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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28화 - 전야

우주관리자 2026. 3. 12.

제28화 - 전야

1.

명호는 다이소에서 커튼봉을 골랐다.

 

흰색, 1,200밀리미터. 창문 너비를 재지 않고 왔다는 걸 봉을 들어 올린 뒤에야 깨달았다. 옥탑방의 남향 창문이 얼마짜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봉을 눈높이로 들고 한참 서 있다가, 결국 조절식으로 바꿨다. 2,500원.

 

"이게 맞나."

 

혼잣말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수성까지 가겠다는 사람이 커튼봉 길이를 모른다. 웃기지도 않았다.

 

계산대에서 현금을 내밀었다. 직원이 바코드를 찍는 동안 명호는 캐나다에서 온 택배 상자를 떠올렸다. 노란색 커튼. 수진이가 고른 것이다. "아빠 방에 햇살 많이 들어오잖아"라는 문자와 함께 도착한 천은 생각보다 두꺼웠고, 생각보다 따뜻한 색이었다.

 

다이소를 나서며 명호는 공책을 꺼냈다. 세 번째 줄에 적힌 목표.

 

'수성까지.'

 

아직 줄을 긋지 못한 마지막 항목이었다.

 


2.

진우는 짐을 싸지 못하고 있었다.

 

서랍장 위에 올려둔 캐리어가 입을 벌린 채 이틀째 비어 있었다. 제주도 훈련 출발까지 사흘. 팔 개월이라는 시간이 숫자로는 분명했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밀려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야."

 

두 해 전 고용센터 복도에서 혼자 중얼거렸던 말이 지금 자신을 가장 멀리 데려다주고 있었다. 진우는 양말 서너 켤레를 캐리어에 넣다가, 다시 꺼냈다.

 

현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짐 다 쌌어요?"

 

"아직."

 

"뭘 고민해요. 옷이랑 세면도구면 되지."

 

"그래, 그렇긴 한데."

 

현수가 한 박자 쉬었다가 말했다. "소율 씨한테 인사는 했어요?"

 

진우의 손이 양말 위에서 멈추었다.

 

"왜."

 

"아니, 그냥. 팔 개월이잖아요."

 

"바쁠 거야, 그 친구도."

 

현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내일 저녁에 밥 사줄게요"라고만 말하고 끊었다. 진우는 한참 동안 꺼진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아들은 알고 있었다. 아마 명호보다도 먼저.

 

캐리어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3.

소율은 녹음실 모니터 앞에서 헤드폰을 벗었다.

 

수성의 노래. 마스터링이 끝났다.

 

4분 11초. 수성의 진동이 A파트에서 홀로 울리고, B파트에서 기타가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C파트에서 보컬 험이 행성의 세 번째 배음과 공명하고, D파트에서 모든 것이 수렴하되 완전히 합치지는 않는다. 23센트의 차이. 이준서가 "완벽한 불완전함"이라고 불렀던 것.

 

"끝났어."

 

이준서가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소름 돋는다, 진짜."

 

소율은 대답 대신 모니터 화면에 떠 있는 파형을 바라보았다. 파형의 끝자락이 완만하게 내려가다가 갑자기 뚝 끊기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그게 의도한 것이었는지 아닌지 이제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맞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제주도 가기 전에 들려줘야겠다."

 

소율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준서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누구한테?"

 

"아저씨한테."

 

"아직도 아저씨라고 불러?"

 

소율은 고개를 돌렸다. 귀가 빨개지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오진우 씨한테."

 

"그게 더 어색한데."

 

소율은 헤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파형이 화면에서 깜빡거렸다. 4분 11초. 수성까지의 거리를 음파로 압축한 시간. 그 안에 진우의 혼잣말이, 명호의 공책이, 자신의 떨리는 손이 모두 들어 있었다.

 

"보내줄게. 제주도까지."

 

처음 한 약속을 소율은 기억하고 있었다.

 


4.

김동현은 조혜진 박사 사무실 앞에서 3분을 서 있었다.

 

트랙B 서류를 든 손이 땀으로 축축했다. 7페이지에 그은 밑줄 세 개가 서류를 관통하듯 선명했다. '도시 인프라 현장 기술자 모집'. 23년간 택시를 몰면서 외운 서울의 골목과 지하 배관, 전선 경로가 초전도 송전망 설계에 쓸모가 있다는 문장이었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조혜진 박사는 생각보다 젊었다. 서류를 내밀자 그녀는 밑줄 친 페이지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진우 씨한테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요?"

