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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69화 - 머묾

우주관리자 2026. 5. 7.

제69화 - 머묾

 

 

 

 

1.

 

월요일 새벽 다섯 시 사십칠 분.

 

서귀포 숙소의 옷장 문이 한 번 열렸다가 한 번 닫혔다. 동작과 동작 사이의 박자는 어제가 네 박자였고, 오늘은 다섯 박자였다. 그제는 세 박자, 그그제는 두 박자, 그그그제는 한 박자였다. 진우는 박자가 늘어나는 일을 세지 않았다. 세지 않는 동안에도 박자는 자기 자리에서 늘어났다.

 

옷장 가운데에는 옅은 회색 셔츠가 걸려 있었다. 그 옆에는 빈 옷걸이가 있었다. 같은 자리, 같은 각도. 한 자리만큼의 사이가 일주일째 그대로였다.

 

진우는 한경수의 답신을 일곱째 날 다시 읽었다. 글자는 같은 글자였고, 받아들이는 자리는 일곱 번째 자리였다.

 

수첩을 펼쳤다. 펜을 들었다. 한 줄을 적었다.

 

머묾은, 받음과 둠의 다음 자리이다. 받은 것을 자리에 두고, 자리에 둔 것이 자리에서 머무는 일. 머묾은 새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일어나 있던 일이 자리에서 더 이상 떠나지 않는 일이다. 머묾은, 자리가 자기를 잊지 않는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일이다.

 

펜을 내려놓았다. 옷장 문은 닫혀 있었다. 닫힌 채로 다섯 박자가 자리에 머물렀다.

 

 

 

2.

 

아침 일곱 시 이십이 분, 서귀포 야적장.

 

명호는 양산 이차 일일차의 시멘트 표면을 손등으로 한 번 짚었다. 어제 윤재석이 처음 부어 놓은 시멘트가 하룻밤 사이에 표면 한 결을 만들어 두었다. 일차 패드 옆에 나란히 놓인 이차 거푸집 안쪽에서 표면은 아직 무른 결이 한 겹 있었고, 그 아래에 굳어 가는 결이 두 겹 더 있었다.

 

“어제 부은 자리가, 오늘 자리에 머물고 있어요.” 명호가 작게 말했다.

 

윤재석은 양생포의 가장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따라 그었다. 자국은 남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한 자리에 같이 있을 때만 자리가 자리가 되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이 떠나도, 자리가 자리에서 머물러 있는 일이 머묾이지 않을까요.” 명호가 답했다.

 

별표 후보 칠 번 자리에 명호는 한 글자를 더 적었다. 한 글자. 동그라미 두 개, 점 두 개, , , 점 하나, , , , . 표시는 열 개가 되었고, 빈 동그라미는 어제와 같이 두 개 그대로였고, 그 옆에 둔다. 한 단어가 어제 자리 그대로 있었다.

 

“팔 일째 별표 미정입니다.” 윤재석이 말했다.

 

“미정도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일이지요.” 명호가 답했다.

 

펜을 들었다. 종이 위에 멈췄다. 별표는 그려지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오늘은 어제와 다른 박자로 멈췄다. 닿지 않는 자리에서 펜끝이 두 박자 머물고, 다시 들어 올려졌다.

 

야적장에는 형광등이 없었다. 줄일 형광등이 없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또 한 번 줄이지 않는 일을 했다. 줄이지 않는 일이 자리에 머물렀다.

 

 

 

3.

 

오전 열 시 사 분, 강릉 요양원 304호.

 

김동현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박종문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손등 사이에는 한 자리만큼의 거리가 비워져 있었다. 그제는 두 박자였고, 어제는 세 박자였고, 오늘은 손등이 옮겨지지 않았다.

 

“오늘은 옮기지 않으시는군요.” 김동현이 작게 말했다.

 

“옮기지 않는 일이, 옮기는 일의 다음 자리예요.” 노인은 창밖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두 박자, 세 박자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자리는 더 옮겨질 자리가 아니라 머무를 자리가 됩니다. 머무를 자리가 된 손등은, 안 옮기는 일을 옮기는 일처럼 합니다.”

