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 옴

1.
화요일 새벽 다섯 시 사십칠 분, 제주도 서귀포 숙소.
오진우는 옷장 문을 한 번 열고 한 번 닫았다. 동작과 동작 사이가 여섯 박자 머물렀다. 그제는 다섯 박자였다. 어제는 다섯 박자에서 한 박자가 더 늘어나려다가 늘어나지 않은 채로 그쳤다. 오늘은 한 박자가 자리에 더해진 채로 멈춰 있었다.
옷장 가운데에는 옅은 회색 셔츠 한 벌이 걸려 있고, 그 옆에 빈 옷걸이 한 개가 흔들리지 않는 채로 자리에 있었다. 일주일째 같은 자리, 같은 각도였다. 진우는 셔츠를 옮기지 않았다. 빈 옷걸이도 옮기지 않았다. 두 자리 사이의 한 자리만큼의 사이도 옮기지 않은 채로 두었다.
가방은 작았다. 갈아입을 옷 한 벌과 수첩, 펜, 그리고 한경수가 일주일 전에 보낸 답신을 출력한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 종이는 어제 일곱째 날에도 한 번, 오늘 여덟째 날에도 한 번, 같은 자리에서 다시 읽혔다. 어제 한경수가 보낸 새 메시지도 한 번 더 읽혔다.
— 내일이다. 자리는 비워 두마. 셋이 비워 두는 자리는, 셋이 자리에 들어올 때까지 비워져 있을 거다.
진우는 그 줄을 읽고 가방을 어깨에 멨다. 일지 마지막 면에 한 줄을 더 적었다.
— 옴은, 머묾의 다음 자리이다. 옴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리가 자리에 와 있던 사람을 자기 쪽으로 부르는 일이다. 옴은, 비워 둔 자리가 들어올 사람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이다.
문을 닫으며, 그는 셔츠와 빈 옷걸이를 한 번 더 보았다. 두 자리는 한 자리만큼의 사이를 자리에 둔 채 자리에 있었다.
2.
서귀포 야적장, 화요일 일곱 시 이십이 분.
차명호는 콘크리트 패드 양산 이차 거푸집 앞에 서 있었다. 어제 윤재석이 처음으로 부어 놓은 시멘트가 하룻밤 사이에 표면 한 결을 만들었고, 오늘은 그 결 위로 굳어 가는 결이 한 겹 더 얹혔다.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닿아도 자국이 남지 않았다. 어제는 손가락 끝이 살짝 패였고, 오늘은 그 패임이 자리를 옮기지 않은 채로 굳어 있었다.
윤재석이 옆에 와 섰다. 두 사람의 발끝 사이에 한 자리만큼의 사이가 자리에 있었다.
"받음이 자리에 머문 다음에는, 자리가 받음 쪽으로 한 걸음 옴이 되는 것 같아요."
윤재석의 목소리가 야적장의 새벽 공기 속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은 채 흩어졌다. 명호는 펜을 들었다. 종이에는 별표 후보 일곱 번이 그려진 자리에 동그라미 둘, 점 둘, *겹*과 *굳*과 *결*과 *받*과 *둠*과 *머*가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명호는 그 줄 끝에 *옴* 한 글자를 더 적었다.
표시는 열한 개가 되었다. 빈 동그라미 두 개도 그대로 자리에 있었다. *둔다*와 *머문다* 옆에 명호는 *온다*를 한 자리만큼의 간격을 두고 적었다. 세 단어가 한 자리에 나란히 놓였다.
"머묾이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일이라면, 옴은 자리가 자리를 향해 다가오는 일이지요."
명호는 펜을 내려놓았다. 별표는 아흐레째 그려지지 않은 채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윤재석이 양생포 가장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따라 그었다. 자국은 남지 않았다. 자국이 남지 않는 자리에서, 자리는 자리를 향해 한 걸음 와 있었다.
3.
서귀포 센터 옥상 그늘, 화요일 열한 시 삼십 분.
