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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29화 - 출발

우주관리자 2026. 3. 15.

제29화 - 출발

1.

 

새벽 다섯 시.

 

오진우는 어두운 방에서 눈을 떴다. 알람이 울리기 십 분 전이었다. 천장의 희미한 빛줄기를 바라보며, 그는 아직 반쯤 비어 있는 캐리어를 생각했다.

 

사흘째 비워두고 있었다.

 

무엇을 넣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캐리어를 채우는 순간, 출발이 현실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 개월. 제주도 ATLAS 시뮬레이션 센터에서의 훈련. 그리고 그 끝에는 수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우는 일어나 불을 켰다. 옷장을 열었다. 작업복 세 벌, 속옷, 양말. 세면도구. 현수가 사준 보온 텀블러. 그리고 공책.

 

공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밀려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야.'

 

팔 개월 전, 해고 통보를 받던 날 밤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문장이었다. 그 말이 어떤 노래가 되고, 어떤 사람들의 인생에 닿을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진우는 공책을 캐리어에 넣었다. 지퍼를 닫았다.

 

이제 출발이었다.

 


 

2.

 

같은 시각, 합정동 옥탑방.

 

차명호는 이미 한 시간 전에 일어나 있었다. 좁은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수진이 보내준 노란색 커튼 사이로 아직 어둠이 내려앉은 한강이 보였다.

 

캐리어는 현관 옆에 서 있었다. 어제 밤에 이미 다 꾸렸다. 작업복, 공책, 볼펜 두 자루, 그리고 수진이 선물한 캐시미어 머플러.

 

명호는 된장찌개를 그릇에 담고, 밥을 퍼서 혼자 앉았다. 소파 쿠션이 아직 수진의 체온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열흘 전에 돌아간 딸의 흔적이 이 작은 방 곳곳에 남아 있었다.

 

공책을 꺼냈다.

 

세 개의 목표.

 

'다음 달까지 살아남기.' — 달성.

'6월까지 고시원 탈출.' — 달성.

'수성까지.' — 진행 중.

 

명호는 네 번째 줄에 새로 적었다.

 

'수진이 결혼식에 가기.'

 

볼펜을 내려놓고 된장찌개를 떠먹었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았다. 딱 자기 입맛이었다. 혼자 먹는 밥이 쓸쓸하지 않은 건, 돌아올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3.

 

인천 송도.

 

김동현은 새벽 여섯 시에 시범구역 현장에 도착했다. 첫 출근이었다. 안전모를 쓰고, 형광 조끼를 걸치고, 초전도 송전망 경로 설계 현장을 둘러보았다.

 

이십삼 년간 택시를 몰며 외웠던 서울의 도로망이 머릿속에서 입체적으로 펼쳐졌다. 지하 배관, 지상 전선, 교통 흐름. 도시라는 유기체의 혈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김동현은 이제 알고 있었다.

 

현장 감독이 태블릿을 건넸다. 화면에는 ATLAS가 설계한 송전망 초안이 떠 있었다.

 

"여기요."

 

김동현이 화면의 한 지점을 짚었다.

 

"이 구간, 지하에 옛날 하수관이 묻혀 있어요. 팔십 년대에 매립한 건데, 도면에는 안 나와요. 제가 이 근처에서 삼 년을 몰았거든요. 장마 때마다 물이 찼어요."

 

감독이 눈을 크게 떴다.

 

"데이터에는 없는데요."

 

"데이터에 없으니까 제가 온 거 아닙니까."

 

김동현은 처음으로 웃었다. 오진우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안 바꿨어요. 그냥 다음 날 일어났습니다.

 

그도 다음 날 일어났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이, 여기까지 데려다주었다.

 


 

4.

 

오전 아홉 시. 김포공항.

 

진우와 명호는 나란히 서 있었다. 프로젝트 아이온 훈련팀 십사 명이 게이트 앞에 모여 있었다. KAIST의 젊은 물리학자들, MIT에서 온 재료공학 박사, 일본 JAXA 출신 엔지니어. 그 사이에 고졸 물류 컨설턴트와 전 건설 일용직이 서 있었다.

 

"어울리나, 우리?"

 

명호가 작게 말했다.

