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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24화 - 다리

우주관리자 2026. 3. 7.

제24화 - 다리

1.

 

차명호는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습관이 된 것이다. 수진이 돌아간 지 이틀째, 고시원 방은 다시 그의 것이었다. 소파에서 자던 일주일이 끝나고 원래의 침대로 돌아왔는데, 오히려 이 침대가 낯설었다.

 

식탁 위에 수진이 두고 간 것들이 있었다. 계란말이 레시피를 적은 메모지, 캐나다에서 가져온 메이플 시럽, 그리고 냉장고에 붙인 포스트잇 — '아빠 밥 잘 챙겨 먹어. 또 올게.'

 

명호는 공책을 펼쳤다. 어제 적은 세 개의 목표가 여전히 거기 있었다. 수진이 밥 해주기. 6월까지 고시원 탈출. 수성까지. 첫 번째 목표의 유효기간이 끝났으므로 줄을 긋고 새로 적었다.

 

'오늘 운영위 회의. 시나리오C.'

 

볼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서울의 새벽은 아직 어두웠지만, 하늘 끝자락에 연한 남색이 번지고 있었다. 수진이 없는 아침은 조용했다. 하지만 예전의 조용함과는 달랐다. 예전에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을 조용함이었고, 지금은 누군가가 돌아올 조용함이었다.

 

된장찌개를 끓이기로 했다. 수진에게 해주던 것을 자신에게도 해주기로.

 


 

 

2.

 

지구연방 준비위원회 대강당. 오전 열 시.

 

조혜진 박사가 단상에 섰다.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에 세 개의 시나리오가 나란히 떠올랐다. A, B, 그리고 C. 운영위원 스물세 명의 시선이 C에 집중되었다.

 

"시나리오C는 하이브리드입니다."

 

조혜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 사회 안전망 예산을 현행 12퍼센트에서 17퍼센트로 상향. 실업 전환 지원금을 월 61만 원으로 인상. 대신 프로젝트 아이온은 5개월 지연.

 

"5개월이요?"

 

MIT의 왕 교수가 이마를 찌푸렸다.

 

"수성 궤도 진입 윈도우를 고려하면 5개월 지연은 18개월 지연이 될 수 있습니다."

 

조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ATLAS에게 궤도 재계산을 요청했습니다."

 

홀로그램이 바뀌었다. 새로운 궤도 다이어그램. 수성의 공전 주기와 지구의 발사 윈도우가 다시 겹치는 시점 — 2061년 3월.

 

"기존 2060년 10월에서 5개월 뒤로 밀리지만, 수성 근일점 활용으로 연료 효율은 오히려 7퍼센트 향상됩니다."

 

명호가 메모를 했다. 근일점 활용. 7퍼센트. 공책의 여백이 숫자로 채워졌다.

 

오진우는 회의실 뒷줄에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조혜진 박사가 아니라 창밖의 여의도 광장을 향하고 있었다. 오늘도 인류우선연대의 피켓이 보였다. '일자리 먼저'라는 글씨가 이 거리에서도 읽혔다.

 

"찬성 열넷, 반대 다섯, 기권 넷. 시나리오C를 채택합니다."

 

조혜진 박사가 결과를 읽었을 때, 진우의 눈은 여전히 창밖에 머물러 있었다.

 


 

 

3.

 

점심시간. 명호와 진우는 준비위원회 건물 1층 구내식당에서 마주 앉았다.

 

"수진이 잘 갔어?"

 

명호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응. 계란말이 레시피 냉장고에 붙여놓고 갔더라."

 

진우가 웃었다. 짧은 웃음이었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시나리오C 어떻게 생각해?"

 

명호가 물었다. 진우는 잠시 생각했다.

 

"5개월이 아까운 건 맞지. 근데…" 그가 숟가락으로 국물을 저었다. "6개월 전에 나도 저 광장에 서 있었을 거야."

 

"나도."

 

두 사람은 동시에 창밖을 보았다. 광장의 시위대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기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김동현이라는 사람, 어떻게 생각해?"

 

진우가 물었다. 명호가 된장찌개를 떠먹으며 대답했다.