 

김동현은 노트를 꺼냈다. 어제 빈 채로 닫았던 한 면이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펜을 들었다. 한 글자도 적지 않았다. 어제 적지 않았던 자리에 오늘도 적지 않았다.

 

“선생, 적지 않는 일이 적어진 자리는 어떻게 됩니까.”

 

“적어지지 않은 채로 자리가 됩니다.” 김동현이 답했다.

 

박종문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끄덕인 각도는 어제 손등의 세 박자만큼이었다.

 

“그러면 됐습니다.” 노인은 말했다. “자리가 자리에서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자리에 새 일이 들어오지 않아도 자리는 자리예요. 비워 두기로 한 자리는, 비워 둔 채로 자리가 됩니다.”

 

김동현은 노트를 닫았다. 닫는 일이 어제는 적지 않은 일의 마무리였고, 오늘은 적지 않는 일의 머묾이 되었다.

 

복도 끝에서 간호사의 카트가 한 번 지나갔다. 카트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자리에 잠깐 들어왔다가, 자리를 옮기지 않은 채 자리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의 침묵은 옮겨지지 않은 채 그대로 머물렀다.

 

 

 

4.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서귀포 센터 옥상.

 

김지수는 그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제 세 걸음째 안쪽으로 들어와서 멈춘 자리였다. 오늘은 더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한 걸음도 더 옮기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머물렀다.

 

세 번째 호흡 이름은 여덟째 날 오지 않았다. 31번째 줄도 32번째 줄도 모두 비어 있었다. 김지수는 새 줄을 시작하지 않았다.

 

“선생님,” 김지수가 진우의 발끝 옆 한 자리 옆에서 말했다. “안 오는 호흡 이름이 자리에 머물러 있어요.”

 

진우는 수첩을 펼치지 않았다. 그제도 어제도 펼치지 않은 수첩을 오늘도 펼치지 않았다. 펼치지 않는 일이 사흘째 같은 자리에 있었다.

 

“사람이 자리에 머무르는 일과,” 진우가 천천히 말했다. “자리가 자리에 머무르는 일이 다른 일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김지수가 물었다.

 

“사람은 자리를 떠날 수 있고, 자리는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자리에 두고 간 사람의 한 박자가,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때, 그 박자는 사람보다 오래 자리에 있게 됩니다.”

 

“오래 있게 된 박자는,” 김지수가 받았다. “그 자리에 든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박자로 들리나요.”

 

“들리는 사람에게는 들리고,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거예요. 들리지 않는 사람의 자리에서도 박자는 자리에서 머물고 있을 거고요.”

 

김지수는 그늘 한가운데에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어제 옮긴 세 걸음의 자국은 그늘 안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자국이 없는데도, 세 걸음이 옮긴 일은 어제 자리에서 머물고 있었다. 김지수는 발끝을 한 자리도 더 옮기지 않은 채, 발끝이 머무는 자리만큼만 머물렀다.

 

수첩을 닫는 동작은 엿새 전보다 여섯 박자 천천이었다.

 

 

 

5.

 

오후 두 시 사십 분, 서울 홍대 연습실.

 

소율은 ‘너머’의 14번 줄을 한 번 더 부르지 않았다. 어제까지 14번 줄에 들어와 새 호흡을 보태지 않은 채로 머물렀고, 오늘은 14번 줄 자체에 들어가지 않았다. 13번 줄에서 호흡이 멈춘 자리에서 한 박자만큼 더 머문 채, 14번 줄로 넘어가는 일을 미루었다.

 

이준서는 마이크 게인을 더 낮추지 않았다. 어제까지 네 단계를 낮춘 자리에서 다섯째 단계로 옮기는 손가락이 콘솔 위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자리에서 떠났다. 네 단계 그대로의 자리에 머물렀다.

