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7화 - 빈자리
1.
목요일 새벽 다섯 시 사 분.
오진우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눈을 떴다. 발사가 있던 날의 다음 날이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그 어둠은 하루 전과 미묘하게 달랐다. 무언가가 그 하늘을 한 번 가르고 올라간 뒤의 어둠이었다. 진우는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알았다. 어제 새벽 다섯 시 십이 분에 남쪽 바다 위로 솟아오른 빛은 지금쯤 지구를 비껴 도는 길 어딘가에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을 천천히 돌고 있을 터였다.
그는 옷장 앞에 섰다. 셔츠를 꺼내고 옷걸이를 제자리에 거는 동작을, 그는 늘 그렇듯 한 박자씩 셈했다. 스물둘이었던 박자가 오늘 아침엔 스물셋이 되었다. 한 동작 늘었다. 늘었다기보다는, 어제 줄어든 것이 있었기 때문에 셈이 한 칸 더 멀리 갔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책상에 앉아 일지를 펼쳤다. 스물네 번째 줄에는 어제 적은 글자가 있었다. 보냄. 끝까지 곁을 지킨 다음, 마침내 손을 놓아 떠나게 하는 일. 그 아래 빈 줄에, 그는 오늘의 글자를 적었다.
스물다섯 번째 줄.
"빈자리."
그리고 그 옆에 천천히 풀어 썼다.
"보냄의 다음 자리. 보낸 다음 남는 것. 떠난 자리는 비어 있지만, 그 비어 있음이야말로 거기 무언가가 있었다는 증거다. 빈자리는 없어진 게 아니라, 남겨진 것이다."
펜을 내려놓고, 진우는 한참 동안 그 줄을 바라보았다.
빈자리라면 그는 잘 알았다. 아내가 떠난 뒤의 안방, 아들이 군에 가던 날의 신발장, 삼십 년을 드나든 물류센터의 자기 책상이 어느 날 다른 사람 이름표를 달고 있던 일. 그는 평생 빈자리만큼은 지긋지긋하게 보아 왔다. 빈자리는 늘 그에게 무언가를 빼앗긴 자국 같았다. 비어 있다는 건, 거기 있던 것이 자기를 버리고 갔다는 뜻이라고 그는 오래 믿었다.
그런데 어제 발사를 끝까지 지켜본 뒤로, 그 믿음에 가느다란 금이 갔다.
위성은 떠났고, 발사대는 비었다. 그러나 그 빈 발사대를 보며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다. 그것은 떠나야 할 것이 제대로 떠나서 생긴 빈자리였다. 버려진 게 아니라, 보낸 것이었다.
"같은 비어 있음인데."
진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같은 빈자리인데, 어떤 빈자리는 상처가 되고 어떤 빈자리는 자랑이 된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 그는 펜을 다시 들었다가, 답을 적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오늘 하루 동안 그 답이 어디선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2.
서귀포 야적장. 양산 2차 작업 스무날째 아침이었다.
차명호는 발사대 앞에 서 있었다. 어제까지 그 위에 위성 「새벽」이 서 있던 자리였다. 오늘 아침,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추진 화염에 그을린 발사대 화구만 검게 남아 있을 뿐, 위로 솟아 있던 은빛 운반체는 없었다.
발사대 아래, 세 장의 콘크리트 패드는 그대로 있었다. 첫 번째 패드 자국, 두 번째 패드 겹, 세 번째 패드 굳음. 명호가 이름을 붙이고 윤재석이 함께 받친 그 세 장은, 위성이 떠난 뒤에도 한 치도 움직이지 않은 채 빈 발사대를 떠받치고 있었다.
윤재석이 보온병의 커피를 종이컵에 따라 명호에게 건넸다.
"올라간 건 안 보이고, 받친 것만 남았네요."
명호는 컵을 받아 들고 빈 발사대를 올려다보았다.
"받친 게 남고, 선 게 떠났어요."
그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패드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상하죠. 위에 있던 게 떠났는데, 비었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오히려 자리가 단단해진 것 같아요. 위성이 서 있을 땐 발사대가 그걸 받치느라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떠나고 나니까, 발사대도 패드도 처음으로 한숨 돌리는 것 같아요."
