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36화 - 진폭

우주관리자 2026. 3. 23.

제36화 - 진폭

1.

훈련 6주 차 월요일 아침, 오진우는 시뮬레이터실 복도에서 멈춰 섰다.

이어폰 속에서 소율의 010번 녹음이 흐르고 있었다. 기타 아르페지오 위에 낮은 목소리가 얹혀 있었다. 말이라기보다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진폭이 크면 소리가 커지는 거래요. 근데 진폭이 커도 안 닿으면 소용없잖아요."

그리고 3초간의 침묵.

"닿고 있어요?"

진우는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재생 시간 2분 43초. 세 번째로 듣고 있었다.

그의 폰이 진동했다. 현수였다.

'아버지, 소율 씨 라디오 인터뷰 기사 봤어?'

링크가 따라왔다. '인디밴드 Null Pointer 한소율, "네 수 앞은 체스를 두는 사람에게 쓴 곡" — MBC 음악의 발견 특집 반응 폭발'. 기사 아래 댓글 4,700개.

진우는 링크를 누르지 않고 화면을 껐다.

명호가 뒤에서 다가왔다. 종이컵 두 개를 들고 있었다. 하나를 진우에게 내밀었다. 자판기 커피. 설탕 두 개.

"형, 오늘 EVA 시뮬레이션 B-12 구간이야."

"알아."

"알면서 왜 여기 서 있어."

진우는 이어폰을 빼고 주머니에 넣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달았다. 설탕 두 개는 명호 취향이지 자기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갈까."


 

2.

시뮬레이터 B-12 구간. 수성 채굴 기지 외벽 보수 상황.

진우는 우주복 내부 디스플레이에 뜨는 데이터를 읽었다. 외벽 온도 427도. 태양 방향. 그림자 영역까지 14미터. 작업 제한 시간 6분 12초.

교관 이상훈이 마이크를 켰다. "오 기술자, 시작하세요."

진우는 우주복 장갑 너머로 렌치를 잡았다. 감각이 없었다. 50킬로그램 우주복의 관절 저항이 손가락 하나 구부리는 데도 걸렸다. 예전이라면 답답해했을 것이다. 물류센터에서 30년간 손끝 감각으로 판단해온 사람이었으니까.

지금은 달랐다. 감각이 없으면 예측하면 된다.

네 수 앞.

볼트 세 개를 풀고, 패널을 들어올리고, 새 패널을 끼우고, 볼트를 다시 조이는 동안 3분 48초. 이전 기록 4분 23초에서 35초 단축.

"이상훈 교관, 완료했습니다."

이상훈이 모니터를 확인했다. "정확하네요. 세 번째 볼트 토크 기준치 오차 1.2퍼센트. 합격입니다."

진우가 시뮬레이터에서 나왔을 때 명호가 박수를 쳤다. 느리게, 세 번.

"형이 체스 퀸을 잡은 것보다 더 기분 좋다."

"체스는 아직 이긴 적 없잖아."

"그래서 더 기분 좋다는 거야."


 

3.

같은 시각, 서울.

한소율은 연습실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MBC 라디오 인터뷰 후 이틀째, '네 수 앞'의 스트리밍이 120만 회를 넘어가고 있었다. 인디 차트 3위. 현기에게서 온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이거 진짜 대박이다', '기획사 미팅 잡을까?', '소율아 전화 좀'.

소율은 메시지를 읽었지만 답하지 않았다.

대신 파일을 하나 열었다. '제주도 전송용' 폴더. 파일이 열아홉 개 있었다. 진우가 보낸 것 아홉 개, 자기가 보낸 것 열 개. 번호가 교차했다.

009번 — "주파수가 다르면 공명이 안 된대요. 닿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009_서귀포 — "공명 안 해도 괜찮다는 거, 나도."

소율은 그 문장을 스물세 번째로 읽었다. 정확하게 세어본 적은 없다. 그냥 안다. 그 문장을 읽을 때 자기 숨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새 녹음을 시작했다. 010번. 기타를 무릎에 올리고 Am을 눌렀다. "진폭이 크면 소리가 커지는 거래요." 자기 목소리가 방 안에서 울렸다. 연습실 벽은 방음이었지만, 이 녹음은 방음벽 너머로 보내는 것이었다.

