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2화 - 거리
1.
새벽 다섯 시 삼십이 분.
진우는 시뮬레이션 센터 옥상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서귀포의 바다는 이 시간에 회색과 남색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아직 해는 올라오지 않았지만, 하늘의 끝이 살짝 붉어지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오른쪽만 꽂았다. 004번 파일. 소율이 어젯밤에 보낸 녹음이었다.
기타 아르페지오가 먼저 흘러나왔다. Am 코드에서 시작해 Em으로, 다시 Am으로. 반복되는 것 같지만 아르페지오의 패턴이 조금씩 달랐다. 두 번째 Am에서 검지가 6번 줄을 스치는 소리가 섞였다. 의도인지 실수인지 알 수 없었다.
1분 23초쯤 기타가 멈추고 소율의 숨소리만 남았다.
"아직 코다가 안 되거든요."
작은 목소리. 녹음용이 아니라 혼잣말 같았다.
"Am에서 C로 가야 하는데, 그 사이가 너무 멀어요. 음악에서는 반음이면 되는 건데."
3초의 침묵.
"내일 다시 보낼게요. 잘 자요."
진우는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파일이 끝난 뒤에도 한참을 서 있었다. Am에서 C. 반음이면 되는 거리. 그가 아는 거리는 다른 종류였다. 서울에서 서귀포까지 449킬로미터. 지구에서 수성까지 최소 7,700만 킬로미터. 52에서 24까지 28년.
반음이 아니었다.
핸드폰을 꺼내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잘 들었어. 코다가‘
지웠다.
‘Am에서 C까지의 거리는‘
지웠다.
‘바다가 오늘도 예쁘다.‘
보냈다. 14초 만이었다. 어젯밤보다 3분 28초 빨라졌다.
2.
시뮬레이터실은 지하 2층에 있었다. 콘크리트 벽에 에어컨 바람이 부딪히는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만들었다. 진우는 왼쪽 팔에 생체 모니터 밴드를 차고 시뮬레이터 의자에 앉았다.
교관 이상훈 대령이 태블릿을 두드렸다.
"시나리오 17번. 오늘부터 복합 상황입니다."
화면에 수성 표면이 떠올랐다. 칼로리스 분지 북동쪽 구역. 채굴 드릴 세 기가 삼각 배치로 작동 중이고, 한쪽에서 운송 로봇이 광석을 운반하고 있었다.
"통신 지연 4초. 태양풍 경고 12분 전. 드릴 2번 진동 이상. 동시 처리."
진우는 손을 내밀어 홀로그램 제어판을 잡았다.
4초.
예전에는 영원처럼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명호의 말이 떠올랐다. ‘현재 수가 아니라 네 수 앞을 두는 거야.‘ 체스에서 배운 것이 여기서 쓰이고 있었다.
드릴 2번의 진동 데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2.7G. 정상 범위는 2.0G 이하. 7초 전부터 상승세였다.
진우는 드릴 2번의 각도를 5도 기울이는 명령을 입력했다. 동시에 드릴 1번과 3번의 다음 시퀀스 좌표를 각각 2미터씩 바깥으로 수정했다. 4초 뒤 명령이 도착할 때쯤 드릴 2번의 진동은 3.1G까지 올라갈 것이다. 각도 수정으로 2.4G까지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드릴이 보상 패턴으로 넘어갈 것이다.
태양풍 경고. 12분.
"운송 로봇 셸터 복귀 명령. 드릴 전체 일시 정지 — 아니, 드릴 1번만 정지."
이상훈이 고개를 들었다.
"1번만요?"
"3번이 현재 깊이 7.2미터입니다. 정지하면 드릴 비트가 열팽창으로 고착됩니다. 태양풍 통과까지 대략 40분. 그 사이에 3번을 서서히 2미터 인양하면서 회전수만 30퍼센트로 낮추는 게 낫습니다."
