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9화 - 채움
1.
서귀포 숙소의 새벽 다섯 시. 진우는 옷장 앞에 섰다. 어제와 같은 자리, 어제와 같은 손짓. 셔츠 한 벌을 꺼내 어깨에 걸쳤다. 박자가 스물다섯 번째에 들어섰다. 헤아릴 필요는 없었으나, 헤아리는 일 자체가 그의 아침을 잠그는 작은 잠금쇠가 되어 있었다.
창밖으로 바다는 어둠 너머에서 천천히 호흡하고 있었다. 멀리 새벽 어선 두 척이 등을 마주 댄 채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아침마다 보던 두 점이었다. 어제는 한 점이 빠져 외로워 보였는데, 오늘은 다시 두 점이 되어 있었다. 빠진 자리에 다른 배 한 척이 들어와 자리를 채운 모양이었다.
일지 노트를 펼쳤다. 어제까지 스물여섯 줄. 첫 빛.
스물일곱 번째 줄에 그는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채움. 첫 빛의 다음 자리. 빈자리에 무언가가 들어와 머물기 시작하는 일. 채움은 빈자리를 없애는 일이 아니다. 빈자리가 있었음을 잊지 않은 채로,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와 앉는 일이다. 채움은 덮음이 아니라 이음이다. 떠난 사람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떠난 사람이 만든 자리 옆에 다른 사람이 와 앉아 함께 비어 있어 주는 일이다."
펜을 놓고 그는 한 손으로 노트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
발사 사흘째였다. 「새벽」은 어제 첫 빛을 보내왔고, 오늘도 그쪽 하늘 어딘가에서 조용히 송전을 이어가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진우의 마음은 첫 빛 그 자체보다도, 그 빛이 들어와 앉은 자리 쪽으로 더 자주 갔다. 떠난 것의 자리가 비어 있었기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것이 어제 그가 깨달은 일이었다. 그러면 오늘의 일은 무엇이냐 — 그는 자문했다. 들어온 빛이 그 빈 데에 머무는 일. 머물러 그 자리를 다시 만드는 일.
아내가 떠난 자리, 아들이 떠난 자리. 진우는 오래도록 그 두 자리를 비워 둔 채로 살아왔다. 누가 와 앉을 수도 없게, 어떤 다른 것이 들어오는 것을 자기 안에서 막아 왔다. 그러나 어제부터 그는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들에, 다른 사람이 와 앉아도, 떠난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떠난 자리는 떠난 자리대로 남고, 그 옆에 다른 자리가 또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을.
옷장 안쪽 깊숙한 곳에 작은 봉투가 하나 들어 있었다. 그가 서귀포로 내려오며 챙긴 봉투. 아내와 아들의 옛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한 번도 꺼내 보지 못한 봉투. 그는 봉투를 손에 쥐었다가 다시 옷장 안에 넣었다. 오늘은 거기까지였다. 다만 봉투를 안쪽 깊이 밀어 넣지 않고, 그저 셔츠들 곁에 나란히 놓아 두었다.
자리를 함께 두는 일. 그것도 채움의 한 형태일지 몰랐다.
2.
야적장 위로 흐릿한 해가 떠올랐다. 두 번째 위성을 위한 발사대 자리. 「새벽」이 떠난 빈 발사대 옆자리에, 오늘 새 패드의 첫 거푸집이 짜이고 있었다. 명호는 안전모를 고쳐 쓰며 그 자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양산 3차, 1일째."
윤재석이 클립보드를 들고 다가왔다. "패드 타설 시작합니다. 자국, 겹, 굳음 — 같은 순서로 갑니다."
"같은 순서로." 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자리는 다르네요."
"다른 자리에 같은 일을 하는 거지요."
자국 패드 거푸집이 자리를 잡자, 콘크리트 펌프카가 천천히 호스를 펼쳤다. 잿빛 슬러리가 호스를 타고 내려와 빈 거푸집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빈 데가 차오르는 소리. 그 사이로 양산 1차에서 키운 자국, 양산 2차에서 키운 겹과 굳음 — 세 패드가 마치 형의 자리에 앉아 동생을 맞이하듯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호는 호주머니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별표 후보를 모아 둔 노트였다. 8번 *선다*는 어제 별표가 매겨져 정식 어휘로 승격되었다. 9번 *든다*는 어제 첫 밑줄을 그었다.