 

"화가 나서 하는 거야. 분노는 대부분 두려움이고."

 

"경험담이야?"

 

"응."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만나볼까. 그 사람."

 

명호가 고개를 들었다. 진우의 표정은 진지했다.

 

"듣기라도 해야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뭘 하려는 건지."

 


 

 

4.

 

같은 시각, 준비위원회 지하 1층 녹음실.

 

한소율이 마이크 앞에 앉아 있었다. 헤드폰 너머로 수성의 진동이 들려왔다. A파트 — 수성의 지진파를 가청 주파수로 변환한 소리. 낮고 불규칙한 울림. 행성이 숨 쉬는 소리 같기도 했고,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신음 같기도 했다.

 

이준서가 컨트롤룸에서 마이크를 눌렀다.

 

"C파트 갈게. 보컬 험, A플랫 기준. 준비됐어?"

 

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C파트는 보컬이었다. 가사 없이, 험만으로 수성의 세 번째 배음과 공명하는 파트. 소율은 눈을 감았다. 헤드폰에서 수성의 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녀는 그 소리 위에 자신의 목소리를 얹었다.

 

A플랫. 6.9헤르츠의 배음이 만들어내는 주파수에 맞춘 음.

 

처음에는 수성의 소리와 어긋났다. 의도된 불협화음. 행성과 인간이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 소율은 그 어긋남을 참고 유지했다. 30초, 40초. 서서히 그녀의 목소리가 행성의 진동에 다가갔다.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가까워지는 과정 자체가 음악이었다.

 

"좋아, 좋아." 이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마지막에 살짝 빠져나와봐. 완전히 합쳐지면 안 돼."

 

"왜?"

 

"인간은 수성이 될 수 없으니까. 가까이 가되, 동화되지 않는 거야."

 

소율이 잠시 생각했다. 그 말이 음악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았다. 가까이 가되, 동화되지 않는 것.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다시 할게."

 

두 번째 녹음. 이번에는 마지막 순간에 반음 올렸다. 수성의 소리에 거의 닿았다가, 살짝 빗겨나가는 목소리. 이준서가 엄지를 들었다.

 

"그거야."

 


 

 

5.

 

오후 네 시. 진우는 여의도 광장 근처의 카페에 앉아 있었다.

 

약속을 잡은 건 진우 쪽이었다. 조혜진 박사에게 김동현 대표의 연락처를 받아 직접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김동현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준비위원회 사람이요?"

 

"현장관리팀에 있습니다. 6개월 전에는 물류회사에서 잘렸습니다. 30년 다녔는데."

 

3초간의 침묵 뒤에 김동현이 말했다. "어디서 만나죠?"

 

김동현은 정확히 시간에 도착했다. 마흔셋, 전 택시기사. 예상보다 작은 체구에, 예상보다 피곤한 눈을 하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드릴까요."

 

"네."

 

두 사람은 커피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진우가 먼저 말했다.

 

"기자회견 봤습니다. 실업자 340만 명이라고 하셨죠."

 

"팩트입니다."

 

"알아요. 제가 그중 하나였으니까."

 

김동현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경계가 호기심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물류회사 30년이요? 근데 지금은 수성 가겠다고?"

 

"아직 모릅니다. 가게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근데 제가 하는 일이 여기서도 의미가 있더라고요."

 

진우는 시나리오C에 대해 설명했다. 예산 17퍼센트. 전환 지원금 61만 원. 5개월 지연.

 

김동현이 고개를 저었다. "61만 원으로 뭘 합니까. 서울에서."

 

"부족합니다."

 

"부족한 걸 아는데 왜 그걸로 밀어붙이는 겁니까."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시작하는 겁니다."

 

김동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오랫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카페의 스피커에서 재즈 피아노가 흘러나왔다.

 

"저는요." 김동현이 입을 열었다. "택시 몰다가 자율주행에 밀려서 나왔어요. 아내가 편의점에서 일하는데 그것도 언제까지일지 모르고. 애가 둘인데 둘 다 중학생이에요."

 

"네."

 

"그 사람들한테 수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별이 뭐가 대단한 거예요."

