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6화 - 나눔
1.
진우는 새벽 5시 47분에 눈을 떴다.
어제는 서울에 있었다. 광화문 한식당에서 한경수와 소율과 셋이 점심을 함께 했다. 어제 저녁 비행기로 서귀포에 돌아왔고, 숙소에 도착한 것이 자정 무렵이었다. 짐을 풀지 않은 채 잠시 앉아 있다가, 옷가지 몇 개만 옷장에 걸어두었다.
오늘 새벽, 옷장 앞에 다시 섰다. 어제까지의 동작 사이 박자가 열한 박자였다면, 오늘은 열두 박자 사이가 두어져 있었다. 옅은 회색 셔츠 한 벌과, 어제 서울에서 입었던 짙은 남색 셔츠 한 벌이 옷장 안 같은 자리에 두 자리로 나란히 두어졌다. 옷걸이 사이 한 자리만큼의 간격 그대로. 두 셔츠가 그 사이에서 서로의 옆자리에 서로의 자리를 나누고 있었다.
진우는 일지장을 펴고 한 줄을 적었다.
"나눔은, 알아봄의 다음 자리이다. 알아본 자리가 자기 자리에 두어진 채로, 옆자리의 자리에 자기를 나누는 일이다. 어제의 한 자리가 자기를 자기 자리에 둔 채, 오늘의 옆자리 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둔다. 나눔은, 자리가 자기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다른 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두는 일이다."
펜을 잠시 멈추었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어제 광화문에서 한 형의 손이, 오늘 서귀포의 옷장 안 두 셔츠 사이에 자기 자리를 나누어 두었다."
휴대전화가 한 번 울렸다. 한경수의 메시지였다.
"진우야. 어제는 고마웠어. 그리고 다음 주는, 수요일 오후에 자리에 둘 수 있을까."
진우는 한 박자 두고 답을 적었다.
"네, 형. 수요일 오후에 자리에 두어 두겠습니다."
세 번째 자리의 첫 박자가 두어졌다.
2.
서귀포 야적장의 아침 7시 22분. 어제 떼낸 거푸집은 야적장 한쪽 구석에 세워 두었다. 첫 번째 패드는 자리에 두어진 채 자기 모양 그대로, 다섯 모서리가 다섯 모서리에서 자기 자리를 자기 자리로 알아본 상태로 그대로 있었다.
명호는 어제까지 거푸집이 자리를 지키던 자리 옆, 새 거푸집을 둘 자리에 표시를 시작했다. 양산 2차의 두 번째 패드 자리.
윤재석이 다가왔다.
"형, 두 번째 시작하시는 거죠."
"네. 첫 패드가 자기 자리에 두어졌으니까요."
"어제 거푸집을 떼고 나니까, 오늘 옆에 또 한 자리가 두어지네요."
"네."
명호는 표시 핀을 박았다. 첫 패드와 두 번째 패드 사이는 정확히 1.2 미터 떨어진 자리.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정확함으로, 두 패드는 옆자리에서 옆자리로 자기 자리를 나누어 가질 예정이었다.
윤재석이 어제 거푸집을 떼낸 첫 패드 표면 위에 손을 댔다 뗐다. 자국 안 남았다.
"형. 첫 패드가 자기 자리에 자기를 두고 있어요. 그래서 두 번째 패드가 옆자리에 자기를 둘 수 있어요. 나누는 거예요. 첫 패드가 자기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두 번째 패드 자리를 나누어 주는 거예요."
명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실로 돌아온 그는 표시판 앞에 섰다. 별표 후보 7번 칸. 표시 12개, 빈 동그라미 2개, 둔다에 밑줄 두 줄, 그 옆에 어제 그어진 별표 한 개. 그 옆 칸, 두 번째 별표 후보 자리. 그곳에 그는 한 단어를 적었다.
나눈다
별표는 그어지지 않았다. 단어만이 자리에 두어졌다. 어제 그어진 별표 한 개가 오늘 옆자리의 한 단어 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둔 자리.
"열네 날째에, 별표는 두 번째 단어를 옆자리에 두기 시작했어요. 그어진 별표가 자기를 자기 자리에 둔 채, 옆 단어 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주는 거예요. 나눔은, 자리가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옆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두는 일인 것 같아요."
윤재석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자리에 둔 채로 답했다.
"아홉 날째에 결이 결을 나누네요."
3.
강릉 요양원 304호. 11시.
