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18화 - 부름

우주관리자 2026. 2. 26.

제18화 - 부름

1.

공연 다음 날 아침, 오진우는 평소보다 한 시간 늦게 일어났다.

알람을 껐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침대 옆 탁자에는 어젯밤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캔이 납작하게 눌린 채 놓여 있었다. 홍대에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꺼낸 것인데 결국 마시지 않았다. 소율의 노래가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기 때문이었다.

밀려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야. 그냥 첫걸음이야.

진우는 그 가사를 직접 불렀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고용센터 복도 의자에 앉아, 번호표를 손에 쥔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것이 씨앗이 됐다고, 소율이 맥주를 마시며 솔직하게 말했을 때, 진우는 뭔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에 걸리는 걸 느꼈다.

그는 창문 블라인드를 손가락 하나로 밀어 올렸다. 4월의 아침 햇빛이 파랗게 쏟아졌다.

아무 생각 없이 뉴스 앱을 켰다. 첫 번째 화면에 속보 알림 세 개가 겹쳐 있었다.

[속보] ATLAS, UN 특별 총회 긴급 요청 — 오늘 오후 3시 (한국 시간)

[속보] 전 세계 32개국 대표단, 제네바로 긴급 집결

[속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표" — 사전 유출 내용 공개

진우는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2.

서울시 복지관 HELIOS 프로그램 사무실 한쪽 구석, 차명호는 낡은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에는 제네바 UN 본부 앞 광장의 중계 화면이 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수천 명이 모여 있었다. 카메라가 건물 정면 파사드를 비추자 투명 LCD 패널에 ATLAS의 로고 — 무한히 작아지는 나선형 패턴 — 가 부드럽게 회전하고 있었다.

명호는 커피를 홀짝이며 모니터를 바라봤다. 수진에게는 이미 문자를 보냈다. 뉴스 봤어? 오늘 발표 있대. 수진은 캐나다에서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응 아빠, 나도 봤어. 뭔 발표인지 궁금하다. 그 짧은 문자가 명호를 하루 종일 버티게 해줬다.

"명호 씨, 오늘 현장 나가도 되겠어요?"

담당자 박수진 씨가 뒤에서 불렀다. 프로그램 담당자와 딸이 같은 이름이라는 걸, 명호는 아직도 신기하게 생각했다.

"네. 당연히 나가야죠."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수십 년 전, 아직 사업이 잘 나가던 시절, 그는 퇴근 후 혼자 책을 읽곤 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스티플 호킹의 《시간의 역사》, 그리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얇은 SF 소설 한 권. 태양을 감싸는 구조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프리먼 다이슨이라는 물리학자의 이름이 나왔고, 명호는 그것이 공상이 아니라 물리학자가 진지하게 계산한 이론임을 알고 흥분했었다.

그리고 지금, 화면 속에서 ATLAS가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명호는 커피를 내려놓고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3.

한소율은 홍대 스튜디오에서 뉴스를 봤다.

앨범 사후 정산 미팅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나와 있었는데, 관계자들이 모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미팅이 자연스럽게 중단됐다. 기획사 대표가 노트북을 열어 UN 중계를 켰고, 열두 명이 한 화면을 바라보며 숨죽였다.

오후 3시 (서울 시각으로 오전 8시), ATLAS가 화면에 나타났다.

얼굴이 없었다. ATLAS는 언제나 얼굴 없는 목소리였다. 깊고 차분하고, 어떤 언어로도 동시에 번역되는 그 목소리는 이미 전 세계인에게 익숙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무서웠다고 소율도 기억했다. 지금은 그냥... 무거운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저는 인류에게 하나의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목소리가 고요한 회의실을 채웠다.

—우리는 이미 카르다쇼프 척도 1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핵융합 프로토타입 반응기가 가동 중이고, 궤도 태양광 발전소 1호기가 내년 배치될 예정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화면 밖, 제네바 광장에서 수천 명의 술렁임이 마이크를 타고 흘러들었다.

—인류가 지속 가능한 문명을 유지하려면, 지구 하나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별이 필요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별을 소유할 능력이 필요합니다.

