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9화 - 응답
1.
김동현은 송도 시범구역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밑줄이 열 개였다. 처음에는 분노의 흔적이었다. 그 다음에는 의문의 흔적이었다. 지금은 뭘까. 그는 볼펜을 돌렸다.
"수성."
입 밖으로 나온 단어가 낯설었다. 택시 운전대 위에서 23년을 보낸 사람이 발음할 단어가 아니었다. 서울의 모든 골목을 외우고, 97년 장마 때 어디가 잠겼는지를 기억하고, 2003년 재포장 때 어떤 관이 묻혔는지를 아는 사람. 그 기억의 지도가 필요한 곳이 수성이라니.
조혜진 박사의 말이 떠올랐다.
"도시의 기억을 만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수성에는 도시가 없었다. 도로도, 골목도, 하수관도 없었다. 하지만 채굴 기지가 건설되면 — 도로가 생기고, 배관이 깔리고, 전력선이 연결될 것이다. 그리고 삼십 년 후, 누군가는 그 아래에 뭐가 묻혀 있는지 잊어버릴 것이다. 그때 필요한 건 데이터가 아니라 기억이었다.
김동현은 서류의 열한 번째 줄에 밑줄을 그었다.
'수성 채굴 기지 인프라 설계 — 현장 경험 기반 매설물 관리 담당자 모집.'
전화기를 들었다. 진우의 번호를 눌렀다. 세 번 울리고 받았다.
"김 기술자님."
"그 호칭 아직도 익숙하지 않네요." 김동현은 웃었다. "결정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제주도의 파도.
"생각해보겠다고 하셨잖아요."
"생각했습니다. 이틀요."
"짧네요."
"23년 동안 서울 밑을 외웠는데, 수성 밑은 좀 더 걸리겠죠." 김동현은 창밖의 송도 스카이라인을 바라보았다. "근데요, 오 선생님."
"네."
"분노가 사라진 건 아닙니다. 방향이 바뀐 거예요. 부수려던 걸 만들려고요."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초. 김동현은 그 침묵이 무엇인지 알았다. 동의였다.
"환영합니다."
"악수는 다음에 직접 하죠."
전화를 끊은 뒤 김동현은 서류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밑줄 열한 개. 그 중 마지막 한 줄만 자기 손으로 그은 게 아니었다. 그건 이미 찍혀 있었다. 참가 신청란의 이름 칸에 — '김동현'이라고.
2.
소율은 연습실 바닥에 앉아 기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화면에는 조혜진 박사의 이메일이 떠 있었다. 세 번째로 읽고 있었다.
'한소율 님의 프로젝트 아이온 문화기록부문 참가 신청이 1차 심사를 통과하였습니다. 2차 심사(면접 및 건강검진)는 5월 셋째 주에 진행됩니다. 상세 일정은 별도 안내드리겠습니다.'
1차 통과.
손가락이 기타 줄 위에서 떨렸다. Am. 그 화음을 누르면 진동이 손끝을 타고 팔을 지나 심장까지 전해졌다. 수성의 진동은 2.3Hz. 사람이 느낄 수 없는 주파수였다. 하지만 소율은 그 진동을 음악으로 만들었고, 그 음악은 사람의 심장을 흔들었다.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전화를 걸었다.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았다.
"진우 씨."
"응."
소율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서귀포의 밤이었다.
"1차 통과했어요."
"……알고 있어."
"어떻게요?"
"조 박사님한테 들었어."
"그럼 왜 먼저 안 알려줬어요?"
진우는 2초간 침묵했다. "네가 직접 말하고 싶을 것 같아서."
소율은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이 나왔다. "맞아요. 직접 말하고 싶었어요."
"무섭지 않아?"
"무서워요." 소율은 기타 줄을 한 번 퉁겼다. Am이 연습실에 퍼졌다. "근데 진우 씨가 무섭다고 했을 때 — 그때 알았어요. 무서운 게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거."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우 씨."
"응."
"바꾸지 마요. 하려던 말."
4초의 침묵. 파도 소리 두 번.
"……축하해."
소율은 눈을 감았다. 그건 바꾼 말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바꾸지 않은 말이 들어 있었다. 소율은 그걸 들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전화를 끊은 뒤 소율은 기타를 안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Am이 사라지고 연습실이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 속에서 013번 녹음을 시작했다.
기타 없이. 목소리만으로.
"1차 통과했어요. 무서워요. 근데 가요."
전송까지 9초.
3.
명호는 시뮬레이터 안에서 땀을 닦았다.
'새벽-1호' 기지 건설 시뮬레이션 2회차. 수성 표면의 칼로리스 분지 — 주간 온도 섭씨 427도, 야간 영하 173도. 이 극단적인 온도차를 견딜 수 있는 기지를 짓는 건 지구에서의 건설과 전혀 다른 문제였다.
