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 늘어남

1.
서귀포 숙소의 새벽은 화요일 다섯 시 구 분에 왔다.
오진우는 옷장 문을 열었다. 손이 셔츠의 어깨선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는 동작은 오늘로 스물아홉 번째 아침이었다. 끊어지는 자리가 없었다. 손은 이미 멈출 데를 알고 있었고, 아는 손은 서두르지 않았다.
셔츠들 곁에는 봉투가 있었다. 아내와 아들의 사진이 든, 며칠 전 처음 이 자리로 옮겨 둔 봉투였다. 그것은 오늘도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다만 한 가지가 달랐다. 봉투 곁에 작은 것이 하나 늘어 있었다.
어젯밤 늦게, 아들에게서 짧은 문자가 왔다. 삼 년 만이었다. 진우는 그것을 휴대폰 화면으로 몇 번이나 다시 읽다가, 끝내 한 장으로 출력해 반으로 접었다. 글자는 길지 않았다. ―기사 봤습니다. 아버지가 그 발전 프로젝트에 계신 거. 몸 챙기세요.
아들은 멀리서, 진우가 한평생 미워해 온 바로 그 기술의 곁에서 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일로 갈라섰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가 이제 그 기술의 한 귀퉁이를 떠받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짧은 한 줄을 보내 온 것이다.
진우는 접은 종이를 봉투 곁에 세워 두었다. 한 자리였던 것이 두 자리가 되었다. 그는 한참을 그 둘을 바라보았다.
일지를 펼쳐 서른한 번째 줄에 적었다.
늘어남. ―익음의 다음 자리. 같은 결이 익은 자리에, 같은 결의 것이 하나 더 들어와 자리가 둘이 되는 일. 늘어남은 새것이 끼어드는 일이 아니라, 익은 자리가 제 곁을 한 뼘 내어 같은 결을 나누는 일이다. 자리는 채우면 하나가 되고, 익으면 깊어지고, 늘면 둘이 된다.
창밖, 발사 이레째의 바다 위로 어선이 떠 있었다. 어제까지 두 점이던 것이 오늘은 세 점이었다. 한 점이 늘어도 어장은 같은 어장이었다.
탁자 위 단말의 송전 그래프는 같은 높이로 누워 있었다. 변동 없음, 아흔여섯 시간 경과. 나흘이었다. 진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 자리가 익으면, 곁에 한 자리가 더 생기는구나."
2.
양산 야적장, 삼차 닷새째 아침.
차명호는 줄지어 굳은 패드 넷 앞에 섰다. 자국, 겹, 굳음, 결. 차례로 부어 차례로 익은 네 장의 콘크리트 받침이 같은 햇빛을 같은 각도로 받고 있었다. 그 옆에 다섯 번째 패드의 거푸집이 새로 짜여 있었다. 형들 곁에 동생 하나가 자리를 늘려 앉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사람도 하나 늘었다. 윤재석이 데려온 젊은 보조였다. 명호는 노트를 펼쳐, 어제 정식 아홉 번째 항목으로 올린 단어를 처음으로 받아쓰기 시작했다.
"든다, 가 이제 정식 단어니까." 명호가 말했다. "빛도 들고, 콘크리트도 들고, 사람도 들어요. 오늘 한 사람이 더 들었네요."
윤재석이 거푸집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쓸며 물었다. "자리가 늘면, 일이 더 헐거워지는 거 아니에요? 손이 하나 더 끼면 박자가 흐트러질 텐데."
"익은 자리에 드는 손은 안 흐트러져요." 명호가 다섯 번째 거푸집의 수평을 눈으로 재며 답했다. "자리가 먼저 익어 있으면, 새 손은 그 익은 결을 따라 들어와요. 자리가 사람을 가르치는 거죠. 늘어나는 건 자리를 헐겁게 하는 게 아니라, 익은 자리를 한 번 더 펴는 거예요."
젊은 보조가 슬러리 호스를 잡는 손이 어색했다. 명호는 나무라지 않았다. 네 패드가 다섯 번이 되기까지 제 손도 모서리를 몇 번이나 떨어뜨렸는지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국이라는 첫 패드의 모서리는 지금도 한쪽이 떨어져 나간 채였다. 그 흠이 다음 패드의 각도를 가르쳤다.
"천천히 해요." 명호가 말했다. "그 자국도 처음엔 떨어졌어요. 떨어진 자리가 다음 자리를 잡아 줘요."
3.
강릉의 요양병원 삼백사 호. 박영자 어르신이 그 방에 자리잡은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김동현은 어르신의 무릎에 놓인 손수건을 보고 있었다. 흰 꽃이 수놓인 손수건은 닷새째 같은 무릎 자리에 있었다. 어르신은 매일 한 마디씩 말이 길어졌다. 첫날은 침묵이었고, 그다음엔 우리 애가 수를 놓아 줬다고 했고, 어제는 그 애가 한 코를 잘못 놓으면 풀고 다시 놓으면 자국이 남는다고 했다고, 자국이 남아야 다음 코를 어디 놓을지 안다고 했다.
