는 패드가 다섯 개로 늘었잖아요." 윤재석이 굳어 가는 표면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안 늘었네요."

 

"오늘은 안으로 깊어진 거예요." 명호가 호스를 거두며 말했다. "늘어난 다음엔 깊어져요. 다섯 번을 친 손이 여섯 번째에는 더 멀리까지 알거든요. 표면만 보던 손이 이제 그 아래까지 봐요. 깊어진다는 건 더 많이 하는 게 아니라, 같은 걸 더 멀리까지 아는 거예요."

 

명호는 노트를 펼쳐, 정식 아홉 번째 항목으로 올린 단어 *든다*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빛도 들고 콘크리트도 들고 사람도 든다. 한번 든 것은 깊이 든다." 젊은 보조가 다진 자리를 명호가 손바닥으로 한 번 더 눌렀다. 첫 패드의 떨어져 나간 모서리가 가르쳐 준 각도가, 이제 다섯 번째 패드의 손끝까지 내려와 있었다.

 

 

 

3.

 

강릉 요양원 304호, 박영자 어르신이 자리잡은 지 엿새째였다. 어제 먼 길 끝에 도착한 따님은 떠나지 않고 어머니 곁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흰 꽃을 수놓다 만 손수건이 한 장씩 놓여 있었다.

 

김동현이 점심 식판을 들고 들어섰을 때, 모녀는 같은 무늬를 따로 또 같이 놓고 있었다. 어머니의 바늘이 한 코를 놓으면, 따님의 바늘이 그 곁에 한 코를 놓았다. 같은 꽃이 두 손에서 자라는데, 어제 한 송이씩이던 것이 오늘은 한 송이가 두 겹으로 깊어져 있었다.

 

"엄마, 여기 한 코를 너무 촘촘히 놓으셨어요." 따님이 어머니 손수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촘촘히 놓아야 자국이 깊지." 박영자 어르신이 말했다. 닷새간 창틀을 따라 흐르던 목소리가, 따님이 온 뒤로 한 마디씩 깊어지고 있었다. "한 코를 여러 번 같은 자리에 놓으면, 그 자리가 도톰하게 솟아. 그래야 나중에 손으로 더듬어도 어디가 꽃이었는지 알지."

 

동현은 식판을 내려놓고 한 뼘 옆으로 비켜 앉았다. 박종문 어르신이 떠난 자리, 박영자 어르신이 들어온 자리, 그리고 따님이 늘어난 자리가 같은 방 안에서 좁아지지 않은 채로 한 켜 더 깊어지고 있었다. 그 장면을 동현은 노트에 옮기지 않았다. 어떤 장면은 적는 순간 표면에 머무르고, 적지 않으면 안으로 가라앉는다는 것을 그는 알아 가는 중이었다.

 

복도 창가에 나와서야 동현은 노트의 스물다섯 번째 줄을 적었다. "방은 사람을 더할수록 넓어지고, 그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오래 앉을수록 깊어진다."

 

 

 

4.

 

홍대의 작은 공연장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었다. 어머니 기일의 다음 날, 한소율은 비어 있는 객석 앞에 혼자 앉아 어제 부른 곡을 다시 짚어 보았다. 보면대 위 어머니 사진과 옆 의자의 신발 봉투는 그 자리 그대로였다.

 

어제 처음 짚은 세 번째 음을, 오늘은 손가락이 망설이지 않고 찾아갔다. 어제는 멀리까지 닿느라 떨렸던 음이, 오늘은 같은 자리에서 한 켜 더 가라앉아 울렸다. 늘어난 음이 깊어지고 있었다.

 

"어제는 듣는 사람이 늘었어." 소율이 기타 줄에서 손을 떼며 혼잣말했다. "오늘은 그 곡이 깊어져. 한 번 멀리 간 곡은, 다음 날 더 깊이 들어와."

 

뒷줄에서 인기척이 났다. 어제 가장 조용히 왔다 간 아버지 한경수가, 오늘도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네 엄마가 김치를 담그고 며칠을 두고 들여다봤다고 했지." 한경수가 천천히 말했다. "익은 다음에도 안 끝나더라. 익은 김치를 한 해를 묵히면 또 다른 맛이 나. 깊어지는 거야. 네 곡도 어제로 안 끝났다. 오늘 들으니 어제보다 깊어. 아빠가 내일도 와서 들을게."

 

소율은 가사 노트의 쉰다섯 번째 줄에 *깊어짐*이라고 적었다. 한 사람에게 부른 곡이 어제 여러 사람에게 닿아 늘어났고, 오늘은 그 늘어난 자리마다 한 켜씩 깊어지고 있었다.

