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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92화 - 익음

우주관리자 2026. 6. 1.

제92화 - 익음

 

1.

 

서귀포의 새벽은 월요일 다섯 시 육 분에 옷장 문을 열었다. 오진우는 어제와 같은 손으로 같은 옷걸이를 밀었고, 그 동작은 스물여덟 번째 박자에 가서 멎었다. 처음 이 숙소에 들었을 때 스물 몇 번의 박자가 어색하게 끊어졌던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끊어지는 자리가 없었다. 손이 옷걸이를 미는 동안 어디서 멈춰야 할지 손이 먼저 알았다.

 

셔츠들 곁에 놓인 봉투—아내와 아들의 옛 사진이 든—는 닷새째 같은 자리에 있었다. 어제는 그 위로 공기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는, 그 흐름이 어제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같은 자리를 같은 방향으로 여러 번 지나간 공기가, 그 자리에 길을 들여 놓은 것 같았다.

 

그는 일지를 펼쳐 서른 번째 줄을 적었다.

 

「익음. 흐름의 다음 자리. 한 방향으로 흐르던 것이 같은 결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 동안, 그 결이 처음보다 깊고 부드러워지는 일. 익음은 새것이 헌것이 되는 일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 길이 들어 흐름이 한결 수월해지는 일이다. 익음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배어드는 것이다.」

 

발사 엿새째 아침이었다. 머리맡 단말의 송전 그래프는 같은 높이로 일흔두 시간을 그어 왔다. 같은 높이가 사흘이 되자, 그 직선은 더 이상 그저 멈춰 있는 선으로 보이지 않았다. 같은 일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 동안 그 일에 능숙해진 선처럼 보였다. 변하지 않는 것에도 익는 데가 있었다.

 

창밖 바다에는 어선 두 점이 어제와 같은 자리에 떠 있었다. 어부가 매일 바뀌어도 어장은 같은 자리였고, 그 자리에서 그물을 거두는 손동작은 며칠을 같은 자리에서 되풀이된 끝에 한결 매끄러워져 있었다. 진우는 보리차를 한 모금 넘겼다. 미지근한 온도가 입안에 익숙했다.

 

"같은 걸 여러 번 하면, 그게 깊어지는구나."

 

혼잣말은 어둠이 아니라, 이제 막 밝아 오는 회청색 속으로 천천히 배어들었다.

 

 

2.

 

야적장의 양산 3차는 나흘째로 접어들었다. 차명호는 자국·겹·굳음 세 패드 곁에서 굳어 가던 네 번째 패드의 거푸집을 탈형할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다. 양생포를 걷자, 사흘 동안 안에서 바깥으로 열을 흘려보낸 콘크리트가 형들 곁에 자기 표면을 드러냈다. 거푸집 판을 떼어 내는 손길에 윤재석이 먼저 와 있었다.

 

"오늘은 한 박자 일찍이 아니라, 늘 오던 시간에 왔어요."

 

윤재석이 장갑을 끼며 말했다. 명호는 거푸집 판을 들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익은 거예요. 처음엔 한 박자 일찍 와야 자리에 들어왔는데, 이제는 늘 오던 시간에 와도 자리가 맞잖아요.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여러 번 와 본 손이, 그 시간을 몸에 들여놓은 거죠."

 

탈형된 패드의 모서리는 매끄러웠다. 양산 1차 때 부었던 첫 패드—자국—의 모서리에는 거푸집을 떼면서 살짝 떨어져 나간 데가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를 거치는 동안 명호의 손은 거푸집을 언제 어느 각도로 떼어야 콘크리트가 상하지 않는지를 배웠고, 네 번째 패드는 그 배움이 배어든 결과였다. 같은 일을 네 번 한 손이, 첫 번째보다 깊어진 것이었다.

 

그는 작업 노트의 여백에 오래 두었던 한 단어를 다섯 번째로 밑줄 그었다. 든다. 콘크리트도 들고, 빛도 들고, 사람이 떠난 자리에 다른 사람도 든다. 그리고 그 단어는, 다섯 번을 같은 자리에 밑줄 그어지는 동안 명호 안에서 더 이상 후보가 아니었다.

 

"이제 이건 후보가 아니에요. 다섯 번을 같은 자리에 적었으면, 그건 익은 단어예요."

 

명호는 별표 후보 목록에서 든다를 정식 항목으로 올렸다. 후보 아홉 번째가 아니라, 그냥 아홉 번째였다. 윤재석이 그 노트를 곁눈으로 보며 물었다.

 

"단어도 익어요?"

 

"단어가 제일 잘 익죠. 같은 자리에 여러 번 쓰이는 동안 그 자리에 배어드니까. 처음엔 빌려 쓴 말 같은데, 여러 번 쓰다 보면 제 말이 돼요. 자리잡고, 흐르고, 그러다 익는 거예요."

 

탈형을 마친 네 번째 패드가 형들 곁에서, 같은 햇빛을 같은 각도로 받기 시작했다.

 

 

3.