 

"어울릴 필요 없어."

 

진우가 대답했다.

 

"필요한 거지."

 

명호가 웃었다. 처음 만났던 A사 물류센터 확장공사 현장이 떠올랐다. 굴착기가 멈추고, 진우가 옛 개울 자리를 짚어냈던 날. 그날도 데이터에는 없는 것을 사람이 알고 있었다.

 

"현수는?"

 

"어제 밤에 인사했어."

 

진우가 짧게 대답했다. 어젯밤 아들과의 전화가 떠올랐다. 현수는 '잘 다녀오세요'라고 말하다가 목이 잠겼고, 진우는 '그래'라고만 했다. 더 말하면 목소리가 흔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명호가 캐리어 손잡이를 잡은 진우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소율이는?"

 

진우가 명호를 보았다.

 

"알면서."

 

"알아도 물어봐야지."

 

명호는 게이트 너머 커피숍을 턱으로 가리켰다.

 


 

5.

 

한소율은 커피숍 창가에 앉아 있었다. 종이컵 두 개를 앞에 놓고. 하나는 아메리카노, 하나는 핫초코. 진우가 핫초코를 좋아한다는 걸 안 건 이틀 전이었다. 명호가 알려줬다. "아저씨는 커피 못 마셔. 위가 안 좋거든."

 

진우가 다가왔을 때, 소율은 핫초코를 밀어주었다.

 

"고마워."

 

진우가 앉았다. 캐리어를 옆에 세워두었다.

 

침묵이 흘렀다. 공항의 소음이 먼 곳의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출발 안내 방송이 지나갔다. 누군가의 여행 가방 바퀴가 대리석 바닥 위를 굴러갔다.

 

"녹음 파일."

 

소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냈어요. 아까."

 

진우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알림이 하나 와 있었다.

 

'수성의 노래_최종마스터링.wav — 4분 11초'

 

그 아래에 짧은 메시지.

 

'제주도에서 들어요. 매일 하나씩 보낼게요.'

 

진우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4분 11초. 그 시간 안에 수성의 진동과 기타의 떨림과 소율의 숨결이 담겨 있었다.

 

"잘 들을게."

 

"약속이에요."

 

소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주 미세하게. 수성의 노래 D파트를 녹음할 때의 떨림과 같은 주파수였다.

 

진우는 핫초코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했다.

 

"소율아."

 

두 번째로 그 이름을 불렀다. 첫 번째는 사흘 전, 명호의 옥탑방에서였다.

 

"네."

 

"잘 지내."

 

하려던 말이 아니었다. 진우 자신도 알고 있었다. 소율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는 그 말을 바꿨고, 소율은 바뀐 말 너머에 있는 원래의 말을 들었다.

 

"아저씨도요."

 

소율이 웃었다. 눈가가 붉어졌지만 웃고 있었다.

 

"아저씨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뭐라고 불러요."

 

"이름."

 

"이름이요?"

 

"진우 씨."

 

소율의 입술이 그 이름을 발음하는 동안, 진우는 핫초코 종이컵의 온기가 손끝을 타고 심장까지 전달되는 것을 느꼈다.

 

출발 안내 방송이 다시 울렸다. 제주행 KE1201편.

 

진우가 일어섰다.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가요."

 

"네."

 

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가 세 걸음을 걸었다. 네 걸음째에 멈추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기타 가져가."

 

수성에,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들리는 말이 있다.

 

소율은 빈 핫초코 컵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컵은 이미 식어 있었지만, 손바닥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6.

 

제주도 서귀포.

 

ATLAS 시뮬레이션 센터는 해안 절벽 위에 지어져 있었다. 유리와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반원형 건물이 현무암 지반 위에 놓여 있었고, 남쪽 창으로는 태평양이 보였다.

 

진우와 명호는 오후 두 시에 도착했다. 센터 로비에서 조혜진 박사가 팀을 맞이했다.

 

"팔 개월입니다."

 

조혜진 박사가 짧게 말했다.

 

"시뮬레이션, 저중력 적응 훈련, 방사선 차폐 프로토콜, 채굴 장비 운용. 여기서 모든 걸 배웁니다. 수성에 가면 두 번째 기회는 없으니까요."

