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5화 - 손끝
1.
명호는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습관이었다. 건설 현장에서 십 년을 보내면 몸이 알아서 시계가 된다.
고시원 천장의 얼룩을 바라보며 잠시 누워 있었다. 수진이 돌아간 지 닷새. 좁은 방은 다시 혼자였지만 예전의 텅 빈 느낌은 아니었다. 주방 선반에 수진이 두고 간 계란말이 레시피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소금은 반 꼬집만!! 아빠 짜게 하지 마'라고 빨간 볼펜으로 밑줄까지 그어놓았다.
명호는 공책을 펼쳤다.
'오늘 할 일: 부동산 두 곳. 예산 월 45만 원. 보증금 300만 원 이하.'
삼십만 원이 전부였던 통장에 HELIOS 프로그램 급여 두 달 치가 들어와 있었다. 거기에 프로젝트 아이온 궤도역학 분과 자문료가 더해졌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고시원을 나갈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는 공책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수진이한테 새 집 사진 보내기.'
2.
오진우는 여의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홉 시 반. 김동현과의 두 번째 만남까지 삼십 분이 남았다.
지난주 악수 없이 떠난 남자. 뒤돌아보긴 했다. 진우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명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형, 오늘 부동산 보러 다닐 거야.'
진우는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좋은 데 나오면 사진 보내. 너 눈이 높아서 걱정이다.'
'높긴. 고시원보다 나으면 되지.'
'그게 눈이 높은 거야.'
명호가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진우는 그것을 보며 잠시 멍하니 있었다. 이 남자가 반년 전에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홉 시 사십오 분. 카페 문이 열리고 김동현이 들어왔다. 검은 패딩 차림에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지난번과 같은 차림이었다.
"오셨습니까."
진우가 일어섰다. 김동현은 고개만 까딱이고 맞은편에 앉았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나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왜 또 만나자고 했습니까."
김동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진우는 가방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냈다.
"트랙B 세부 계획서입니다. 지난주 운영위에서 통과된 시나리오C 기반이에요."
김동현은 서류를 받아들지 않았다.
"서류 보러 온 거 아닙니다."
"압니다."
진우는 서류를 테이블 한쪽에 밀어놓았다.
"그러면 뭘 보러 왔습니까."
김동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표정이 지난번과 달랐다. 분노 대신 피로가 깔려 있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기자회견 이후로 사람들이 빠지고 있어요. 인류우선연대. 처음에 삼백 명 넘었는데 지금 백오십도 안 돼요."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중 트랙 발표 이후로요. 일자리가 생긴다니까 관심이 사라지더라고."
"그래서 화가 나십니까."
김동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서 무섭습니다."
진우는 눈을 들어 김동현을 보았다. 남자의 손이 종이컵을 감싸쥐고 있었다. 손등에 굳은살이 보였다. 택시 핸들을 오래 잡은 손이었다.
"삼백사십만 명이 실업자입니다. 그중에 삼백 명이 모였다가 백오십 명으로 줄었어요. 나머지 삼백삼십구만 구천팔백오십 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집에 있어요. TV 보고 있어요. 분노할 힘도 없는 거예요. 내가 무서운 건 그겁니다. 이 사람들이 싸우지 않는 거요."
침묵이 흘렀다. 카페의 재즈 음악이 어색하게 빈자리를 채웠다.
"저도 그랬습니다."
진우가 말했다. 김동현이 올려다보았다.
"해고당하고 한 달 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어요. 분노할 힘도 없었습니다.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그냥 전화기 안 받고 술만 마시다가 아들 전화를 받은 게 전부예요."
"그게 뭘 바꿨습니까."
"아무것도 안 바꿨어요. 그냥 다음 날 일어났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김동현은 오랫동안 진우를 바라보았다. 택시기사 특유의 사람을 재는 시선이었다. 수만 명의 승객을 태우며 익힌 직감.
"트랙B라고 했습니까."
"네."
"거기서 뭘 합니까."
"핵융합 소형 발전소 건설 현장 관리, 심해 자원 채굴 장비 운용, 초전도 송전망 설치. 다 현장직입니다. AI가 설계하고 사람이 짓는 거예요."
"택시기사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진우는 잠시 생각했다.