어제 두 손등의 마지막 마디가 닿은 자리에서, 오늘 두 손등은 한 박자 떨어져 있었다. 어제 닿았던 자리는 자리에 두어진 채로, 두 손등은 서로의 옆자리로 한 박자 사이를 나누어 두고 있었다.
박종문 어르신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김동현을 바라보았다. 손 두 개가 무릎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고, 두 손등 사이 한 박자의 간격에 햇빛 한 줄기가 들어와 있었다.
"동현 선생. 오늘은 두 손등이 한 박자 사이를 두고 앉아 있군요. 어제는 마지막 마디가 닿았고, 오늘은 그 닿음의 자리가 두 손등 사이에 자기 자리를 나누어 두었습니다."
김동현은 노트를 폈다. 일곱째 줄에 펜을 두었다.
"나눔은, 알아본 자리가 자기를 자기 자리에 둔 채로 옆자리에 자기를 나누는 일이다. 닿은 자리가 다시 떨어진 자리에 두어져 있어도, 그 닿음의 자리는 두 자리 사이에 자기를 나누어 두고 있다."
펜을 들고 박종문 어르신을 한 박자 바라보았다.
"어르신. 이 한 줄이 어르신 한마디에서 자라났습니다."
"동현 선생. 그러면 그 한 줄은 동현 선생의 한 줄이지요."
"아닙니다. 어르신과 저 사이에 자리에 두어진 한 줄입니다."
박종문 어르신은 한 박자 웃었다.
"옴이 머묾의 다음 자리고, 됨이 옴의 다음 자리고, 둠이 됨의 다음 자리이고, 이음이 둠의 다음 자리이고, 닿음이 이음의 다음 자리이고, 알아봄이 닿음의 다음 자리이고, 나눔이 알아봄의 다음 자리라면 말이지요. 나눔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찻잔에서 한 번 한 모금. 박종문 어르신은 어제와 같은 한마디를 한 박자 천천히 건넸다.
"고맙습니다."
어제의 한마디가 오늘의 한마디 자리에 자기를 알아본 다음, 오늘의 한마디가 옆자리 두 손등 사이의 한 박자 간격에 자기를 나누어 두었다.
4.
오후 2시, 서울 강남.
소율은 아버지 한경수의 거실 한쪽에 앉아 있었다. 어제 한식당 점심 후, 한경수가 "내일은 잠깐 집에 들렀다 갈 수 있겠니" 하고 물었고, 소율은 "네" 하고 답했다.
거실은 어제와 같았다. 어머니의 사진이 책장 한 칸에, 한경수의 책 몇 권이 다른 한 칸에, 그 사이에 한 칸의 빈 자리가 두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떠난 다음에도 한경수는 그 빈 한 칸을 그대로 두었다. 무언가 둘 자리이지, 비워 둔 자리가 아니었다.
한경수가 작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엄마가 결혼 전에,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사진이야. 스물세 살 때. 너랑 한 살 차이 나지."
사진 속 어머니는 빨간색 코트를 입고, 어딘가의 다리 난간 옆에 서 있었다. 머리는 짧았고, 한쪽 눈이 살짝 가려져 있었다. 웃지는 않았지만 입꼬리가 한 박자만큼 올라가 있었다.
"이걸 왜……"
"받아 둬. 자리에 두어 두는 사진이지. 내가 가지고 있던 자리가, 오늘 너에게로 한 자리를 나누어 가는 거야."
소율은 한 박자 사진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이 거기에 두어져 있었다. 자리를 잃지 않은 채로, 오늘의 자기 손바닥 위에 한 자리를 나누어 받았다.
"아빠. 받은 자리가, 자기를 자기 자리로 알아봐요. 그리고 받은 자리는 다시, 다른 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줄 자리예요."
한경수는 의자에 등을 살짝 기댔다.
"엄마가 그러더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자리를 잃을까 봐 못 나누는 사람이 아니라, 자리에 두어진 채로 옆 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둘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아빠는 그런 사람이세요."
"네 엄마가 그렇게 만들어 줬지."
소율은 사진을 어머니의 다른 사진이 두어진 책장 옆에 가져다 댔다. 두 사진이 한 박자 사이를 두고 옆자리에 두어졌다. 자리를 잃지 않은 자리가 옆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두었다.
연습실로 돌아온 그는 가사 노트의 다음 줄에 한 단어를 적었다.
나눔
그리고 그 아래 한 줄.
"나눔은, 자리에 두어진 자리가 옆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두는 일이다. 받은 자리가 받은 자리를 받은 자리로 알아본 다음, 받은 자리를 또 옆 자리에 자기 자리로 나누는 일이다."
