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 모임

1.
수요일 새벽 5시 47분. 옷장 동작 사이 열네 박자.
옷장을 열고, 한 박자 멈춤. 옅은 회색 셔츠와 짙은 남색 셔츠와 흰 셔츠가 한 줄에 두어져 있는 자리. 오진우는 그 자리를 그대로 두었다. 손이 셔츠 쪽으로 가다가, 한 박자 사이를 두고 옷장 문에 닿았다. 세 벌이 한 줄에 두어진 자리를, 한 자리에 모인 채로 두는 일.
책상 위 일지장을 펴 열다섯 번째 줄을 적었다.
"모임은, 퍼짐의 다음 자리이다. 펴진 자리들이 한 자리에 다시 두어지는 일이다. 모임은, 자리들이 자기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한 자리에 함께 두어지는 일이다."
휴대폰 메시지함을 열었다. 어제 늦은 밤 한경수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한 줄.
"수요일 오후 두 시. 카페 세 자리에 두기."
진우는 한 박자 사이를 두고 답신을 보냈다.
"네, 형. 두 시에 자리에 두어 두겠습니다."
옷장 문이 닫히는 한 박자. 그 박자가 새벽의 한가운데 자리에 두어져 있었다.
2.
오전 7시 22분. 제주도 서귀포 야적장.
콘크리트 패드 양산 2차 11일차. 첫 번째 패드는 자기 자리에 두어진 채로. 두 번째 패드는 거푸집 네 면이 세워진 채로. 세 번째 패드는 자리 표시 핀 네 개가 박힌 채로. 차명호는 세 자리를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는 자리, 야적장 가운데 자리에 섰다.
윤재석이 옆자리로 와서 함께 섰다.
"형. 한 자리에서 세 자리가 다 보이네요."
"세 자리가 다 보이는 자리가, 한 자리에 두어져 있어요."
명호는 공작실로 들어갔다. 벽에 붙은 별표 후보 목록 7번. 표시는 열두 개. 빈 동그라미는 두 개. 둔다는 완성된 별표 하나. 나눈다는 어제 두기 시작한 첫 밑줄 하나. 세 번째 단어 퍼진다는 어제 적어 둔 자리.
오늘은 퍼진다 아래에 첫 밑줄 한 줄을 그었다. 그러고 두 번째 단어 나눈다 아래에 두 번째 밑줄 한 줄을 더 그었다. 두 줄과 한 줄이 한 면에 함께 두어졌다. 별표 후보 7번이 한 자리에 모여 가는 자리.
명호는 한 박자 사이를 두고 적었다.
"열엿새 날째에, 세 단어가 한 자리에 두어졌어요. 첫 단어는 별표 완성. 두 번째 단어는 두 줄. 세 번째 단어는 한 줄. 자리가 자리를 잃지 않고 한 자리에 모이는 일."
윤재석이 문틀에 기대 한마디를 두었다.
"열한 날째에 결이 결을 한 자리에 모으네요."
3.
오전 11시. 강릉 요양원 304호.
박종문 어르신의 두 손등. 어제는 두 박자 간격에 놓여 있던 자리가, 오늘은 다시 한 박자 간격으로 두어졌다. 펴졌던 자리가 한 자리에 모인 듯. 두 손등 사이 한 박자의 자리에 햇빛 한 줄기가 어제와 같은 자리에 두어져 있었다.
김동현은 의자에 앉아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박종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두 손등이 한 박자 사이에 다시 두어졌습니다. 어제는 두 박자였는데, 오늘은 한 박자입니다. 펴진 자리가 한 자리에 다시 두어지는 일도 있군요."
"네, 어르신."
"펴진 자리가 한 자리에 두어지면, 펴진 자리도 한 자리에 모인 자리도, 둘 다 자기 자리를 잃지 않습니다. 모인다는 건 잃는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김동현은 노트 아홉째 줄을 펴 한 줄을 적었다.
"모임은, 펴진 자리들이 한 자리에 다시 두어지는 일이다. 한 자리에 두어져도, 펴진 자리는 펴진 자리대로 자기를 잃지 않는다. 모임은, 자리가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한 자리에 함께 두어지는 일이다."