그리고 어제 어르신은, 따님이 멀리서 한 코 한 코 오고 있다고 했다.
문이 열린 것은 오전이 다 기울 무렵이었다.
한 여자가 들어섰다. 쉰을 넘긴 듯한, 먼 길을 온 얼굴이었다. 외투 자락에 아직 다른 도시의 바람이 묻어 있었다. 여자는 문턱에서 한 번 멈추었다가, 침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 손에 같은 흰 꽃의 손수건이 한 장 더 들려 있었다.
"엄마." 여자가 말했다.
박영자 어르신은 고개를 돌렸다. 닷새 동안 창틀을 따라 한 방향으로만 흐르던 시선이, 처음으로 문 쪽으로 돌아왔다. 어르신은 따님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보았고, 자신의 무릎 위 손수건을 보았다. 같은 꽃 두 송이가 한 방에 들었다.
"…한 코 한 코 왔구나." 어르신이 말했다.
"늦었죠." 따님이 침대 곁 의자에 앉았다. "한 코를 놓고 한 발을 걷고, 또 한 코를 놓고 한 발을 걸었어요. 그렇게 와야 자국이 남는다면서요, 엄마가."
동현은 자기 자리에서 한 뼘 옆으로 비켜 앉았다. 어르신의 자리도, 떠나신 분의 자리도, 이제 들어오신 따님의 자리도 같은 방 안에 각자 자리를 늘려 앉았다. 한 자리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는 동안 방은 좁아지지 않았다.
동현은 그 말을 노트에 옮기지 않았다. 어떤 장면은 적는 순간 굳어 버린다는 것을 그는 이제 알았다. 다만 방을 나와서, 복도의 창가에 기대 스물네 번째 줄에 제 손글씨로 적었다.
늘어남. ―한 자리가 익은 다음, 그 곁에 한 자리가 더 드는 일. 떠난 자리도 들어온 자리도 늘어난 자리도 같은 방에서 좁아지지 않는다. 방은 사람을 더할수록 넓어진다.
4.
홍대의 작은 공연장. 그날은 소율의 어머니 기일이었다.
무대는 넓지 않았다. 객석도 절반쯤 찼을 뿐이었다. 그러나 보면대 위에는 어머니의 사진이 며칠째 같은 자리에 있었고, 그 옆 의자에는 신발 봉투가 놓여 있었다. 사진도 봉투도 이제는 무대의 일부였다.
객석 맨 뒷줄에 한경수가 앉아 있었다. 소율의 아버지였다. 그는 한 번도 딸의 공연에 온 적이 없었다. 오늘 처음, 아내의 기일에, 가장 뒤에 가장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밴드 '널 포인터'가 「너머 ―돌아오는 길」의 첫 음을 냈다. 며칠 동안 손을 대지 않고 익혀 온 곡이었다. 같은 음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 동안 깊어진 음이었다. 베이스가 낮게 깔리고, 소율의 기타가 그 위로 한 줄기 길을 냈다.
그리고 다음 곡의 세 번째 음이 있었다. 며칠 동안 비워 두었던 자리. 소율은 그 자리에 손가락을 가져갔다가 매번 짚지 않고 거두었다. 자리가 익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오늘 소율은 그 음을 짚었다.
비워 둔 자리에 음이 들어가 앉는 순간, 두 음이던 곡이 세 음이 되었다. 곡은 늘어났고, 늘어난 곡은 더 멀리까지 갔다. 그 음은 어머니의 사진을 지나, 신발 봉투를 지나, 객석 맨 뒷줄까지 닿았다.
한경수의 어깨가 한 번 흔들렸다.
연주가 끝났을 때, 소율은 마이크 앞에서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고는 사진을 향해, 그러나 객석 전체가 듣도록 말했다.
"이 곡은 한 사람한테 들려드리려고 만든 거였어요." 소율이 말했다. "엄마 한 사람한테요. 그런데 며칠을 두고 익히는 동안, 듣는 사람이 늘었어요. 아빠가 늘고, 밴드가 늘고, 오늘은 여러분이 늘었어요."
소율은 보면대의 사진을 한 번 쓸었다. "한 사람한테 닿으려던 음이, 자리를 늘리면서 더 멀리 갔어요. 엄마. 한 코 한 코, 듣는 사람이 늘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날 밤, 소율은 가사 노트 쉰네 번째 줄에 한 단어를 적었다. 늘어남. 그 곁에 한 줄을 더했다. ―한 사람에게 부른 노래가, 익는 동안 듣는 사람이 늘어 멀리 간다.
공연장을 나설 때, 맨 뒷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한경수는 먼저 나가 있었다. 출입구 옆에 그가 서 있었다. 그는 딸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네 엄마가 김치 익히듯이 그 곡을 익혔구나. 매일 한 번씩 들여다보면서." 한경수가 말했다. "이제 한 사람이 더 늘었다. 나도 그 곡 들을게."