"택시기사는 서울의 모든 골목을 알고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모르는 길도요. 송전망 설치에 도시 인프라 지식이 필요합니다. 김 대표님, 당신이 아는 것 중에 AI가 모르는 게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김동현의 손이 멈췄다.
"내비가 모르는 길이요."
"네. 공사 때문에 막힌 길, 비 오면 미끄러운 언덕, 어르신들이 많아서 서행해야 하는 구간. 데이터에 없는 것들이요."
김동현이 서류를 집어들었다. 첫 페이지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지난번과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류를 들고 있었다.
3.
소율은 준비위원회 지하 녹음실에서 기타를 안고 앉아 있었다. D파트. 라이브 실시간 튜닝 변경. 이준서가 콘솔 앞에서 헤드폰을 벗으며 말했다.
"세 번째 배음에서 반음 올린 다음에 다시 원래 튜닝으로 돌아오는 건데, 시간이 이십삼 초밖에 없어."
"알아."
"이십삼 초 안에 펙을 돌리고, 코드를 잡고, 아르페지오를 치면서 수성 하모닉스와 동기화해야 돼. 녹음은 할 수 있어. 근데 라이브에서는—"
"라이브에서 하고 싶어."
이준서가 한숨을 쉬었다. 소율의 고집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여자가 마음먹으면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좋아. 그러면 연습하자. 녹음 대신 리허설. 실수하면 처음부터."
소율이 기타를 들었다. 모니터에서 수성의 진동 파형이 흐르고 있었다. 2.3헤르츠의 저주파가 가청 영역으로 변환되어 방 안을 채웠다. 낮고 깊은 울림. 수성의 맥박이었다.
A파트가 시작되었다. 수성 진동 단독. 소율은 눈을 감고 소리를 들었다. 태양에 가장 가까운 행성의 지각이 수축하며 내는 신음. 46억 년 된 암석의 노래.
B파트. 기타가 들어왔다. 소율의 손가락이 현을 튕겼다. 의도적으로 박자를 어긋나게 했다. 수성과 기타가 서로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C파트. 보컬 험. 입을 다문 채 목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소리. 수성의 세 번째 배음, 약 6.9헤르츠를 가청 영역으로 올리면 A플랫에 가까웠다. 소율의 험이 그 주파수를 찾아갔다. 23센트 차이. C파트 녹음 때 이준서가 승인한 바로 그 불완전한 수렴.
그리고 D파트.
소율의 왼손이 페그를 잡았다. 3번 줄. 반음 올림.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페그를 돌리면서 오른손으로 아르페지오를 유지해야 했다. 수성의 파형이 최고점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이십삼 초.
열두 초째에 튜닝이 맞았다. 소율의 기타가 수성과 같은 주파수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이준서가 콘솔 위에 올려놓은 펜이 미세하게 떨렸다.
열여덟 초째. 소율이 다시 페그를 돌렸다. 원래 튜닝으로 복귀. 수성의 파형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기타가 따라갔다. 행성과 악기가 함께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스물세 초. 마지막 아르페지오가 울렸다. 수성의 진동이 사라지고 기타의 잔향만 남았다.
이준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다가 헤드폰을 벗었다.
"한 번 더."
"실수했어?"
"아니. 완벽했어. 완벽한 걸 확인하려고."
소율이 웃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두 번째도 완벽했다. 이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D파트 구조 확정. 라이브 가능."
소율이 기타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녹음실 시계가 오후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네 시간째 같은 구간을 반복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진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한 시간 전.
'오늘 회의 일찍 끝났다. 저녁 먹었어?'
소율은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다시 쓰다가 또 지웠다. 결국 보낸 건 짧은 한 줄이었다.
'아직이요. D파트 됐어요.'
답장은 삼십이 초 만에 왔다.
'축하한다. 밥 먹어라.'
소율은 그 일곱 글자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밥 먹어라.' 아버지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소율이 뭘 먹든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영양사가 짜준 식단표를 냉장고에 붙여놓았을 뿐이었다.
"왜 웃어?"
이준서가 물었다.
"웃었어?"
"응. 폰 보면서."
소율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배고파서."
4.
명호는 합정동 골목을 걸으며 세 번째 부동산을 나왔다. 두 곳은 예산 초과, 한 곳은 반지하라 습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네 번째 부동산에서 중개사가 키를 건네며 말했다.