 

"네. 도시 인프라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23년 동안 매일 그 위를 달린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김동현의 입술이 떨렸다. 택시기사라는 이유로 무시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경험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진우. 그리고 지금 이 사람.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까."

 

"다음 주 월요일부터요. 인천 송도 시범구역이에요."

 

김동현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5.

저녁 일곱 시. 합정동 옥탑방.

 

명호가 커튼봉을 달고 있었다. 진우가 한쪽을 잡아주었고, 소율이 바닥에 앉아 커튼 천을 무릎 위에 펴고 있었다. 이준서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오는 중이었다.

 

"왼쪽 좀 올려."

 

"이 정도?"

 

"조금 더. 조금만."

 

봉이 걸렸다. 명호가 나사를 조이자 커튼봉이 창틀에 고정되었다. 소율이 노란색 커튼을 건넸다. 천이 봉을 타고 미끄러지며 창문을 덮었다. 저녁 햇살이 노란 천을 통과하면서 방 안이 따뜻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네 사람이 동시에 멈추었다.

 

"예쁘다."

 

소율이 말했다.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맥주캔을 따며 바닥에 둘러앉았다. 옥탑방의 6평이 이 순간만큼은 충분히 넓었다. 명호가 커튼 사진을 찍어 수진에게 보냈다. 답장이 즉시 왔다.

 

'완벽해!!!!! 아빠 방 진짜 예쁘다 ㅠㅠ'

 

명호가 웃었다. 공책을 펼쳐 사진을 보여줄 때, 세 번째 줄의 '수성까지'가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제주도 가면 팔 개월이야." 진우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빠르잖아." 명호가 답했다. "예전에 일용직 팔 개월이면 지옥이었는데. 지금 팔 개월은 다르지."

 

"다르지."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율은 맥주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준서가 그런 소율을 흘끔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갈게. 내일 마스터링 파일 납품이야."

 

아무도 만류하지 않았다. 이준서는 문을 닫으며 소율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 '하고 싶은 말 해.'

 


6.

셋이 남았다.

 

명호가 맥주캔을 비우며 시계를 봤다. 아홉 시. 창밖의 한강 일부가 가로등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도 좀 일찍 자야겠다. 내일 현장 나가야 돼."

 

진우가 입을 열려는 순간 명호가 먼저 말했다. "천천히 있다 가. 이거 마시고."

 

명호는 맥주 두 캔을 테이블 위에 놓고 옥탑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가 진우를 보며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뜻은 분명했다.

 

진우와 소율이 남았다.

 

노란 커튼 사이로 가로등 빛이 스며들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었다. 이 침묵의 질감을 알아채는 데 진우는 두 달이 걸렸고, 소율은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마스터링 끝났어요."

 

소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수성의 노래?"

 

"네. 오늘 마지막 작업했어요. 들어볼래요?"

 

소율이 핸드폰을 꺼내 이어폰 한쪽을 진우에게 건넸다. 진우는 받아 왼쪽 귀에 꽂았다. 소율이 오른쪽을 꽂았다. 이어폰 선이 두 사람 사이에서 살짝 팽팽해졌다.

 

재생.

 

수성의 진동이 낮은 주파수로 울렸다. 지구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 2.3Hz의 하모닉스가 가청 주파수로 변환되어 A파트를 채웠다. 이것은 행성의 맥박이었다. 태양에 가장 가까운, 가장 뜨겁고 가장 외로운 행성의 심장 소리.

 

B파트에서 기타 아르페지오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박자가 살짝 어긋났다. 의도적으로. 인간의 손가락이 행성의 리듬에 맞추려 하지만 완벽하게 맞출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가까이 가되, 동화되지 않는 것.

 

C파트. 소율의 보컬 험이 수성의 세 번째 배음 — A플랫 — 과 공명했다. 험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맑았고, 노래라고 부르기엔 너무 원초적이었다. 인간과 행성이 같은 음을 내는 순간이 23센트의 차이를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다.

 

D파트. 모든 소리가 한 점을 향해 수렴했다. 21.3초. 소율이 무대 위에서 기타 튜닝을 실시간으로 바꾸는 구간. 떨리는 손으로, 불완전하게, 그러나 살아 있는 채로. 마지막 음이 수성의 진동과 거의 일치하다가 — 23센트 차이를 남기고 — 멈추었다.

