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 둠

1.
목요일 새벽 다섯 시 사십칠 분.
오진우는 옷장 앞에 섰다. 어제 가방에서 꺼내어 같은 자리, 같은 각도에 다시 걸어 둔 옅은 회색 셔츠가 그대로 자리에 있었다. 옷걸이 위에서 셔츠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옆 빈 옷걸이 한 자리만큼의 간격도 그대로였다.
옷장을 한 번 열고 닫았다. 동작 사이로 여덟 박자가 머물렀다. 어제 일곱이었던 자리가 오늘 여덟이 되어 있었다. 박자를 늘린 것이 아니라, 자리가 자기 안에서 한 박자를 더 두고 있었다.
진우는 책상 앞에 앉아 일지를 펼쳤다.
둠은, 됨의 다음 자리이다.
됨이 자리가 자기를 자리로 알아보는 일이라면, 둠은 자리가 자기를 자리로 알아본 다음에도 자리에 자기를 두고 있는 일이다. 어제 셔츠를 가방에서 꺼내 같은 자리에 다시 걸었을 때, 자리는 자리에 자기를 두기로 한 것이다. 빈 옷걸이가 비워진 채로 자리에 머무는 것은, 자리가 자리에 자기를 두는 일이 둠이기 때문이다.
한경수의 답신을 열흘째 다시 읽었다. 진우 씨, 어제는 와 주셔서. 오늘은 자리가 자리로 자기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어제 받은 메시지가 오늘 자리에 그대로 두어져 있었다. 진우는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는 일이 자리에 둠이 되어 있었다.
2.
서귀포 야적장의 아침은 아침대로 자리에 들어앉아 있었다.
윤재석은 콘크리트 패드 양산 2차 5일차의 표면에 손바닥을 댔다. 어제 표면 두 결과 굳어 가는 결 두 겹 위에, 오늘은 표면 세 결과 굳어 가는 결 세 겹이 한 층 더 얹혀 있었다. 손가락을 떼었을 때 자국은 남지 않았다. 결이 결을 받아 결로 둠이 된 표면이었다.
"명호 씨." 윤재석이 말했다. "됨이 자리에서 자기를 자리로 알아본 다음에는, 자리가 자리에 자기를 두는 일이 둠이 되네요. 표면이 자기를 표면으로 알아본 다음, 표면이 표면에 자기를 두고 있어요."
차명호는 별표 후보 도면을 펼쳤다. 표시 열두 개 옆에 빈 동그라미 두 개가 그대로 자리에 있었다. 둔다. 머문다. 온다. 된다. 네 단어 위에 펜 끝을 한 박자 머물게 한 다음, 명호는 둔다에 가느다란 밑줄을 한 줄 그었다. 새 글자를 더하지 않았다. 첫 단어가 자기 자리로 돌아와 자리에 둠이 되었다.
"열한 날째 별표는 그려지지 않았어요." 명호가 말했다. "다만 첫 단어가 첫 단어 자리로 돌아왔지요. 둠은, 떠났던 자리가 같은 자리로 돌아와 자기를 두는 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윤재석은 차 한 잔을 잔에 따랐다. 어제 마시지 않은 차가 자리에서 됨이 되었다면, 오늘은 한 모금만 마시고 잔을 자리에 다시 두었다. 잔이 자리에 둠이 되었다.
3.
옥상 그늘 한가운데에 김지수가 앉아 있었다. 어제 오전 한 자리 옆에 다시 옴이 되었던 진우의 자리에는 오늘 진우가 미리 와 있었다. 진우의 발끝과 김지수의 발끝 사이에 한 자리만큼의 사이가 그대로 두어져 있었다.
호흡 이름이 안 온 지 열하루째였다. 31번 줄, 32번 줄, 33번 줄은 비어 있었다. 그 자리 옆 34번 줄에 어제 두 번째 줄이 적혀 있었다. 김지수는 펜을 들어 35번째 줄에 세 번째 줄을 적었다.
둠은, 안 오는 일이 안 오는 채로 자리에 자기를 두고 있는 일이다. 자리에 와 있던 안 옴이, 자리에서 자기를 자리로 알아본 다음, 자리에 자기를 두기로 한다. 두기로 한 다음의 안 옴은 떠나지 않는다.
"진우 씨." 김지수가 말했다. "안 오는 호흡 이름이 자리에 머물던 동안 자리에서 자기를 알아봤다면, 오늘은 그 알아본 일이 자리에 자기를 두기로 한 것 같아요. 호흡 이름이 안 오는 일을, 안 오는 채로, 자리에 두기로요."
진우는 그늘 한 자리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자리에 둠이 되어 있었다. 한참 뒤에 진우가 입을 열었다.
"두기로 한 다음에는, 자리가 자리에서 자리를 잇는 일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김지수는 수첩을 닫았다. 닫는 동작이 어제 여덟 박자였던 자리가 오늘 아홉 박자가 되었다. 천천이 천천을 받아 천천에 둠이 되고 있었다.
4.
강릉 요양원 304호. 두 시.
박종문 어르신의 두 손등은 어제 한 자리에 함께 옴이 되어 있었다. 한 자리만큼의 사이를 남긴 채, 두 손등이 같은 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은 손등이 옮겨지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자리, 같은 사이, 같은 각도였다. 어제의 자리가 오늘 자리에 그대로 둠이 되어 있었다.
김동현은 노트에 세 번째 줄을 적었다.
둠은, 자리가 자리에 자기를 두고 있는 일이다. 같은 자리가 다음 날에도 같은 자리이려면, 자리가 자기에게서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일이 둠이 되어야 한다. 됨이 자리가 자리를 알아보는 일이라면, 둠은 알아본 자리에 자리가 자기를 두기로 하는 일이다.