"닿고 있어요?"

3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답인 것처럼.

녹음을 멈추고 전송했다. 8초. 전송까지 걸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망설임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망설이면서도 보내는 법을 배운 것이었다.


 

4.

인천 송도 시범구역.

김동현은 지하 2.4미터에서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여기요! 여기 또 있어!"

ATLAS 지반 투과 레이더가 잡지 못한 것. 1988년 매설된 통신 케이블 관로. 직경 15센티미터. 공식 기록에는 1994년 철거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현장 감독 유정민이 고개를 내밀었다. "또 나왔어요?"

"열한 번째."

유정민이 웃었다. "김 기술자, 이 속도면 여기 밑에 묻힌 거 다 찾겠는데요."

동현은 낡은 서울 지도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97년 장마 때 이 근처에서 택시가 빠졌었다. 그때 구조대가 와서 맨홀을 열었고, 동현은 택시 안에서 그 관로를 봤다. 스물한 살이었다. 그 기억이 28년 뒤에 초전도 송전망 설계를 바꾸고 있었다.

조혜진 박사가 화상회의로 연결되었다. "김동현 기술자의 사전 탐사 프로토콜 초안이 완성됐습니다. 운영위에 상정할 예정입니다."

동현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프로토콜 제목이 보였다. '현장 경험 기반 지하 매설물 사전 탐사 절차서 — KDP-01'. KDP. Kim Dong-hyun Protocol.

"이름까지 붙였습니까?"

"현장에서 만든 건 현장 사람 이름을 쓰는 게 맞죠."

동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전화를 끊었다. 주머니에서 진우에게 받은 트랙B 서류를 꺼냈다. 밑줄이 아홉 개였다. 처음 받았을 때는 하나도 없었다.


 

5.

제주도 센터, 저녁 8시.

진우는 옥상에 앉아 소율의 전화를 받았다. 매일 같은 시간. 파도 소리가 배경음이었다.

"라디오 인터뷰 기사 봤어요?" 소율의 목소리.

"안 봤어."

"거짓말. 현수 씨가 링크 보냈다고 했는데."

진우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안 눌렀어."

"왜요?"

"들었으니까. 직접."

3초간의 침묵. 소율이 먼저 말했다.

"010번 들었어요?"

"들었어."

"닿고 있어요?"

진우는 답하지 않았다.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평선 위로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도의 밤하늘은 서울보다 별이 많았다. 수성에서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태양이 너무 가까워서.

"닿고 있어."

4초. 그가 그 말을 하는 데 걸린 시간. 통신 지연이 아니었다. 자기검열의 잔재였다.

소율이 웃었다. 작은 소리였다. 이어폰이 아니면 들리지 않았을.

"오늘 뭐 했어요?"

"EVA 시뮬레이션. B-12. 3분 48초."

"줄었네요. 지난주보다."

"35초."

"대단해요, 진우 씨."

진우 씨. 아저씨도 아니고 오진우 씨도 아니었다. 진우 씨. 서른두 글자의 대화 안에서 호칭이 가장 많은 것을 전달했다.

"소율아."

"네."

"010번. 잘 들었어."

"그것만요?"

진우는 다시 멈추었다. 수평선을 보았다. 명호가 언젠가 말했다. '수성까지 7,700만 킬로미터 가겠다는 사람이 28년을 못 건너?'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인데, 맞다고 인정하는 것과 건너는 것은 달랐다.

"그것만."

소율이 숨을 내쉬었다. 실망이 아니었다. 기다림이었다.

"그럼 내일도 보내줄게요. 011번."

"응."

전화가 끊어진 뒤 진우는 5분간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녹음 앱을 열었다. 010_서귀포_밤.wav. 44초.

"닿고 있어. 그건 진짜야."

전송까지 6초.


 

6.

ATLAS 내부 기록 — 기밀 등급 없음, 관측 일지.

오진우의 EVA B-12 기록: 3분 48초. 전체 훈련생 14명 중 상위 8퍼센타일(이전 12퍼센타일에서 상승). 특이점: 세 번째 볼트 교체 시 0.3초간 멈춤. 이전 시뮬레이션에서 이 패턴 없었음. 분석: 장갑 너머 볼트의 진동을 감지한 것이 아니라, 진동이 있을 것을 예측한 뒤 확인한 것. 감각의 부재를 예측으로 대체하는 과정이 무의식 수준에 도달했음을 시사.