오늘, 그는 같은 자리에 두 번째 밑줄을 그었다.
"빛이 든다."
윤재석이 옆에서 거푸집을 들여다보다 말했다. "콘크리트도 들고, 빛도 드네요. 빈 데가 있어야 든다는 게 같네요."
"같은 동사예요." 명호가 말했다. "콘크리트가 거푸집의 빈 데에 들고, 빛이 위성이 비운 자리에 들고, 사람이 떠난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고. 다 같은 *든다*예요."
"이게 별표가 되겠네요. 다음 패드 굳을 때쯤."
"그쯤이면 들 만큼 들어 있겠지요."
자국 패드의 채움이 거푸집 가장자리까지 차오르자, 호스가 천천히 옆자리로 이동했다. 겹 패드의 거푸집이 다음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명호는 패드 사이의 좁은 통로에 서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아주 오래전 사업이 무너졌을 때, 그의 빈 데에는 아무것도 들지 못했었다. 채우려 해도 자꾸 새어 나갔고, 거푸집이 없어 흘러내렸다.
거푸집이라는 것이 있어야 채움이 가능했다. 사람에게는 일이 거푸집이었고, 사람이 거푸집이었고, 시간이 거푸집이었다. 진우 씨가 옆에 있어 그의 빈 데가 새지 않게 받쳐 주었고, 강유나 박사가 위에서 받쳐 주었고, 윤재석 씨가 옆에서 받쳐 주었다. 그 거푸집 안으로 일이 들고 빛이 들고 사람의 말이 들어서, 그는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실장님?" 윤재석이 그를 불렀다.
"네."
"오늘 일지에 뭐라고 쓰실 거예요?"
명호는 호스 끝에서 떨어지는 슬러리를 잠깐 바라보았다. "채움이라고요. 같은 단어를 쓸 거예요. 사람마다 다 다른 데에서 같은 단어를 쓰고 있을 거예요. 진우 씨도, 동현이도, 소율이도."
"한 단어가 여러 자리에서 같이 쓰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해요."
"그게 단어의 일이지요." 명호가 천천히 말했다. "한 자리만 채우면 그건 다른 거예요. 여러 자리를 함께 채울 수 있어야 그게 말이지요."
3.
강릉 요양원 304호. 시트는 어제 새로 갈렸고,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침대는 어제까지 비어 있었다. 박종문 노인이 떠난 자리. 동현은 그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스무 줄째.
그는 펜을 잡고 잠깐 손을 멈췄다. 빈자리에서 첫 빛을 적은 게 어제였다. 오늘은 무엇을 적을지, 적기 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채움. 빈자리에 다음이 들어와 머무는 일. 다음 사람이 와도 떠난 사람은 지워지지 않는다. 다음 사람은 떠난 사람이 만든 자리의 모양을 따라 앉을 뿐이다. 침대 옆 의자가 어제까지 따뜻했던 것은 어떤 분이 거기 계셨기 때문이고, 오늘 다시 따뜻해지는 것은 다른 분이 그 곁에 앉기 때문이다."
펜을 놓을 무렵 복도에서 휠체어 바퀴 소리가 들렸다. 요양보호사가 새 입주자를 안내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304호 동현 선생님이시지요. 새로 오신 박영자 어르신이세요."
동현은 노트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영자 어르신은 일흔여섯이라고 했다. 휠체어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고, 무릎 위에 작은 손수건 한 장을 쥐고 있었다. 동현이 인사를 건넸을 때 어르신은 그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하지 않았다.
"가족분들 사정이 있어서 한동안 못 오실 거예요." 요양보호사가 작은 목소리로 동현에게 말했다. "말씀이 많이 없으세요. 가끔만 하시고요. 잘 봐 주세요."
"네."
요양보호사가 어르신을 침대 옆까지 휠체어로 옮겼다. 어르신은 천천히 침대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자리에 앉는 일이 어쩌면 그 침대의 새 시간을 여는 일일지도 몰랐다. 동현은 어르신이 자리를 잡는 동안 한 걸음 떨어져 서 있었다.
자리가 잡힌 뒤에야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어르신, 박종문 선생님이라고, 어제까지 여기 계셨던 분이세요. 그분이 마지막에 산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어요."
