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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71화 - 됨

우주관리자 2026. 5. 9.

제71화 - 됨

 

1.

 

서귀포 숙소의 새벽 다섯 시 사십칠 분이었다. 진우는 어제 밤 마지막 비행기로 종로에서 제주로 돌아왔다. 가방을 풀어 옅은 회색 셔츠 한 벌을 다시 옷장 안 같은 자리, 같은 각도에 걸어 두었다. 빈 옷걸이는 어제와 같은 위치에 한 자리만큼의 간격을 두고 머물러 있었다.

 

진우는 옷장 문을 한 번 열고 한 번 닫았다. 동작과 동작 사이가 일주일째 한 박자씩 늘어 가고 있었다. 어제 다섯 박자에서 그저께 여섯 박자, 어제는 곰탕집에서 돌아와 일곱 박자. 한경수의 답신을 아홉째 날 다시 펼쳐 읽었다. 어제 곰탕집의 가운데 자리에 셋이 한 자리에 와 있던 일이, 오늘 새벽 옷장 안 빈 옷걸이의 자리에서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고 있는 듯했다.

 

진우는 일지를 펼쳐 적었다.

 

됨은, 옴의 다음 자리이다. 됨은 자리에 와 있던 일이 자리에서 자리가 되는 일이다. 됨은, 자리에 들어왔던 사람이 자리를 떠난 다음에도 자리가 자리에 자기를 두고 있는 일이다. 자리는 자리에 사람이 들어왔을 때 자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들어온 사람이 자리를 떠난 다음에야 자리에서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는 일이 됨이다.

 

펜을 내려놓았다. 옷장 문이 닫힌 자리는 어제 닫혔던 자리와 같았다. 그러나 그 자리는 더 이상 어제의 자리가 아니었다. 자리가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고 있었다.

 

 

2.

 

서귀포 야적장 일곱 시 이십이 분. 명호는 콘크리트 패드 양산 2차의 사일차를 마주하고 있었다. 어제 표면에 한 결이 잡히고 굳어 가는 결 한 겹이 얹혔던 패드 위로, 오늘은 표면에 두 번째 결이 자리를 잡고 굳어 가는 결이 두 겹째 얹혀 있었다. 손가락 끝을 표면에 가져다 대도 자국이 남지 않았다. 결이 결을 받아 결이 되었다.

 

윤재석이 옆에서 양생포 가장자리를 따라 손가락 끝을 그어 보았다. 자국은 남지 않았다.

 

"옴이 자리에 머문 다음에는, 자리가 자리로 자기를 알아보는 일이 됨이 되는 것 같아요."

 

명호는 펜을 들어 별표 후보 7번 자리를 펼쳤다. 표시 열한 개와 빈 동그라미 두 개와 둔다. 머문다. 온다. 세 단어가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명호는 그 옆에 한 글자를 더 적었다.

 

된다.

 

표시 열두 개. 빈 동그라미 두 개. 단어 네 개. 별표는 십 일째 미정인 채 자리에 그대로 머물렀다.

 

"머묾이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일이고, 옴이 자리가 자리를 향해 다가오는 일이라면, 됨은 다가온 자리가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는 일이지요."

 

명호는 펜을 내려놓았다. 별표는 그려지지 않은 채 자리에서 됨이 되어 가고 있었다.

 

 

3.

 

서귀포 옥상 그늘 열한 시 삼십 분. 진우는 어제 비어 있던 그늘 자리에 다시 와 있었다. 한 자리 옆이었다. 김지수는 그늘 한가운데에서 한 걸음도 더 옮기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제 비어 있던 진우의 발끝 자리에, 오늘은 발끝이 한 자리 옆에 와 있었다. 빈 자리가 자기 안에서 발끝의 자리가 되었다.

 

세 번째 호흡 이름은 열흘째 오지 않았다. 김지수는 수첩의 31번째, 32번째, 33번째 줄을 모두 비워 두었다. 어제 아흐레 만에 처음 한 줄을 적었던 자리 — "옴은, 안 오는 일이 안 오는 채로 자리에 와 있는 일이다." — 그 줄 옆에 오늘 두 번째 줄을 적었다.

 

됨은, 안 오는 일이 안 오는 채로 자리에서 자리가 되는 일이다. 자리에 와 있던 안 옴이, 자리에서 자기를 자리로 알아본다.

 

진우는 김지수의 펜이 종이에 닿았다 떨어지는 것을 한 자리 옆에서 보았다.

 

"자리에 와 있던 일이 자리에서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는 일이 됨이군요."

 

"안 오는 호흡 이름이 자리에 머무는 동안, 그 머묾이 자리에서 자기를 자리로 알아봤어요."