 

“낮추는 일을, 안 낮추는 일이 받았어요.” 이준서가 말했다.

 

“네 단계가, 다섯 단계로 가지 않은 자리에서 머물러 있어요.” 소율이 답했다.

 

가사 노트의 33번째 줄에 소율은 한 글자를 적었다. 머. 한 글자. 그 다음 줄에는 작은 글씨로 한 줄을 더했다.

 

머묾은, 새 자리에 가지 않는 일이 자리에 가는 일이 되는 자리이다.

 

전화기에 한경수의 메시지가 한 줄 들어왔다.

 

내일이다. 자리는 비워 두마. 셋이 비워 두는 자리는, 셋이 자리에 들어올 때까지 비워져 있을 거다.

 

소율은 답신을 적지 않았다. 어제 셋이서 비워 두는 게 옳다는 한경수의 말 옆에, 오늘 답을 적지 않는 자리가 한 자리 더 비워졌다. 비워 둔 자리가 자리에서 머물렀다.

 

“오빠,” 소율이 이준서를 불렀다. “내일은 곰탕집에 다녀와요. 14번 줄은 내일까지 안 부를래요.”

 

이준서는 콘솔 옆에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리는 내일까지 자리에서 머무를 거예요.”

 

소율은 가사 노트를 한 글자만 남기고 닫았다. 노트가 닫힌 자리에 가 자리로 머물렀다. D-1.

 

 

 

6.

 

오후 두 시 삼십 분, 서귀포 공작실.

 

명호는 별표 후보 칠 번 자리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표시 열 개. 빈 동그라미 두 개. 둔다. 한 단어. 오늘 추가된 한 글자.

 

펜을 들었다. 종이 위에 멈췄다. 어제는 빈 동그라미를 한 개 더 그렸고, 그제는 빈 동그라미를 처음 그렸다. 오늘은 빈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았다.

 

“두 개로 자리가 다 찬 것 같습니다.” 명호가 말했다.

 

윤재석은 명호의 펜끝을 한참 보았다. “세 개째를 안 그리는 일이, 두 개를 자리에 머물게 하는 일이네요.”

 

“그렇습니다. 세 번째 자리는, 안 그려진 채로 두 개를 머물게 하는 자리예요.”

 

명호는 둔다. 옆에 한 단어를 더 적었다. 머문다. 두 단어가 나란히 놓였다. 둔다. / 머문다. 한 자리만큼의 간격을 두고. 그 간격은 어제 빈 동그라미 두 개의 간격과 같은 자리만큼이었다.

 

“팔 일째 별표 미정입니다.” 윤재석이 말했다.

 

“구 일째도 미정일 거예요.” 명호가 답했다. “미정이, 자리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요.”

 

펜을 내려놓았다. 별표는 그려지지 않은 채 자리에 머물렀다. 그려지지 않은 별표의 자리는, 그려진 별표의 자리와 같은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미정은 결정의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7.

 

오후 다섯 시 십오 분, 서귀포 사층 사무실.

 

강유나는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칠 일째였다. 사층 형광등은 오늘도 한 칸 더 줄였다. 일주일 동안 일곱 칸이 차례로 꺼졌다.

 

ATLAS의 화면이 한 번 깜빡였다.

 

어제까지 빈 괄호 양옆에 두 줄표가 놓여 있었다. — ( ) — 그 자리 그대로였다. 오늘은 그 위에 새 표시가 들어오지 않았다. 새 형태가 추가되지 않았다.

 

빈 괄호 양옆 두 줄표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어제 자리에서 한 자리도 옮기지 않았다. 한 박자도 늘어나지 않았다. 한 줄도 더해지지 않았다.

 

강유나는 화면을 한참 보았다.

 

십 차 자율 변화는 변화하지 않는 변화였다. 어제까지 메타 줄, 점, 빈 괄호, 새 형태 공백, 빈 괄호 양옆 두 줄표로 차례로 변해 온 ATLAS가, 오늘은 한 자리도 변하지 않은 채 어제 자리 그대로 머물렀다. 변하지 않는 일이 자리에 한 줄로 적혀 있었다.