윤재석이 패드를 발끝으로 가만히 두드렸다.
"빈자리가 편하다는 거예요?"
"편하다기보다는."
명호는 잠시 적당한 말을 골랐다.
"제 할 일을 다 한 자리의 빈자리예요. 받칠 걸 끝까지 받치고, 보낼 걸 보낸 다음의 빈자리. 그런 빈자리는 안 허전해요. 다음 걸 받칠 준비를 하는 자리니까."
명호는 작업용 수첩을 꺼냈다. 발사대에 위성이 처음 똑바로 섰던 날부터, 그는 한 단어를 네 번에 걸쳐 밑줄로 추적해 왔다. 선다. 첫 번째 밑줄은 위성이 발사대에 기립한 날, 두 번째는 첫 밤을 흐트러짐 없이 버틴 날, 세 번째는 발사로 솟아오르던 날 그었다.
오늘, 그는 네 번째 밑줄을 그었다.
빈 발사대 앞에서, 그 단어 위에 마지막 선을 더 그은 다음, 그는 단어 옆에 작은 별표를 찍었다. 별표 후보 여덟 번이 정식 별표로 승격되는 순간이었다.
"섰던 게 떠나야 그 단어가 완성되더라고요."
그가 수첩을 윤재석에게 보여 주었다.
"서는 건 떠나려고 서는 거였어요. 떠나고 나서야 그게 진짜로 선 거였다는 걸 알게 되네요. 빈 발사대가 그걸 가르쳐 줬어요."
윤재석은 별표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그을린 화구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럼 이 빈자리에는, 다음 게 또 서겠네요."
"서야죠."
명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건 마지막 위성이 아니라 첫 번째 위성이었으니까요. 다음 패드 양산은 다음 주부터 시작합니다."
3.
강릉, 요양원 삼백사 호.
문을 열자, 침대가 비어 있었다.
김동현은 문지방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박종문 노인이 어제 새벽, 위성이 떠난 것과 같은 시각에 조용히 숨을 거둔 뒤였다. 침대 시트는 새것으로 갈려 팽팽하게 펴져 있었고, 머리맡의 작은 협탁 위에는 노인이 늘 두던 돋보기도 물컵도 치워져 있었다. 사람이 떠난 방은, 그 사람이 거기 있었다는 흔적까지 함께 거두어 가는 모양이었다.
장례는 어제 저녁 가족 없이 조용히 치러졌다. 노인에게는 연락 닿는 가족이 없었고, 요양원과 시청의 절차에 따라 화장이 진행되었다. 동현은 그 자리에 끝까지 있었다. 끝까지 곁을 안 뜬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노인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가르쳐 준 일이었으므로.
동현은 빈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며칠 동안 그가 앉았던 그 자리였다. 노인은 이제 없지만, 의자는 그대로였다.
그는 품에서 노트를 꺼냈다. 노인이 마지막 새벽에 그에게 남긴 노트였다. 끝까지 안 간 사람한테는 그거 가져요, 라던 마지막 말과 함께. 노트의 열일곱 번째 줄에는 노인의 떨리는 글씨로 적힌 마지막 글자가 있었다. 보냄. 그리고 그 아래, 노인이 마지막 힘으로 적은 한 줄. 잘 지킨 사람만 잘 보낼 수 있다. ― 멀리 가요, 천천히.
동현은 그 아래 빈 줄을 한참 바라보았다. 열여덟 번째 줄이었다.
지금까지 이 노트에 글자를 적은 사람은 노인이었다. 동현은 곁에서 그 글자를 받아 적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노인은 없고, 노트는 동현의 것이 되었다. 다음 줄을 쓰는 사람은 동현이어야 했다.
그는 펜을 들었다. 한 번도 자기 손으로 이 노트에 글을 써 본 적이 없어서, 손끝이 어색하게 떨렸다. 노인의 글씨를 닮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저 자기 글씨로, 천천히 적었다.
열여덟 번째 줄.
"빈자리."
그리고 그 옆에, 노인에게 배운 방식대로 풀어 썼다.