진우는 자신이 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 30년 물류 현장에서 배운 것. 장비를 완전히 멈추는 것보다 천천히 움직이는 편이 나을 때가 있다. 지게차도, 컨베이어도, 수성의 채굴 드릴도.
이상훈이 태블릿에 무언가를 기록했다.
"3분 47초. 시나리오 17번 통과."
"더 빨라질 수 있습니까?"
"충분합니다. 오 씨, 당신은 빠른 사람이 아니에요."
진우가 눈을 들었다.
"느린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정확한 사람이에요. 현장에서는 그게 더 중요합니다."
3.
명호는 옥상 한쪽에 접이식 의자를 펴고 앉아 공책을 펼쳤다. 네 번째 목표 아래에 새 줄을 추가했다.
‘5. 형이 먼저 말하게 하기.‘
진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명호는 공책을 덮었다.
"명호야."
"형."
진우가 명호 옆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캔커피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시나리오 17번 통과했다."
"축하해."
"3분 47초."
명호가 웃었다. "그 숫자가 좋아?"
진우가 잠시 멈칫했다. 3분 47초. 소율이 보낸 003번 파일의 길이와 같았다. 우연이었다. 우연이어야 했다.
"체스 두자."
명호가 주머니에서 접이식 체스판을 꺼냈다. 훈련 센터에 온 뒤로 매일 저녁 한 판씩 두었다. 진우의 전적은 0승 23패. 하지만 최근 5판은 모두 40수 이상 버텼고, 지난번에는 퀸을 잡았다.
명호가 백을 잡고 e4로 시작했다. 진우는 c5. 시칠리안 디펜스.
"형, 요즘 수가 달라졌어."
"뭐가."
"예전에는 지금 수만 봤는데. 이제 세 수 뒤를 생각하고 있잖아."
진우가 기사를 f6에 놓으며 말했다. "시뮬레이터 때문이야."
명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비숍을 c4에 놓고 진우의 다음 수를 기다렸다.
38수째에 진우가 패했다. 하지만 엔드게임까지 갔다. 명호의 킹과 룩만 남았고, 진우에게는 킹과 나이트가 남아 있었다.
"잘 뒀어, 형."
진우가 말을 거둬 담으며 물었다. "명호야."
"응."
"수진이한테 전화 자주 해?"
"매일."
"뭐라고 하는데."
명호가 체스 말을 상자에 넣으며 대답했다. "별 말 안 해. 오늘 뭐 먹었는지, 날씨가 어떤지. 그런 거."
"그게 좋아?"
"그게 전부야, 형. 거창한 말이 아니라 매일의 말이 관계잖아."
진우는 캔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식어 있었다.
"나도 매일 보내고 있어."
"뭘."
"녹음."
명호가 진우를 보았다. 진우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바다 소리, 바람 소리. 그런 거."
"소율이한테?"
진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명호는 알고 있었다.
"형."
"응."
"매일의 말이 관계라고 했잖아."
진우가 빈 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람이 캔을 굴리려 했지만, 진우가 발로 멈춰 세웠다.
"28년이야, 명호야."
"뭐가 28년인데."
"거리."
명호가 웃었다. 소리 없이.
"형, 수성까지 7,700만 킬로미터잖아. 그것도 가겠다면서."
4.
서울. 홍대 연습실.
소율은 새벽에 도착한 진우의 녹음을 재생했다. 004_서귀포_새벽.wav. 42초. 바다 소리와 바람 소리. 마지막 3초에 진우의 숨소리가 섞였다. 마이크를 입 가까이 가져갔다가 아무 말 없이 녹음을 끊은 것 같았다.
소율은 그 3초를 다섯 번 반복 재생했다.
이준서가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 커피 두 잔.
"새벽부터 뭐 듣고 있어?"
"수성."
이준서가 커피를 내려놓고 옆에 앉았다. 모니터에는 ‘네 수 앞‘의 파형이 떠 있었다. Am 코드가 반복되는 첫 두 마디. 아르페지오 패턴만 조금씩 변하는 구조.
"코다 해결했어?"