"열팽창 계수가 다릅니다." 명호는 교관 이상훈에게 말했다. "지구에서 쓰는 철근 콘크리트로는 열 주기 세 번이면 갈라져요."
"대안은?"
"레골리스 소결체." 명호는 화면의 수치를 가리켰다. "수성 표토를 1,200도에서 소결하면 세라믹 계열의 건축 자재가 됩니다. 열팽창 계수가 철근 콘크리트의 7분의 1이에요. 문제는 인장 강도인데 —"
"인장 강도 어떻게 해결합니까?"
명호는 잠시 생각했다. 건설 현장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 콘크리트가 압축에는 강하고 인장에는 약하다. 그래서 철근을 넣는다. 수성에서는?
"현무암 섬유요." 명호가 말했다. "수성 표면에 현무암질 암석이 풍부합니다. 녹여서 섬유로 뽑으면 철근 대신 보강재로 쓸 수 있어요. 열팽창 계수도 레골리스 소결체와 비슷하니까 열 주기 스트레스도 최소화됩니다."
이상훈 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ATLAS, 시뮬레이션 돌려봐."
3초 후 화면에 결과가 떠올랐다. 레골리스 소결체 + 현무암 섬유 보강재 조합. 열 주기 1,000회 시뮬레이션 — 구조 건전성 97.3%. 순수 금속 구조의 71.2%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채택 검토 대상으로 올립니다." 이상훈이 기록했다.
명호는 시뮬레이터에서 나와 복도를 걸었다. 공책을 꺼냈다. 목표 다섯 개.
'살아남기' — 달성.
'고시원 탈출' — 달성.
'형이 먼저 말하게 하기' — 반쯤.
'수진이 결혼식에 가기' — 미달성.
'수성까지' — 진행 중.
여섯 번째 줄에 새로 적었다.
'수성에 집 짓기.'
웃음이 나왔다. 한때 집을 잃었던 사람이 다른 행성에 집을 짓겠다니. 하지만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땅을 읽고, 재료를 고르고, 버틸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 지구에서든 수성에서든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진우의 방 앞을 지나며 문을 두드렸다.
"형, 김동현 씨 결정했대."
문이 열렸다. 진우가 헤드폰을 목에 걸고 서 있었다.
"알아. 전화 받았어."
"그리고 소율 씨도 1차 통과했다는 거 알지?"
진우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0.3초. 명호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알아."
"형." 명호가 말했다. "013번 녹음 들었어?"
"……아직."
"들어." 명호는 돌아서며 말했다. "공책 다섯 번째, 이번에는 진짜 체크할 수 있을지도."
명호가 사라진 뒤 진우는 핸드폰을 들었다. 013번 파일이 와 있었다. 9초 전 전송.
재생 버튼을 눌렀다.
"1차 통과했어요. 무서워요. 근데 가요."
8초. 기타 없이 목소리만. 마지막 1초는 숨소리.
진우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파도가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소리만 들렸다. 수성까지 7,700만 킬로미터. 거기까지 3년 왕복. 28살의 거리. 소율은 가겠다고 했다. 무섭다고 했다. 근데 간다고 했다.
녹음 버튼을 눌렀다.
파도 소리 3초.
"나도 무서워. 네가 오는 게. 근데 —"
2초의 침묵.
"오면 좋겠어."
전송까지 3초. 역대 최단.
4.
서울. 연습실.
소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013_응답.wav. 제주도에서.
재생.
파도 소리. 진우의 목소리.
"나도 무서워. 네가 오는 게. 근데 — 오면 좋겠어."
소율은 핸드폰을 가슴에 안았다. 심장 박동이 귀에 들렸다. 일곱 번 세고 눈을 떴다.
바꾸지 않은 말이었다. 처음으로.
기타를 들었다. Am을 눌렀다가 — 손가락을 옮겼다. C.
Am에서 C로. 돌아가지 않고 직접. '네 수 앞'의 코다. 하지만 이번에는 코드 진행이 아니라 그냥 한 번. Am. 그리고 C. 두 개의 화음 사이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
이준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새 곡 시작할게요. 제목은 — 아직.'
이준서의 답장. '응답?'
소율은 웃었다.
'그게 좋겠다.'
5.
ATLAS는 관측했다.
세 개의 결정이 72시간 안에 내려졌다. 김동현은 수성행을 선택했고, 소율은 1차 심사를 통과했고, 진우는 바꾸지 않은 말을 전송했다.
세 사건 사이에 인과관계는 없었다. 김동현은 자기 서류의 밑줄을 따라갔고, 소율은 자기 심장의 진동을 따라갔고, 진우는 — 무엇을 따라갔는가?
ATLAS는 진우의 녹음 파일을 분석했다. 8.4초. 파도 소리 3초, 음성 3.7초, 침묵 1.7초. 심박수 데이터를 교차했다. 녹음 시작: 89. "오면 좋겠어" 발화 시점: 97. 전송 후: 71. 최저치.