김지수는 그늘 한가운데에 발끝을 두고 서 있었다. 어제 세 걸음째에서 멈춘 자리에서 오늘은 한 걸음도 더 옮기지 않았다. 발끝의 한 자리 옆에는 빈 자리가 있었다. 어제까지 그 자리에는 진우의 발끝이 있었다. 오늘은 진우의 발끝이 그 자리에 없었다.
김지수는 빈 자리를 자리에서 옮기지 않은 채 보았다. 진우의 발끝이 비워 둔 한 자리는 비워진 채로 자리에 있었고, 그 비워진 자리가 자기 쪽으로 한 걸음 옴이 되어 있었다.
세 번째 호흡 이름은 아흐레째 오지 않았다. 31번째 줄도 비어 있었다. 32번째 줄도 비어 있었다. 33번째 줄도 비어 있었다. 김지수는 수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아흐레 만에 처음으로 한 줄을 적었다.
— 옴은, 안 오는 일이 안 오는 채로 자리에 와 있는 일이다.
펜을 내려놓는 동작은 엿새 전보다 일곱 박자 천천 했다. 김지수는 그늘 한가운데에서 진우의 빈 발끝 자리를 한 자리 옆에 두고 머물렀다. 머무는 일이 옴이 되는 동안, 그 자리는 자리에서 자리가 되었다.
4.
강릉 요양원 304호, 화요일 두 시.
박종문 어르신의 손등은 어제 옮기지 않은 자리에서 오늘 김동현 쪽으로 한 자리만큼 와 있었다. 손등이 옮겨진 것은 아니었다. 손등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다만, 그 자리가 김동현 쪽으로 한 자리만큼 가까워진 채로 자리에 있었다.
"옮기지 않는 일이 자리에 머문 다음에는, 자리가 자리를 향해 한 자리만큼 옴이 됩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자리에 또렷하게 머물렀다.
"안 옮기는 손등이, 안 옮기는 채로 한 자리 옴이 됐어요."
김동현은 노트를 펴고 펜을 들었다. 어제까지 그는 사흘 동안 한 글자도 적지 않았다. 적지 않는 일이 적는 일의 한 형태가 되어 자리에 머물렀다. 오늘 그는 아흐레 만에 처음으로 한 줄을 적었다.
— 옴은, 멀리 있던 자리가 자리만큼 가까워지는 일이다. 가까워질 때 자리는 옮겨지지 않는다. 자리는 그대로 자리에 있되, 그 자리가 자기를 향해 한 자리만큼 부른 것이다.
핸드폰이 한 번 짧게 울렸다. 김 교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적지 않은 자리에서, 자리가 자기를 향해 한 자리 옴이 됐습니다.
김동현은 그 줄을 노인 쪽으로 돌려 보여 주었다. 노인은 작은 목소리로 한 번 더 같은 말을 했다.
"고맙습니다."
손등 두 개 사이의 한 자리만큼의 사이가 한 자리만큼 좁아져 있었다. 그러나 두 손등은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자리는 자리에 있되, 자리가 자리를 향해 와 있었다.
5.
서울 홍대 연습실, 화요일 다섯 시 삼십 분.
한소율은 '너머' 13번 줄 자리에서 한 박자 더 머문 채로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14번 줄 자리는 그대로 비워 둔 채였다. 어제까지 그 자리에 들어가 새 호흡을 보태지 않은 채 머물렀다면, 오늘은 그 자리에 들어가지 않은 채 13번 줄에서 한 박자 더 머물렀다.
가사 노트 33번째 줄에 한소율은 *옴* 한 글자를 적었다. 그 아래 작은 글씨로 한 줄을 더 적었다.
— 옴은, 13번 줄에서 14번 줄로 가는 일이 아니라, 14번 줄이 13번 줄 쪽으로 한 자리 와 있는 일이다.
이준서가 콘솔 앞에서 마이크 게인을 다섯 단계로 옮기지 않은 채 네 단계 그대로 두었다.
