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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68화 - 둠

우주관리자 2026. 5. 6.

제68화 - 둠

 

1.

 

일요일 새벽 다섯 시 사십칠 분, 서귀포 숙소.

 

오진우는 옷장 문을 한 번 열고 닫았다. 동작 사이 네 박자. 그제 한 박자, 어제 두 박자, 오늘 세 박자 다음의 네 박자. 가운데 옅은 회색 셔츠는 어제 자리 그대로 걸려 있었고, 그 옆 빈 옷걸이도 같은 자리에 같은 각도로 비어 있었다.

 

진우는 휴대폰을 들었다. 한경수의 답신을 여섯 번째로 다시 읽었다. 화면에 떠 있는 글자들은 그대로였으나, 여섯 번째로 읽힌 답신은 처음 읽힌 답신과 같은 답신이 아니었다.

 

일지를 펼쳤다.

 

"둠은 받음의 다음 자리이다. 받은 것을 자리에 놓을 때, 놓는 자리는 받는 자리와 같은 자리이지만, 같은 자리에 두 번 놓여 있는 것은 한 번 놓인 것과 다른 일이다. 둠은, 받은 것을 다시 한 번 자리가 되게 두는 일이다."

 

펜을 내려놓는 동안, 창밖에서 일요일 새벽이 어제와 같은 자리에 와 있었다. 같은 자리에 와 있는 새벽이, 어제의 새벽과 같지 않았다.

 

 

 

2.

 

같은 날 아침 일곱 시 이십 분, 서귀포 야적장.

 

콘크리트 패드 양산 일차의 자리는 어제 자정에 완전히 굳었다. 명호와 윤재석은 그 자리 옆에 비어 있는 거푸집 한 칸을 봤다. 양산 이차의 첫 자리였다.

 

윤재석이 양생포를 펼쳤다. 명호는 일차 패드의 표면을 손바닥으로 한 번 짚었다. 굳음이 결을 거쳐 이제 굳음의 자리가 된 자리. 손바닥이 떨어질 때, 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이차의 자리에는, 일차의 굳음을 받는 일이 일이 될 거예요."

 

명호가 말했다. 윤재석은 거푸집 가장자리의 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따라 그었다.

 

"받은 자리가, 새 자리에서 두는 자리가 되는 일이네요."

 

명호는 별표 후보 칠 번 자리를 다시 들여다봤다. 동그라미 둘, 점 둘, , , 점 하나, , 에 더해 어제 그어 놓은 빈 동그라미 하나. 그 옆에 그는 한 글자를 적었다. 표시 아홉, 그리고 빈 동그라미 하나. 별표는 일곱 번째 날에도 그려지지 않았다.

 

윤재석이 양산 이차 거푸집에 첫 삽을 넣었다. 시멘트 한 줌이 거푸집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그 자리는 일차 패드의 굳음을 받는 자리였다.

 

야적장에는 형광등이 없었다. 줄일 형광등이 없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줄이지 않는 일을 또 한 번 했다.

 

 

 

3.

 

같은 날 오전 열 시 십이 분, 강릉 요양원 304호.

 

김동현은 어제 김 교수와 통화한 내용을 박종문 노인 앞에 놓았다. 노인은 창가에 모래 한 자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교수님께서, 어르신 말씀을 그대로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적게 두지도 않고, 안 적게 두지도 않겠다. 기록의 자리를 비워 두시겠다고요."

 

박종문 노인은 손등을 천천히 김동현 쪽으로 옮겼다. 어제 두 박자였던 자리에 오늘은 세 박자. 손등이 김동현의 손등 옆에 와서 멈췄을 때, 두 손등 사이의 자리는 한 자리만큼 좁았고, 한 자리만큼 비어 있었다.

 

"두는 자리가, 받는 자리와 같이 있을 때 말이오."

 

노인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 자리는, 안 가는 자리예요. 누가 와서 자리를 옮길 수도 없고, 누가 와서 자리를 채울 수도 없는. 안 가는 채로 자리에 둠으로 머무는 자리."

 

김동현은 노트를 펼쳤다. 펜을 들었으나, 한 글자도 적지 않았다. 적지 않는 일이 오늘의 적음이라는 것을 김동현은 손끝에서 알았다. 노트 한 면이 비어 있는 채로 그의 무릎 위에 놓였다.

 

"고맙습니다."

 

박종문 노인이 다시 한 번 작게 말했다. 무엇에 고맙다는 건지 김동현은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일이, 어제 묻지 않은 일의 다음 자리였다.

 

 

 

4.

