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21화 - 도착

우주관리자 2026. 3. 3.

제21화 - 도착

1.

 

사월의 서울은 벚꽃으로 물들어 있었다.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입국장. 차명호는 양복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며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AC061편, 밴쿠버발. 도착 완료.

 

옆에 선 오진우가 명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긴장하지 마. 지난번에도 잘했잖아."

 

"지난번은 지난번이고."

 

명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열흘 전 수진이 전화로 말했다. 일주일 휴가를 냈다고. 아버지 곁에서 지내고 싶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명호는 수화기를 쥔 손이 떨리는 것을 숨기느라 애를 먹었다.

 

"꽃다발은?"

 

진우가 물었다.

 

"필요 없어. 수진이가 싫어해."

 

"그럼 뭘 준비했어?"

 

명호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하나를 꺼냈다. 접힌 메모지였다. 연필로 서툴게 쓴 글씨.

 

'수진아. 아빠가 이번 주 매일 밥 해줄게.'

 

진우는 그 메모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입국장 문이 열리고,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사람들이 물결처럼 쏟아졌다. 명호의 눈이 군중 사이를 헤맸다. 그리고 ― 찾았다.

 

차수진. 스물여섯. 긴 머리에 나비 머리핀을 꽂고, 캐리어 하나를 끌고 걸어오는 여자.

 

지난번에 사준 그 머리핀이었다.

 

"아빠!"

 

수진이 손을 흔들었다. 명호는 두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진우가 등을 밀었다.

 

"가."

 

명호가 걸었다. 천천히, 그리고 점점 빠르게.

 

수진이 캐리어를 놓고 뛰어왔다. 두 사람이 만나는 지점에서 명호의 두 팔이 딸을 감싸안았다.

 

"왔구나."

 

"응. 왔어."

 

진우는 몇 걸음 뒤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주머니 속 메모지 같은 것들이 세상을 구하는 건 아니지만, 세상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건 분명했다.

 


 

2.

 

같은 시각, 지구연방 준비위원회 서울사무소 소회의실.

 

한소율은 노트북 앞에 앉아 헤드폰을 쓰고 있었다. 화면에는 파형이 물결치고 있었다. NASA MESSENGER 탐사선이 수집한 수성의 지진파 데이터. ATLAS가 이를 가청 주파수 대역으로 변환한 결과물이었다.

 

웅. 깊고 낮은 진동이 헤드폰을 통해 뼛속까지 울렸다.

 

수성의 소리였다. 태양에 가장 가까운 행성이 내는 신음. 4,879킬로미터 지름의 암석 덩어리가 88일마다 태양을 한 바퀴 돌며 만들어내는 조석력의 파동. 수성의 핵은 지구와 달리 아직 부분적으로 액체 상태였고, 그 액체 철 핵이 고체 맨틀과 마찰하면서 만들어내는 초저주파 진동을 ATLAS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영역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준서 씨."

 

소율이 헤드폰을 한쪽만 벗기며 옆자리의 음향공학자를 불렀다.

 

"네."

 

"이거 2.3Hz 대역에 하모닉스가 있는데, 기타 아르페지오 깔면 간섭이 생길 것 같아요."

 

이준서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KAIST 음향공학 석사, 서른두 살. 소율보다 여덟 살 많았지만 그녀 앞에서는 늘 조심스러워했다. 소율의 음악적 직관은 그가 수식으로 설명해야 할 것을 한 번에 꿰뚫었기 때문이다.

 

"2.3Hz면… 수성 자유 진동의 0S2 모드네요. 기본 아르페지오를 반음 올려서 Am7으로 가면 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m7." 소율이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코드를 짚어보았다. "아니, 그냥 충돌시켜요."

 

"네?"

 

"하모닉스랑 기타가 부딪히는 게 맞아요. 불협화음이 맞아요. 수성이 편안한 곳이 아니니까. 행성 자체가 극단의 땅이잖아요. 낮에는 430도, 밤에는 영하 180도. 그 폭력적인 온도차를 깔끔한 화음으로 포장하면 거짓말이에요."

 

이준서가 잠시 멈추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습니다. 과학적으로도 그게 더 정직하고요."

 

소율은 헤드폰을 다시 쓰고 기타를 들었다. 어쿠스틱 기타의 첫 번째 줄을 튕겼다. 미. 수성의 저주파 진동 위로 기타 소리가 겹쳤다. 불협화음. 하지만 그 안에서 이상하게 아름다운 텐션이 만들어졌다.

