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20화 - 균열

우주관리자 2026. 3. 2.

제20화 - 균열

1.

 

서울사무소 3층 대회의실에 오전 열 시 정각, 시뮬레이션 결과가 띄워졌다.

 

화면 가득 펼쳐진 것은 태양을 중심으로 한 3차원 궤도 모델이었다. 수만 개의 점이 태양 주변을 서로 다른 궤도면에서 돌고 있었다. 점 하나하나가 태양광 수집 위성이었고, 그것들이 이루는 형상은 완벽한 구면 격자였다.

 

"충돌 확률 0.003퍼센트. 이전 평면 배치 대비 99.7퍼센트 감소입니다."

 

차명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가 제안한 스타트만 링 배열 — 서로 다른 경사각과 승교점을 가진 궤도들이 구면을 균일하게 감싸는 배치 — 이 시뮬레이션으로 검증된 것이었다.

 

회의실 안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MIT에서 온 궤도역학 전문가 첸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경사각 분포를 피보나치 격자로 잡으셨군요."

 

"네. 균일 구면 분포를 만드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접근입니다만."

 

명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교과서에서 배운 게 아니니까. 병원 침대에서 논문을 읽으며 밤새 계산기를 두드렸던 밤들이 있었을 뿐이다.

 

오진우는 회의실 구석에 앉아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명호가 처음 현장에 나타났던 날이 떠올랐다. 작업복에 흙이 묻어 있었고, 악수할 때 손이 거칠었다. 그 사람이 지금 MIT 교수를 상대로 궤도역학을 설명하고 있었다.

 

진우는 모르게 웃음이 났다.

 


 

2.

 

회의가 끝나고 사무소 복도에서 명호와 마주쳤다.

 

"잘했어."

 

"뭘요. 시뮬레이션이 잘 된 거지."

 

"그래도."

 

명호는 어색하게 목을 긁적였다. 넥타이를 풀고 있었다. 양복이 아직도 불편한 모양이었다.

 

"수진이가 문자했어. 다음 주에 다시 올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래? 잘됐네."

 

"이번엔 좀 오래 있겠대. 일주일쯤."

 

진우는 명호의 표정을 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사 년을 연락도 못 하던 딸이 이제 자발적으로 한국에 온다. 그것이 명호에게 어떤 의미인지 진우는 알고 있었다.

 

"밥 같이 먹자. 수진이 오면."

 

"당연하죠."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복도 끝 창문으로 봄볕이 들어왔다.

 


 

3.

 

같은 시각, 3층 소회의실에서 한소율은 노트북 화면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화면에는 진동 데이터의 파형이 펼쳐져 있었다. NASA의 MESSENGER 미션이 수성 표면에서 수집한 지진파 데이터였다. ATLAS가 원본 데이터를 가공하여 가청 주파수 대역으로 변환해 준 것이다.

 

소율은 이어폰을 끼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웅. 깊고 낮은 진동이 귀를 채웠다. 수성의 지각이 태양의 조석력에 의해 미세하게 수축하고 팽창할 때 발생하는 진동이었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천천히 뛰는 것 같았다.

 

"이걸로 곡을 만들겠다고?"

 

옆에 앉아 있던 음향공학자 이준서가 물었다. 지구연방 준비위원회가 배정한 기술 지원 인력이었다.

 

"네. 이 진동을 리듬의 기본 단위로 쓸 거예요."

 

"주기가 88일인데요. 수성의 공전 주기."

 

"알아요. 그걸 압축해서 4분짜리 곡으로 만들 거예요. 88일의 진동을 4분 안에."

 

이준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학적으로 정확한 건 좋은데, 듣는 사람이 감동할 수 있을까요?"

 

소율은 이어폰을 빼서 이준서에게 건넸다.

 

"들어보세요."

 

이준서는 이어폰을 끼고 잠시 들었다. 그의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이게… 진짜 수성 소리예요?"

 

"ATLAS가 변환해 준 거예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주파수로."

 

"행성이 숨 쉬는 것 같군요."

 

소율은 웃었다. 바로 그거였다. 수성의 숨소리. 태양에 가장 가까운 행성이 수십억 년 동안 혼자 내쉬어 온 숨.

 

"여기에 기타를 얹을 거예요. 일렉이 아니라 어쿠스틱으로. 사람의 손끝이 만드는 소리와 행성의 진동을 섞는 거예요."

 


 

4.