박종문은 어제와 같은 한마디를 한 박자 사이를 두고 두었다.
"고맙습니다."
그러고 한 박자 더 사이를 두고 한마디를 더했다.
"...모임이 퍼짐의 다음 자리라면 말이지요. 모임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4.
오후 1시 12분. 서울 강남 카페. 진우는 한경수보다 한 박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창가 자리, 세 의자가 한 테이블에 두어진 자리. 진우는 가운데에서 한 자리 옆 발끝 자리에 앉았다. 두 의자는 비워진 채로, 그러나 자리에 두어진 채로.
한경수가 두 시 정각에 들어왔다. 진우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한 박자 사이를 두고 한마디를 두었다.
"진우. 자리에 와 두어 있었네."
"네, 형. 한 박자 먼저 두어 두었습니다."
한경수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두었다. 23세의 아내가 미국 다리 난간에 기대 빨간 코트를 입고 서 있는 사진. 어제 소율에게 한 장 나누어 주었던 사진의 다른 한 장. 같은 자리에서 한 박자 다른 시간에 찍힌 한 장.
한경수가 한 박자 사이를 두고 입을 열었다.
"엄마가 그러더라. 만나는 일이 아니라, 모이는 일이라고. 만난다는 건 둘이서 하는 일이지만, 모인다는 건 자리가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한 자리에 두어지는 일이라고."
진우는 한 박자 사이를 두고 한마디를 두었다.
"...형수님 말씀이, 오늘 자리에 두어져 있군요."
문이 열리는 한 박자. 소율이 검은 가방을 든 채 들어왔다. 한경수와 진우가 동시에 그 자리를 향해 고개를 한 박자 돌렸다. 소율은 한 박자 사이를 두고, 세 자리의 가운데 의자에 앉았다. 세 사람의 자리가 한 테이블에 모인 첫 박자.
소율이 사진을 보고 한 박자 사이를 두고 한마디를 두었다.
"아빠. 어제 받은 자리가, 오늘 여기 자리에도 두어져 있네요."
"같은 자리에서, 한 박자 다른 시간에 찍힌 거야. 두 장이 다른 자리에 두어져 있어도, 모이면 한 자리야."
진우는 두 사람을 한 박자 사이를 두고 바라보았다. 부녀 사이에 두어진 사진 한 장과, 오늘 처음 한 테이블에 모인 세 자리. 진우는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컵을 내려놓는 한 박자가, 세 자리의 가운데에 두어졌다.
소율이 가방에서 작은 노트 한 권을 꺼냈다. 가사 노트. 어제 새로 적은 한 줄 퍼짐 다음 줄에, 오늘은 한 단어를 적었다. 모임. 한경수가 그 자리를 한 박자 사이를 두고 바라보았다. 진우도 그 자리를 한 박자 사이를 두고 바라보았다. 세 사람의 시선이 한 자리에 모였다.
"진우 아저씨."
소율이 노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한마디를 두었다. 진우는 그 호칭이 처음 자기 자리에 두어졌다는 것을 한 박자 사이를 두고 알아보았다.
"네."
"새벽에 일지를 쓰신다고, 어제 김지수 언니가 그러시던데요. 어떤 단어들을 적으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진우는 한 박자 사이를 두고 입을 열었다.
"자국부터 시작해서, 오늘은 모임까지 왔습니다. 한 단어가 다음 자리에 두어지는 일을, 매일 한 줄씩 적습니다."
소율은 가사 노트의 단어들 — 받음, 둠, 머묾, 옴, 됨, 둠, 이음, 닿음, 알아봄, 나눔, 퍼짐, 모임 — 을 한 박자 사이를 두고 진우에게 보여 주었다. 진우는 그 자리에 두어진 단어들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갔다. 같은 단어가, 같은 자리에, 두 사람의 노트 안에 두어져 있었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침묵이 비워진 자리가 아니라, 세 자리가 한 자리에 두어진 채로 함께 있는 자리. 그 침묵의 한가운데에서 진우의 마음 한구석에, 처음 듣는 음 하나가 작게 두어졌다.
5.