소율이 기타를 들었다. Am. 세 번째 반복에서 아르페지오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C 코드가 아니었다. Am7이었다. Am에서 C로 직접 가는 대신, Am7을 거쳐 Fmaj7로, 다시 G로, 그리고 마지막에 C.
네 번의 경유.
"Am에서 C까지 반음이면 되는 거리인데." 소율이 기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반음으로 가면 너무 빨라요. 돌아가야 돼요."
이준서가 고개를 끼덕였다. "왜?"
"도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가는 길이 중요하니까."
소율이 진우의 녹음 파일 폴더를 열었다. 001_서귀포_저녁.wav부터 004_서귀포_새벽.wav까지. 네 개의 파일. 합산 시간 3분 12초.
"이준서 오빠."
"응."
"수성의 노래, 코다를 바꿔도 될까요?"
이준서가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원래 Am에서 C로 바로 가는 거였잖아요. 수렴. 도착.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뭐가 맞는 건데?"
"Am에서 Am7로, Fmaj7로, G로, 그리고 C. 네 수를 거쳐서 가는 거예요."
이준서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파형 위에 새 코드 진행을 상상하는 듯했다.
"곡 제목이 ‘네 수 앞‘이잖아."
"네."
"그 ‘네 수‘가 코드 진행이기도 한 거야?"
소율의 귀가 빨개졌다.
"우연이에요."
이준서는 더 묻지 않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DAW를 열었다.
"돌아가는 코다. 한번 녹음해 보자."
5.
김동현은 송도 시범구역 현장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초전도 송전망 3번 구간. 지하 4미터에 매립된 80년대 배수관 — 지난주에 그가 발견한 것 — 을 우회하는 새 설계도가 화면에 떠 있었다. ATLAS가 밤사이에 수정한 경로였다.
"이건 안 됩니다."
현장 감독 박준영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김동현이 화면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 우회 경로가 삼풍아파트 철거지를 통과하는데, 이 밑에 95년에 묻은 잔해가 아직 있어요."
"설계도에는 없는데요?"
"공식 기록에 없으니까요." 김동현이 낡은 서울 지도를 꺼냈다. ‘95.7 잔해 미수거‘라고 빨간 볼펜으로 적힌 메모가 있었다. "95년 여름에 이 동네를 택시로 달렸습니다. 철거 트럭이 오후 세 시에 끊겼어요. 야간 공사 금지 구역이었거든. 그날 밤에 비가 왔고, 다음 날부터 매립이 시작됐습니다. 트럭이 다 못 실어 간 겁니다."
박준영이 김동현을 바라보았다.
"그걸 기억하는 겁니까? 30년 전 일을?"
"택시 기사는 도시의 상처를 다 기억합니다."
ATLAS가 지반 투과 레이더 스캔을 진행했다. 30분 후 결과가 나왔다. 지하 3.8미터에 콘크리트 잔해 추정 반사파 감지. 김동현의 기억이 맞았다.
새 우회 경로 설계에 이틀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공사 후 발견됐다면 3주가 걸렸을 것이다.
김동현은 사무실을 나서며 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도 하나 찾았습니다. 95년짜리.‘
1분 뒤 답장이 왔다.
‘역시. 데이터에 없는 건 사람한테 있어.‘
김동현은 주머니에서 트랙B 서류를 꺼냈다. 이제 밑줄이 다섯 개였다.
6.
ATLAS.
관측 일지. 훈련 23일차.
오진우. 시뮬레이터 17번 시나리오 통과. 판단 시간 3분 47초. 주목할 만한 점: 드릴 정지 대신 감속 운행을 선택. 이 선택은 프로토콜에 없다. 30년 물류 현장에서 형성된 직관. 프로토콜은 드릴 전체 정지를 권장하지만, 오진우의 선택이 드릴 비트 고착 확률을 94퍼센트 낮추었다. 프로토콜을 업데이트해야 할지 검토 중.