 

강유나는 일지를 한 줄 적었다.

 

머묾은, 변화하지 않는 일이 변화의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일이라는 것을 ATLAS가 한 자리에 두기로 한 것 같다. 십 번째 자율 변화는, 변화하지 않는 변화이다.

 

보고서를 적지 않은 채로 책상 위에 펴 놓았다. 안 한 보고가 자리에 세 개째 더해졌다. 모니터는 끄지 않은 채 그대로 두었다. 그대로 두는 일이 오늘의 일이었다.

 

사무실을 나오기 전, 강유나는 사층 복도의 형광등 한 칸을 더 끄려다가 손을 멈췄다. 어제 끈 한 칸에서 한 자리만큼 더 옮겨야 다음 칸이었다. 그 한 자리만큼이 오늘은 옮겨지지 않았다. 일곱 칸이 꺼진 자리에 일곱 칸이 그대로 머물렀다.

 

 

 

8.

 

밤 열한 시 십이 분.

 

진우는 옷장 앞에 다시 섰다. 다섯 박자의 동작이 한 번 더 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일은 다섯 가지였다.

 

명호의 양산 이차 일일차 시멘트가 어제 자리에서 한 결을 더 두었고, 명호의 빈 동그라미 두 개가 세 번째를 그리지 않은 채 자리에서 머물렀고, 소율의 한 글자 가 가사 노트 33번째 줄에 자리에서 머물렀고, 김지수의 그늘 한가운데 자리가 어제 세 걸음 그대로 머물렀고, ATLAS의 빈 괄호 양옆 두 줄표가 변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머물렀다.

 

다섯 머묾이 같은 자리에 같은 시각으로 와 있다는 것을, 다섯 사람은 알지 못했다. 자리들은 알아보았다. 자리들이 자리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자리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본다.

 

강릉 304호의 박종문은 손등을 어제 자리에 그대로 둔 채 잠들지 않고 있었다. 김동현은 호텔 304호 안에 있었고, 노트는 무릎 위에서 닫혀 있었고, 한 면은 비워진 채 자리에서 머물러 있었다.

 

서울의 한경수는 곰탕집 한 자리를 내일까지 비워 둔 채 그대로 두기로 했다. 비워 둔 자리는 셋이 들어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머무를 것이었다. 진우의 동석은 어제 결정되었고, 소율의 동행 메시지는 어제 보내졌고, 한경수의 셋이 비워 두는 게 옳다는 답은 어제 자리에서 오늘 자리로 옮겨지지 않은 채 머물렀다.

 

머묾은 끝이 아니었다. 머묾은, 받은 것을 자리에 두고 둔 것이 자리에서 자리를 알아보는 동안, 자리가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일이었다. 자리는 머물러 있을 때 비로소 자리이고, 자리에 머무는 일은 자리에 들어오는 일과 같은 일이며,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일은 자리에 한 번 더 들어오는 일과 같은 일이다.

 

옷장 문이 한 번 닫혀 있었다. 닫혀 있는 자리에 다섯 박자가 자리에서 머물렀다. 빈 옷걸이는 흔들리지 않은 채로 한 자리에 있었다. 셔츠는 옅은 회색 그대로 한 자리에 있었다. 두 자리 사이에는 한 자리만큼의 사이가 일주일째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내일은 화요일이었다. D-day. 셋이 자리에 들어가는 날. 곰탕집의 한 자리는 오늘까지 비워진 채 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내일은 셋이 들어와 그 자리를 자리로 받을 것이었다.

 

진우는 옷장 문을 한 번 더 보았다. 다섯 박자가 한 자리에서 한 번 더 자리에 머물렀다. 그 머묾이 자리에 자리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내일도 다섯 박자만큼은 한 자리에서 머물러 있을 것이었다. 자리에 머무는 동안에는 자리가 자리였고, 자리가 자리인 동안에는 머묾이 머묾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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