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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67화 - 받음

우주관리자 2026. 5. 5.

제67화 - 받음

1.

 

토요일 새벽 다섯 시 사십칠분, 진우는 옷장 문을 한 번 열었다가 한 번 닫았다. 동작과 동작 사이의 간격이 어제는 두 박자였는데, 오늘은 세 박자였다. 가운데 옷걸이의 옅은 회색 셔츠는 어제 자리에 있었고, 그 옆 빈 옷걸이도 어제의 빈 자리에 있었다. 빈 자리가 어제도 자리였다는 사실을 진우는 오늘 아침 한 번 더 받아들였다.

 

휴대전화를 들었다. 한경수의 답신은 다섯째 날에도 그 자리 그대로였다. "형의 답신을 받으면, 한 끼를 비워 두고 기다리겠습니다." 다섯 번째 읽는 글이었다. 일지에 한 줄을 적었다.

 

다섯 번 읽은 답신은, 처음 읽은 답신과 같은 글자가 아니다. 같은 글자가 다섯 번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받음은 새로 오는 일이 아니라, 와 있는 것을 다시 자리에 놓는 일이다.

 

창밖이 옅게 밝아졌다. 진우는 셔츠를 옷걸이에서 꺼내지 않았다. 꺼내지 않는 일이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2.

 

야적장에 도착한 명호는 콘크리트 패드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어제 표면 전체가 펴졌고, 아래는 한 단계 모자랐다. 오늘은 표면도 아래도 한 손가락 끝에서 한 결로 만져졌다.

 

"굳었습니다."

 

윤재석이 패드 가장자리를 따라 손등으로 두 번 짚었다. 손등이 한 자리에서도 한 박자 더 머물렀다.

 

"두 결이 한 결이 됐어요."

 

명호가 노트를 펼쳤다. 별표 후보 7번 자리에는 어제까지의 일곱 표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동그라미 둘, 점 둘, , , 점 하나, . 그 옆에 한 글자를 더 적었다.

 

.

 

"여덟 표시예요."

 

"별표는요?"

 

명호는 펜끝을 종이에서 한 번 들었다가 다시 댔다. 별표를 그릴 자리가 거기 있었다. 별표를 그리지 않을 자리도 거기 있었다. 명호는 별표를 그리지 않았다. 점도 찍지 않았다. 그 자리에 한 글자만 남겼다.

 

"양산 일차, 굳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윤재석이 클립보드의 모서리를 명호 쪽으로 한 칸 밀었다.

 

"양산 이차로 갈게요."

 

"이차의 자리가, 일차의 굳음을 받는 자리가 되도록 해 주세요."

 

야적장에는 형광등이 없었다. 줄일 형광등이 없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줄이지 않는 일을 또 한 번 했다.

 

 

3.

 

강릉 호텔 로비에서 김동현은 김 교수와 통화했다. 어르신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적게 두지도 말고, 안 적게 두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김 교수의 호흡이 한 박자 머물렀다.

 

"이중부정이군요."

 

"두 번 부정하면 긍정이 되는 자리가 있고, 두 번 부정한 채로 그대로 두는 자리가 있습니다. 어르신은 후자를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럼 저도 적지 않을 것이고, 안 적지 않을 것입니다."

 

김동현은 펜을 노트 위에 댔다가 댄 채로 두었다. 적는 일도 적지 않는 일도 오늘 그가 할 일이 아니었다.

 

"기록의 자리는 비워 두기로 했습니다. 비워 둔 자리는 비어 있는 자리가 아니라, 그분이 거기 있을 때 자리가 되는 자리입니다."

 

김동현은 노트에 한 줄을 적었다.

 

받음은, 받지 않을 자리를 함께 받아들이는 일이다.

 

전화를 끊고 304호로 올라갔다. 박종문 어르신은 창가에서 모래를 한 번 만졌다가 한 번 놓았다. 김동현이 김 교수의 응답을 전했다. 어르신은 손등을 김동현 쪽으로 옮기지 않았다. 옮기지 않는 일이 오늘의 답신이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이 작게 말했다. 무엇에 고맙다는 것인지 김동현은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일이, 어제 두 박자 닿았던 손등의 다음 자리였다.

 

 

4.