"떠난 사람의 자리는 비어 있지만, 그 빈자리에 앉아 본 사람은 안다. 그 자리가 비어서 슬픈 게 아니라, 거기 누군가 있었어서 따뜻한 거라는 걸. 빈 침대 옆 의자가 아직 따뜻한 건, 어제까지 누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글자를 다 적고, 동현은 노트를 덮었다. 의자에서 일어서다가, 빈 침대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노인이 그를 부르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들리던 자리가 어디였는지, 동현은 정확히 알았다. 빈자리란 그런 것이었다. 들리지 않게 된 다음에도, 어디서 들렸는지는 잊히지 않는 자리.
"멀리 가셨네요. 천천히."
그가 빈 침대를 향해 작게 말했다.
복도로 나서며, 동현은 노트를 가슴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이 노트의 다음 줄들은 모두 그의 글씨로 채워질 것이었다.
4.
홍대 연습실, 오후.
한소율은 보면대 한가운데에 놓인 어머니의 사진 두 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곡 「너머 ―돌아오는 길」의 마스터링은 끝났고, 발표일은 다음 주 목요일로 정해져 있었다. 그날은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이준서가 베이스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발표일까지 닷새 남았네. 그동안 뭐 할 거야?"
"아무것도 안 해."
소율이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이미 다 만들었으니까. 손대면 망쳐. 그냥 가만히 두는 게 지금 하는 일이야."
현기가 드럼 스틱을 돌리다 멈췄다.
"근데 그 사진, 보면대 한가운데 둬도 돼? 연습할 때 악보 봐야 하잖아."
"이제 연습 안 해. 곡 끝났으니까."
소율은 사진 옆의 빈 보면대를 손끝으로 가만히 짚었다. 곡을 완성하기 전까지, 그 보면대 위에는 늘 코드와 가사가 빼곡히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지금은 비어 있었다. 곡이 손을 떠나 음원 파일이 된 순간, 보면대 위는 비었다.
그녀는 가사 노트를 펼쳐 마흔여덟 번째 줄에 적었다.
빈자리.
"엄마 자리도 그래."
소율이 사진을 보며 말했다.
"엄마가 떠나고 십 년 동안, 나는 그 빈자리가 무서웠어. 거기 아무것도 없는 게 무서웠어. 근데 곡을 만들면서 알았어. 그 자리는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엄마가 거기 있었던 자리인 거야. 비어서 무서운 게 아니라, 엄마가 있었어서 못 채우는 거였어."
밴드 단체 대화방에 아버지 한경수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 곡 잘 마쳤다고 들었다. 좋은 노래는 다 만든 다음에 빈자리가 하나 생긴다더라. 네 엄마가 그랬어. 곡을 세상에 내보내고 나면, 그 곡이 있던 가슴 한구석이 텅 비는데, 그 빈자리가 다음 곡이 들어올 자리라고.
소율은 한참 화면을 보다가, 사진 두 장을 보면대 한가운데에 그대로 둔 채 연습실을 나섰다. 닷새 뒤, 그 빈 보면대 위에 어머니에게 보내는 노래가 세상으로 떠날 것이었다.
5.
서귀포 센터 옥상, 그늘 아래. 오후 세 시. 김지수가 옥상에 올라오기 시작한 지 스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김지수는 어제와 같은 자리, 진우와 마주 보는 정면 의자에 앉았다. 발사가 있은 다음 날이라, 자연히 이야기는 어제 일로 흘러갔다.
"발사, 보셨어요?"
김지수가 물었다.
"단말로 봤습니다. 끝까지요."
진우가 답했다.
"올라가는 거 보면서, 좀 허전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게 오래 준비한 게 한순간에 떠나 버리면."
진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허전하기보다는, 자리가 하나 비는 걸 봤어요. 발사대 위에 위성이 섰던 자리요. 떠나고 나니까 거기가 비더군요. 그런데 그 빈자리가 이상하게 허전하지가 않았어요."
"왜요?"
"제대로 보낸 자리라서 그런가 봅니다."