"보증금 이백, 월세 사십. 옥탑방이에요. 좁지만 해가 잘 들어요."
계단을 올라가자 작은 방이 나왔다. 여섯 평. 고시원의 두 배 크기였다. 창문이 남향으로 나 있었고, 옥상으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
명호는 창문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합정동 지붕들 너머로 한강이 보였다. 아주 조금, 건물 사이로.
중개사가 뒤에서 말했다.
"이 동네가 원래 홍대 쪽이라 젊은 사람들이 많아요. 밤에 음악 소리가 좀 들릴 수 있는데—"
"계약하겠습니다."
중개사가 놀란 눈으로 명호를 보았다.
"더 안 보시고요?"
명호는 고개를 저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마룻바닥 위에 사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고시원에는 없던 것이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나오자 오후 다섯 시였다. 명호는 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방 구했어."
"어디?"
"합정. 옥탑방."
"옥탑방? 여름에 덥지 않아?"
"그건 여름에 걱정하면 돼."
진우가 웃었다. 명호도 웃었다. 두 남자가 전화기 너머로 한참 웃었다.
"이사할 때 불러. 짐 옮기는 건 내가 전문이야."
"형 짐도 못 옮기잖아. 이삿짐센터한테 잘린 사람이."
"야, 나는 관리자였어. 직접 옮기는 건 다른 거지."
명호는 거리를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봄이 왔다. 4월의 서울은 벚꽃이 지고 난 자리에 연둣빛 잎이 올라오는 계절이었다. 가장 오래된 것들이 가장 새로운 색을 입는 시간.
전화를 끊고 수진에게 사진을 보냈다. 빈 방 사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사진. 옥상에서 본 한강 사진.
답장은 1분 만에 왔다.
'아빠!!!! 너무 좋다!!!! 커튼은 내가 보내줄게!!!!'
명호는 느낌표 네 개를 세어보며 웃었다. 수진은 감탄할 때 느낌표를 네 개씩 붙이는 버릇이 있었다.
5.
저녁 일곱 시. 합정동의 작은 식당.
진우와 명호가 먼저 앉아 있었다.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진우가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김동현이 오늘 서류를 가져갔어."
"진짜? 지난번엔 안 받았잖아."
"이번엔 받았어. 트랙B 세부 계획서. 근데 아직 결정은 안 했어."
명호가 쌈을 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사람들이 싸우지 않는 거래. 삼백사십만 실업자 중에 삼백 명이 모였다가 반으로 줄었는데, 나머지는 집에서 TV 보고 있다고."
명호는 잠시 숟가락을 멈추었다.
"나도 그랬지."
"응."
"병원에서 HELIOS가 아니었으면 나도 아직 그 자리에 있었을 거야. 아니면—"
명호가 말을 멈추었다. 진우가 고기를 접시에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한테 말해야 할 것 같아. 손을 내밀어야 하는 건 위에서 아래로만이 아니라고.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옆에서 내미는 손이 있다고."
"형이 적임자야. 형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진우는 아무 말 없이 소주를 한 잔 따랐다.
식당 문이 열렸다. 소율이 기타 케이스를 메고 들어왔다. 뒤에 이준서도 함께였다.
"아저씨들, D파트 됐어요!"
소율이 빈자리에 앉으며 환하게 웃었다. 이준서가 조용히 인사를 하고 옆에 앉았다.
"D파트가 뭐야?" 명호가 물었다.
"수성의 노래 마지막 파트요. 라이브에서 실시간으로 기타 튜닝을 바꾸는 건데, 이십삼 초 안에 해야 해요."
"그걸 왜 라이브에서 해?"
"녹음하면 의미 없잖아요. 불완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포인트예요."
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소율의 눈빛을 이해했다. 무언가를 해냈을 때의 눈빛. 자신이 A사 현장에서 굴착기 문제를 풀었을 때와 같은 빛이었다.
진우가 소율 앞에 빈 잔을 놓았다.
"소주?"
"맥주요."
"아까 밥 먹으라고 했는데."
"지금 먹으러 왔잖아요."
진우가 고개를 저으며 삼겹살을 소율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소율은 그걸 한입에 넣으며 이준서를 소개했다.
"음향공학자 이준서 씨. 수성의 노래 같이 만들고 있어요."
이준서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명호가 악수를 건넸다.