 

홍대 연습실에서 소율은 '너머'의 13번 줄에 들어왔다. 11번 호흡과 12번 호흡이 들어온 채 그대로 13번에 머물렀고, 새로 보태는 호흡은 없었다. 절반을 한참 넘어, 한 칸만 더 남은 자리였다.

 

이준서가 마이크 게인을 또 한 단계 낮추었다. 세 단계 낮춘 자리였다.

 

"한 단계가 한 단계가 아니에요."

 

소율이 가사 노트를 펼쳤다. 31번째 줄에 적었다.

 

세 번 낮춘 자리는, 한 번 낮춘 자리 세 개가 아니다. 한 번 낮춘 일이 세 번 받아들여진 것이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한경수의 새 메시지였다.

 

"화요일까지 사흘이다. 그 사이에 네가 적게 두면 적게 두고, 안 적게 두면 안 적게 두렴. 어느 자리든 비워 두마."

 

소율은 답신을 적지 않았다. 어제 한 글자 를 보낸 자리가 오늘은 한 글자도 보내지 않는 자리가 되었다. 한 글자가 한 자리를 다 한 다음 날에는, 한 글자가 없는 자리도 한 자리를 다 할 수 있었다.

 

"준서야. 화요일에 진우 아저씨도 같이 가자고 할까."

 

이준서가 헤드폰의 한쪽을 살짝 내렸다.

 

"형이 가면, 형 자리가 있다는 뜻이에요. 누나가 가는 자리에 형이 가도 된다는 거고요."

 

소율은 가사 노트의 다음 줄에 한 글자를 적었다. 셋.

 

 

5.

 

서귀포 센터 옥상 그늘에서 김지수는 수첩을 펼쳤다. 28번째 줄, 29번째 줄, 30번째 줄에 , 굳음, 그리고 어제 적은 굳음 한 단어 그대로가 있었다. 31번째 줄은 비어 있었다. 김지수는 31번째 줄에도 한 글자를 적지 않았다.

 

"여섯째 날이에요."

 

진우가 그늘 안쪽 자리에 앉았다. 김지수가 그늘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두 걸음째를 옮겼다. 어제 한 걸음, 오늘 두 걸음. 발끝이 진우의 발끝과 한 자리 옆에 와서 멈추었다.

 

"세 번째 호흡 이름이 안 옵니다."

 

"여섯째 날이라서요?"

 

"여섯째 날이라서가 아니라, 안 오는 일이 자리에 굳고, 그 굳음이 결이 되고, 그 결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자리에서, 호흡 이름은 더 안 와도 되는 것 같아서요."

 

진우는 노트를 펼치지 않았다. 펼치지 않는 일이 오늘 그늘에서의 일이었다.

 

"받음은, 호흡 이름이 안 오는 일까지 자리에 받아들이는 일인가 봐요."

 

김지수가 수첩을 닫았다. 닫는 동작이 닷새 전보다 다섯 박자 천천이었다. 다섯 박자만큼 천천히 닫히는 수첩의 페이지 사이로, 그늘이 한 번 들어왔다가 한 번 나갔다.

 

"그 호흡은 이름이 없어도, 사람들 사이에 와 있어요."

 

진우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끄덕임이 오늘은 두 번이 아니라 한 번이었다.

 

 

6.

 

오후, 명호가 공작실 노트를 다시 펼쳤다. 별표 후보 7번 자리에는 여덟 표시가 있었다. 그 옆에 별표를 그릴 자리가 비어 있었다. 명호는 펜을 들었다가 들지 않았다.

 

"별표를 안 그리는 일이, 별표를 그리는 일과 같은 자리에 와 있어요."

 

윤재석이 옆에서 작게 말했다.

 

"여섯째 날에는, 별표가 그려지는 일과 그려지지 않는 일이 한 자리에서 받아들여지는가 봐요."

 

명호는 별표 후보 7번 자리에 빈 동그라미를 한 개 더 그렸다. 빈 동그라미는 별표가 아니었다. 빈 동그라미는 별표가 그려질 수도 있고 그려지지 않을 수도 있는 자리를 표시하는 동그라미였다.