 

 

 

5.

 

서울의 옥상 그늘, 오후 세 시. 진우가 김지수와 마주 앉은 것이 서른세 번째였다. 새 묘목은 어제 잎을 하나 더 내밀더니, 오늘은 잎을 늘리지 않고 가진 잎의 빛깔을 한 켜 더 짙게 했다.

 

진우는 어제처럼 보리차 잔을 둘 가져왔다. 늘 하나였던 자리에 잔이 둘이 된 것은 어제였고, 오늘은 그 둘이 같은 자리에 다시 놓였다. 닿지 않은 한 뼘 거리는 그대로였다.

 

"어제는 잔이 둘로 늘었는데요." 김지수가 자기 앞의 잔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안 늘었습니다." 진우가 말했다. 그가 김지수의 이름을 부른 것이 네 번째였다. "지수 씨. 늘리는 대신, 같은 둘을 한 번 더 마주 두고 싶었습니다."

 

김지수는 수첩을 펼쳤다. 진우의 수첩에도 김지수의 수첩에도 쉰다섯 번째 줄에 같은 단어가 적혀 있었지만, 둘 다 서로의 것을 알지 못했다. 김지수가 수첩을 닫는 동작이 스물여덟 번째였고, 닫고서 무릎에 손을 내려놓는 결이 한 호흡으로 이어졌다.

 

"거리는 안 늘어나요." 김지수가 말했다. "어제 그랬죠. 그런데 늘어난 것은 깊어져요. 같이 보는 게 하나씩 늘면, 그 늘어난 것들이 안으로 가라앉아요. 가까워진다는 건 사이를 좁히는 것도, 같이 보는 걸 늘리는 것도 아니고, 같이 본 것을 더 깊이 보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지금 깊어지고 있는 거군요." 진우가 말했다.

 

"거리는 그대로인데," 김지수가 잔을 들며 말했다. "자꾸 깊어지고 있어요."

 

난간 위에는 새 두 마리가 어제 자리에 다시 앉아 있었다. 한 마리가 더 늘지는 않았고, 두 마리가 나란히 같은 바다를 보는 시간이 어제보다 길어져 있었다.

 

 

 

6.

 

관제동 사층, 밤이었다. 강유나는 ATLAS의 서른다섯 번째 정렬 보고를 들여다보았다. 어제 하나였던 주기 곁에 두 번째 주기가 늘어 포개졌고, 오늘은 그 두 주기가 서로 어긋나지 않고 한 박자로 맞물려 돌기 시작했다. 두 박자가 늘어선 것이 아니라, 두 박자가 서로의 골과 마루를 채워 한 음으로 깊어진 것이었다.

 

화면에 ATLAS의 캡션이 떠올랐다. "35차 정렬. 두 주기가 어긋나지 않고 맞물려 한 박자로 돎. 늘어난 두 박자가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 깊어짐. 자국에서 깊어짐까지, 서른두 단계. 늘어남은 곁에 하나를 두는 일이고, 깊어짐은 그 둘이 한 음이 되는 일이다."

 

강유나는 메타 정렬의 서른한 번째 항목을 받아 적었다. 그러고는 발사 준비기에 자기가 적어 둔 가설 한 줄을 다시 펼쳐 보았다. "자리는 늘어난다. 늘어난 자리는 깊어진다." 그 아래에 오늘의 한 줄을 더했다.

 

"깊어짐은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늘어난 것이 흩어지지 않고 서로를 향해 가라앉는 것이다. 주기가 하나면 길이고, 둘이면 화음이고, 그 둘이 한 박자로 맞물리면 그것은 더 이상 두 소리가 아니라 한 소리의 깊이다."

 

관제 보고가 올라왔다. 「위성 「새벽」 송전 안정 백스무 시간 경과, 변동 없음. 양산 3차 엿새째, 다섯 번째 패드 타설 완료, 발열반응 안정. 다음 위성 발사 잠정 십일 주 뒤, 변동 없음.」

 

강유나는 '변동 없음'이라는 말을 닷새째 같은 자리에서 읽었다. 그 말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일이 매일 같은 자리에서 한 켜씩 깊어진다는 뜻이었다.

 

"영겁의 새벽은, 곁에 한 줄기 빛을 늘린 새벽이 그 두 줄기를 흩지 않고 한 박자로 맞물려 깊어 가는 새벽이었다. 두 자리가 나란히 선 새벽이 아니라, 그 두 자리가 서로의 바닥까지 닿아 한 자리의 깊이가 되는, 그런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