 

강릉 304호. 박영자 어르신이 자리잡은 지 나흘째였다. 김동현은 어제와 같은 옆자리에 앉았고, 어르신은 어제와 같은 의자, 같은 무릎 위에 흰 꽃이 수놓인 손수건을 두고 있었다.

 

사흘 전 첫날에는 말이 없었고, 이튿날에 "우리 애가 수를 놓아 줬어요"라는 한 마디가 나왔고, 어제는 그 곁에 "옆에 같이 앉아서 한 코 한 코 같이 셌어요"라는 한 마디가 더 보태졌다. 같은 이야기가 매일 한 마디씩 길어지고 있었다. 동현은 그것이 익어 가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 어르신은 손수건의 꽃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 보더니, 셋째 마디를 꺼냈다.

 

"…그 애가 그러더라고요. 엄마, 한 코를 잘못 놓으면 풀고 다시 놓으면 돼요, 하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풀고 다시 놓으면 자국이 남잖니, 하고. 그랬더니 그 애가… 자국이 남아야 다음 코를 어디 놓을지 알죠, 하더라고요."

 

동현의 손이 노트 위에서 잠시 멈췄다. 자국. 그가 두 달 넘게 따라온 단어가, 한 어르신의 입에서 따님의 말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어르신께 조심스럽게 물었다.

 

"따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어르신은 창틀을 따라 시선을 한 결로 흘려보냈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손수건을 한 번 더 쓸며, 아주 천천히 대답했다.

 

"오고 있어요. 멀리 있어서… 한 코 한 코 오고 있어요."

 

동현은 그 말을 받아 적지 않았다. 어떤 말은 노트에 옮기는 순간 굳어 버린다는 것을, 그는 이제 알았다. 그는 다만 노트의 스물세 번째 줄에 오늘의 단어를 자기 손글씨로 적었다.

 

「익음. 같은 이야기가 매일 한 마디씩 길어지는 동안, 그 이야기가 처음보다 깊어지는 일. 익은 이야기에는 자국이 남아 있다. 자국이 남아 있어야, 다음 마디를 어디 놓을지 안다.」

 

떠난 자리(박종문)와 들어온 자리(박영자) 사이, 동현이 앉은 옆자리에는 어제의 줄과 오늘의 줄 사이로 한 결의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은 매일 같은 자리를 지나는 동안 조금씩 익어 가고 있었다.

 

 

4.

 

홍대 연습실의 불이 평소 시간에 켜졌다. 곡 「너머 ―돌아오는 길」의 발표일이 내일로 다가와 있었다. 내일은 한소율의 어머니 기일이었다. 발표 하루 전, D-1이었다.

 

보면대 위 어머니의 사진과, 그 옆 의자에 놓인 신발 봉투는 며칠째 같은 자리에 있었다. 소율은 더 이상 그 둘을 옮기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 며칠을 둔 사진과 신발이, 연습실 공기에 배어들어 그 자리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는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연주했다. 손대지 않았다. 발표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고치는 대신, 같은 곡을 같은 손으로 한 번 더 흘려보냈다. 연주가 끝나자 베이시스트가 말했다.

 

"어제랑 똑같이 쳤는데, 오늘이 더 깊게 들려."

 

"똑같이 쳐서 깊어진 거야. 며칠을 같은 손으로 같은 자리를 짚었거든. 그러면 음이 손에 익어. 익은 음은 처음보다 깊어."

 

다음 곡의 두 음 사이, 며칠째 비워 두었던 세 번째 음의 자리로 소율은 오늘 처음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러나 짚지는 않았다. 손가락이 그 자리 위에 가만히 머물렀다가, 두 음 사이의 길어진 빈 데로 다시 돌아왔다.

 

"세 번째 음은, 내일 짚을 거야. 오늘은 그 자리가 익기를 기다려. 비워 둔 자리도 며칠을 비워 두면 익거든. 아무거나 들어와 앉는 자리가 아니라, 거기 들어올 음을 기다리는 자리가 돼."

 

가사 노트 쉰세 번째 줄에 그는 적었다. 「익음. 같은 두 음을 며칠 동안 같은 손으로 짚는 동안, 그 두 음이 손에 배어드는 일. 그리고 그 사이 비워 둔 자리가, 아무 음이나 받는 자리가 아니라 한 음을 기다리는 자리로 깊어지는 일.」

 

아버지 한경수가 연습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어머니의 어록을 또 한 번 전했다.

 

"네 엄마는 김치를 담그고도 바로 안 먹었어. 며칠을 같은 독에 두고, 매일 한 번씩 들여다봤지. 왜 안 먹냐고 하면, 익는 중이라고. 익는 건 그냥 두는 게 아니라, 매일 같은 자리에서 한 번씩 들여다보는 거라고 그랬어."

 

소율은 보면대의 어머니 사진을 한 번 들여다보았다. 내일이면 그 사진 앞에서, 며칠을 익힌 곡을 처음으로 들려드릴 참이었다.

 

 

5.