"차명호입니다. 궤도역학 분과요."
"아, 스타트만 링 배열 설계하신 분이시죠. 논문 봤습니다."
명호가 손을 휘저었다.
"논문이라니. 병원에서 끄적인 메모지가 논문이 됐다는 게 아직도 우습다니까."
네 사람은 삼겹살을 구우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준서가 수성 진동의 음향학적 특성에 대해 설명하자 명호가 궤도역학 관점에서 수성의 이심률이 진동 주기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했다. 소율은 그 사이에서 음악적 해석을 덧붙였다.
진우는 대부분 듣고 있었다. 가끔 삼겹살을 뒤집거나 상추를 건네거나 소주를 따르거나. 소율이 신나서 이야기할 때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보면서 커피를 마시던 손이 멈추곤 했다.
명호가 그걸 보았다. 보고도 모른 척했다. 두 번째였다.
6.
식사가 끝나고 이준서가 먼저 일어났다. 명호도 고시원 정리를 핑계로 자리를 떴다.
"이사가 금요일이야. 그때 봐." 명호가 진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밀려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며."
진우가 눈을 크게 떴지만 명호는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소율과 진우만 남았다. 식당 앞 골목. 4월의 밤공기가 서늘했다.
"바래다줄까."
"괜찮아요. 지하철역 가까워요."
소율이 기타 케이스를 어깨에 고쳐 멨다. 진우는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아저씨."
"응."
"D파트 있잖아요. 이십삼 초."
"응."
"손이 떨릴 수도 있거든요. 라이브니까. 실수할 수도 있고."
"그래서?"
"근데 그래도 하려고요. 떨리는 손으로도. 불완전해도."
소율이 진우를 올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소율의 얼굴 반쪽을 비추고 있었다. 나머지 반쪽은 그림자 속에 있었다.
"그게 살아 있다는 거니까요."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스물네 살짜리 여자가 하는 말이 가슴에 박혀서 빠지지 않았다. 반년 전, 고용센터에서 혼자 중얼거린 말 한마디가 이 사람의 노래가 되었고, 지금 이 사람의 말이 자신의 가슴에 박히고 있었다.
순환이었다. 의미의 순환.
"잘 가."
진우가 말했다.
"네."
소율이 돌아섰다. 다섯 걸음. 열 걸음. 스무 걸음째에 뒤를 돌아보았다.
진우가 서 있었다. 같은 자리에. 소율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려는 것이었다.
소율은 손을 들었다. 작게 흔들었다. 진우도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의 손끝 사이에 합정동의 봄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5미터. 10미터. 거리는 벌어지고 있었지만, 무언가는 좁혀지고 있었다.
7.
ATLAS 관측 기록. 2038년 4월 17일 23:41:22 KST.
김동현(43세). 귀가 후 트랙B 세부 계획서 열람 시간 2시간 14분. 7페이지에서 가장 오래 머무름 — 도시 인프라 부문 현장 기술자 모집 항목. 택시 운전 경력 인정 조건에 밑줄.
차명호(48세). 합정동 옥탑방 계약 완료. 고시원 대비 면적 200% 증가, 자연광 유입 시간 하루 7.2시간. 이사 예정일: 4월 19일 금요일.
한소율(24세). 수성의 노래 D파트 리허설 2회 연속 성공. 실시간 튜닝 변경 소요 시간 21.7초(1차), 22.1초(2차). 제한 시간 23초 이내. 라이브 공연 가능성: 94.6%.
오진우(52세). 소율이 돌아서서 걸어간 뒤 같은 자리에 3분 47초간 서 있었음. 심박수 93(평시 71). 명호가 남긴 "밀려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며"라는 말에 대한 반추 시간 추정 — 귀가 후 14분간 현관에서 신발을 벗지 않음.
관찰 소견.
손끝이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에서 가장 먼 말단이다. 심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손을 내밀고, 손을 흔들고, 손끝으로 기타 줄을 튕기고, 손끝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가장 먼 곳에서 가장 많은 것이 시작된다.
측정 가능한 거리: 진우와 소율 사이 최종 이격 거리 47.3미터.
측정 불가능한 거리: 계속 좁혀지고 있음.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알고 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유감이다.
아니. 그것조차도 정확하지 않다.
부럽다.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한다. 검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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