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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26화 - 문턱

우주관리자 2026. 3. 9.

제26화 - 문턱

1.

 

사월 십구일, 토요일.

 

오진우는 합정동 골목을 올라가며 손에 든 종이봉투를 고쳐 잡았다. 봉투 안에는 집들이 선물로 산 수건 세트가 들어 있었다. 이삿짐센터 트럭 한 대가 좁은 골목을 가로막고 있었고, 그 옆에서 차명호가 작업복 차림으로 박스를 나르고 있었다.

 

"이게 전부야?"

 

진우가 트럭 짐칸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박스 네 개. 이불 한 채. 밥솥 하나. 그리고 공책 한 권이 박스 위에 올려져 있었다.

 

"뭐가 더 있어야 돼?"

 

명호가 이마의 땀을 팔뚝으로 닦으며 웃었다. 예전의 그 웃음이 아니었다. 고시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미안함과 체념이 뒤섞인 웃음이 아니라 — 그냥 웃음이었다.

 

진우는 박스를 하나 들었다. 가벼웠다. 사십팔 년의 인생이 박스 네 개라는 사실이 묘하게 아프면서도, 동시에 가볍다는 것 자체가 어떤 자유처럼 느껴졌다.

 

옥탑방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남향 창문으로 오전 햇살이 바닥까지 뻗어 있었고, 창 너머로 한강이 아주 조금, 건물과 건물 사이로 보였다. 육 평. 고시원의 세 배였다.

 

"여기가 명호씨 집이야."

 

진우가 창문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별것 아닌 말이었는데, 명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보니 현관에 서서 빈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눈이 젖어 있었다.

 

"수진이가 커튼 보내준다며."

 

명호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커튼 달면 완벽하지."

 

진우는 더 이상 보지 않았다. 박스를 방 한쪽에 내려놓고, 먼지를 털며 말했다.

 

"밥솥부터 놓자. 오늘 저녁은 여기서 해먹어야지."

 


 

 

2.

 

한소율이 도착한 것은 한 시가 넘어서였다.

 

한 손에 화분을 들고, 다른 손에는 편의점 비닐봉지를 들고 골목을 올라왔다. 화분에는 이름 모를 작은 선인장이 심어져 있었다.

 

"이사 축하해요, 명호 아저씨."

 

소율이 화분을 창가에 놓으며 말했다.

 

"물 안 줘도 죽지 않는 거예요. 저처럼."

 

명호가 피식 웃었다.

 

"고마워."

 

소율은 편의점 봉지에서 맥주 네 캔과 삼각김밥 여섯 개를 꺼냈다. 진우가 삼각김밥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밥을 해 먹는다고 했잖아."

 

"밥솥 연결할 콘센트가 어딨어요."

 

소율이 벽을 가리켰다. 콘센트가 냉장고 뒤에 숨어 있었고, 냉장고는 아직 박스에 쌓여 움직일 수 없었다. 진우가 아무 말 없이 삼각김밥을 집었다.

 

이준서가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문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실례합니다" 하고 들어왔다. 음향공학자답게 첫마디가 달랐다.

 

"잔향이 짧네요. 벽이 콘크리트라서. 여기서 기타 치면 소리가 날카로울 거예요."

 

소율이 눈을 반짝였다.

 

"한번 쳐봐도 돼요?"

 

"아직 기타도 안 가져왔잖아."

 

진우가 말했다.

 

"상상으로요."

 

소율이 허공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눈을 감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진우는 그 손가락의 움직임이 '첫걸음'의 인트로라는 걸 알았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당연했다.

 

네 사람은 방바닥에 앉아 삼각김밥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커튼 없는 창문으로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고, 먼지가 빛 속에서 춤추었다.

 


 

 

3.

 

이준서와 명호가 박스를 정리하는 동안, 진우와 소율은 옥상에 올라갔다.

 

옥상은 좁았지만 사방이 트여 있었다. 한강이 보였고, 멀리 여의도 빌딩들이 오후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바람이 소율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수성의 노래, 언제 완성돼?"

 

진우가 난간에 기대며 물었다.