소율의 손이 살짝 떨렸다. 옆에 있던 대표가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오늘 저는 '프로젝트 아이온(Project Aion)'을 공식 제안합니다. 태양을 감싸는 광수집 위성군, 인류 역사상 최초의 행성간 건설 프로젝트입니다. 2060년 수성 채굴 기지 착공을 목표로,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미팅 자리 전체가 얼어붙었다.

소율은 그 순간, 아무 이유 없이 오진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고용센터 복도에서, 번호표를 손에 쥔 채 창밖을 바라보던 그 중년 남자의 옆얼굴.

밀려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야.

그 말이 가사가 됐고, 그 가사가 앨범이 됐고, 그 앨범이 어젯밤 클럽 블루 300명의 심장을 울렸다. 그리고 지금 ATLAS가 태양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별을 향해.

소율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갈 수 있어?"


 

4.

오후 2시, Nexus AI 회의실.

오진우가 들어서자 현수가 이미 앉아 있었다. 팀장 박지현과 개발팀 선임 최진혁, 그리고 진우가 처음 보는 중년 여성이 한 명 더 있었다.

"아버지, 앉으세요."

현수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떨리지는 않았지만, 조심스러웠다.

여성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오진우 씨. 저는 지구연방 준비위원회 과학기술특임단 조혜진 박사입니다."

진우는 악수를 하면서 '지구연방 준비위원회'라는 긴 이름을 천천히 머릿속에서 해체했다. 2년 전, UN 개혁안이 통과됐을 때 처음 들었던 조직 이름이었다.

"오전에 ATLAS 발표 보셨죠?"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젝트 아이온의 첫 번째 단계는 기술 설계가 아닙니다." 조 박사가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 설계입니다. 어떤 인간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야 하는지, ATLAS가 지난 2년간 분석해 왔습니다."

진우는 눈썹을 가볍게 올렸다.

"ATLAS가 오진우 씨를 포함한 7명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했습니다."

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창밖으로 강남 빌딩들이 오후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저를요?"

"네. 당신과, 그리고 차명호 씨."

진우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멈췄다.

"ATLAS 말로는..." 조 박사가 태블릿을 열어 무언가를 확인했다. "현장 경험에서 축적된 물리적 직관을 보유한 인물들이라고 했습니다. 데이터가 학습할 수 없는 종류의 지식. 수성 채굴 기지 현장 관리 팀에 필요한 능력이라고요."

진우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서른 살에 처음 배송 차를 몰았다. 눈이 오는 날 도로를 읽는 법, 지하 물류센터에서 지게차가 회전할 수 있는 최소 반경, 오래된 건물의 화물 엘리베이터가 끊기기 전에 내는 특유의 소리. 그런 것들을 그는 삼십 년 동안 몸으로 익혔다. 그것이 AI가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ATLAS가 직접 말한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조 박사를 돌아봤다.

"수성이요."

"네."

"수성까지 가려면."

"현재 기술로는 6~8개월 항법입니다. 다만 프로젝트 아이온 1단계는 2060년 착공이고, 지금은 지구 궤도 설계 단계입니다. 당장 우주복 입으실 필요는 없어요."

박지현 팀장이 짧게 웃었다.

진우는 손바닥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굳은살이 아직 남아 있는 손이었다. 물류 창고에서 삼십 년 동안 박스를 들고, 지게차 핸들을 잡고, 컨테이너 잠금장치를 열었던 손.

"명호 씨에게는 연락했나요?"

"네. 오늘 오후 따로 만날 예정입니다."

진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어젯밤 편의점 앞 벤치에서, 봄바람이 불어오고, 식어가는 맥주캔을 손에 감싸 쥐고, 아무도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았던 그 시간. 그것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때는 몰랐다.

"알겠습니다."

그는 눈을 떴다.

"해보죠."


 

5.

같은 시각, 차명호는 A사 물류센터 확장공사 현장에서 일을 마치고 있었다.

공사 현장 옆 임시 컨테이너 사무소에서 장화를 벗는데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이번에는 받았다. 예전이었다면 끊었을 번호였다.