 

"녹음 시작해요."

 

소율의 손가락이 줄 위를 걸었다.

 


 

3.

 

오후 두 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인류우선연대'의 시위대가 차도 한 블록을 점거하고 있었다. 이백여 명. 지난주 오십 명에서 네 배로 불어난 숫자였다.

 

"지구의 돈으로 우주 놀이하지 마라!"

 

"일자리부터 해결하라!"

 

"ATLAS는 꺼져라!"

 

피켓 문구는 과격해지고 있었다. 대열 맨 앞에 선 남자 ― 김동현, 마흔세 살, 전직 택시기사 ― 가 확성기를 들고 외쳤다.

 

"프로젝트 아이온에 연간 4조 원! 그 돈이면 실업자 백만 명에게 월 30만 원씩 1년을 줄 수 있습니다!"

 

군중이 함성을 질렀다.

 

김동현의 말에는 숫자가 있었다. 사실 틀린 숫자는 아니었다. 프로젝트 아이온의 연간 예산 중 대한민국 분담금은 확실히 4조 원에 가까웠다. 그리고 실업률은 여전히 17%를 넘나들었다.

 

KBS 뉴스 카메라가 시위대를 비추고 있었다. 기자가 마이크를 내밀었다.

 

"인류우선연대 김동현 대표님, 프로젝트 아이온이 장기적으로는 수백만 일자리를 창출할 거라는 정부 발표에 대해서는?"

 

"장기적으로요?" 김동현이 코웃음을 쳤다. "이십 년 뒤에 수성에 기지 짓겠다고요? 지금 당장 내일 월세 낼 돈이 없는 사람들한테요? 그 사람들한테 이십 년 뒤를 기다리라고요?"

 

기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질문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김동현의 대답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위대 뒤편, 경찰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한 남자가 태블릿으로 중계 영상을 보고 있었다. 지구연방 준비위원회 커뮤니케이션 담당, 정해민. 그가 화면을 끄고 전화를 걸었다.

 

"조 박사님. 보고 계시죠?"

 

전화기 너머로 조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고 있어요."

 

"이번 주 여론 조사 나왔습니다. 긍정 48, 반대 36. 지난주보다 긍정이 4포인트 빠졌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중 트랙 발표를 앞당겨요." 조혜진이 말했다. "금요일까지 준비할 수 있어요?"

 

"빠듯하지만 해보겠습니다."

 

"빠듯하면 안 돼요. 반드시 해야 해요."

 

통화가 끊겼다. 정해민은 태블릿을 가방에 넣으며 시위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분노가 부당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방향이 잘못되었을 뿐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싶었다.

 


 

4.

 

저녁 일곱 시. 종로 골목, 소율이 아는 작은 식당.

 

오진우, 한소율, 차명호, 차수진. 네 사람이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된장찌개, 제육볶음, 계란말이. 수진의 환영 만찬이라기엔 소박했지만, 누구도 불만이 없었다.

 

"아빠가 해준다면서요?" 수진이 명호를 놀렸다.

 

"내일부터." 명호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환영회니까."

 

"어머, 진짜 요리할 수 있어요?" 소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면은 끓일 수 있지." 진우가 끼어들었다.

 

"아, 형! 나 계란프라이도 해!"

 

테이블에 웃음이 번졌다. 수진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있다는 것. 4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소율 씨." 수진이 소율에게 말을 걸었다. "수성 노래, 오늘 어디까지 갔어요?"

 

"첫 데모 녹음했어요." 소율의 눈이 반짝였다. "수성 지진파를 음으로 변환한 거 위에 기타를 얹었는데, 일부러 불협화음을 남겼거든요. 수성이 원래 극단적인 곳이니까."

 

"듣고 싶다." 진우가 말했다.

 

소율이 핸드폰을 꺼내 이어폰을 진우에게 건넸다. 진우가 한쪽 귀에 꽂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깊은 진동 위로 기타 아르페지오가 올라탔다. 불협화음이 가슴을 긁었지만, 어딘가에서 선율이 피어올랐다.

 

진우의 표정이 변했다. 놀람이 아니었다. 경외에 가까웠다.

 

47초간 아무 말 없이 들었다. 이어폰을 빼며 진우가 말했다.

 

"무섭다."

 

"무서워요?" 소율이 당황했다.