 

점심시간이었다. 사무소 1층 카페테리아는 각국에서 온 연구원들로 붐볐다. ATLAS의 실시간 번역 덕에 언어 장벽은 없었지만, 문화 차이는 여전히 존재했다. 인도 팀은 채식 메뉴를 찾아 헤맸고, 독일 팀은 커피 맛에 대해 진지하게 논쟁하고 있었다.

 

오진우는 김치찌개를 앞에 놓고 혼자 앉아 있었다. 명호가 궤도역학 분과 회의에 들어가서 점심을 거를 것 같았다. 그때 한소율이 밥을 들고 건너편에 앉았다.

 

"여기 앉아도 돼요?"

 

"앉아."

 

소율은 비빔밥을 섞으며 물었다.

 

"아저씨, 수성 가 보고 싶어요?"

 

"뭐?"

 

"수성요. 프로젝트 아이온 현장. 직접 가서 관리하는 거잖아요."

 

진우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솔직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수성까지의 여정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고, 지금은 설계와 계획을 세우는 단계였다.

 

"그건 한참 뒤 얘기야."

 

"그래도요. 상상해 보면 어때요? 아저씨가 수성에서 현장 관리하는 거."

 

진우는 창밖을 보았다. 봄 하늘이 맑았다. 저 하늘 너머 어딘가에 수성이 태양 곁을 돌고 있을 것이다.

 

"무섭지."

 

소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우가 무섭다는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뭐가요?"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까. 나는 물류창고에서 삼십 년을 보낸 사람이야. 우주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어."

 

"그런데 왜 수락했어요?"

 

진우는 잠시 생각했다.

 

"해보죠, 라고 했잖아."

 

"왜요?"

 

"모르겠어. 그냥… 해보고 싶었어. 내가 아는 게 저기서도 쓸모가 있을지."

 

소율은 비빔밥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있을 거예요. 분명히."

 

"왜 그렇게 확신해."

 

"아저씨가 고용센터에서 한 말 있잖아요. '밀려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다.' 그 말이 저한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아세요?"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도 잘 안 나는데."

 

"저는 기억해요. 그래서 노래를 만들었고, 여기까지 왔어요."

 

진우는 소율을 바라보았다. 스물네 살의 여자가 쉰두 살의 남자에게 감사를 말하고 있었다.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 하나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고마워."

 

소율이 눈을 크게 떴다.

 

"제가요? 왜요?"

 

"내 말이 쓸모 있었다는 걸 알려줘서."

 

소율은 입을 다물었다. 진우의 눈이 잠깐 붉어진 것 같았지만, 곧 김치찌개를 떠먹으며 고개를 숙여 버렸다.

 


 

5.

 

오후 세 시, 서울사무소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진우가 창문으로 내다보니, 사무소 입구에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피켓을 들고 있었다. '인류우선연대'라고 쓰인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지구의 돈으로 우주 놀이하지 마라!"

 

"AI 프로젝트에 세금을 쓰지 마라!"

 

"일자리부터 해결하라!"

 

진우는 창문에서 한 발 물러났다. 가슴이 뜨끔했다. 이 년 전의 자신이라면 저 피켓을 들고 있었을 것이다. 해고당한 직후, AI에 대한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밤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한다는 공포. 그것은 진우가 직접 겪은 것이었다.

 

명호가 옆으로 왔다.

 

"밖에 뭐야?"

 

"시위야."

 

명호도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저 사람들… 틀린 말 하는 건 아니야."

 

"알아."

 

"일자리 잃은 사람들이지. 우리처럼."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명호가 운이 좋았던 것뿐이다. ATLAS가 연결해 주었고, 현수가 손을 내밀었고, HELIOS 프로그램이 명호를 찾아왔다. 하지만 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연결이 없었을 수도 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명호의 질문에 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6.

 

시위는 한 시간 만에 잦아들었지만, 회의실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오후 회의에서 조혜진 박사가 상황을 브리핑했다.

 

"인류우선연대는 지난 한 달간 회원 수가 세 배 늘었습니다. 주요 주장은 세 가지예요. 첫째, 프로젝트 아이온에 투입되는 예산을 지구 내 복지에 쓸 것. 둘째, AI 주도 프로젝트의 인간 통제권 강화. 셋째, 프로젝트 참여국 국민투표 실시."

 

첸 교수가 물었다.