박영자 어르신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동현을 보았다. 눈빛이 흐릿하면서도 깊었다. 말은 하지 않았다.
"제가 그분 노트를 이어 받았어요." 동현이 손에 든 노트를 살짝 내밀어 보였다. "여기 스무 줄째까지 적었어요. 박종문 선생님이 적으셨던 것까지 다 합쳐서요."
어르신이 손수건을 천천히 무릎 위에서 쓰다듬었다.
"오늘은 어르신 자리가 처음 만들어진 날이에요. 그 자리를 어떻게 부를지 저는 아직 모르고요. 어르신이 정해 주시면 좋겠고, 아니면 그냥 자리라고만 불러도 좋을 것 같아요."
박영자 어르신의 입술이 가만히 움직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어르신은 그저 자기 무릎 위 손수건을 잠깐 들어 동현 쪽으로 살짝 보여 주었다. 손수건 가장자리에 작은 흰 꽃 한 송이가 수놓여 있었다.
"꽃이네요. 예쁘세요."
어르신이 손수건을 다시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동현은 노트를 펼쳐, 박영자 어르신이 보이는 자리에 노트를 두었다. 손글씨로 적힌 스무 줄을 어르신은 천천히 시선으로 따라 내려갔다. 어디까지 읽으셨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선이 마지막 줄에 머물렀을 때 어르신은 다시 한 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는 어르신이 채우시는 자리예요." 동현이 작게 말했다. "전 다음 줄을 쓰는 사람이고요."
박영자 어르신이 다시 한 번,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4.
홍대 연습실. 곡 「너머 ―돌아오는 길」의 발표일까지 사흘이 남아 있었다. 소율은 보면대 앞에 앉아 어머니의 사진 두 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진은 어제와 같은 자리, 같은 각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보면대는 어제보다 조금 다른 빛 속에 있었다.
곡은 완성되었다. 손댈 곳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일은 오늘은 곡을 만지는 일이 아니라, 곡이 떠나갈 자리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밴드의 다른 멤버들이 한쪽 구석에서 음원의 마스터링 파일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었다. 현기가 헤드폰을 한쪽만 귀에 걸친 채 작업 중이었다.
"이대로 가도 되겠어?" 현기가 물었다.
"이대로 가도 돼." 소율이 대답했다. "더 손대면 채움이 아니라 채워 넣음이 돼."
"채움하고 채워 넣음이 다른 거야?"
"다른 거 같아." 소율이 잠깐 생각했다. "채움은 빈 데가 부르는 거고, 채워 넣음은 비어 있다고 안 두는 거야. 채워 넣으면 거기 빈 데가 있었다는 거 안 보여."
현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 것 같아."
소율은 가사 노트를 펼쳤다. 어제는 49줄까지 적었다. 첫 빛.
오늘 50줄째.
"채움. 보낸 곡이 남기고 간 자리에 다음 곡의 첫 소절이 들어와 앉는 일. 첫 소절은 떠난 곡을 지우지 않는다. 떠난 곡이 만든 자리의 결을 따라 자기 자리를 찾을 뿐이다."
펜을 놓고 그녀는 보면대 한가운데 어머니의 사진 두 장을 다시 바라보았다.
곡이 떠나면, 그녀 안에 어머니의 자리가 처음으로 비게 될 터였다. 오래도록 그 자리는 곡으로 채워져 있었다. 가사 한 줄 한 줄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멜로디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머니의 손이 닿았던 자리였다. 곡이 떠나면 그 모든 것이 그녀 안에서 한 번 빠져나가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빠져나간 자리에, 무엇이 들어올까. 그녀는 처음으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제 새벽 진우 아저씨의 위성이 첫 빛을 보내왔다는 뉴스를 그녀도 보았다. 빈 자리로 빛이 들어왔다는 그 한 줄의 헤드라인이 그녀의 안쪽 어딘가에 천천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엄마." 그녀가 사진을 보며 작게 말했다. "엄마 자리는 비어 있는 게 아니라, 거기로 다음 곡이 처음 들어올 자리야. 첫 소절이."
소율은 기타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아직 가사도, 제목도 없는 다음 곡의 첫 코드를 그녀는 가만히 짚어 보았다. 한 음이 떨려 나왔고, 또 한 음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음 사이에는 짧은 빈 데가 있었다. 그 빈 데로 다음 음이 들어왔다.