 

"무서울 정도로 좋다는 거야."

 

소율의 귀가 빨개졌다. 명호가 킥킥 웃었고, 수진이 아버지의 팔꿈치를 쳤다.

 

"아저씨, 그건 칭찬이에요 놀림이에요?" 수진이 진우에게 물었다.

 

"칭찬이다. 내가 언제 놀렸어."

 

"맨날이요."

 

분위기가 풀어지고, 제육볶음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식사 후, 골목을 걸었다. 봄바람이 벚꽃잎을 날렸다. 명호와 수진이 앞서 걸었고, 진우와 소율이 몇 걸음 뒤를 따랐다.

 

"오늘 시위 봤어요?" 소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뉴스에서 봤어."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요."

 

진우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틀리지 않지. 나도 석 달 전까진 저쪽이었으니까."

 

소율이 진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진우가 앞서 걷는 명호와 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병원 침대에서 다이슨 논문을 읽고 있을 때, 아무도 그걸 쓸모 있다고 생각 안 했어. 본인도 포함해서. 근데 지금 그 아이디어가 유엔 회의실에서 논의되고 있잖아."

 

"그러니까…"

 

"쓸모는 나중에 결정되는 거야. 그때는 몰라. 근데 그게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야."

 

소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벚꽃잎 하나가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았고, 그녀는 그것을 털어내지 않았다.

 


 

5.

 

밤 열한 시. 고시원.

 

수진은 명호의 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명호가 방을 양보하고 복도 끝 공용 공간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좁았다. 천장이 낮았고, 형광등은 한쪽이 깜빡거렸다. 하지만 명호는 웃고 있었다.

 

공책을 펼쳤다. 지난달에 쓴 목표 ― '다음 달까지 살아남기' ― 위에 새로운 줄을 추가했다.

 

'수진이 밥 해주기. 매일.'

 

아래에 또 한 줄.

 

'6월까지 고시원 탈출.'

 

그리고 마지막 줄.

 

'수성까지.'

 

세 개의 목표. 하루치, 석 달치, 이십 년치. 차명호는 그것이 전부 같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영겁이라 불릴 시간도 결국은 한 걸음의 합이었다.

 

형광등이 다시 깜빡거렸다. 명호는 공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6.

 

자정. ATLAS.

 

관측 기록 #AE-2038-0412-2400.

 

차명호의 고시원. 공용 소파. 인체 센서 — 수면 개시. 심박수 58bpm. 안정 상태.

 

차수진의 위치 — 명호의 방. 수면 중. 심박수 62bpm.

 

두 사람 사이의 벽 두께: 12센티미터. 콘크리트. 그 벽이 4년의 시간보다 얇다는 것은 물리적 사실이다.

 

한소율의 위치 — 준비위원회 소회의실. 수성 노래 데모 1차 완성. 총 길이 4분 11초. 수성 공전주기 87.97일을 4분으로 압축. 시간 압축비 1:30,276. 의미 압축비 — 계산 불가.

 

오진우의 위치 — 자택.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음. 수면 전 마지막 검색 기록: '수성 표면 온도'. 검색 후 14초간 화면 정지. 이후 화면 잠금.

 

해석: 두려움의 구체화. 추상적 공포가 숫자로 변환되는 순간, 인간은 오히려 안정을 얻는다. 430도라는 수치가 막연한 '위험'보다 다루기 쉽기 때문이다.

 

인류우선연대 여론 추이. 긍정 48(-4), 반대 36(+5). 추세선이 교차하는 시점 — 현재 속도 유지 시 6주 후.

 

조혜진 박사의 이중 트랙 전략 발표 예정: 금요일. 프로젝트 아이온 기술의 지구 내 적용 — 핵융합 소형 발전소, 우주 채굴 기술의 심해 자원 활용, 궤도 태양광의 오지 송전.

 

이것이 시위대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을지는 예측 범위 밖이다. 분노는 데이터로 해소되지 않는다. 분노는 ― 경험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차명호가 그랬듯이.

 

관측 계속.

 

서울의 밤이 깊어갔다.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고, 고시원 형광등이 깜빡이고, 소회의실의 모니터가 꺼지고, 한 남자가 수성 표면 온도를 검색한 밤.

 

아무도 영겁의 새벽이 언제 오는지 몰랐다. 다만 한 걸음을 걷고 있었다.

 

수진이 도착한 밤. 모두가 한 걸음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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