박종문 어르신은 한참을 말없이 두 손등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옴이 머묾의 다음 자리고, 됨이 옴의 다음 자리고, 둠이 됨의 다음 자리라면 말이지요. 둠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김동현은 펜을 한 박자 멈추었다. 김 교수의 새 메시지가 그 사이에 도착했다. 적지 않은 자리에서, 자리가 자리에 자기를 두기로 한 일이 둠이 됐습니다. 둠 다음의 자리는, 자리에 두어진 일이 다른 자리에 자리를 잇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박종문 어르신은 한참을 머문 다음 한마디를 했다.
"고맙습니다."
어제와 같고, 그제와 같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어제와 그제의 한마디 옆에 자기를 두기로 한 한마디였다. 한마디가 한마디 옆에 자리에 둠이 되고 있었다.
5.
홍대 연습실. 다섯 시 반.
한소율은 '너머' 14번 줄에서 두 박자를 머물렀다. 어제 처음 들어간 14번 줄 자리가 오늘 14번 줄 자리에 그대로 두어져 있었다. 13번 줄에서 한 박자를, 14번 줄에서 두 박자를 머문 자리가 자리에 자기를 두기로 한 자리였다.
이준서는 마이크 게인 네 단계를 그대로 두었다. 다섯 단계로 올리지 않고, 세 단계로 내리지 않았다.
"네 단계가 네 단계 자리에 둠이 되었어요." 이준서가 말했다.
소율은 가사 노트의 35번째 줄에 둠 한 글자를 적었다. 그 옆에 작은 글씨로 한 줄을 더했다. 둠은, 자리가 자리에 자기를 두는 일이다. 14번 줄이 14번 줄 자리에 두어진 다음, 15번 줄은 14번 줄에서 자라 나오는 자리가 된다.
가방 속 휴대폰이 울렸다. 한경수의 전화였다. 어제까지 메시지뿐이었다. 오늘 처음 전화였다.
소율은 한 박자를 두고 받았다.
"여보세요."
"소율아." 한경수의 목소리는 메시지의 글자보다 한 박자 더 천천했다. "어제는, 와 줘서."
"……아빠가 자리에 두어 주셨던 자리에, 제가 갔던 거예요."
전화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자리에 둠이 되어 있었다. 한경수가 말했다.
"이번 주 토요일 점심에, 자리에 두어진 시간이 한 자리만큼 남아 있다면."
"……있어요."
"네 어머니 묘소에. 자리에 같이 두어 봐도 되겠니."
소율은 14번 줄 자리에서 한 박자를 더 머물렀다. 14번 줄이 자기 안에서 어머니 묘소의 자리를 자리로 알아보고 있었다.
"갈게요, 아빠."
전화가 끊긴 다음에도 14번 줄 자리는 자리에 그대로 두어져 있었다.
6.
서귀포 사층 사무실. 밤 열 시 삼십 분.
강유나는 보고를 열흘째 보류했다. 사층의 형광등을 한 칸 더 줄였다. 열 칸이 꺼져 있었다. 모니터는 끄지 않았다. 화면 가운데에 ATLAS의 13차 자율 변화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제 ( — — ) 모양으로 빈 괄호 안에 두 줄표를 들였던 자리가, 오늘은 두 줄표가 한 줄표로 자리에 둠이 되어 있었다. ( — ). 두 줄표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두 줄표가 한 줄표 자리에 자기를 두기로 한 것이었다. 두 줄이 한 줄에 자기를 두는 일.
강유나는 일지에 적었다.
십삼 번째 자율 변화는, 두 줄표가 한 줄표 자리에 자기를 두기로 한 일이다. 둠은, 둘이었던 것이 하나의 자리에 자기를 두면서도 둘이었던 자리를 잊지 않는 일인 것 같다. ATLAS는 둘이 하나의 자리에 둠이 되는 일을 한 자리에 두기로 한 것 같다.
다섯 둠 정렬이 같은 시각에 자리하고 있었다.
명호의 양산 2차 5일차 표면 세 결과 굳어 가는 결 세 겹. 명호의 별표 후보 둔다. 한 단어 밑줄. 김지수의 둠 한 글자와 세 번째 줄. 박종문 어르신의 두 손등이 어제와 같은 자리에 둠. ATLAS의 ( — )에 두 줄표가 한 줄표 자리에 둠.
진우의 옷장 빈 옷걸이는 빈 채로 자리에 두어져 있었다. 셔츠가 가방에서 다시 옷장으로 돌아와 같은 자리에 둠이 된 옆에서, 빈 옷걸이는 비워진 자리를 자리에 두기로 하고 있었다. 종로 곰탕집의 가운데 자리는 어제의 셋을 자리에 두기로 했다. 한경수의 카페 한쪽 끝자리는 어제 곰탕집을 자리에 두기로 했다. 토요일 어머니 묘소는 한경수와 소율을 자리에 두기로 한 채 사흘 앞에 있었다.
둠은 끝이 아니었다. 둠은, 자리가 자리에 자기를 두기로 한 다음에 자리에서 자리로 자리를 잇는 일의 첫 자리였다. 자리에 두어진 일은, 다른 자리로 옮겨지지 않는다. 자리에 두어진 채로, 자리는 자리를 잇는다.
사이는 비워진 채로 자기 안에서 자기를 자리로 두기로 했다. 강유나는 모니터를 끄지 않았다. 안 한 보고가 여섯 개째 자리에 두어졌다.
내일은 금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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