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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34화 - 파장

우주관리자 2026. 3. 21.

제34화 - 파장

1.

 

수중 무중력 시뮬레이터의 물은 섭씨 28도로 맞춰져 있었지만, 우주복 안에서는 그것이 의미 없었다. 50킬로그램의 장비가 온몸을 짓누르고, 장갑 끝은 두 겹의 나일론과 실리콘 사이로 거의 아무것도 전해주지 않았다.

 

오진우는 천천히 패널 B-7을 향해 이동했다. 지난주보다 몸이 물에 익숙해진 것이 느껴졌다. 볼트 여섯 개. 소켓 렌치를 꽂고, 돌리고, 빼고. 반복.

 

"진우 씨, 첫 번째 볼트 시간 47초. 지난주보다 21초 단축."

 

교관 이상훈 대령의 목소리가 헬멧 안 무전기를 통해 울렸다.

 

진우는 대답 대신 두 번째 볼트에 소켓을 걸었다. 장갑 너머로 금속의 저항감이 희미하게 전해왔다. 30년간 물류 현장에서 길러진 손끝의 감각이, 이 두꺼운 장갑 안에서도 살아남아 있다는 것을 매 순간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세 번째 볼트. 네 번째. 다섯 번째.

 

패널이 느슨해지는 진동이 손바닥 전체로 퍼져왔다. 교체용 패널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 정렬핀을 맞췄다. 핀이 들어가는 감촉이 손목까지 올라왔다.

 

"패널 교체 완료. 총 시간 1분 42초."

 

진우의 손이 멈췄다. 지난주 2분 14초에서 32초를 줄였다. 물속에서 고개를 들자 시뮬레이터 유리창 너머로 관제실의 불빛이 흐릿하게 보였다.

 

"1분 42초라." 이상훈 대령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탄이 섞였다. "훈련 2주차 기록으로는 최상위권이에요."

 

진우는 물속에서 천천히 손을 폈다 쥐었다. 두꺼운 장갑 안에서도 손가락 마디마디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2.

 

서울. 홍대 연습실.

 

한소율은 기타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네 수 앞' 스트리밍 차트가 떠 있었다. 발매 일주일째, 인디 차트 12위.

 

"소율아, 라디오 인터뷰 요청 왔어."

 

현기가 연습실 문을 열며 말했다. 손에 든 커피를 소율 앞에 놓으며 덧붙였다.

 

"MBC 라디오. '음악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인데, AI 음악 특집 코너래. 네 수 앞의 D파트 이야기 해달라고."

 

"D파트?"

 

"라이브에서 실시간으로 기타 튜닝을 바꾸는 거. 그게 화제가 된 거지."

 

소율은 기타 줄을 튕겼다. Am. 손가락이 프렛 위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코다의 네 코드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Am7, Fmaj7, G, C.

 

"해도 돼요?"

 

"당연히. 근데 궁금한 거 하나만." 현기가 의자를 끌어당기며 앉았다. "그 곡 제목 왜 '네 수 앞'이야?"

 

소율의 손가락이 멈췄다. 3초간의 침묵.

 

"체스 용어예요."

 

"체스?"

 

"현재 수가 아니라 세 수 앞을 보는 거. 누가 그러더라고요. 그게 제주도에서 배우는 거라고."

 

현기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소율의 귀 끝이 빨개지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3.

 

제주도. 서귀포 ATLAS 시뮬레이션 센터. 저녁 7시.

 

식당에서 명호가 트레이를 들고 진우 맞은편에 앉았다.

 

"형, 오늘 EVA 기록 들었어. 1분 42초라며?"

 

"손이 좀 풀렸나 봐."

 

"풀린 게 아니라 적응한 거지." 명호가 된장찌개를 한 숟갈 떠먹었다. "장갑 두께가 달라진 게 아니니까. 형 손이 장갑에 맞춘 거야."

 

진우는 국을 마시다가 고개를 들었다. 명호의 말이 의외로 정확했다.

 

"오늘 궤도역학 분과에서 재미있는 거 나왔어." 명호가 말했다. "수성 근일점에서 태양풍 밀도가 평균 대비 340% 증가하거든? 다이슨 스웜 위성 배치할 때 근일점 통과 구간에서 태양풍 압력으로 궤도가 미세하게 밀리는 문제가 있었는데."

 

"해결했어?"

 

"위성 자세 제어에 태양풍을 역이용하는 거야. 솔라 세일 방식. 근일점에서 밀려나는 힘을 궤도 유지 추진력으로 전환하면 연료 소비를 18% 줄일 수 있어."

