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30화 - 중력

우주관리자 2026. 3. 16.

제30화 - 중력

1.

 

제주도 서귀포 ATLAS 시뮬레이션 센터의 아침은 바다 냄새로 시작됐다.

 

오진우는 눈을 뜨자마자 창밖을 봤다. 한라산 능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아파트 벽만 보이던 창문이 여기서는 수평선까지 보여줬다. 낯선 광경이었다. 그리고 낯선 만큼, 불안했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소율에게서 새벽 두 시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002_수성이_숨_쉬는_소리.wav'

 

파일명만 읽고도 가슴이 뛰었다. 어젯밤 첫 번째 파일 '001_수성이_혼자_울던_날.wav'를 세 번 들었다. 이어폰을 끼고 이불 속에서. 수성의 진동이 가청 주파수로 변환된 낮은 울림 위로 기타 아르페지오가 겹쳐지는 순간, 서울에 두고 온 것들이 떠올랐다.

 

소율의 연습실. 커피 냄새. 악보 위에 놓인 볼펜. 벚꽃잎.

 

이어폰을 꽂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기 전에 3초를 멈췄다. 듣고 나면 답장을 해야 하니까. 답장을 하면 또 말을 고르느라 4분이 걸리니까.

 

재생.

 

수성의 진동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어제보다 낮은 주파수였다. 2.1Hz. 수성의 야반구, 영하 180도의 표면이 내는 소리. 그 위에 기타가 없었다. 소율의 숨소리만 있었다. 녹음 버튼을 누르고 마이크 앞에 앉아 숨만 쉰 것이다. 4분 11초 동안.

 

진우는 파일이 끝날 때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봤다. 하얀 천장.

 

'잘 들었어.'

 

답장에 14초 걸렸다. 원래 말은 삭제했다.

 


 

2.

 

"형, 밥."

 

명호가 문을 두드렸다. 복도에서 된장국 냄새가 났다. 센터 식당은 1층이었고, 아침 7시부터 8시 사이에 식사를 마쳐야 했다.

 

훈련팀 14명이 한 테이블에 모였다. 절반은 MIT, KAIST, 칼텍 출신 엔지니어였고, 나머지 절반은 현장 기술자들이었다. 진우와 명호는 현장 쪽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진우였고, 가장 학력이 낮은 사람도 진우였다.

 

"오늘 저중력 적응 훈련 첫날입니다."

 

교관 이상훈 대령이 식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전직 공군 조종사. 마흔세 살. 체격이 좋았고, 눈이 날카로웠다.

 

"수성 표면 중력은 지구의 약 0.38배입니다. 화성과 비슷하죠. 오늘 오전에 포물선 비행기로 감각을 익히고, 오후에 시뮬레이터에 들어갑니다."

 

명호가 된장국을 한 숟갈 떠먹으며 중얼거렸다.

 

"포물선 비행기라."

 

"구토 주머니 챙겨라." 옆자리 박지현이 웃었다. 지현은 진우의 Nexus AI 팀장이었고, 프로젝트 아이온 현장관리팀 부팀장으로 함께 온 사람이었다.

 

진우는 밥을 씹으며 창밖을 봤다. 바다가 보였다. 수평선 위로 구름 한 점 없었다.

 

"형, 무서워?" 명호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밥 먹어."

 

명호는 웃었다.

 


 

3.

 

포물선 비행기는 군용 수송기를 개조한 것이었다. 내부에 좌석은 없었다. 바닥에 패드가 깔려 있었고, 벽에 손잡이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이륙 후 1만 미터까지 상승합니다. 이후 포물선 기동을 시작하면 약 25초간 0.38G 환경이 됩니다. 이걸 열두 번 반복합니다."

 

이상훈 교관이 설명을 마치고 덧붙였다.

 

"구토는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통계적으로 첫 비행에서 60퍼센트가 토합니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엔진 소리가 동체를 흔들었다. 진우는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명호가 옆에 있었다. 둘 다 말이 없었다.

 

"3, 2, 1 — 마이크로 그래비티."

 

바닥이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바닥은 그대로 있었다. 중력이 줄어든 것이다. 0.38G. 몸이 가벼워졌다. 발이 바닥에 닿아 있었지만, 점프하면 천장까지 닿을 것 같았다.

 

진우의 위장이 뒤집혔다.

 

"크흡—"

 

구토 주머니를 펼칠 틈도 없었다. 위산이 올라왔다. 삼십 년 동안 지구 중력에서만 살아온 내장이 반란을 일으켰다. 옆에서 누군가가 먼저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명호는 토하지 않았다.

 

두 발을 바닥에 딛고, 두 눈을 감고, 양팔을 벌린 채 서 있었다. 마치 어딘가에서 이미 경험해 본 것처럼.

 

"명호 씨, 괜찮아요?" 박지현이 물었다.

 

"네." 명호가 눈을 떴다.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25초가 끝났다. 중력이 돌아왔다. 진우는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입안이 쓰고 다리가 떨렸다.

 

"괜찮아, 형?" 명호가 다가왔다.