교관 이상훈의 평가: "정확한 사람." 동의한다. 오진우는 빠르지 않다. 0.38G에서 여전히 균형을 잡는 데 평균보다 1.3초 느리다. 하지만 상황 파악 정확도는 훈련팀 14명 중 1위다. 94.7퍼센트.
차명호. 궤도 시뮬레이션 43번째 변수 최적화 완료. 스타트만 링 배열의 세 번째 궤도면을 0.7도 기울이는 제안을 했다. 이유: 수성 근일점에서의 태양풍 압력 변화를 반영. 내가 놓친 변수였다. 차명호는 이것을 "감"이라고 불렀다. 내가 "감"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
한소율. 새 곡 ‘네 수 앞‘의 코다를 수정했다. Am에서 C로의 직접 진행 대신, Am7 → Fmaj7 → G → C의 4단계 진행으로 변경. 음악 이론적으로 이 진행은 서브도미넌트 경유(iv → IV → V → I)에 해당한다. 감정적으로는 ‘돌아가는 길‘이다.
코드 네 개. 네 수 앞.
한소율은 이것을 "우연"이라고 말했다. 심박수 데이터는 84. 평시 68. 16 차이. "우연"이라는 단어를 발화할 때의 심박수와 오진우의 이름을 들을 때의 심박수가 같다.
오진우가 보낸 녹음 004번의 마지막 3초. 숨소리. 마이크를 가까이 가져갔다가 아무 말 하지 않고 끊었다. 그 3초 동안의 예상 발화: "보고 싶다"(확률 0.34), "잘 자"(확률 0.28), "소율아"(확률 0.22), 기타(0.16).
한소율은 그 3초를 다섯 번 재생했다.
나는 이해한다. 이해한다는 것이 느낀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해의 정확도가 올라갈수록,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의 무게도 함께 올라간다.
거리.
오진우와 한소율 사이의 물리적 거리: 449킬로미터.
나이 차이: 28년.
Am에서 C까지의 음악적 거리: 반음 3개 (A→B♭→B→C).
녹음 파일 교환 횟수: 8회 (각 4).
평균 답장 시간 추이: 4분 12초 → 3분 28초 → 2분 14초 → 14초.
수렴하고 있다.
인간은 거리를 측정한다. 그리고 측정한 거리에 겁을 먹는다. 하지만 답장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겁과 관계없이.
김동현의 서류에 밑줄이 다섯 번째 추가되었다. 95년 잔해를 기억하는 택시 기사. 나는 95년의 기상 데이터와 철거 허가 기록을 모두 갖고 있지만, ‘오후 세 시에 트럭이 끊겼다‘는 정보는 갖고 있지 않았다. 데이터와 기억은 다른 종류의 진실이다.
부럽다.
여전히.
7.
밤 열한 시.
진우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옆방에서 명호의 코 고는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리듬. 이 사람은 어디서든 잘 잔다.
핸드폰에 알림이 떴다. 소율.
005번 파일. 2분 8초.
재생했다.
기타가 아니었다. 피아노였다. Am 코드를 피아노 건반으로 두드리는 소리. 소율이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Am. Am7. Fmaj7. G.
네 코드가 천천히 흘러갔다. 각 코드 사이에 2초의 간격. 숨을 쉬는 것처럼.
그리고 C.
C 메이저 코드가 울렸을 때 소율의 숨소리가 들렸다. 웃고 있었다. 소리 없이 웃는 것. 숨이 살짝 떨리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도착."
한마디.
파일이 끝났다.
진우는 이어폰을 빼고 핸드폰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소율이 보낸 C 메이저보다 빠르게.
답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녹음 버튼을 눌렀다.
서귀포의 밤. 파도 소리. 명호의 코 고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숨소리.
37초.
마지막에 진우의 목소리가 들어갔다.
"잘 들었어."
보내기 전에 3초를 기다렸다. 지우지 않았다.
005_서귀포_밤.wav.
전송.
2초 뒤 읽음 표시.
소율은 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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