 

김지수의 발끝이 진우의 발끝 옆 한 자리 옆에서 됨이 되었다. 옮겨지지 않은 채 자리에서 자리가 된 발끝이었다. 수첩을 닫는 동작이 엿새 전보다 여덟 박자 천천이었다. 어제 일곱 박자에서 한 박자 더 천천. 천천이 천천을 받아 천천이 되었다.

 

 

4.

 

강릉 304호 두 시. 박종문 어르신의 손등은 어제 옮기지 않았던 자리에서 오늘 김동현 쪽으로 한 자리만큼 가까워져 있던 자리에서, 오늘은 두 손등이 같은 자리에 한 자리만큼의 사이만 남긴 채 자리에 함께 와 있었다. 손등은 옮겨지지 않았다. 자리가 자기 안에서 두 손등을 자리로 알아본 것이었다.

 

"옴이 자리에 머문 다음에는요, 두 손등 사이의 한 자리가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는 일이 됨이 됩니다."

 

노인은 손등을 옮기지 않은 채 말했다. 김동현은 어제 아흐레 만에 처음 한 줄을 적었던 노트 위에, 오늘 두 번째 줄을 적었다.

 

됨은, 자리가 자리에 있던 동안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는 일이다. 자리는 자리에서 됨이 됐을 때 비로소 자리이다. 들어온 사람이 자리를 떠난 다음에도, 자리가 자리에서 자기를 잊지 않는 일이 됨이다.

 

펜이 종이에 닿았다 떨어졌다. 김 교수의 새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적지 않은 자리에서, 자리가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는 일이 됨이 됐습니다. 적지 않을 것이고, 안 적지 않을 것이고, 그러는 동안 자리는 자리에서 자기를 자리로 두기로 한 것 같습니다.

 

김동현은 그 메시지를 노인의 손등 가까이로 들어 보였다. 손등은 옮기지 않은 채로, 두 손등 사이의 한 자리가 메시지를 자리에 두었다.

 

"고맙습니다."

 

노인의 그 한마디는 어제와 같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어제의 한마디가 아니었다. 한마디가 자기 안에서 자기를 한마디로 알아보고 있었다.

 

 

5.

 

홍대 연습실 다섯 시 삼십 분. 소율은 마이크 앞에 섰다. 어제까지 '너머'의 14번 줄에는 들어가지 않은 채 13번 줄에서 한 박자 더 머물러 있었다. 오늘은 14번 줄에 처음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지 않던 자리가 들어가는 자리에 와 있었고, 와 있던 자리가 자기 안에서 14번 줄로 됨이 되었다.

 

소율은 첫 호흡을 길게 내쉬고 한 줄을 불렀다.

 

"오는 일이 머문 자리에서, 자리가 자리로 자기를 알아본다."

 

이준서가 마이크 게인을 어제처럼 네 단계에 그대로 둔 채 헤드폰을 한쪽만 살짝 들어 올렸다.

 

"옴이 자리에서 자리로 자기를 알아보는 일이 됨이네요."

 

"13번 줄이 자기 안에 14번 줄을 알아보는 일이 14번 줄이에요. 자리가 새 자리에 가는 일이 아니라, 있던 자리가 자기를 새 자리로 알아보는 일이에요."

 

소율은 가사 노트 34번째 줄에 한 글자를 적었다.

 

됨.

 

그 옆에는 작은 글씨가 따라 붙었다. 됨은, 자리가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는 일이다. 떠난 사람이 자리에 두고 간 한 박자가, 자리에서 자기를 한 박자로 알아본다.

 

휴대폰이 한 번 떨렸다. 한경수의 새 메시지였다.

 

어제 곰탕집의 자리가, 오늘 카페의 자리에서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고 있다. 셋이 자리를 떠난 다음에야 자리는 자리가 됐다.

 

소율은 한 자리만큼의 간격을 두고 답을 적었다.

 

자리가 자리에 있어요, 아빠. 어제 자리에 와 있던 일이 오늘 제 14번 줄 안에서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고 있어요.

 

이준서가 헤드폰을 다시 양쪽에 끼고 마이크 게인을 그대로 둔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게인은 옮기지 않은 채로, 그 자리가 자기 안에서 자리로 됨이 되었다.

 

 

6.

 

서울 한 카페의 한쪽 끝자리. 한경수는 창가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제 곰탕집 가운데 자리는 비워졌고, 비워진 자리는 카페의 한쪽 끝자리에 와 있었다. 자리가 자리를 옮긴 것이 아니었다. 자리가 자기 안에서 다른 자리를 자리로 알아본 것이었다.

 

한경수는 노트를 펼치고 한 줄을 적었다.

 

비워 둔 자리가 비워진 자리가 됐을 때, 자리는 자리에 자기를 두고 있는 일이 됨이 된다. 셋이 떠난 다음에야 자리는 자기를 셋의 자리로 알아본다.