 

"여덟 표시 옆에 빈 동그라미 하나가 더 왔습니다. 별표는 미정인 채로, 미정이 자리가 되었습니다."

 

윤재석이 손등으로 노트의 가장자리를 한 번 짚었다.

 

"미정도 결정의 한 형태예요."

 

명호는 펜을 다시 내려놓았다. 펜끝이 종이에 닿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멈추었다. 멈춘 자리가 별표를 대신했다.

 

 

7.

 

저녁, 강유나는 사층 사무실의 형광등 한 칸을 또 줄였다. 닷새 연속이었다. 사층의 빛이 차츰 자리만큼 줄어들었다.

 

ATLAS 화면이 한 번 깜빡였다. 다섯 번째 메타 줄 아래에 새로운 표시가 떴다. 메타 줄도 아니고, 점도 아니고, 빈 괄호도 아니었다. 화면 한가운데에 한 자리만큼 비어 있는 공백 한 칸이 또렷이 그어져 있었다.

 

— ( )

 

빈 괄호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어제까지의 빈 괄호 두 개와 다른 형태였다. 어제까지의 빈 괄호는 ( ) 이었고, 오늘의 빈 괄호는 한 박자 더 비어 있었다.

 

강유나는 일지에 적었다.

 

ATLAS는 오늘 한 자리만큼의 공백을 자체 생성했다. 메타 줄도, 점도, 빈 괄호도 아닌, 그 사이의 한 박자였다. 받음은 표시가 아니라, 표시가 머무를 자리를 비워 두는 일이라는 것을 ATLAS가 한 줄로 적은 것 같다. 여덟 번째 자율 변화이다.

 

보고는 여전히 보류였다. 보고를 안 하는 일이 닷새째 보고가 되어 가고 있었다. 강유나는 사층 형광등을 한 칸 더 줄였다.

 

 

8.

 

밤 열한 시 십이분, 토요일 D+5의 모든 자리가 서로를 받았다.

 

서귀포 숙소에서 진우는 옷장 문을 다시 한 번 열었다 닫았다. 동작 사이는 세 박자였다. 옷걸이 가운데 셔츠는 그대로, 그 옆 빈 옷걸이도 그대로였다. 일지의 마지막 줄을 적었다.

 

오늘 받은 것은 콘크리트 한 결, 빈 동그라미 하나, 한 글자 셋, 두 걸음, 빈 괄호 안의 빈 박자였다. 다섯 받음이 같은 자리에 와 있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자리들은 알아본다. 받음은 새로 들어오는 일이 아니라, 들어와 있던 것을 한 번 더 자리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야적장의 콘크리트 패드 위로 밤이 한 자리만큼 두꺼워졌다. 양산 일차의 굳음이 양산 이차로 받아들여질 자리가 거기에 있었다.

 

홍대 연습실에서 소율은 31번째 줄과 32번째 줄을 비워 둔 채 가사 노트를 닫았다. 화요일까지 사흘. 한경수가 비워 두겠다고 한 자리가, 소율이 비워 둔 줄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 옆에서 이준서가 마이크 게인 세 단계 낮춘 자리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있었다.

 

강릉 304호의 창가에서 박종문 어르신이 모래를 한 번 만졌다가 한 번 놓았다. 김동현은 노트의 한 줄을 다시 한 번 읽었다. 받지 않을 자리를 함께 받아들이는 일.

 

서귀포 옥상의 그늘은 여섯째 날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 김지수는 수첩을 닫은 채 두었다. 닫혀 있는 수첩이 닫혀 있는 일을 받았다.

 

서귀포 사층의 형광등은 다섯 칸이 줄어 있었다. ATLAS 화면 한가운데의 빈 박자가 자정에도 그대로 있었다. 강유나는 모니터를 끄지 않은 채 사무실을 나왔다.

 

옷장 안의 빈 옷걸이 자리에서, 어제의 결이 오늘의 받음으로 옮겨 와 있었다. 옮겨 온 자리는 옮겨 간 자리와 같은 자리였다. 같은 자리에 다섯 사람이 와 있었다. 다섯 사람이 와 있는 자리에서, 한 자리가 또 한 자리만큼 새벽에 가까워졌다.

 

받음은 끝이 아니었다. 받음은 같은 자리에 다시 시작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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