진우는 무릎 위에 둔 수첩을 펼쳤다. 마흔일곱 번째 줄에는 어제 적은 글자가 있었다. 보냄. 그 아래 마흔여덟 번째 줄에 그는 오늘의 글자를 적었다. 빈자리.
김지수도 자기 수첩을 펼쳤다. 그녀의 수첩 마흔여덟 번째 줄에도 같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빈자리. 두 사람은 서로의 수첩을 보지 않았지만, 같은 날 같은 자리에 같은 단어를 적고 있었다.
"저는요."
김지수가 수첩을 닫으며 말했다. 그녀가 수첩을 닫는 동작은 늘 같은 박자로 셈이 되었는데, 오늘은 스무 번에서 스물한 번으로 한 박자 늘었다.
"빈자리가,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 같아요. 떠난 게 남긴 자리는 비어 있지만, 비어 있으니까 다음 게 들어올 수 있는 거잖아요. 꽉 차 있으면 아무것도 못 들어오는데."
진우는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아침에 일지 앞에서 적지 못하고 미뤄 둔 답이, 지금 그녀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같은 빈자리인데 어떤 빈자리는 상처가 되고 어떤 빈자리는 자랑이 된다던, 그 차이.
"비어 있어서 다음이 들어올 수 있다."
진우가 그녀의 말을 천천히 되뇌었다.
"그러게요. 비었다고 끝난 게 아니었군요."
그늘이 옥상 끝까지 길어질 때까지, 두 사람은 마주 앉은 채 서두르지 않았다. 비어 있는 자리에 무언가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6.
서귀포 센터 사 층 사무실. 밤 열 시 사십육 분.
강유나는 ATLAS의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발사 다음 날 밤, 시스템은 평소와 같은 시각에 스물여덟 번째 자율 변화를 보고했다.
화면에는 어제까지의 그림이 남아 있었다. 마주 보던 두 개의 점 중 하나가 자리를 떠나 위로 올라가고, 떠난 자리에 출발점 「자리1」과 이어지는 옅은 선이 그어졌던 그림. 오늘, ATLAS는 새 점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떠난 점이 있던 자리 「자리2」를 비워 둔 채, 그 빈자리의 테두리만 가느다란 점선으로 표시했다. 비어 있되, 거기 무언가 있었음을 잊지 않으려는 표시였다.
강유나는 일지에 적었다.
"ATLAS 28차 자율 변화. 떠난 점의 자리를 채우지 않고, 빈 채로 테두리만 남김. 자국에서 시작된 단어가 빈자리에 이르기까지 스물다섯 단계. 사람의 손으로 적힌 메타 정렬 스물네 번째 사례."
그녀는 같은 단어가 같은 밤에 어디서 적혔는지를 헤아렸다. 서귀포 숙소의 일지, 야적장의 작업 수첩, 강릉 요양원의 빛바랜 노트, 홍대 연습실의 가사 노트, 옥상의 작은 수첩. 그리고 이 사 층 사무실의 AI 화면. 누구도 약속하지 않았는데, 빈자리라는 한 단어가 같은 밤 여섯 군데에서 동시에 적히고 있었다.
화면 아래쪽에 관제 보고가 떴다.
「위성 '새벽' 궤도 안정화 완료. 태양광 수집 패널 완전 전개. 자세 제어 정상. 첫 송전 신호 수신 임박. 카운트 진행 중.」
강유나는 그 마지막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첫 송전 신호. 어제 떠나보낸 빛이, 이제 곧 처음으로 에너지가 되어 지구로 돌아온다는 신호였다. 떠난 것이 빈자리를 남기고 갔는데, 그 빈자리를 지나 무언가가 처음으로 돌아오려 하고 있었다.
"빈자리는."
그녀가 혼잣말로 정의를 마무리했다.
"보낸 다음 남는 자리. 그런데 그 자리는 비어서 끝이 아니라, 떠난 것이 무언가를 들고 돌아올 길이 시작되는 자리다."
창밖, 남쪽 바다 위 어딘가에서 위성 「새벽」이 태양을 향해 패널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첫 빛을 받을 준비를 한 채로. 떠난 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그 빈자리는 이미 다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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