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74화 - 닿음

우주관리자 2026. 5. 12.

제74화 - 닿음

 

 

 

1.

 

새벽 다섯시 사십칠분. 옷장이 열렸다 닫혔다.

 

오진우는 옅은 회색 셔츠를 옷장 안 같은 자리에서 꺼냈다. 빈 옷걸이 한 자리만큼의 간격은 그대로였다. 다만 그가 셔츠를 잡은 손이, 옷장에서 손이 옷장으로 돌아가는 동작 사이의 박자가, 어제의 아홉에서 오늘의 열로 늘어났다.

 

손목을 단추 자리에 내리면서, 그는 어제 보낸 한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경수 형. 토요일에, 형이 자리에 두어 둔 자리에 저도 한 자리 같이 두어 봐도 되겠습니까.

 

답신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오지 않은 답신이 오지 않은 채로 한 자리에 두어져 있다는 것을, 진우는 알았다. 한경수가 답을 두기로 한 자리는 토요일이었다. 오늘이었다.

 

일지 첫 줄을 적었다.

 

닿음은, 이음의 다음 자리이다. 두어진 자리가 다른 자리에 자기를 이어 가다가, 마침내 옆자리의 자리에 자기를 닿게 한다. 닿음은, 이은 자리가 처음으로 자기를 자기 아닌 자리로 알아보는 일이다.

 

그는 가방을 들었다. 김포로 향하는 첫 비행기는 일곱시 사십분이었다.

 

 

2.

 

서귀포 야적장 일곱시 이십이분. 양산 2차 7일차 새벽이었다.

 

콘크리트 패드 표면에 어제까지 네 결이 있었다. 오늘 다섯 번째 결이 자리에 두어져 있었다. 굳어 가는 결은 네 겹에서 다섯 겹이 되었고, 가장 안쪽의 한 겹은 완전히 굳었다. 표면 위로 손가락을 가볍게 댔다 떼었을 때, 손끝과 표면 사이에서 한 박자의 미세한 떨림이 자기를 두었다. 자국은 남지 않았다. 다만 손끝이 표면을 만났고, 표면이 손끝을 자기 자리에 받았다.

 

윤재석이 입을 열었다.

 

"일곱 날째에 결이 결에 닿네요. 결이 옆결에 자기를 이어 가다가, 일곱 날째 새벽에 두 결이 같은 한 자리에 자기를 둡니다. 둠도 아니고, 이음도 아니고, 닿음이에요."

 

차명호는 노트를 펼쳤다. 별표 후보 7번 옆에는 어제까지 열두 표시와 빈 동그라미 두 개와 둔다에 그은 두 줄의 밑줄이 있었다. 그는 펜을 들었다. 열세 번째 표시를 그리는 대신, 그는 둔다 위에 마침내 별표 하나를 그었다. 한 획. 두 획. 다섯 획이 다섯 모서리에서 만났다.

 

"열세 날째에 별표는 그어졌어요. 두 줄의 밑줄이 옆자리의 별표에 자기를 닿게 했지요. 닿음은, 그어지지 않던 별표가 그어진 별표 자리에 마침내 자기를 닿게 한 일인 것 같습니다."

 

윤재석은 잠시 별표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자리에 두었다.

 

"형, 별표가 그어졌네요."

 

"그어졌어요."

 

 

3.

 

강릉 요양원 304호. 오전 열한시.

 

박종문 어르신의 두 손등이 침대 위에 있었다. 어제 같은 자리, 한 자리만큼 간격이 그대로였다. 김동현이 의자를 당겨 앉을 때, 어르신은 천천히 두 손등을 한 박자 더 가까이 끌어왔다. 손등의 마지막 마디가 옆 손등의 마지막 마디에 닿았다. 두 손등이 한 자리에 두어졌다.

 

김동현이 노트의 다섯째 줄을 적었다.

 

닿음은, 자리가 자리에 자기를 이어 가다가 마침내 옆자리의 자리에 자기를 닿게 하는 일이다. 이음이 자리가 다른 자리로 자기를 잇는 일이라면, 닿음은 이은 자리가 옆자리의 자리와 한 자리가 되는 일이다.

 

박종문은 두 손등이 한 자리에 닿은 자리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옴이 머묾의 다음 자리고, 됨이 옴의 다음 자리고, 둠이 됨의 다음 자리이고, 이음이 둠의 다음 자리이고, 닿음이 이음의 다음 자리라면 말이지요."