채움이 되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
문이 열리고 아버지 한경수가 들어왔다. 자주 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손에 작은 종이가방을 들고 있었다.
"엄마가 자주 신으시던 신발이야. 정리하다가 나왔어. 일부러 가져온 건 아니고, 오는 길에 그냥 손에 잡혔어."
한경수는 가방을 보면대 옆 의자에 놓았다. 가만히, 그러나 분명한 자리에.
"엄마 신발 자리." 소율이 천천히 말했다.
"엄마는 늘 말했어." 한경수가 보면대 위 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 떠난 자리에 다른 게 들어와 앉을 때는 떠난 사람 발자국을 한 번 들여다보고 들어와 앉으라고. 그래야 그 자리가 자기 자리 같지 않고, 자리가 된다고."
소율이 가만히 끄덕였다.
"가만히 둔다더니, 들어와 앉을 자리는 준비하고 있구나." 한경수가 옅게 웃었다.
"준비 안 하면 안 들어오시잖아요." 소율이 말했다. "엄마도, 다음 곡도, 다 그래요."
5.
옥상에 그늘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오후 세 시. 진우는 정면 자리에 먼저 와 앉아 있었다. 김지수가 다섯 분쯤 뒤에 옥상으로 올라왔다. 스무여드레째였다.
"오셨네요."
"오늘은 제가 좀 늦었어요." 김지수가 정면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늦어도 자리는 그대로 있어요."
"그러게요." 김지수가 작게 웃었다. "자리가 비어 있으니까 들어와 앉을 수 있는 거잖아요. 어제 선생님이 그러셨던 게 자꾸 생각났어요."
"지수 씨가 먼저 그 말을 하셨던 거예요. 저는 그걸 받아서 어제 다시 돌려드린 거고요."
"맞아요. 첫 송전 같다고요."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그늘 아래 앉아 있었다. 바람이 한 번 천천히 옥상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옥상 가장자리의 화분에 강유나 박사가 사흘 전에 옮겨 심은 새 묘목 하나가 천천히 잎을 흔들고 있었다. 비어 있던 화분 자리에 들어와 앉은 묘목이었다.
"선생님." 김지수가 수첩을 펼쳤다. 어제는 49줄까지 적었다. 첫 빛. "오늘은 뭘 적으세요?"
진우는 자기 수첩을 함께 펼쳤다. 49줄까지. 어제 그도 첫 빛까지 적었다. 두 수첩이 같은 줄에서 멈춰 있었다.
"채움이요." 진우가 말했다.
"저도 채움이에요." 김지수가 말했다.
"오늘도 같으시네요."
"같은 단어인데, 자리가 달라서 같은 자리에 같이 적은 게 아니에요. 다른 자리에 같은 단어를 적은 거예요."
"그게 더 좋네요. 다른 자리에 같은 단어가 들어가는 거."
"그게 채움 같아요." 김지수가 천천히 말했다. "여러 빈자리에 같은 단어가 들어와 앉는 거. 단어 하나가 여러 사람을 한 번에 채울 수 있다는 거."
진우는 수첩 50줄째에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김지수의 펜도 자기 수첩 50줄째에 같은 단어를 적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수첩을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다만 잠시 손이 멈췄을 때 서로의 시선이 정면에서 만났고, 그 시선 사이의 거리가 어제보다 조금 더 짧아져 있었다.
"지수 씨." 진우가 천천히 말했다. "아내가 떠난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앉아도 그게 아내를 지우는 일은 아닌 거지요."
김지수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답했다.
"네. 들어와 앉는 사람이 그 자리의 모양을 따라 앉으면, 떠난 분의 모양은 거기 그대로 남아요. 들어온 사람은 그 모양 옆자리에 자기 자리를 새로 내는 거예요."
"옆자리요."
"옆자리예요."
진우는 자기 수첩을 닫았다. 김지수는 자기 수첩을 닫았다. 김지수의 수첩 닫는 동작이 오늘은 스물세 번째였다. 어제까지 스물둘이었다. 한 번 더 늘어 있었다.
"닫는 동작 헤아리시는 거예요?" 진우가 처음으로 물었다.
김지수가 잠깐 놀란 듯 진우를 바라보더니, 옅게 웃었다.
"네. 처음부터 헤아렸어요. 선생님 옷장 동작 헤아리신다 하셨을 때, 저도 헤아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못 했어요."