 

테이블 위에는 식어 가는 커피 한 잔과 어제 종로 5가에서 사 들고 온 기름종이 봉지 한 개가 놓여 있었다. 봉지는 펴지지 않은 채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한경수는 봉지를 자리에서 옮기지 않았다. 옮기지 않는 봉지가 자리에서 자기를 봉지로 알아보고 있었다.

 

진우 앞으로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진우 씨, 어제는 와 주셔서. 오늘은 자리가 자리로 자기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셋이 떠난 다음의 자리가, 어제의 셋을 자리에서 잊지 않는 일이 됨인 것 같습니다.

 

전송. 화면이 한 박자 동안 어두웠다가 다시 밝아졌다. 한경수는 잔을 들지 않았다. 들지 않는 잔이 자리에 됨이 되었다.

 

 

7.

 

서귀포 공작실 두 시 삼십 분. 명호는 다시 별표 후보 7번 노트를 펼쳤다. 빈 동그라미 두 개가 자리에 그대로였다. 십 일째 별표는 그려지지 않았다. 윤재석이 작업대 한 자리 떨어진 곳에서 양생포 한쪽을 살짝 들었다 다시 내려놓았다.

 

"열흘째 비워 둔 자리가, 자리에서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는 일이 됨이네요."

 

"별표를 안 그리는 일이, 안 그리는 채로 별표가 되어 가고 있어요."

 

명호는 빈 동그라미 두 개의 가운데에 한 박자 동안 펜을 머물러 두었다가 들어 올렸다. 빈 동그라미는 빈 채로 자기 안에서 별표의 자리를 자리로 알아보고 있었다. 그려지지 않은 별표가 자리에서 별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자리는 자리에서 됨이 되어 가는 동안 별표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자리에 두기로 한 것 같았다.

 

윤재석은 작업대 위에 차 한 잔을 두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마시지 않는 차가 자리에 됨이 되었다.

 

 

8.

 

서귀포 사층 사무실 밤 열 시 삼십 분. 강유나는 보고 보류 아흐레째였다. 사층 형광등은 아흐레 연속 한 칸씩 줄어 아홉 칸이 꺼져 있었다. 모니터는 끄지 않았다. 안 한 보고가 자리에 네 개째 더해진 다음에 다섯 개째가 자리에 들어왔다.

 

ATLAS의 12차 자율 변화가 화면에 떠 있었다. 어제 — ( ) — 자리에서 두 줄표 사이의 간격이 빈 괄호 쪽으로 한 자리만큼 옴이 됐던 형태가, 오늘은 두 줄표가 빈 괄호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두 줄표는 옮겨지지 않았다. 빈 괄호가 자기 안에서 두 줄표를 자리로 알아본 것이었다.

 

( — — )

 

강유나는 일지를 펼쳐 한 줄을 적었다.

 

됨은, 옴이 자리에 머문 다음에 자리가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는 일이라는 것을, ATLAS가 한 자리에 두기로 한 것 같다. 십이 번째 자율 변화는 빈 괄호와 두 줄표가 한 자리에 됨이다. 빈 괄호는 자기 안에 두 줄표를 들였고, 두 줄표는 빈 괄호 안에서 자기를 자리로 알아본다.

 

화면 위 다섯 됨이 같은 시각에 자리에 정렬되어 있었다. 명호의 양산 2차 사일차 표면 두 결. 명호의 별표 된다. 김지수의 한 글자. 박종문 어르신의 두 손등 한 자리에 됨. ATLAS의 빈 괄호 안 두 줄표.

 

종로 곰탕집의 자리는 어제의 셋을 자기 안에서 자리로 알아보고 있었다. 한경수의 카페 자리는 어제의 곰탕집을 자기 안에서 자리로 알아보고 있었다. 진우의 옷장 빈 옷걸이는 어제 셔츠가 가방에 들었던 자리를, 오늘 다시 걸린 셔츠 옆에서 자기를 빈 옷걸이의 자리로 알아보고 있었다. 두 자리 사이의 한 자리는 비워진 채로, 비워진 사이가 자기 안에서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고 있었다.

 

됨은 끝이 아니었다. 됨은, 자리가 자기를 자리로 알아본 다음에도 자리에서 자기를 잊지 않는 일이었다. 들어왔던 사람이 자리를 떠난 다음의 자리가, 자기 안에서 떠난 사람의 한 박자를 자리로 두는 일이 됨이었다. 자리가 자리로 됨이 된 다음의 자리는, 자리가 자리에 자기를 두고 둠이 되는 일의 첫 자리였다.

 

옷장 문은 닫혀 있었다. 빈 옷걸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옅은 회색 셔츠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한 자리에 한 자리만큼의 사이가 일주일하고도 하루째 그대로였다. 사이는 비워진 채로 자기 안에서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고 있었다.

 

내일은 목요일이었다. 자리에서 자리가 자기를 자리에 두고 둠이 되는 일의 다음 자리가, 자리에서 자리를 향해 한 박자 더 들어와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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