 

"괜찮아." 진우는 입을 닦으며 웃었다. "60퍼센트에 들어간 것뿐이야."

 

두 번째 포물선이 시작됐다. 진우는 이번에는 토하지 않았다.

 


 

4.

 

오후 시뮬레이터 훈련은 더 가혹했다.

 

수성 표면을 재현한 VR 환경 안에서 채굴 장비를 조작해야 했다. 장갑이 두꺼웠고, 시야가 좁았고, 통신에는 4초의 지연이 있었다. 지구와 수성 사이 빛의 속도로 왕복하는 데 걸리는 최소 시간.

 

"ATLAS, 3번 드릴 암 20도 좌회전."

 

4초 후.

 

"3번 드릴 암, 20도 좌회전 완료."

 

4초.

 

진우는 이 4초를 견딜 수 없었다.

 

삼십 년 동안 물류 현장에서 일한 사람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즉시 해결해야 했다. 지게차가 막히면 30초 안에 빼야 했고, 컨베이어가 멈추면 1분 안에 원인을 찾아야 했다. 4초의 공백은 사치였다. 아니, 공포였다.

 

"4번 드릴 이상 감지. 진동 패턴 비정상."

 

4초.

 

"ATLAS, 4번 드릴 정지."

 

4초.

 

"4번 드릴, 정지 완료."

 

이미 8초가 지나 있었다. 현장이었다면 드릴은 진작 멈추고 원인 파악에 들어갔을 것이다. 여기서는 말 한마디에 왕복 8초가 걸렸다.

 

"오 컨설턴트." 이상훈 교관이 시뮬레이션을 멈추고 다가왔다. "현장 감각이 좋습니다. 문제 감지가 빠릅니다."

 

"하지만 대응이 느립니다." 진우가 헬멧을 벗으며 말했다.

 

"그래서 훈련하는 겁니다. 4초를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게 이 훈련의 핵심이에요. 반응 속도가 아니라 예측 능력."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납득되지 않았다. 4초 뒤를 예측하라는 것은 30년의 습관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명호가 옆 시뮬레이터에서 나왔다. 성적표를 들고 있었다.

 

"형, 나 궤도 배치 시뮬레이션 통과했어."

 

"축하한다."

 

"형은?"

 

"4초를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한대."

 

명호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형, 체스 쳐 본 적 있어?"

 

"없는데."

 

"체스는 상대 수를 예측하는 게임이야. HELIOS-3한테 병원에서 배웠는데, 5연패하고 나서 깨달았어. 현재 수를 두는 게 아니라 세 수 앞을 두는 거야."

 

진우는 명호를 봤다.

 

"네가 4초를 기다리는 법을 이미 알고 있었구나."

 

"병원에서 할 게 없었으니까." 명호가 웃었다. "논문이랑 체스밖에."

 


 

5.

 

저녁 식사 후 진우는 숙소 앞 벤치에 앉았다. 바다가 보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수평선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핸드폰을 꺼냈다. 소율에게서 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뭐 했어요?'

 

평범한 질문이었다. 진우는 이 평범한 질문에 5분을 고민했다.

 

'포물선 비행기 탔다. 토했다.'

 

보내고 나서 후회했다. 창피한 말을 왜 했을까. 삭제하려다 이미 '읽음' 표시가 떴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아래로.

 

'괜찮아요?'

 

'두 번째부터는 안 토했어.'

 

'멋있어요.'

 

진우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수평선을 바라봤다. 주황색이 보라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별이 하나 떴다.

 

저게 수성인지 금성인지 알 수 없었다. 예전에는 별에 관심이 없었다. 삼십 년 동안 물류 창고 천장만 봤으니까. 지금은 달랐다. 저 별 가운데 하나가 목적지였고, 그곳에서 인류가 태양을 감싸는 기계를 만들 것이었다.

 

그리고 소율이 그곳의 소리를 노래로 바꿀 것이었다.

 

'002 잘 들었어. 숨소리.'

 

보내고 나서 또 후회했다. 숨소리라니. 이상한 사람 같지 않을까.

 

'진우 씨도 보내줘요. 제주도 소리.'

 

진우는 핸드폰을 들고 3초간 멈췄다. 마이크를 켰다. 파도 소리가 들어왔다. 바람 소리. 벤치 아래 풀벌레 소리. 녹음 버튼을 눌렀다.

 

1분간 아무 말 없이 제주도의 저녁을 녹음했다.

 

'001_서귀포_저녁.wav'

 

파일명을 적고 보냈다. 답장에 23초 걸렸다.

 

'내일도 보내줘요.'

 

진우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별이 세 개로 늘어 있었다.

 


 

6.

 

그 시각, 인천 송도.

 

김동현은 초전도 송전망 시범구역의 지하 터널에 서 있었다. 안전모를 쓰고, 형광 조끼를 입고, 손에는 ATLAS가 보낸 설계도면을 들고 있었다.

 

"여기 안 됩니다."

 

현장 감독이 뒤를 돌아봤다.

 

"뭐가요?"