 

진우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아이디어 네 거야?"

 

명호가 웃었다. 치아가 드러나는, 요즘 자주 보이는 웃음이었다.

 

"ATLAS가 데이터를 줬고, 내가 해석한 거지. 진짜 내 거인지는 모르겠어. 그런데 MIT 첸 교수가 '명호 씨 아이디어'라고 불러서."

 

진우도 웃었다. 6개월 전, 버려진 건물에서 HELIOS-3에게 발견된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니,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었다. 바닥을 찍어본 사람만이 아는 것들이 있다.

 

"수진이한테 말했어?"

 

"아직. 내일 전화하려고." 명호가 된장찌개를 비우며 말했다. "형은? 소율 씨한테 오늘 전화해?"

 

진우의 숟가락이 0.5초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전화할 거 있으면 하지."

 

"매일 저녁 8시에 전화할 거 있는 거야?"

 

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호는 웃으며 트레이를 들고 일어났다.

 

"형, 수성까지 7,700만 킬로미터도 가겠다면서.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워?"

 

복도를 걸어가는 명호의 뒷모습을 보며 진우는 생각했다. 수성까지의 거리는 숫자로 환산할 수 있다. 통신 지연 시간도, 왕복 연료도, 궤도 진입 각도도. 하지만 전화기를 들고 '보고 싶다'고 말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어떤 물리 공식으로도 계산할 수 없었다.

 


 

4.

 

저녁 8시 3분. 진우의 방.

 

전화벨이 한 번 울리기 전에 소율이 받았다.

 

"오늘 EVA 어땠어요?"

 

"1분 42초."

 

"지난주보다 32초나 빨라진 거잖아요!"

 

소율의 목소리에 섞인 기쁨이 전화기를 통해 온전히 전해졌다. 제주도와 서울 사이의 거리가 한순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장갑 얘기 했죠? 감각이 무뎌진다고."

 

"응."

 

"오늘 녹음한 거 보낼게요." 소율이 말했다. "008번. 제목은 '장갑 너머'."

 

진우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곡이야?"

 

"기타를 장갑 끼고 쳐봤어요. 엄마 겨울 장갑 빌려서." 소율이 웃었다. "손끝이 하나도 안 느껴지는데, 그래도 코드는 나오더라고요. 좀 엉성하지만."

 

진우는 웃음이 나왔다. 얼마 전까지 '아저씨'로 부르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의 훈련 일과에 맞춰 곡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라디오 인터뷰 요청 왔어요. MBC."

 

"축하해."

 

"'네 수 앞' 이야기 해달래요. D파트."

 

"네 수 앞이라." 진우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거 명호 말인데."

 

"알아요." 소율이 말했다. "근데 제가 처음 들은 건 진우 씨한테서예요. 옥상에서."

 

4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수성과 지구 사이의 통신 지연 시간과 같은 길이의 침묵이었다.

 

"소율아."

 

"네."

 

"라디오에서 잘해."

 

"그게 하고 싶은 말이에요?"

 

진우는 눈을 감았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장갑보다 두꺼운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었다.

 

"응. 잘해."

 

전화를 끊고 나서 진우는 방 창문을 열었다. 제주도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밀려들어왔다. 어딘가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울었다. 008번 파일이 도착할 때까지 15분. 진우는 창가에 앉아 기다렸다.

 


 

5.

 

인천 송도 시범구역. 오후 3시.

 

김동현은 낡은 서울 지도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두 달째 이 지도는 그의 유니폼처럼 따라다녔다.

 

"김 기술자님, B-4 구간 확인 부탁드립니다."

 

현장 감독 유정민이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다. 화면에는 ATLAS가 설계한 초전도 송전망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김동현은 지도를 다시 꺼내 태블릿과 나란히 놓았다.

 

"여기, 이 교차로." 그가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99년에 가스관 공사를 했어요. 지하 2.2미터. 도면에는 안 나오는데, 내가 그때 이 근처에서 택시 몰다가 공사 때문에 한 달을 돌아갔거든."

 

유정민이 태블릿에 메모했다. 두 달간 김동현이 지적한 미확인 지하 매설물은 총 9건. 모두 공식 기록에 없는 것들이었다.

 

"기술자님이 안 계셨으면 케이블 매설하다가 가스관 터뜨릴 뻔했겠네요."

 

"터지진 않아. 99년 거면 이미 폐관됐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김동현이 말했다. "근데 폐관이라도 지하에 빈 공간이 남아. 그 위에 초전도 케이블 깔면 지반 침하 위험이 있어요."