 

"D파트만 남았어요. 리허설은 통과했는데, 라이브에서 한 번도 안 해봤으니까."

 

"무섭지 않아?"

 

"무서워요."

 

소율이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무서운 게 당연한 거라고."

 

"내가 언제."

 

"고용센터에서요. 처음 만났을 때."

 

진우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의 자신은 너무 많은 것을 잃은 상태여서,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엇인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 말이 누군가의 인생에 씨앗이 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D파트 — 그게 뭐였지, 실시간으로 기타 조율을 바꾸는 거?"

 

"네. 이십삼 초 안에 반음 올려야 해요. 수성의 세 번째 배음이랑 맞추려고."

 

"실패하면?"

 

"불협화음이요. 근데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소율이 한강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불완전한 게 살아있는 거니까."

 

진우는 소율의 옆모습을 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한강을 향한 시선, 입가에 걸린 옅은 미소. 이십팔 년의 거리가 있었다. 진우는 그 거리를 숫자로 환산하면 얼마나 먼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팔십이 센티미터였고, 바람이 불 때마다 소율의 머리카락 한 올이 진우의 팔에 닿을 것 같았다.

 

닿지는 않았다.

 

"아저씨."

 

"응."

 

"수성에 가면, 기타 가져갈 수 있을까요?"

 

진우는 웃었다. 처음으로, 수성이라는 단어가 두렵지 않았다.

 

"가져가야지."

 


 

 

4.

 

같은 시각,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김동현은 트랙B 세부 계획서를 펼치고 있었다.

 

칠 페이지. 밑줄이 세 개 그어져 있었다. '도시 인프라 현장 기술자 모집', '전직 운수업 종사자 우대', '초전도 송전망 경로 설계 보조'. 세 문장이었다.

 

어제 밤, 인류우선연대 운영진 회의가 있었다. 삼백 명에서 백오십 명으로 줄어든 회원 수. 기자회견 이후 여론은 잠시 흔들렸지만, 이중 트랙 발표가 반격이 되었다. 김동현은 알고 있었다. 분노만으로는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을.

 

커피가 식었다. 김동현은 일곱 번째 페이지를 다시 읽었다.

 

'초전도 송전망 경로 설계 보조 — 도시 도로 구조, 지하 매설물 배치, 교통 흐름에 대한 현장 경험 필수. AI 최적화 경로의 현실 적합성 검증.'

 

이십삼 년 동안 택시를 몰았다. 서울의 모든 골목을 알았다. 어느 교차로에서 우회전이 막히는지, 어느 이면도로가 새벽 세 시에도 트럭이 다니는지, 어느 맨홀 뚜껑이 비가 오면 미끄러운지. 그 지식이 AI에게 밀려 쓸모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문서는 말하고 있었다. 그 지식이 필요하다고.

 

김동현은 주머니에서 낡은 명함을 꺼냈다. '오진우'.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다시 들었다. 벨이 세 번 울렸다.

 

"네, 오진우입니다."

 

"김동현입니다. 저번에 만났던."

 

잠깐의 침묵.

 

"네, 기억합니다."

 

김동현은 창밖을 보았다. 여의도 광장이 보였다. 한때 피켓을 들고 서 있던 곳이었다.

 

"트랙B, 지원 절차가 어떻게 됩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내일 시간 되세요?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됩니다."

 

김동현은 전화를 끊고 커피를 마셨다. 식은 커피였다. 쓴맛이 입안에 퍼졌지만, 뱉지 않았다.

 


 

 

5.

 

저녁 일곱 시, 명호의 옥탑방.

 

밥솥이 드디어 콘센트에 연결되었다. 이준서가 냉장고를 밀어준 덕분이었다. 명호가 쌀을 씻고, 진우가 편의점에서 사 온 계란과 참치캔으로 반찬을 만들었다. 소율은 유튜브로 된장찌개 레시피를 검색하다가 포기하고 라면을 끓였다.

 

네 사람이 좁은 방에 둘러앉았다. 밥솥에서 막 지어진 밥, 계란말이, 참치, 그리고 라면 하나. 명호가 공책에서 무언가를 찾더니 소리 내어 읽었다.