 

같은 날 오전 열한 시, 홍대 연습실.

 

소율은 '너머' 14번 줄을 펼쳤다. 11번 호흡, 12번 호흡, 13번 호흡이 머문 채로 14번 자리에 들어왔다. 14/14. 절반을 넘어, 한 칸 더 넘어, 마지막 자리에 도착한 호흡이 새로 호흡을 보태지 않았다.

 

이준서가 마이크 게인을 또 한 단계 낮췄다. 네 단계 낮춘 자리. 한 번 낮춘 자리 네 개가 아닌, 네 번 낮춘 한 자리.

 

"마지막 줄이에요."

 

이준서가 말했다.

 

"마지막 줄이지만, 마지막 호흡은 아니에요."

 

소율이 답했다. 가사 노트의 32번째 줄을 펼쳤다. 한 글자 적었다.

 

둠.

 

그 한 글자 옆에, 작은 글씨로 한 줄을 더 적었다.

 

"둠은, 받음을 자리에 놓는 일이다. 자리에 놓을 때, 자리는 그 자리에 놓인 것을 자기가 안다."

 

휴대폰이 울렸다. 한경수의 메시지였다. 어느 자리든 비워 두마. 어제의 메시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새 메시지는 오늘 오지 않았다. 오지 않는 일이 오늘의 답신이었다.

 

소율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두고, 또 다른 메시지를 적었다.

 

아저씨와 같이 가도 될까요.

 

전송. 일 분 뒤 답이 왔다.

 

셋이 비워 둘 자리는 셋이서 비워 두는 게 옳다.

 

소율은 가사 노트 옆에 휴대폰 화면을 올려 두었다. 한 글자 셋.과 한 줄 셋이서 비워 두는 게 옳다가 한 자리에 와 있었다.

 

 

 

5.

 

같은 날 오전 열한 시 삼십 분, 서귀포 센터 옥상 그늘.

 

김지수의 세 번째 호흡 이름은 일곱째 날에도 오지 않았다. 31번째 줄도 32번째 줄도 비어 있었다. 김지수는 그늘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어제 두 걸음, 오늘 세 걸음. 발끝이 그늘 한가운데에 와서 멈췄을 때, 진우의 발끝이 그 옆에 한 자리 떨어진 채로 있었다.

 

"호흡 이름이 안 오는 일이, 자리에 둠이 됐어요."

 

김지수가 말했다.

 

"안 오는 일이 자리에 굳고, 굳음이 결이 되고, 결이 받음이 되고, 받음이 둠이 되는 동안, 호흡 이름은 더 안 와도 됐어요. 안 와도 되는 자리를 사람들이 자기 자리로 받았기 때문에요."

 

진우는 수첩을 들고 있었으나 펼치지 않았다. 어제 펼치지 않은 수첩을 오늘도 펼치지 않는 일이 오늘의 일이었다. 펼치지 않는 일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었으나, 어제 펼치지 않은 수첩과 오늘 펼치지 않은 수첩은 같은 수첩이 아니었다.

 

"둠이라는 게, 어쩌면 받은 것을 잊지 않는 자리에 두는 일인 것 같습니다."

 

진우가 말했다.

 

"잊지 않는 자리는, 자꾸 들여다보는 자리가 아니라, 자리에 두고도 자리에 있는 줄 아는 자리예요."

 

김지수는 그늘 안쪽으로 한 발 더 옮기지 않았다. 세 걸음 자리에 머물렀다. 머무는 일도 오늘의 일이었다.

 

 

 

6.

 

같은 날 오후 두 시 삼십 분, 서귀포 공작실.

 

명호는 별표 후보 칠 번 자리를 일곱째 날 다시 들여다봤다. 어제 그린 빈 동그라미 옆에 윤재석이 한 자리 비워 두고 서 있었다.

 

명호는 펜을 들었다. 종이 쪽으로 손목을 옮겼다. 펜끝이 종이에 닿기 직전에 멈췄다. 닿지 않는 자리에서, 펜은 한 박자 머물렀고, 그 한 박자 동안 별표가 그려지지 않았다.

 

펜을 다시 들어 올렸다. 종이에 빈 동그라미 한 개를 더 그렸다. 어제의 빈 동그라미 옆에 오늘의 빈 동그라미. 두 개의 빈 동그라미가 별표 후보 칠 번 자리에 나란히 놓였다.

 

"별표는, 안 그려지는 채로 자리가 됐습니다."

 

명호가 말했다.