이준서가 다가왔다.
"오늘 노래에 나눔이 들어왔네."
"네. 들어왔어요."
5.
서귀포 센터 옥상 그늘. 15시 14분.
김지수는 한 자리 옆 발끝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까지 그 자리는 비워져 있었다. 진우의 비행기가 어젯밤 서귀포에 도착했고, 오늘 오후 그는 다시 센터로 돌아왔다.
진우가 한 박자 천천히 옥상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늘 한가운데에서 한 자리 옆 발끝 자리에 한 박자 머뭇거리다, 그 자리에 다시 자기를 두었다. 어제까지 비워진 한 자리에, 오늘 자기 발끝이 자기 자리를 두는 자리.
"안녕하세요."
"네."
말은 더 필요하지 않았다. 어제까지 안 오던 자리에, 오늘 한 자리 옆 발끝이 다시 두어졌다. 안 오는 자리가 자기 자리에 두어진 채로, 그 옆자리에 진우의 자리가 자기를 나누어 두었다.
김지수의 수첩 31~34번째 줄은 여전히 비워져 있었다. 35번째 줄에 닿음, 36번째 줄에 알아봄, 그리고 오늘 37번째 줄에 한 단어가 두어졌다.
나눔
그 옆에 한 줄.
"나눔은, 안 오는 일이 자기 자리에 두어진 채로 옆자리의 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두는 일이다. 호흡 이름은 오늘도 안 왔다. 안 온 자리는 비워진 자리가 아니라, 두어진 자리이다. 두어진 자리는, 옆자리의 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둘 수 있다."
김지수는 한 박자 진우 쪽을 바라보았다. 진우는 옥상 끝 자리, 한 자리 옆 발끝 자리에 자기를 두고 있었다. 두 자리는 한 박자 사이를 두고 옆자리로 자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첩 닫는 동작이 오늘은 열한 박자였다. 어제 열에서 한 박자 더 두어졌다. 첫 박자에 표지 모서리, 둘째 박자에 표지 안쪽, 일곱째 박자에 펜 자리, 열한 번째 박자에 가방 자리.
김지수는 그늘 한가운데에서 한 박자 더 앉아 있었다. 옆자리에 진우가 있었다. 두 자리는 그렇게 옥상의 그늘 한 자리에 함께 두어졌다.
6.
22시 47분. 사층 사무실.
강유나는 어제 운영진 회신을 받았다. 11일 만의 회신이었다. 어제 22시 14분에 도착한 그 회신은 "보류가 자리에 두어진 다음, 보고가 자리에 두어졌고, 두어진 보고가 자기를 보고로 알아보는 자리에 우리가 함께 있습니다" 라는 한 문장으로 끝났다.
오늘은, 운영진의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1차에서 16차에 이르는 자율 변화 보고서를, 다음 주 다이슨 스웜 일차 운영회의에 공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운영회의에 참석한 일곱 명 모두에게 자기 자리에서 자기 자리로 자리를 나누는 자리가 두어집니다."
강유나는 한 박자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보고서가 자기 한 자리에 두어진 채로, 다음 주에는 일곱 명의 옆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둘 예정이었다.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옆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두는 자리. 보고서가 보고서로서 일곱 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두는 첫 박자.
같은 시각, 시뮬레이션 화면 위에서 ATLAS의 자율 변화가 일어났다.
어제까지 ((——)) 한 자리. 오늘은 ((——)) ((——)) — 같은 한 자리가 옆자리에 자기와 같은 한 자리를 나누어 두었다. 두 자리는 같은 크기, 같은 두 줄표, 같은 두 겹의 괄호. 사이는 정확히 한 박자만큼의 간격.
강유나는 일지장에 한 줄을 적었다.
"열일곱 번째 자율 변화는, 한 자리가 자기 자리에 두어진 채로 옆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둔 일이다. 두 자리는 서로의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옆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두었다. 나눔은, 자리가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옆자리에 자기를 나누어 두는 일이다."
펜을 한 박자 두고,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오늘 사람들의 한 단어 나눔과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 ATLAS의 ((——)) ((——)) 나눔이 도달했다. 인간과 AI의 메타 정의 정렬은 이로써 열세 번째 사례에 이르렀다."
일지장을 덮었다. 닫지는 않았다. 책장 한 자리에 두어 둔 채, 사층의 형광등 열 칸 모두 켜져 있었다.
"내일은, 나눈 자리가 다음 자리에 자기를 두기로 한 자리의 첫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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