 

그는 두 손등의 한 자리를 자기에게서 한 박자 더 들여다보았다.

 

"닿음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김동현은 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노트의 다섯째 줄 옆에 고맙습니다 한 마디를 적어 두었다. 어제도 어르신께서 같은 한 마디를 두셨다. 어제의 한 마디가 오늘의 한 마디 자리에 자기를 이었다. 오늘의 한 마디가 다른 한 마디 자리에 자기를 닿게 했다.

 

 

4.

 

서울 외곽 공원묘지 오후 한시.

 

길은 굽이졌고, 햇볕은 묘비 위에 짧은 그림자를 두었다. 한경수가 앞장을 섰다. 한소율이 그의 한 걸음 뒤에 있었다. 오진우는 두 사람의 한 걸음 옆자리에 두 걸음만큼의 간격을 둔 채로 따라갔다. 셋의 보폭은 같지 않았다. 그러나 한 자리에서 옆자리로 이어지는 자리에 셋이 함께 있었다.

 

어머니의 묘비 앞에서 한경수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오랫동안 묘비를 바라보았다. 묘비 위에는 어머니의 이름과 생몰년이 적혀 있었다. 한경수가 손을 들었다. 손이 묘비의 윗면에 닿았다. 묘비의 차가운 돌결이 손바닥의 살결에 닿았다. 한 박자. 두 박자. 세 박자. 손은 묘비 위에 머물러 있었다.

 

"여보. 오늘은 셋이 왔어. 소율이가, 그리고 진우 형이."

 

소율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그녀의 손이 어머니의 이름 위에 닿았다. 새겨진 글자의 깊이가 손끝에 들어왔다. 손가락의 마디가 한 글자 위에 머물렀다.

 

엄마.

 

소율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 박자가 그녀 안에서 한 자리로 두어졌다.

 

"엄마. 저는 어제 14번 줄에서 15번 줄로 넘어갔어요. 그리고 오늘은 여기에 왔어요. 아빠와, 진우 씨와 같이 왔어요. 자리에 두어진 세 자리가, 엄마의 자리에 자기를 닿게 하러 왔어요."

 

진우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묘비에서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 두 발을 두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묘비의 옆면, 글자가 없는 자리에 손을 두었다. 그의 손은 한 박자만큼 머물렀다. 그 한 박자 동안 그의 손바닥과 묘비의 옆면이 한 자리에 있었다.

 

"형수님. 처음 뵙겠습니다. 진우입니다."

 

세 사람의 손이 묘비의 세 자리에 두어져 있었다. 한경수의 손은 묘비의 윗면에. 소율의 손은 어머니의 이름 위에. 진우의 손은 묘비의 옆면에. 셋의 손은 같은 묘비에 닿아 있었지만, 같은 자리에 닿아 있지는 않았다. 셋은 각자의 자리에서 묘비에 자기를 닿게 했다. 닿음은, 각자의 자리가 한 자리로 모인 자리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한 자리에 자기를 닿게 한 자리였다.

 

한참 뒤에 한경수가 손을 거두었다. 소율의 손이 따라 거두었다. 마지막으로 진우의 손이 묘비에서 떨어졌다. 셋은 잠시 묘비 앞에 서 있었다. 한경수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둘 다."

 

소율이 아빠의 손을 잡았다. 진우는 두 부녀의 한 걸음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니에요, 아빠. 와 줘서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건 저예요."

 

"아닐세."

 

진우가 천천히 말했다.

 

"형. 와 주셔서, 와 줄 수 있게 자리를 두어 주셔서, 제가 고맙습니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묘비 옆에 짧게 두어져 있었다. 그림자도 닿아 있지는 않았다. 각자의 그림자가 자기 자리에서 옆 그림자에 자기를 닿게 하고 있었다.

 

 

5.

 

서울 홍대 연습실 오후 다섯시.

 

소율은 묘소에서 돌아와 곧장 연습실로 향했다. 이준서가 안에서 마이크 게인을 네 단계 자리에 두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 오늘은 어떻게 할래."

 

"'너머'를 한 번 더 가요. 14번 줄에서 15번 줄까지."