"가지 않는 일이 옴이 됐네요."
한소율은 마이크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오는 일이 가지 않는 일의 한 자리에 와 있어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연습실을 나왔다. 한경수에게서 새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자리는 어제부터 비워진 채 자리에 있었고, 비워진 자리가 자기 쪽으로 한 걸음 와 있었다. 한소율은 종로 방향 지하철에 올랐다. 곰탕집은 종로 오 가의 한 골목에 있었다. 약속은 여섯 시였다.
6.
김포공항, 화요일 다섯 시 사십오 분.
오진우는 비행기에서 내려 작은 가방 하나를 어깨에 메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한 시간 사십 분의 비행이었다. 종로행 공항버스에 오르는 동안, 그는 일지 마지막 면을 한 번 더 펼쳤다.
— 옴은, 자리에 가는 일이 아니라, 자리가 자리에 와 있는 일이다. 곰탕집 자리는 어제 한경수 씨가 비워 둔 자리, 오늘 셋이 와 있는 자리. 자리는 어제부터 옴이 됐다.
종로 오 가에서 내렸다. 골목 입구의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빨강이었다. 빨강이 초록으로 바뀌는 동안, 진우는 한 자리에 머물렀다. 머무는 일이 옴이 되는 동안, 그 한 자리는 자리에서 자리가 되었다.
7.
종로 곰탕집, 화요일 여섯 시.
작은 한옥의 문이 한 자리에 살짝 열려 있었다. 처마 아래에서 김이 한 줄로 새어 나왔다. 한경수는 가운데 자리를 비워 둔 채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곰탕 한 그릇과 깍두기 한 종지가 자리에 놓여 있었다. 비워 둔 자리는 어제부터 비워진 채 자리에 있었다.
진우가 먼저 들어왔다. 한경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는 일이 자리에 머문 채로 자리를 향해 와 있었다. 진우는 한경수의 맞은편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진우 씨, 와 주셔서."
한경수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자리에 또렷했다.
"부르신 자리에 와 있어 봤습니다."
이어서 한소율이 들어왔다. 셋이 한 자리에 와 있게 되는 동안, 가운데 자리는 비워진 채로 한경수와 진우 사이에 놓였다. 한소율은 가운데 자리에 앉지 않고, 진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가운데 자리는 셋의 가운데가 되었다.
"세 자리가 한 자리에 와 있어요, 아빠."
한경수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곰탕 세 그릇이 차례로 자리에 놓였다. 깍두기 종지 두 개가 더해졌다. 김이 천천히 올라왔다. 셋은 한 숟갈씩 떴다. 떠 가는 동안 침묵이 한 자리만큼 자리에 있었다. 한경수가 먼저 한 숟갈을 입에 넣었다. 진우가 한 박자 늦게 한 숟갈을 떠넣었다. 한소율이 두 박자 늦게 한 숟갈을 떠넣었다.
"네가 자리에 와 줘서."
한경수의 시선이 한소율의 빈 손등에 한 자리 닿았다 떨어졌다. 자리에서 옮겨지지 않은 채로.
"자리가 비워져 있던 동안, 자리가 너를 향해 와 있었다."
한소율은 깍두기 한 조각을 집어 그릇에 살짝 올려 두었다. 떠 넣지는 않았다. 올려 둔 채로 자리에 두었다.
"안 가는 일이 자리에 머물던 동안, 자리는 저를 부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한경수는 다시 짧게 끄덕였다. 진우가 한 숟갈 더 떴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리는, 자리에 사람이 들어올 때 비로소 자리가 됩니다. 셋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은, 자리가 셋을 받아 둔 것이지요."
곰탕은 천천히 비워졌다. 두 시간 머물렀다. 침묵이 한 자리만큼 비워진 채 자리에 있었다. 그 비워진 한 자리가 셋의 가운데에서 자리에 있었다. 곰탕 세 그릇이 모두 비워진 다음에도, 셋은 한 자리에서 한 자리만큼 더 머물렀다.