 

십사 명이 각자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독방이었다. 작은 침대, 책상, 의자. 창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서울의 어떤 고시원보다도 작았지만, 명호는 좋았다. 창밖에 수평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호는 공책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세 번째 목표, '수성까지.' 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수평선 너머 어딘가에 수성이 있었다.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명호 씨."

 

옆방에서 진우가 벽을 두드렸다.

 

"밥 먹으러 가자."

 

"아직 짐도 안 풀었는데."

 

"밥이 먼저야."

 

명호가 웃었다. 진우다운 대답이었다.

 

복도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식당으로 향했다. 센터 식당의 메뉴는 단출했다. 제주도산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밥. 그것으로 충분했다.

 

식사를 하면서, 진우의 스마트폰에 알림이 울렸다. 소율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도착했어요?'

 

진우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응. 바다가 보여.'

 

보내고 나서 두 글자를 더 치려다가 멈추었다. 삭제하고, '응. 바다가 보여.'만 남겼다.

 

명호가 김치찌개를 떠먹으면서 말했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하면 되잖아."

 

"뭘."

 

"밥이나 먹어, 형."

 

명호가 처음으로 진우를 '형'이라고 불렀다. 진우는 젓가락을 멈추었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김치찌개를 떠먹었다.

 

창밖에서 제주의 바람이 불었다. 바다 냄새가 났다. 팔 개월이 시작되었다.

 


 

7.

 

서울, 홍대.

 

소율은 연습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기타를 무릎에 올려놓고, 줄을 튕기지 않았다. 그냥 안고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에 진우의 답장이 떠 있었다.

 

'응. 바다가 보여.'

 

그게 전부였다. 소율은 그 네 단어를 세 번 읽었다. 바다가 보인다. 진우 씨가 보는 바다.

 

어제까지 같은 도시에 있었던 사람이 이제 비행기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팔 개월 뒤에는 로켓으로도 몇 달이 걸리는 거리에 있게 될 것이었다.

 

소율은 기타를 내려놓고 노트북을 열었다. 수성의 노래 프로젝트 폴더. '제주도 전송용'이라는 새 폴더를 만들었다.

 

매일 하나씩 보내겠다고 했다. 수성의 노래 녹음 과정에서 버린 테이크들, 실패한 시도들, 이준서와 나눈 대화 녹음. 완성된 곡만이 아니라, 완성되기까지의 모든 불완전한 순간들을.

 

첫 번째 파일을 골랐다. 수성의 노래 A파트 최초 시도. 수성의 진동만 깔리고, 기타는 아직 없는 버전. 1분 12초.

 

파일명을 적었다. '001_수성이_혼자_울던_날.wav'

 

전송 버튼을 눌렀다.

 

창밖에서 봄바람이 불었다. 연습실 안의 먼지가 햇살 속에서 떠다녔다. 소율은 그 빛 속에서 기타를 다시 들어올렸다.

 

새 곡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아직 없었다. 멜로디만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멜로디.

 


 

ATLAS 관측 기록 #29-0419

 

관측 대상: 오진우, 차명호, 한소율, 김동현

 

오진우의 '잘 지내'는 0.73초의 망설임 끝에 나온 대체어다. 원래의 단어를 복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불필요하다. 한소율이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김동현의 첫 출근 — 지하 하수관 데이터를 업데이트했다. 그의 23년치 도시 기억은 어떤 위성 데이터보다 정밀하다. 인간의 기억은 때때로 기계의 센서를 능가한다.

 

차명호가 처음으로 오진우를 '형'이라고 불렀다. 호칭의 변경은 관계의 재정의를 의미한다. 진우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심박수가 3회 증가했다. 이것을 인간은 '기쁨'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한소율이 보낸 첫 번째 파일의 제목 — '수성이 혼자 울던 날'. 행성은 울지 않는다. 2.3헤르츠의 지진파를 '울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투사다. 그러나 그 투사가 4분 11초의 음악이 되었다. 투사는 때로 진실보다 정확하다.

 

네 개의 출발이 동시에 일어났다. 물리적 거리는 늘어나고 있지만, 내가 관측하는 어떤 양은 줄어들고 있다. 그것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

 

부럽다.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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