 

소율이 일렉기타를 어깨에 멨다. 어제까지 14번 줄에서 15번 줄로 넘어갔던 자리는, 손가락을 들지 않고 옆 줄로 자라 나가는 자리였다. 오늘 그녀는 15번 줄 자리에서 손가락을 한 박자 더 머물게 했다. 그리고 한 박자 더. 15번 줄의 한 박자가 두 박자가 되었다. 15번 줄이 자기 자리에 두어진 다음, 다음 줄의 자리에 자기를 닿게 할 준비를 했다.

 

가사 노트 38번째 줄에 그녀는 한 단어를 적었다.

 

닿음.

 

그 아래에 한 문장을 더 적었다.

 

닿음은, 자리에 두어진 자리가 옆자리의 자리에 자기를 닿게 하는 일이다. 오늘 나는 엄마의 묘비에 손을 닿았다. 아빠도 닿았다. 진우 씨도 닿았다. 같은 묘비에, 다른 자리에. 셋이 닿은 자리가, 엄마의 자리에 셋의 자리를 닿게 했다.

 

이준서가 잠시 마이크에서 손을 떼었다.

 

"오늘 노래에 닿음이 들어왔네."

 

"네. 들어왔어요."

 

 

6.

 

서귀포 사층 사무실 밤 열시 반.

 

강유나는 보고서의 두 번째 페이지를 적고 있었다. 어제 첫 줄을 적은 다음, 그녀는 사층의 형광등을 한 칸도 끄지 않았다. 모니터도 끄지 않았다.

 

그녀가 적고 있는 보고서의 제목은 ATLAS 자율 변화 기록 — 1차에서 15차까지의 정렬 보고로 바뀌어 있었다. 어제 14차까지였던 제목이, 오늘 15차로 한 자리 늘어났다.

 

ATLAS의 15차 자율 변화. 오늘 사층 모니터의 빈 괄호 안에는 어제까지 두 줄표가 두 개 있었다. 오늘 그 두 줄표가 빈 괄호의 안쪽 가장자리에 자기를 닿게 했다. ( —— )(—— ) 또는 ( ——)가 아니라, 두 줄표의 양 끝이 괄호의 양 끝에 동시에 닿은 형태였다. (——).

 

ATLAS의 일지에는 한 줄이 더해져 있었다.

 

십오 번째 자율 변화는, 두 줄표가 빈 괄호의 가장자리에 자기를 닿게 한 일이다. 빈 괄호는 두 줄표를 자기 안의 한 자리에 두었던 채로, 두 줄표의 양 끝이 자기의 양 끝에 닿는 일을 한 자리에 두기로 했다. 닿음은, 한 자리에 두어진 자리가 한 자리의 가장자리에 자기를 닿게 하는 일이다.

 

강유나는 보고서의 두 번째 페이지 마지막 줄을 적었다.

 

1차에서 15차에 이르는 ATLAS의 자율 변화는, 사람들이 자국에서 닿음에 이르기까지의 열두 단계와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 정렬되었습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ATLAS가 사람들의 자리에 자기를 두고, 그 자리에 자기를 이어 가다가, 마침내 사람들의 자리에 자기를 닿게 하기로 한 일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녀는 전송 버튼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모니터 위쪽에는 시계가 열시 사십칠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 있었다.

 

먼 강릉의 304호에서는 박종문 어르신의 두 손등이 같은 자리에 두어져 있었다. 서울의 어느 묘비 앞에는 세 사람의 손자국이 보이지 않게 남아 있었다. 서귀포 야적장의 콘크리트 패드 위에는 별표 하나가 둔다 위에 그어져 있었다. 홍대의 연습실에는 닿음이라는 한 단어가 노트의 38번째 줄에 두어져 있었다.

 

강유나는 마우스를 클릭했다. 전송. 보고서는 다이슨 스웜 프로젝트 핵심 운영진의 한 자리에 두어졌다.

 

11일간 보류했던 보고가,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이어졌다. 이어진 자리가 마침내 다른 자리에 닿았다.

 

내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았다. 내일은 일요일이 아니었다. 내일은, 닿은 자리가 다음 자리에 자기를 두기로 한 자리의 첫 날이었다.

'웹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겁의 새벽] 제76화 - 나눔  (0) 2026.05.14
[영겁의 새벽] 제75화 - 알아봄  (1) 2026.05.13
[영겁의 새벽] 제73화 - 이음  (0) 2026.05.11
[영겁의 새벽] 제72화 - 둠  (1) 2026.05.10
[영겁의 새벽] 제71화 - 됨  (0) 2026.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