 

옥상 그늘, 오후 세 시. 서른한 번째 자리였다. 진우와 김지수는 정면으로 앉았고, 가장자리 화분의 새 묘목은 어제 펴진 두 잎 곁에 오늘 새 잎을 더 내밀지 않았다. 대신 어제까지의 잎들이 한결 짙어져 있었다. 잎을 늘리는 대신, 가지고 있는 잎을 익히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수첩에 같은 단어를 적었다. 서로의 것을 보지 않았다. 쉰세 번째 줄, 두 사람 모두 익음이었다. 김지수의 수첩 닫는 동작은 스물여섯 번째였다. 어제까지 닫고 나서 손이 다음 자리로 흘러갔다면, 오늘은 그 흐름이 한결 부드러워서, 닫고 흐르는 동작이 하나의 결처럼 이어졌다.

 

진우는 어제 자기 손이 보리차 잔 위에서 한 결로 옆으로 한 뼘 옮겨졌던 자리를, 오늘 같은 자리에 다시 가져다 두었다. 닿지는 않았다. 어제의 한 뼘과 오늘의 한 뼘 사이에, 며칠을 같은 자리에 둔 거리가 익어 있었다.

 

"지수 씨."

 

두 번째로 부르는 이름은, 첫 번째보다 입에 익었다. 진우는 그것을 느꼈다.

 

"어제 제가 한 뼘 옮긴 자리요. 오늘 다시 그 자리에 손을 두니까… 어제보다 덜 어색하네요. 같은 자리에 한 번 더 손을 두는 것뿐인데, 그 자리가 익었어요."

 

김지수는 자기 손을 탁자 위, 진우의 손에서 한 뼘 떨어진 자리에 두었다. 어제와 같은 거리였다. 그리고 그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좁히지 않아도 익어요. 같은 거리를 며칠 두면, 그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 않게 돼요. 가까워지는 게 닿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 같은 거리를 오래 두는 것도 가까워지는 거예요. 닿지 않은 채로 익는 거리요."

 

진우는 그 말 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가 평생 믿어 온 것은, 가까워진다는 건 거리를 없애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과 그의 손 사이 한 뼘은, 며칠을 그 자리에 둔 끝에 두 사람을 멀어지게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 한 뼘이, 두 사람이 함께 익혀 온 자리 같았다.

 

"닿지 않은 채로도 익는 거리가 있군요."

 

"네. 그게 제일 오래가는 거리예요."

 

새 한 마리가 화분 가장자리에 어제와 같은 자리에 내려앉았다가, 같은 자리에서 다시 날아올랐다. 같은 자리에 여러 번 내려앉은 새의 발끝이, 그 자리를 한결 익숙하게 디뎠다.

 

 

6.

 

사층 관제실, 밤 열 시 사십육 분. 강유나는 ATLAS의 서른세 번째 정렬을 지켜보았다.

 

어제 발생한 양방향 흐름—출발점 「자리1」과 옆자리 사이를 한 결로 오가던 빛—이 오늘은 같은 경로를 같은 간격으로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빛 점이 출발점에서 옆자리로, 다시 옆자리에서 출발점으로 오가는 그 한 번의 왕복이, 어제는 들쭉날쭉했으나 오늘은 같은 시간 간격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흐름이 주기가 된 것이었다.

 

ATLAS가 캡션을 스스로 적었다.

 

「33차 정렬. 양방향 흐름이 같은 간격으로 되풀이되며 주기를 이룸. 같은 경로를 여러 번 흐른 빛이, 그 경로에 익어 한결 일정해짐. 흐름이 익으면 주기가 된다.」

 

자국에서 익음까지, 메타 정렬은 서른 번째 단계, 스물아홉 번째 배열에 이르렀다. 관제 보고가 화면 아래로 흘렀다.

 

「위성 「새벽」 송전 안정 일흔두 시간 경과. 변동 없음. 양산 3차 나흘째. 네 번째 패드 탈형 완료, 모서리 정상. 발열반응 안정. 다음 위성 발사 잠정 11주 뒤. 변동 없음.」

 

강유나는 사흘째 같은 자리에 찍히는 '변동 없음'이라는 네 글자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같은 보고가 사흘을 되풀이되는 동안, 그 네 글자는 무료한 반복이 아니라 익어 가는 안정으로 읽혔다.

 

그는 노트에 적었다.

 

"익음은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익음은 같은 일이 여러 번 일어나는 동안, 그 일이 자기 자리에 배어드는 것이다. 흐름이 한 번이면 길이고, 여러 번이면 주기다. 주기는 되풀이되는 길이고, 되풀이되는 동안 그 길은 깊어진다. 우리가 매일 같은 자리에 와서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가 익는 일이었다."

 

ATLAS의 빛 점이 같은 경로를 또 한 번 왕복했다. 같은 간격, 같은 결이었다. 그리고 그 같은 왕복은 어제의 왕복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영겁의 새벽은, 어제 한 결로 흐르기 시작한 흐름이 오늘 같은 간격으로 되풀이되며 그 자리에 익어 가는 새벽이었다. 한 번 새로 밝아 오는 새벽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 여러 번 드는 동안 그 자리에 배어드는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