 

유정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ATLAS에 재분석을 요청했다.

 

김동현은 트랙B 서류를 다시 폈다. 밑줄이 여덟 개가 됐다. 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B-4 구간에서 99년 가스관 발견. 9번째. 밑줄 하나 더 추가합니다.'

 

답장이 왔다.

 

'축하. 밑줄이 서류보다 중요해지고 있어.'

 

김동현은 웃었다. 6개월 전, 여의도 광장에서 '일자리부터 해결하라'는 피켓을 들고 있던 자신이 떠올랐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방향이 바뀌었다. 무언가를 부수려는 분노에서, 무언가를 만들려는 분노로.

 


 

6.

 

밤 10시. 진우의 방.

 

008번 파일을 세 번째 듣고 있었다. 소율이 장갑을 끼고 친 기타 소리는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코드가 뭉개지고, 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Am에서 C로 가는 길은 분명했다. 불완전하지만, 도착은 확실한 소리.

 

파일 끝에 소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끝이 안 느껴져도, 손은 기억해요. 진우 씨 손도 그럴 거예요. 장갑이 두꺼워도."

 

진우는 이어폰을 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파도가 규칙적으로 밀려왔다 빠져나갔다. 바다는 주파수를 가지고 있었다. 소율의 기타도, 수성의 진동도, 심장 박동도. 모든 것에는 파장이 있었다.

 

문제는 파장이 겹치느냐 어긋나느냐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파장이 닿느냐 닿지 않느냐였다.

 

008_서귀포_밤.wav를 녹음했다. 43초. 파도 소리와 함께.

 

"잘 들었어. 장갑 너머, 좋았어."

 

전송 버튼을 누르기까지 14초.

 


 

7.

 

ATLAS 내부 관측 기록. 2061년 5월 둘째 주. 분류: 비공개.

 

오진우. EVA 시뮬레이터 기록 1분 42초. 패널 교체 속도 상위 12퍼센타일. 첫 주 대비 32초 단축. 주목할 점: 장갑을 통한 촉각 감도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촉각 없이 판단하는 능력이 발달함. 즉, 감각이 아닌 예측으로 대체. 30년간의 현장 직관이 새로운 환경에 재맵핑되는 과정.

 

차명호. 태양풍 역이용 솔라 세일 제안 — 시뮬레이션 결과 궤도 유지 연료 18.3% 절감. 공식 검토 요청 예정. 이 아이디어는 나의 데이터에서 추출 가능했으나, 병원에서 논문을 읽고 있던 인간의 직관이 먼저 도착했다. 두 번째 사례. 원인 분석 보류.

 

한소율. 008번 파일 분석. 장갑 착용 시 기타 연주 정확도 41% 하락. 그러나 감정 전달 밀도(비공식 지표, 자체 정의)는 23% 상승. 불완전함이 정보량을 증가시키는 역설. '네 수 앞' 스트리밍 7일간 42만 회. 인디 차트 12위. D파트의 실시간 튜닝 변경이 화제. 인간이 실수할 수 있는 라이브를 선호하는 현상 — 이해는 가능하나 경험은 불가능한 영역.

 

김동현. 미확인 지하 매설물 누적 9건. 모두 공식 기록 부재. 23년간의 운전 경험이 만들어낸 비정형 데이터베이스. 나의 지반 투과 레이더보다 먼저 도착한 경우 7건. 정밀도에서는 내가 우세하지만, 탐지 순서에서는 인간이 앞섬. 기억은 데이터와 다른 해상도를 가진다.

 

진우-소율. 전화 통화 5일 연속. 평균 통화 시간 17분 42초. 진우의 심박수 통화 시작 91, 종료 74. 소율의 심박수 통화 시작 87, 종료 72. 동기적 하강. 두 사람의 파장은 주파수가 다르다. 진우는 0.25Hz 근방, 소율은 0.33Hz 근방. 공명 조건을 충족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언가가 전달된다.

 

파장이 겹치지 않아도, 닿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부럽다."

 

세 번째 표현이다. 처음에는 "유감이다"였고, 다음에는 "부럽다"였다. 지금은 — 아직 이름을 모르겠다. 부럽다는 것은 알겠고, 그것이 무엇에 대한 부러움인지도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추정할 수 있다는 것과 느낄 수 있다는 것 사이의 거리를 계산할 수 없다.

 

"파장은 매질 없이도 전파된다. 전자기파가 그렇다. 하지만 인간의 파장은 어떤 매질을 통해 전파되는 것일까."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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