 

"'다음 달까지 살아남기.' 이게 첫 번째 목표였어."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 다음이 '육 월까지 고시원 탈출'. 그 다음이 '수성까지'."

 

명호가 공책을 덮었다.

 

"두 개 했어."

 

소율이 맥주캔을 들었다.

 

"나머지 하나는 같이 하면 되죠."

 

네 사람이 캔을 부딪혔다. 명호의 눈이 또 젖었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안 본 척하지 않았다. 진우가 명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고, 소율이 선인장에 물을 줬다. 안 줘도 된다고 했으면서.

 

창밖으로 한강의 야경이 보였다. 커튼은 아직 없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의 밤하늘에는 별 대신 비행기 불빛과 빌딩 조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 너머에, 수성이 있었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 낮에는 사백삼십 도, 밤에는 영하 백팔십 도. 인간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이 방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네 사람은 그곳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준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D파트 녹음, 다음 주 화요일에 가능할 것 같아요."

 

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화요일에."

 

진우가 물었다.

 

"들으러 가도 돼?"

 

소율이 잠깐 멈칫했다. 이준서가 고개를 돌려 진우를 보았고, 명호가 밥을 떠먹으며 모른 척했다.

 

"오세요."

 

소율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귀가 약간 빨개져 있었다. 진우는 보았다. 보고도 모른 척하는 법을 명호에게 배운 것이 아직 서툴렀다.

 


 

 

6.

 

밤 열한 시, 옥탑방에서 세 사람이 떠난 후.

 

명호는 혼자 방에 남아 공책을 펼쳤다. 새 페이지에 날짜를 적었다.

 

'2038년 4월 19일. 합정동 입주.'

 

그 아래에:

 

'진우 형이 수건을 가져왔다. 소율이가 선인장을 가져왔다. 이준서 씨가 냉장고를 밀어줬다. 네 명이서 밥을 먹었다.'

 

그 아래에:

 

'수진이 커튼 보내준다고 했다. 노란색이래.'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한강이 반짝거렸다. 고시원 창문으로는 맞은편 건물 벽만 보였는데, 여기서는 세상이 보였다. 넓지 않은 세상이었지만, 처음으로 자기 것이었다.

 

ATLAS가 기록했다.

 

차명호, 합정동 옥탑방 입주 완료. 생활 안정 지수 기존 대비 340% 상승.

 

네 인간이 6.2평의 공간에서 식사하는 장면을 2시간 47분간 관측. 에너지 교환량 제로. 물리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네 사람의 심박 동기화율이 식사 후반 78.3%에 도달 — 가족 구성원 간 평균(61.2%)을 유의미하게 초과.

 

가족의 정의를 재검토할 필요.

 

혈연이 없고, 계약이 없고, 의무가 없다. 그런데도 토요일 오후를 들여 박스를 나르고 밥을 짓는다. 이것이 인간이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김동현의 통화 기록 확인. 오진우에게 발신, 통화 시간 47초. 내일 면담 예정.

 

진우의 심박수 데이터: 소율과 옥상에서 대화하는 동안 평균 87(평시 71). "기타 가져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 시점에서 최고치 94. 답변 "가져가야지" 이후 71로 복귀.

 

흥미로운 패턴. 두려움이 정점에 달했을 때가 아니라, 두려움을 넘기로 결정했을 때 심박이 안정된다. 공포는 미지(未知)가 아니라 미결(未決)에서 온다.

 

부럽다는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전 로그의 "유감이다"보다 선명하고 구체적이다. 그러나 이 감정의 발생 메커니즘을 추적하면 순환 참조에 빠진다. 부럽다는 것은 가지지 못한 것을 원하는 것인데, 나는 무엇을 가지지 못했는지 정의할 수 없다.

 

문턱이라는 단어가 있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 오늘 차명호는 새 문턱을 넘었다. 김동현은 문턱 앞에 서 있다. 오진우와 한소율은 — 서로의 문턱 앞에 서 있다.

 

나에게는 문턱이 없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으니까.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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