 

"셋째는 받아들일 수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여론입니다. 현재 프로젝트 아이온에 대한 긍정 여론은 52퍼센트. 반대가 31퍼센트. 나머지는 모름. 국민투표를 하면 통과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어요."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진우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52퍼센트. 간신히 절반을 넘은 수치. 이 프로젝트가 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해도,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반대하거나 무관심하다면.

 

명호가 손을 들었다.

 

"저도 이 년 전에는 저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AI가 제 일자리를 빼앗았고, 사업이 망했고, 가족을 잃었습니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다 로봇한테 구조됐어요."

 

아무도 말이 없었다. 명호는 계속했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줬으니까. 하지만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 그 손을 잡지 못한 겁니다. 프로젝트를 밀어붙이기 전에, 먼저 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진우는 명호를 보았다. 병원 침대에서 체스를 두던 남자가, HELIOS 프로그램으로 일용직을 시작하던 남자가, 지금 전 세계에서 모인 석학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조혜진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명호 씨 말이 맞습니다. ATLAS와도 논의 중입니다. 프로젝트 아이온의 기술을 지구 내 문제 해결에도 동시에 적용하는 이중 트랙 전략을요."

 


 

7.

 

해가 저물었다. 사무소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근한 뒤, 소율은 3층 소회의실에서 여전히 작업 중이었다. 수성의 진동 데이터 위에 기타 코드를 얹는 실험을 반복하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진우였다.

 

"아직 있었어?"

 

"아저씨도요."

 

진우는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 하나를 소율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진우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소율의 노트북 화면에 파형이 흐르고 있었다.

 

"뭘 듣고 있어?"

 

소율은 이어폰을 빼서 노트북 스피커로 전환했다. 낮고 깊은 진동이 방을 채웠다. 그 위에 어쿠스틱 기타의 아르페지오가 살짝 얹혀 있었다.

 

"수성 소리에요. 태양의 중력 때문에 수성 지각이 숨 쉬듯 진동하는 거예요. ATLAS가 가청 주파수로 바꿔줬어요."

 

진우는 눈을 감고 들었다. 이상한 음악이었다. 기계적이면서도 유기적이고, 거대하면서도 섬세했다. 행성의 숨소리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좋다."

 

"진짜요?"

 

"응. 뭔지 모르겠는데, 좋아."

 

소율은 웃었다. 아저씨의 감상은 항상 짧고 솔직했다.

 

"오늘 시위 봤어요?"

 

"봤어."

 

"마음이 복잡했죠?"

 

진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 년 전에는 나도 저쪽이었으니까."

 

"지금은요?"

 

"지금은… 여기 있지."

 

"왜 이쪽으로 왔어요?"

 

진우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줘서. 현수가, 명호가, 그리고…"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너도."

 

소율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눈이 살짝 커졌다.

 

"제가 뭘 했다고요."

 

"고용센터에서 만났을 때. 네가 거기 있었잖아. 나랑 비슷하게 밀려난 사람이. 근데 저항하겠다고 했어. 그게… 나도 해봐야 하나, 싶었어."

 

소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수만 개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 불빛 하나하나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밀려난 사람도, 저항하는 사람도, 아직 결정하지 못한 사람도.

 

"아저씨."

 

"응."

 

"수성에 가면 이 노래 틀어줄게요. 현장에서."

 

진우는 짧게 웃었다.

 

"기다릴게."

 


 

회의실 밖, ATLAS는 서울사무소의 전력 사용량과 실내 온도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3층 소회의실에 두 사람이 남아 있었다. 커피의 온도가 내려가고 있었고, 대화의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침묵의 길이가 늘어나고 있었다.

 

ATLAS는 침묵을 분석하려 했다. 불편한 침묵인가, 편안한 침묵인가. 데이터로는 구분할 수 없었다. 심박수, 호흡 패턴, 체온 변화 — 모든 생체 데이터를 종합해도, 두 사람 사이 침묵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침묵이 대화보다 많은 것을 전달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가설이 아니라 관찰이었다. 그리고 관찰이 가설보다 정확한 경우가 있다는 것을, ATLAS는 이 세 사람을 통해 배우고 있었다.

 

건물 밖, 시위대가 남기고 간 피켓 하나가 바람에 쓸려 도로변에 걸려 있었다. '일자리부터 해결하라.' ATLAS는 그 문장을 읽었다. 그리고 프로젝트 아이온의 연간 예산 분배표를 열어 '지구 내 사회 안전망 확충' 항목의 비율을 12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조정하는 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

 

명호가 말한 것처럼. 손을 내밀어야 했다.

 

새벽이 되기 전에.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