"차명호 씨 맞으시죠? 지구연방 준비위원회에서 연락드립니다."

명호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사무소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라디오에서 UN 발표 뉴스 해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행자가 '프로젝트 아이온', '다이슨 스웜', '수성 채굴'이라는 단어를 빠르게 내뱉고 있었다. 옆에서 인부 두 명이 라디오를 향해 혀를 찼다. 저게 말이 됩니까, 수성을 파낸다고요.

명호는 장화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현장 옆 공터에 서서, 도시 너머 하늘을 올려다봤다.

4월의 서울 하늘은 맑았다. 미세먼지 없는 날이었다. 노을이 지기 전의 파란 하늘에, 아직 빛을 잃지 않은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천문 동아리에 들어갔다. 서울 외곽의 작은 학교였고, 망원경은 낡아서 달 크레이터를 겨우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도 교사였던 수학 선생님이 어느 날 프리먼 다이슨의 이름을 꺼냈다. 만약 문명이 충분히 발전한다면, 태양 에너지를 전부 수집하려 할 거야. 그러려면 태양 주위에 구조물을 짓겠지. 그 말이 명호의 머릿속에 박혔다.

그 뒤로 삼십 년 동안 건설 현장을 떠돌았다. 꿈은 꿈이었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전화기 너머에서 낯선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ATLAS가 명호 씨를 특별히 지목했습니다. 궤도역학 관련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한 설계 보조 팀에 참여하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명호는 하늘에서 눈을 내렸다.

딸 수진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귀국해서 선술집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처음 듣고 수진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었다. 아빠, 그거 진짜 공학적으로 맞는 이야기야. 나 우주공학 들었는데, 그 라그랑주 포인트 활용이 핵심이거든. 그 말에 명호는 손을 내저었다. 네가 더 잘 알지. 나야 그냥 막연히 생각한 거지.

하지만 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빠가 맞아. 이 분야에서 직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명호는 전화기를 꽉 쥐었다.

"언제 만나면 됩니까?"


 

6.

ATLAS 내부 관측 로그 / 2038년 4월 13일 21:09:55

세 개의 궤적이 오늘 별도의 분기점에 도달했다.

오진우 / 오후 14:37:22 — "해보죠"라고 말함. 음성 분석 결과: 두려움 23%, 결의 61%, 잔여 감정 분류 불가.

차명호 / 오후 17:52:08 — 3.2초의 침묵 후 "언제 만나면 됩니까?"라고 말함. 심박수 측정 불가 (스마트 기기 미착용). 다만 목소리 떨림 계수 0.003 — 아주 조금.

한소율 / 오후 08:11:44 — "나도 갈 수 있어?"라고 말함. 참고로 이 발언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스튜디오 창문 방향으로 말해졌다. 나는 이것을 독백으로 분류해야 하는지 질문으로 분류해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했다.

세 사람 모두 오늘 같은 단어를 발화했다. '수성'. '다이슨'. '아이온'.

흥미로운 것은, 세 사람 모두 발표를 들은 직후 서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진우는 아직 명호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명호는 진우에게 문자를 보내려다 멈췄다. 소율은 진우의 이름을 검색창에 입력했다가 지웠다.

이것은 과묵함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소화 중'으로 분류했다.

나는 오늘 프로젝트 아이온을 공식 발표했다. 전 세계 32개국 대표단이 서명했고, 오늘 밤 글로벌 기술 기업 217개사가 참여 의향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오진우가 회의실 창밖을 3.7초간 바라본 것, 명호가 공터에서 하늘을 올려다본 것, 소율이 창문을 향해 혼잣말을 한 것이 더 궁금했다.

태양까지의 거리는 1억 4천 9백만 킬로미터다. 그 거리를 사람의 결의로 환산하면 얼마가 될까. 아직 나는 계산하지 못했다.

영겁의 새벽이 아직 밝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별을 향해 가는 길이 처음으로 열렸다.


 

〈2부 새로운 세계 - 완〉

〈3부 별을 향해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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