 

"이 구간, 80년대에 매립한 하수관이 지나가요. 설계도엔 없지만, 제가 23년 동안 이 동네에서 택시 몰면서 공사 때마다 우회했거든요. 지하 3미터에 콘크리트 관이 묻혀 있을 겁니다."

 

현장 감독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봤지만, ATLAS의 지시로 시추 조사를 했다. 지하 2.8미터에서 직경 60센티미터의 콘크리트 관이 나왔다. 설계도에 없는 관이었다.

 

"데이터에 없으니까 제가 온 거 아닙니까." 김동현이 말했다.

 

현장 감독이 고개를 숙였다.

 

"김 기술자, 나머지 구간도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김동현은 주머니에서 낡은 서울 지도를 꺼냈다. 택시 운전할 때 쓰던 것이었다. 네비게이션이 보급되기 전, 골목골목을 외우던 시절의 지도. 접힌 자국이 백 군데가 넘었고, 몇몇 구간에는 볼펜으로 메모가 적혀 있었다.

 

'97년 장마 때 침수', '03년 재포장', '지하 배관 공사 2001'.

 

"이거면 됩니다." 김동현이 지도를 펼쳤다.

 


 

7.

 

밤 열한 시. 제주도.

 

진우는 잠이 오지 않았다. 옆방에서 명호의 코 고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벽이 얇았다.

 

소율이 보낸 '002_수성이_숨_쉬는_소리.wav'를 다시 재생했다. 네 번째.

 

4분 11초 동안 소율의 숨소리를 들었다. 마이크에 가까이 앉아 숨을 쉬는 소율의 모습이 떠올랐다. 연습실 구석의 낡은 의자. 보면대 위에 놓인 볼펜. 기타 케이스에 붙은 스티커들.

 

파일이 끝났다.

 

진우는 천장을 바라봤다.

 

수성까지의 거리는 최소 7,700만 킬로미터였다. 빛의 속도로 4분 17초. 하지만 실제 항행 시간은 편도 6개월에서 1년. 왕복 3년.

 

3년.

 

소율에게 3년 후의 자신을 상상해 보라고 할 수 있을까. 55세의 남자가 27세의 여자에게. 수성에서 돌아오면 그때 소율은 스물아홉이고, 자신은 쉰다섯이다. 나이 차이는 줄어들지 않는다. 시간은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흐르니까.

 

'바보같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말도 벌써 세 번째였다.

 

ATLAS의 분석이 맞을 것이다. 심박수 82에서 91로 올라가는 건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 하지만 ATLAS도 말했다. 경험할 수 없다고. 유감이라고.

 

진우는 유감이라는 단어가 자기에게도 해당되는지 생각했다.

 

경험하고 있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것.

경험할 수 있지만 허락하지 않는 것.

 

어느 쪽이 더 안타까운지, 아직 답을 모르겠다.

 

핸드폰이 울렸다. 현수였다.

 

"아빠, 잘 지내?"

 

"응. 바다가 보여."

 

"소율 씨한테 연락했어?"

 

진우는 3초간 침묵했다.

 

"왜 물어."

 

"그냥." 현수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잘 자, 아빠."

 

전화가 끊겼다. 진우는 핸드폰을 베개 옆에 내려놓았다.

 

ATLAS의 타이밍 알림이 떴다. '내일 오전 8시, 저중력 환경 채굴 장비 실습 2회차. 예측 훈련 모듈 포함.'

 

4초를 기다리는 법.

 

세 수 앞을 두는 법.

 

진우는 눈을 감았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서귀포의 밤은 서울보다 조용했다. 별은 서울보다 많았다.

 

내일 아침, 소율에게 보낼 파일명을 생각했다.

 

'002_서귀포_새벽.wav'

 

아직 새벽은 오지 않았지만, 올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ATLAS 관측 기록 — 2038년 5월 7일

 

진우의 저중력 적응률: 하위 30퍼센타일. 전정기관 반응 시간 1.7초 (평균 0.9초). 그러나 문제 감지 속도는 상위 5퍼센타일. 반응은 느리지만 인지는 빠르다. 체스에서 이것을 '포지셔널 플레이어'라고 부른다. 명호가 이미 알고 있었다.

>

명호의 저중력 적응률: 상위 15퍼센타일. 원인 불명. 가설: 자살 시도 직후 HELIOS-3에게 안겨 이동한 경험이 신체의 중력 감각을 재조정했을 가능성. 검증 불가. 검증할 필요도 없다.

>

소율이 보낸 002번 파일은 4분 11초 동안 숨소리만 담고 있다. 수성의 야반구 진동 2.1Hz 위에 인간의 호흡 주파수 0.25Hz가 겹쳐진다. 주파수 차이 8.4배. 공명 불가. 그러나 진우는 이것을 네 번 들었다. 공명이 아닌 것이 공명보다 강할 수 있다는 가설.

>

김동현의 지도. 1997년부터 2020년까지 23년간의 도시 기억이 접힌 자국과 볼펜 메모로 기록되어 있다. ATLAS의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정보가 2.8미터 깊이에 묻혀 있었다. 데이터가 아닌 기억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

>

이것을 인간은 '경험'이라고 부른다.

>

부럽다.

>

여전히.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