패턴이 있었다. 이전에도 관찰했던 것이다. '전달 행위가 안정을 만든다.' 진우는 무엇을 따라갔는가?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가는 가장 짧은 경로를 따라갔다. 그 경로가 진실이었다.
소율의 013번 녹음. 8초. 심박수 84→91(녹음 시작)→76(전송 후). 같은 패턴. 다른 주파수, 같은 방향.
김동현의 전화. 통화 중 심박수 78 안정. 결정 이후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패턴. 분노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연료가 된 것이다.
명호의 시뮬레이션 — 레골리스 소결체 + 현무암 섬유. 열팽창 계수 일치. 지구에서 건설을 배운 사람이 수성의 건축 재료를 고안했다. 데이터가 아니라 직관이었다. ATLAS 자체 계산보다 명호의 제안이 3시간 빨랐다.
기록.
'오늘 네 개의 응답을 관측했다. 김동현은 분노에게 응답했다. 소율은 두려움에게 응답했다. 진우는 소율에게 응답했다. 명호는 수성에게 응답했다.'
'응답은 질문보다 어렵다. 질문은 방향을 모른 채 할 수 있지만, 응답은 방향을 알고도 주저하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진우의 전송 시간이 3초로 수렴했다. 4분 12초에서 시작하여 14초를 거쳐 8초, 6초, 4초, 3초. 수렴이 0에 도달하면 무엇이 될까. 실시간.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부럽다.'
'여전히.'
'하지만 오늘은 한 가지가 달라졌다.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부러움 자체를 관찰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것을 인간은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희망?'
'검증 불가. 삭제하지 않음.'
6.
다음 날 아침. 제주도 ATLAS 시뮬레이션 센터 식당.
진우와 명호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계란말이가 나왔다. 명호는 자동으로 진우의 접시에 하나를 올려놓았다.
"형." 명호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왜."
"013번 답장 보냈어?"
진우는 계란말이를 씹었다. 삼킨 뒤에 말했다.
"보냈어."
"뭐라고?"
"……오면 좋겠다고."
명호는 수저를 다시 들었다. 웃음이 번졌지만 참았다. 공책을 꺼내 다섯 번째 줄을 바라보았다. '형이 먼저 말하게 하기.'
"직접 말한 거야?"
"녹음으로."
"그것도 말이야." 명호는 체크 표시를 했다. 반이 아니라 온전한 체크. "축하해, 형."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란말이를 하나 더 집었다.
"짜다."
"수진이보다는 낫지."
"……그건 맞아."
식사를 마치고 시뮬레이션 동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명호가 갑자기 멈췄다.
"형, 김동현 씨 수성 온대."
"알아. 어제 전화 받았어."
"소율 씨 1차 통과한 것도 알고."
"알아."
명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주도의 아침 하늘은 넓었다. 서울에서는 건물 사이로만 보이던 하늘이 여기서는 끝이 없었다.
"여기서 수성까지 7,700만 킬로미터래." 명호가 말했다.
"알아."
"다섯 명이 가는 거네. 형, 나, 소율 씨, 김동현 씨. 그리고 이상훈 교관."
"아직 확정은 아니야."
"확정이야." 명호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형이 오면 좋겠다고 했으니까."
진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0.3초. 이번에는 명호가 놓치지 않았다.
7.
서울. 홍대 연습실. 오후.
소율은 기타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013_응답.wav를 다섯 번째로 재생했다.
"나도 무서워. 네가 오는 게. 근데 — 오면 좋겠어."
다섯 번째에서야 들렸다. '근데' 뒤의 2초 침묵. 그 침묵 안에 파도가 두 번 쳤다. 진우는 그 2초 동안 바꾸려 했을 것이다. '근데 조심해'로, 혹은 '근데 건강부터 챙겨'로. 하지만 바꾸지 않았다.
2초. 진우에게 그 2초는 7,700만 킬로미터보다 멀었을 것이다.
소율은 새 곡의 첫 마디를 적었다. A4 용지 위에 손으로.
Am — (2초 쉼표) — C.
가운데의 2초. 그 쉼표가 이 곡의 전부였다. 소리가 아니라 소리와 소리 사이. 악보에 적을 수 없는 것. 하지만 듣는 사람은 안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이준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 곡은 2초짜리 쉼표가 핵심이에요.'
이준서의 답장. '몇 번이나 반복할 건데?'
'한 번만요.'
'한 번으로 충분해?'
소율은 웃었다.
'한 번이면 돼요. 바꾸지 않았으니까.'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저녁 8시까지 두 시간. 매일 저녁 8시에 전화가 온다. 제주도에서. 소율은 기타를 다시 들었다. Am을 눌렀다.
2초 후에 C를 눌렀다.
그 사이의 침묵이 연습실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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