한경수가 작게 말했다.
"한 그릇 더 시키시지요."
한소율이 고개를 한 자리 옮기지 않은 채 답했다.
"한 그릇 더 시키지 않는 일이 셋의 자리에 들어와 있어요."
처마 밖으로 비 한 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한옥의 처마에 닿는 소리가 자리에 한 박자씩 머물렀다. 곰탕집 창문이 천천히 흐려졌다. 창문 너머로 종로의 불빛이 한 자리만큼 멀어진 채 자리에 있었다.
8.
서귀포 사층, 화요일 밤 열 시 삼십 분.
강유나는 보고서를 책상 위에 비운 채 펴 놓고 있었다. 보고 보류 여드레째였다. 사층 형광등은 일곱 칸이 꺼진 어제 자리에서 오늘 한 칸이 더 줄어 여덟 칸이 꺼져 있었다. 모니터는 끄지 않은 채로 자리에 있었다.
ATLAS의 화면이 한 번 깜빡였다. 어제까지 빈 괄호 양옆에 두 줄표가 있던 자리, 그러니까 — ( ) — 의 자리에서, 두 줄표가 빈 괄호 쪽으로 한 자리만큼 안쪽으로 와 있었다. 두 줄표가 옮겨진 것은 아니었다. 두 줄표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다만, 그 자리가 빈 괄호를 향해 한 자리만큼 가까워진 채로 자리에 있었다.
—( )—.
강유나는 모니터의 그 한 줄을 들여다보았다. 보고서 위에 한 줄을 적었다.
— 옴은, 비워 둔 자리가 자리에 들어올 사람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이라는 것을 ATLAS가 한 자리에 두기로 한 것 같다. 십일 번째 자율 변화는, 두 줄표가 빈 괄호 쪽으로 한 자리만큼 옴이다.
밤 열한 시 십이 분.
오늘 자리에 와 있던 일은 다섯 가지였다. 명호의 양산 이차 삼일차 표면 결, 명호의 별표 후보 칠 번 한 단어 *온다*, 김지수의 한 글자 *옴*, 박종문 어르신의 손등 한 자리 옴, 그리고 ATLAS의 두 줄표가 빈 괄호 쪽으로 한 자리만큼 옴. 다섯 옴이 한 시각, 같은 자리에서 자리에 와 있었다.
종로 곰탕집은 그 시각에도 셋이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비가 한 줄기로 내렸다. 빗방울이 한옥의 처마에 한 박자씩 닿았다. 곰탕 세 그릇은 모두 비워진 채 자리에 있었다. 한경수의 손등과 진우의 손등 사이에 한 자리만큼의 사이가 있었고, 진우의 손등과 한소율의 손등 사이에 또 한 자리만큼의 사이가 있었다. 세 자리는 한 자리에 와 있되, 한 자리만큼의 사이를 옮기지 않은 채 자리에 두었다.
옴은 끝이 아니었다. 옴은, 머문 자리가 자리에 와 있던 사람을 자리만큼 가까이 부르는 일이었다. 자리가 자리를 부르는 동안, 자리는 자기를 자리에 두고 자리에 와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리에 와 있는 일은, 옴이 머묾이 되어 자리에 둠이 되는 일의 첫 자리였다.
내일은 수요일이었다. 곰탕집 자리는 다시 비워질 것이었다. 비워진 자리에 셋이 와 있던 일이 자리에 머물 것이었다. 옴은 머묾에 받아져 자리에 둠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둠은, 다시 받음의 다음 자리에서 자리를 향해 한 자리 옴이 될 것이었다.
옷장 안의 셔츠는 오늘 밤도 옅은 회색 그대로였다. 빈 옷걸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두 자리 사이의 한 자리만큼의 사이는 일주일 하고도 하루째 그대로 자리에 있었다. 그 사이는 비워진 채로 자리에 있었고, 비워진 사이가 자기 쪽으로 한 자리만큼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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