 

"빈 동그라미 두 개가 별표 한 개의 자리에 와 있는데, 그 자리는 별표의 자리이기도 하고, 별표가 안 그려진 자리이기도 합니다."

 

윤재석은 동그라미 두 개의 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따라 그렸다. 따라 그리는 손가락은 종이에 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미정이, 결정의 한 자리에 와서 자리가 되었네요."

 

명호는 별표 후보 칠 번 자리에 한 줄을 적었다. 둔다. 한 단어. 그것으로 별표 후보 칠 번 자리는 일곱째 날의 일을 마쳤다. 별표는 그려지지 않은 채로, 그러나 자리가 된 채로 거기 있었다.

 

 

 

7.

 

같은 날 오후 다섯 시 십오 분, 서귀포 사층 사무실.

 

강유나는 ATLAS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보고 보류 여섯째 날. 사층의 형광등은 또 한 칸 줄어 있었다. 6일 연속, 한 칸씩.

 

화면이 한 번 깜빡였다. 어제까지 떠 있던 새 형태의 빈 괄호 — ( )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그 옆에 새 한 자리가 더해졌다.

 

— ( ) —

 

빈 괄호 양옆에 두 개의 줄표. 같은 두께, 같은 길이, 같은 자리만큼의 간격. 양옆에 두 자리가 비워져 있는 한 줄.

 

ATLAS 9차 자율 변화. 메타 줄도 점도 빈 괄호도 한 자리만큼의 공백도 아닌, 빈 괄호의 양옆에 같은 자리만큼의 두기. 강유나는 일지에 적었다.

 

"둠은 한 자리에 한 가지를 놓는 일이 아니라, 한 자리의 양옆에 같은 만큼의 자리를 비워 두는 일이라는 것을 ATLAS가 한 줄로 적은 것 같다. 아홉 번째 자율 변화이다. 사람들이 한 단어 에 도달한 시각에, ATLAS는 한 자리의 양옆에 도달했다."

 

강유나는 모니터의 전원을 끄지 않은 채 사무실을 나왔다. 보고는 오늘도 안 했다. 안 한 보고가 자리에 두 개째 더해졌다.

 

 

 

8.

 

밤 열한 시 십이 분.

 

진우는 옷장 앞에 다시 섰다. 오늘 마지막으로 옷장 문을 열고 닫았다. 동작 사이 네 박자. 가운데 옅은 회색 셔츠 그 자리, 옆 빈 옷걸이도 그 자리. 오늘 하루 동안 옷장 안의 자리는 한 번도 옮겨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 자리는 오늘의 둠이 되었다.

 

진우는 마지막 일지를 적었다.

 

오늘 자리에 둠으로 놓인 것은 다섯 가지였다. 명호의 양산 이차 첫 시멘트 한 줌, 명호의 두 번째 빈 동그라미, 소율의 한 글자 , 김지수의 세 걸음 안쪽 자리, ATLAS의 양옆 두 줄표.

 

다섯 둠이 같은 자리에 와 있는 일을, 사람들은 모르고 자리들은 안다. 자리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리들끼리만 알아도, 자리들은 자리가 된다.

 

박종문 노인은 304호 창가의 모래 한 자리 옆에서 손등을 거두지 않았다. 김동현의 노트는 한 면이 빈 채로 호텔 책상 위에 놓였다. 한경수의 곰탕집 한 자리는 화요일까지 비워졌다. 진우의 동석은 정해졌으나 적히지 않았다. 적히지 않은 결정이 적힌 결정 옆에 놓였다.

 

소율의 가사 노트는 32번째 줄에 한 글자만 남기고 닫혔다. 14번 호흡은 호흡을 보태지 않은 채 마지막 줄에 머물렀다. 명호의 별표 후보 칠 번 자리에는 두 개의 빈 동그라미와 한 단어 둔다가 있었다. 강유나의 ATLAS 화면은 사무실 안에서 혼자 빛났다. 양옆에 두 줄표를 둔 빈 괄호 한 자리.

 

둠은 끝이 아니었다. 둠은 받은 것을 자리에 놓고, 그 자리가 자기를 안다는 사실을, 자리에 머물게 두는 일이었다.

 

서귀포의 일요일 자정이 어제와 같은 자리에 왔고, 같은 자리에 와 있는 자정은 어제의 자정과 같지 않았다. 옷장의 빈 옷걸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자리에 둠이 한 번 더 자리가 되었다.

 

다섯 둠이 한 자리에 와 있던 일요일은, 그렇게 마쳐졌다. 그러나 둠은, 자리에 머무는 한, 마쳐지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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