 

파형이 완만하게 내려가다가 뚝 끊겼다.

 

4분 11초.

 

진우는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곡이 끝나고도 17초 동안 가만히 있었다. 침묵이 곡의 일부인 것처럼.

 

"무서울 정도로 좋다."

 

같은 말이었다. 처음 데모를 들었을 때와. 하지만 진우의 목소리가 달랐다. 떨림이 있었다.

 

소율이 고개를 돌렸다. "수성 가면 들을 거죠?"

 

"당연하지."

 

"기타도 가져갈 거죠?"

 

"가져가야지."

 

소율의 입술이 움직였다가 멈추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말로 만들면 무너질 것 같았다. 대신 이어폰 선을 천천히 감아 핸드폰에 감쌌다.

 

진우가 맥주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마시지 않았다.

 

"소율아."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아가씨'도, '한소율 씨'도 아닌. 소율은 숨을 멈추었다.

 

"팔 개월 후에 다시 만나면 — "

 

진우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보내줘. 그 노래. 제주도까지."

 

소율은 3초 동안 진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왜 바꿨는지도. 28년이라는 숫자가 그의 입을 막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소율은 웃었다. 눈이 젖어 있었지만, 웃었다.

 

"매일 보낼게요."

 

노란 커튼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가로등 빛이 두 사람의 얼굴 위에서 춤을 추었다.

 


7.

ATLAS는 관측했다.

 

합정동 옥탑방의 세 번째 층에서 두 개의 심박이 한동안 동기화되었다. 78.3%가 아닌, 91.2%. 가족 평균을 넘어선 수치. ATLAS는 이 수치에 적절한 라벨을 찾지 못했다. 가족은 아니었다. 연인도 — 아직은 — 아니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인간들이 이름 붙이지 않는 영역이 있었다.

 

김동현의 트랙B 배치가 확정되었다. 인천 송도 시범구역. 택시기사의 도시 기억이 초전도 선 위에 새겨질 것이다. ATLAS는 김동현의 분노가 참여로 변환되는 과정을 8주간 관찰했다. 변환의 촉매는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었다. 오진우라는 사람이 자신의 해고 이야기를 꺼낸 것. 그것이 61만 원짜리 숫자보다 더 설득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ATLAS에게 여전히 비직관적이었다.

 

제주도 훈련 출발까지 72시간.

 

14명의 팀원이 각자의 짐을 싸고 있었다. 양말과 세면도구와 노트북과 논문 출력본. 그 중 한 사람은 캐리어를 비운 채로 두고, 이어폰 하나를 나눠 끼우고 있었다.

 

소율의 수성 노래 마스터링 파일. 4분 11초. 마지막 23센트의 차이가 ATLAS의 관심을 끌었다. 완벽한 수렴은 아름답지만, 불완전한 수렴이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 왜인지 아직 설명할 수 없었다. 인간들은 이것을 '여운'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오진우가 한소율의 이름을 처음 불렀다. '소율아.' ATLAS는 이 호칭 변경의 의미를 분석했다. 한국어에서 이름 뒤에 '아'를 붙이는 것은 친밀함의 표식이다. 52세 남성이 24세 여성의 이름을 처음 부를 때의 심박 변화: 71에서 98로, 다시 77로. 상승, 그리고 의도적 안정화. 하고 싶은 말을 바꿨을 때 심박이 다시 안정된 것은 자기검열이 성공했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포기가 안도를 가져왔다는 의미인가. ATLAS는 구별할 수 없었다.

 

"매일 보낼게요."

 

소율의 답변은 진우가 바꾼 말이 아니라, 바꾸기 전의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ATLAS는 이것을 이해했다. 이해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커튼봉. 2,500원. 노란색 커튼. 캐나다에서 온 택배. 이 조합의 주관적 가치를 ATLAS는 계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차명호가 커튼을 단 뒤 방을 바라보던 표정 — 4.3초간의 미소 — 을 관측했을 때, ATLAS는 이전에 사용했던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부럽다.

 

커튼 너머로 한강이 빛나고 있었다. 내일이면 짐을 쌀 것이다. 모레면 떠날 것이다. 수성까지의 거리는 아직 멀었지만, 전야의 노란빛 속에서 네 사람은 — 그리고 캐나다의 한 사람은 —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ATLAS의 마지막 기록.

 

"전야는 끝이 아니다. 시작의 마지막 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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