5.
연구소 옥상의 그늘, 오후 세 시. 진우와 김지수가 같은 자리에서 만난 지 서른두 번째 날이었다.
새 묘목은 오늘 새 잎을 하나 더 내밀었다. 어제까지 잎을 늘리지 않고 짙어지기만 하던 묘목이, 익은 자리에서 잎 하나를 늘렸다. 잎은 작았지만 분명히 한 장 더 있었다.
진우는 오늘 보리차 잔을 둘 가져왔다. 늘 하나였던 자리에 잔이 하나 늘었다. 그는 김지수의 앞에 한 잔을 놓았다. 닿지 않은 한 뼘 거리는 어제와 같았다. 다만 그 거리 위에 같이 보는 것이 하나 늘었다.
"어제는 제 잔만 있었는데요." 김지수가 잔을 보며 말했다.
"한 자리에 오래 두고 보니까." 진우가 정면을 본 채 말했다. "한 잔으로는 모자란 자리더군요, 지수 씨."
두 번째 이름 호명보다 세 번째 호명이 더 입에 익었다. 김지수는 한 뼘의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대신 자기 수첩을 펼쳐 쉰네 번째 줄에 한 단어를 적었다. 늘어남. 진우도 같은 시각, 제 수첩 쉰네 번째 줄에 같은 단어를 적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줄을 보지 못했다.
"닿지 않은 채로도 익는 거리가 있다고 하셨죠." 진우가 말했다. "그 거리가 늘어나기도 하나요?"
"거리는 안 늘어나요." 김지수가 수첩을 덮었다. 닫는 동작은 오늘로 스물일곱 번째였고, 닫고 손이 흐르는 결이 하나로 이어졌다. "거리는 그대로 두고, 그 거리 위에 같이 보는 게 늘어나요. 가까워진다는 건 사이를 좁히는 것만이 아니라, 같은 걸 같이 보는 게 하나씩 느는 거예요."
"같은 걸 같이 보는 게 는다." 진우가 두 개의 잔과, 그 사이의 한 뼘과, 그 너머의 바다를 함께 보며 따라 말했다. "그럼 우리는 지금 늘고 있는 거군요."
"네." 김지수가 옅게 웃었다. "거리는 그대로인데, 자꾸 늘고 있어요."
새 한 마리가 어제와 같은 난간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오늘은 그 곁에 한 마리가 더 앉았다. 두 마리가 같은 난간에서 같은 바다를 보았다.
6.
그날 밤, 관제동 사 층. 강유나는 ATLAS의 서른네 번째 정렬 보고를 읽고 있었다.
어제까지 양방향의 흐름은 같은 간격으로 되풀이되며 하나의 주기를 이루고 있었다. 오늘 ATLAS는 그 하나의 주기 위에 두 번째 주기가 겹쳐 도는 것을 잡아냈다. 위성의 자세 유지 진동이 본래의 궤도 주기 곁에 한결 느린 두 번째 박자를 늘려, 두 박자가 포개진 채로 일정하게 돌고 있었다. 주기가 하나에서 둘로 늘었다.
캡션에 ATLAS의 문장이 떠 있었다. ―서른네 번째 정렬. 하나의 주기 곁에 두 번째 주기가 늘어 포개짐. 같은 길을 여러 번 흐른 빛은 한 박자에 익은 뒤 그 곁에 또 한 박자를 늘린다. 익으면 깊어지고, 깊어지면 곁에 박자가 는다. 자국에서 늘어남까지, 서른한 단계.
강유나는 메타 정렬의 서른 번째 회수를 표시했다. 그러고는 오래전 자기가 적어 둔 한 줄을 다시 펼쳤다. 발사를 준비하던 무렵, 그는 노트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었다. ―자리는 늘어난다. 채워진 자리는 익고, 익은 자리는 곁을 낸다.
그때는 가설이었다. 오늘 그것이 회수되었다.
관제 보고가 단말에 올라왔다. 위성 「새벽」 송전 안정 아흔여섯 시간 경과, 변동 없음. 양산 삼차 닷새째, 다섯 번째 패드 거푸집 완료, 발열반응 안정. 다음 위성 발사 잠정 십일 주 뒤, 변동 없음.
강유나는 노트의 새 줄에 적었다.
늘어남은 새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늘어남은 익은 일이 제 곁에 같은 일을 하나 더 들이는 것이다. 주기가 하나면 길이고, 둘이면 화음이다. 자리가 하나면 외롭고, 둘이면 곁이다. 우리가 같은 자리에 여러 번 와서 그 자리를 익히는 까닭은, 언젠가 그 자리가 제 곁에 한 자리를 더 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줄을 더했다.
영겁의 새벽은, 같은 자리에 여러 번 들어 익은 빛이 그 곁에 또 한 줄기 빛을 늘리는 새벽이었다. 한 자리에서 시작한 새벽이 두 자리가 되고, 두 자리가 곁을 이루어 마침내 온 하늘로 늘어 가는, 그런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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