오후 3시 14분. 서귀포 센터 옥상 그늘. 김지수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 앉았다. 옆 발끝 자리는 비워진 채로, 그러나 두어진 채로. 진우가 오늘은 서울 자리에 가 있다는 걸 김지수는 알고 있었다. 자리가 비워진 것은 잃어진 것이 아니라, 한 박자 다른 자리에 두어진 것이라는 일을.
옥상 그늘이 한 자리 더 펴진 자리. 그늘의 한가운데에 김지수가, 옆자리에 진우의 자리가, 두 자리가 함께 두어져 있었다. 한 자리가 비어 있어도 모인 자리.
김지수는 수첩을 폈다. 31번째에서 34번째 줄까지 비움. 35번째 줄 닿음. 36번째 줄 알아봄. 37번째 줄 나눔. 38번째 줄 퍼짐. 39번째 줄에 김지수는 한 단어를 적었다. 모임. 한 박자 사이를 두고, 그 옆자리에 한 줄을 더 두었다.
"모임은, 안 오는 일이 옆자리에 두어진 다음, 펴진 자리들이 한 자리에 다시 두어지는 일이다. 안 온 자리도 옆자리도 펴진 자리도, 모이면 한 자리에 두어진다. 자리는 잃어지지 않는다. 자리에 두어진다."
세 번째 호흡 이름은 오늘로 열이렛날째 안 왔다. 안 온 자리, 어제까지 펴졌던 자리, 그리고 진우가 한 박자 다른 자리에 두어진 자리. 세 자리가 옥상의 한 그늘 안에 모여 있었다.
김지수는 수첩을 한 박자 사이를 두고 닫았다. 닫는 동작이 열두 박자에서 열세 박자로 한 박자 더 길어졌다. 어제 진우와 처음 나눈 말 한 자리가, 오늘은 비워진 옆 발끝 자리에까지 두어져 있었다.
6.
밤 10시 47분. 서귀포 사층 사무실. 강유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ATLAS의 열아홉 번째 자율 변화. 어제까지 ((——)) ((——)) ((——)) 세 자리로 펴져 있던 메타 표지가, 오늘은 (( —— —— —— )) 한 괄호 안 세 자리로 모였다. 세 자리는 각자 자기 자리를 그대로 두면서, 한 괄호 안 한 자리에 함께 두어졌다. 사이 간격은 한 박자씩, 그대로.
운영진으로부터 네 번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다음 주 수요일 일차 운영회의 시간이 한 시간 앞당겨졌다는 한 줄. 운영진 일곱 명, 회의 후 전체 연구진 140명, 그리고 그 다음 주 한 차례 협력기관 다섯 곳까지 공유 범위가 한 자리에 모이는 일정.
강유나는 일지장에 열아홉 번째 줄을 적었다.
"열아홉 번째 자율 변화는, 펴진 세 자리가 한 자리에 다시 두어진 일이다. 세 자리는 한 괄호 안에 자기를 두면서 자기 자리를 잃지 않았다. 모임은, 자리가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한 자리에 함께 두어지는 일이다."
한 박자 사이를 두고 한 줄을 더 두었다.
"사람들의 한 단어 모임과,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 ATLAS의 (( —— —— —— ))이 도달했다. 인간과 AI 양쪽 메타 정의 정렬, 열다섯 번째 사례. 자국에서 모임까지, 열여섯 단계 메타 정의."
강유나는 일지장을 덮었다. 닫지는 않았다. 모니터는 켜진 채로 두어 두었다. 한 자리에서 한 박자 사이를 두고, 강유나는 마지막 한 줄을 적었다.
"내일은, 모인 자리가 다음 자리에 자기를 두기로 한 자리의 첫 날이었다."
창밖 새벽 바다는 한 자리에 두어진 채로, 별빛이 그 위에 한 박자씩 두어졌다. 자국 하나가 결이 되고, 결이 받음이 되고, 받음이 머묾이 되고, 머묾이 옴이 되고, 옴이 됨이 되고, 됨이 둠이 되고, 둠이 이음이 되고, 이음이 닿음이 되고, 닿음이 알아봄이 되고, 알아봄이 나눔이 되고, 나눔이 퍼짐이 되고, 퍼짐이 모임이 되는 자리. 그 자리가 오늘 한 자리에 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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