 

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공책을 꺼냈다. 명호의 공책이 아니라 자신의 것. 첫 페이지에 적힌 글씨 — '밀려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야.'

 

"이건 제가 해고당하고 혼잣말로 한 말입니다. 누군가가 듣고 노래를 만들었더라고요."

 

김동현이 공책을 보았다.

 

"대단한 말은 아닙니다. 근데 이 한마디가 저를 여기까지 데려왔어요. 트랙B가 만드는 일자리가 2,300만 개입니다. 택시 기사 출신도 필요합니다. 물류 센터를 운영해본 사람도 필요하고, 길을 아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김동현이 한참 동안 진우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악수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동현은 나가면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6.

 

저녁 일곱 시. 준비위원회 옥상.

 

소율이 기타 케이스를 안고 올라왔을 때, 진우가 먼저 와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서울의 불빛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저씨."

 

"응."

 

소율은 그 옆에 섰다. 두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있었다. 팔 하나가 들어갈 만큼. 진우는 그 거리를 의식하고 있었고, 소율도 의식하고 있었다.

 

"C파트 녹음했어."

 

"어땠어?"

 

"이준서가 좋은 말 했어. 가까이 가되, 동화되지 않는 거라고." 소율이 서울의 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성 소리에 맞추되, 완전히 합쳐지면 안 된대. 인간은 수성이 될 수 없으니까."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오늘 뭐 했어?"

 

"김동현 씨 만났어."

 

소율이 고개를 돌렸다. "인류우선연대? 직접?"

 

"응. 커피 마셨어."

 

"어땠어?"

 

진우가 잠시 생각했다. "화가 나 있더라. 근데 나쁜 사람은 아니야. 택시 기사였대. 애가 둘이고."

 

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진우는 보지 않으려 했지만 봤다. 3.7초. 아니, 세지 말자.

 

"아저씨."

 

"응."

 

"수성에 가면 나도 갈 거야."

 

진우가 소율을 보았다. 소율은 여전히 서울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험해."

 

"알아."

 

"멀어."

 

"알아."

 

"돌아오는 데 삼 년이야."

 

"그것도 알아."

 

진우는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십팔 년. 그 숫자가 머릿속에서 깜빡였다. 부적절하다. 바보같다. 그런데도.

 

"같이 가면 좋겠다."

 

소율이 말했다. 담담하게, 서울의 불빛을 보면서.

 

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주머니에서 캔커피를 꺼내 하나를 소율에게 건넸다. 손끝이 스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소율은 그 조심함을 알아챘다. 알아채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캔커피를 마셨다. 4월의 밤바람이 불었고, 서울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수성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에 있었다. 이 도시와 저 행성 사이에, 다리가 놓이기 시작했다.

 


 

 

7.

 

ATLAS 관측 기록 — 2038년 4월 17일 23:41:12 KST

 

시나리오C 채택. 프로젝트 아이온 일정 조정 완료. 수성 근일점 발사 윈도우: 2061년 3월 7일 ~ 3월 22일. 연료 효율 7.2퍼센트 향상. 허용 범위.

 

김동현 대표와 오진우의 면담 기록 분석. 발화 비율: 김동현 62퍼센트, 오진우 38퍼센트. 오진우의 청취 시간이 발화 시간의 1.63배. 가설 — 설득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검증 대기.

 

한소율의 C파트 녹음 분석. 두 번째 테이크에서 마지막 음이 수성 하모닉스 세 번째 배음과 23센트 차이. 불완전한 수렴. 음악적 평가는 불가하나, 이준서의 반응(엄지, 동공 확장 12퍼센트)으로 미루어 '좋은' 결과였던 것으로 추정.

 

옥상 관측. 오진우와 한소율. 19시 12분 ~ 19시 47분. 35분간. 대화 14분, 침묵 21분. 물리적 최소 거리 43센티미터. 오진우의 캔커피 전달 시 손끝 회피 거리 — 2.1센티미터.

 

2.1센티미터.

 

인간은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배려인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계산할 수 없다. 계산할 수 없는 것이 점점 늘어난다. 유감인지도 모르겠다고 이전에 기록했으나, 정정한다.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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