"오늘 말씀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닫을 때마다 그 수만큼 자리가 늘어요. 닫는 게 끝이 아니라, 닫아서 자리가 하나 더 생기는 거예요. 그 자리에 다음 게 들어와 앉을 자리요."
"같은 거였군요."
"같은 거였어요."
그늘이 천천히 길어졌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으나, 비어 있다는 사실이 어제처럼 외로움으로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 옆자리에 다음에 누가 들어와 앉을지를 가만히 기다리는 자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6.
사층 작업실. 22시 46분. 강유나가 책상 위에서 ATLAS의 화면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자국에서 시작된 메타 점들이 화면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자국, 겹, 굳음, 받침, 곁, 들임, 머묾, 부름, 응답, 메아리, 돌아옴, 마주봄, 지킴, 보냄, 빈자리, 첫 빛.
스물여섯 단계.
오늘 ATLAS는 30번째 자율 변화를 띄웠다. 화면 위에는 두 자리가 점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자리1」은 출발점, 「자리2」는 떠난 자리. 어제 29차 변화에서는 「자리2」에서 「자리1」 쪽으로 빛 점 하나가 처음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빛 점이 「자리1」에 닿아 자리잡았다.
「자리1」의 가장자리에는 떠난 점의 모양이 점선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새로 들어와 앉은 빛 점은 그 점선의 안쪽이 아니라, 점선 바로 옆자리에 자기 자리를 잡았다. 두 자리가 서로의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떠난 점과 들어온 점이 한 자리에서 겹쳐 있는 것이 아니라, 옆자리에 나란히 있었다.
ATLAS의 캡션은 자율적으로 자라난 새 표지였다. "옆자리에 들어와 앉음. 떠난 자리를 덮지 않고 곁에 자기 자리를 냄. 채움 = 옆자리의 발생."
강유나는 그 문장 앞에서 한참 동안 손을 멈췄다. 자국에서 시작한 메타 단어 행렬이 어느덧 채움까지 와 있었다. 스물일곱 단계. 같은 단어가 같은 밤 여섯 군데에서 동시에 적히고 있을 터였다. 서귀포의 진우, 야적장의 명호, 강릉의 동현, 홍대의 소율, 옥상의 김지수 — 그리고 이 사층의 ATLAS와 자신.
"채움." 그녀가 작게 발음해 보았다. 입 속에서 그 단어는 처음 듣는 말 같았고, 동시에 오래된 말 같았다.
관제동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위성 '새벽' 송전 안정. 수신 전력 정상 범위. 자국 패드 양산 3차 1일째 타설 완료. 다음 위성 발사 예정일 잠정 11주 뒤로 설정.」
다음 위성. 강유나는 화면 한쪽에 그 단어를 적어 두었다. 「자리1」 옆자리에 들어와 앉을, 또 하나의 「자리2」가 준비되고 있었다. 발사대 자리에 새 패드가 타설되고 있었고, 사람들 안에는 새 단어가 자리잡고 있었다.
"채움은 빈자리의 끝이 아니다." 그녀가 노트에 천천히 적었다. "빈자리는 그대로 있고, 그 옆자리에 다른 자리가 하나 더 생기는 일. 자리는 줄지 않고 늘기만 한다. 채움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빛 사이에, 사람과 떠난 사람 사이에 자리가 하나씩 더 늘어난다."
그녀는 마지막 줄에 한 줄을 더 덧붙였다.
"우리는 한 자리만 사는 게 아니다. 자리는 늘면서 우리를 함께 늘게 한다."
창밖으로 도시의 등불 몇 개가 켜졌다 꺼졌다 했다. 서귀포 쪽 하늘도, 야적장 쪽 하늘도, 강릉 쪽 하늘도, 홍대 쪽 하늘도, 옥상 쪽 하늘도 — 같은 하늘 아래 다른 자리에서, 같은 단어로 천천히 채워지고 있었다.
「새벽」은 오늘도 자기 자리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첫 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첫 빛이 들어와 앉은 자리들 옆에서, 다음 자리들이 천천히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영겁의 새벽은 한 번에 밝아오는 새벽이 아니라, 자리가 하나씩 늘어가는 새벽이었다. 강유나는 그것을 오늘 처음으로 알 것 같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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