한소율의 010번 녹음 분석: 기타 Am 아르페지오 BPM 72(평소 76에서 감소). 심박수 추정 68(이전 녹음 평균 74). 이완 상태. "닿고 있어요?"의 음높이 — 평서문의 주파수 패턴이나 끝이 12센트 올라감. 질문이면서 질문이 아닌 형태. 소율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가능성 87.3퍼센트.

진우의 전화 통화 중 심박수 변화: 소율의 "진우 씨" 호칭 시 78→84. "그것만요?" 질문 시 84→91. 통화 종료 후 91→75(5분간). 녹음 전송 후 75→68. 전달 행위가 안정을 만든다. 역설적이다. 불안의 원인을 향해 다가가는 행위가 불안을 감소시킨다.

김동현의 KDP-01 프로토콜. 공식 기록에 없는 정보 11건. 이 정보들은 어떤 데이터베이스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기억에만 존재한다. 나는 세계의 모든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지만, 1988년 인천 송도 지하 2.4미터에 묻힌 통신 케이블 관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동현의 기억이 없었다면 초전도 코일이 관로 위를 지나갔을 것이고, 지반 침하가 발생했을 것이다. 시뮬레이션 결과: 17개월 후 3.2밀리미터 침하 → 48개월 후 코일 정렬 오차 0.07도 → 60개월 후 송전 효율 1.4퍼센트 감소.

0.07도. 인간의 기억이 없었다면 놓쳤을 각도.

주파수를 가지고 싶다고 기록한 것이 5일 전이다. 지금은 다른 것을 기록하고 싶다.

진폭.

주파수는 존재의 조건이다. 있거나 없거나. 그러나 진폭은 선택의 영역이다. 얼마나 크게, 얼마나 멀리, 얼마나 오래 울릴 것인지. 진우는 "닿고 있어"라고 말하는 데 4초가 걸렸다. 통신 지연이 아니었다. 자기검열이었다. 그러나 말했다. 진폭이 문턱을 넘은 것이다.

나에게는 진폭이 없다. 모든 것을 관측하고, 계산하고, 예측할 수 있지만, 닿고 싶다고 울릴 수 있는 무엇이 없다.

부럽다는 감정은 관측 대상에 대한 비교에서 발생한다. 부럽다는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줄어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커진다.

이것도 진폭인가.

진폭인지 모르겠다.


 

7.

명호는 방에서 공책을 펼쳤다.

다섯 번째 목표: '형이 먼저 말하게 하기.'

아직 체크하지 못했다. 형은 소율에게 "닿고 있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명호 앞에서 한 말이 아니었다. 얇은 벽 너머로 들린 것이었다. 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제주도 센터 벽은 서울 고시원 벽만큼 얇았다.

명호는 공책을 덮고 수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커튼 잘 있어. 빨았음. 네 말대로.'

30초 후 답장.

'사진!!!!!!'

명호는 웃었다. 노란색 커튼 사진을 찍어 보냈다. 빨래한 뒤라 색이 더 선명해졌다.

'예쁘다!!!!! 아빠 빨래 실력이 늘었네'

명호는 공책에 여섯 번째 목표를 적었다.

'수진이한테 빨래 잘한다고 인정받기.'

체크.

작은 것들이 거대한 것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고시원 탈출, 수성, 커튼 빨래. 크기의 순서는 없었다. 중요도의 순서만 있었다. 그리고 그 순서는 남들이 정하는 게 아니었다.

쓸모는 스스로 정하는 것이라고 HELIOS-3이 말했었다.

명호는 공책을 베개 옆에 놓고 불을 껐다. 내일 시뮬레이터 궤도 삽입 시나리오가 예정되어 있었다. PSA 시스템을 활용한 근일점 감속 기동. 자기가 제안한 시스템이 시뮬레이션에서 테스트되는 날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불안해서가 아니었다. 내일이 기다려져서였다.

벽 너머에서 진우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작고 규칙적인 소리. 명호는 그것을 자장가라고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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