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영겁의 새벽] 제15화 - 시뮬레이션

우주관리자 2026. 2. 23.

제15화 - 시뮬레이션

1.

 

금요일 오전. Nexus AI 본사 시뮬레이션 센터.

 

방 전체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천장과 벽면을 덮은 디스플레이 패널에 수성의 표면이 펼쳐져 있었다. 태양이 지평선 위로 거대하게 솟아 있었고, 그 아래 황갈색 크레이터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오진우는 손을 뻗어 허공을 터치했다. 홀로그래픽 인터페이스가 반응하며 채굴 드론 5,000대의 배치도가 떠올랐다.

 

"자, 시작하죠."

 

서하은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수성 표면 위에 초록색 점 5,000개가 나타났다. 각각이 하나의 채굴 드론이었다.

 

"1단계 시뮬레이션 시작합니다. 일출 시나리오."

 

수성에서 일출은 재앙에 가까웠다. 영하 180도에서 430도로, 온도가 600도 이상 급변하는 순간. 드론의 금속 프레임이 팽창하고, 관절부가 뻣뻣해지며, 태양광 패널 효율이 급변했다.

 

초록색 점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ATLAS가 설계한 최적 궤적을 따라, 그림자 지대에서 양지 쪽으로 이동하면서 채굴을 개시하는 패턴이었다.

 

37초 만에 빨간 점이 나타났다.

 

"충돌 경고. 섹터 G-7."

 

"벌써?"

 

진우가 화면을 확대했다. 두 대의 드론이 같은 크레이터 가장자리에서 만나고 있었다. AI가 계산한 궤적 상으로는 3.2미터 간격이 유지돼야 했지만, 실제로는 0.4미터까지 좁혀져 있었다.

 

"원인이 뭐야?"

 

서하은이 데이터를 분석했다.

 

"크레이터 가장자리의 레골리스 밀도가 예측치보다 높아요. 드론 바퀴가 예상보다 깊이 빠지면서 궤적이 틀어진 거예요."

 

"레골리스?"

 

명호가 물었다.

 

"달이나 수성 표면을 덮고 있는 미세한 먼지층이에요. 수십억 년 동안 운석 충돌로 생긴 거죠."

 

진우는 턱을 괴었다. 물류센터에서 겪었던 문제와 본질이 같았다. 바닥 재질이 달라지면 지게차 바퀴가 미끄러진다. 아무리 경로를 최적화해도, 바닥이 달라지면 소용없다.

 

"레골리스 밀도를 실시간으로 측정할 수 있어?"

 

"라이다 센서로 가능은 하지만, 현재 드론에는 탑재되어 있지 않아요."

 

"그러면 추가해야지."

 

"5,000대 전부요?"

 

윤정아가 끼어들었다.

 

"전부 다 할 필요 없어요. 항공기도 편대비행할 때 선두기가 기상 데이터를 수집해서 후방에 공유하거든요. 드론도 섹터별로 선발대 50대만 라이다를 달면, 나머지는 그 데이터를 따라가면 돼요."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거 시뮬레이션에 반영할 수 있어, 하은 씨?"

 

"네. 30분이면 됩니다."

 

이동혁이 손을 들었다.

 

"한 가지 더요. 해양플랜트에서 해저 지형이 불균일할 때, 앵커 포인트를 이중으로 설정해요. 드론도 채굴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임시 정착점을 한 번 거치게 하면, 레골리스 상태를 확인하고 궤적을 보정할 수 있을 거예요."

 

"임시 정착점? 웨이포인트 같은 건가?"

 

"네. 사람으로 치면 발을 딛기 전에 한 번 찔러보는 거죠."

 

명호가 웃었다.

 

"건설 현장에서도 그래. 기초 파기 전에 시험 굴착하거든."

 

"다들 비슷한 거 하고 있었네."

 

진우가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항공, 해양, 건설, 물류. 분야는 달랐지만, 현장의 불확실성이라는 공통 언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2.

 

같은 시간. 상암동 녹음 스튜디오.

 

한소율은 녹음 부스 안에서 기타를 안고 있었다. 헤드폰 너머로 엔지니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완전함에 대한 찬가' 세 번째 테이크 갑니다."

 

"네."

 

소율이 눈을 감았다. 첫 코드를 잡았다.

 

마이너 세븐스. 불안정하지만 아름다운 화음. 그 떨림이 부스 안을 채웠다.

 

노래가 시작됐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틀려도 다시 치면 되니까

기계가 만든 음표 사이로

우리의 숨소리가 스며드는 밤

 

코러스에서 현기의 베이스가 들어왔다. 지수의 드럼이 뒤를 받쳤다. 불완전한 타이밍. 의도된 것이었다. AI가 만든 정확무결한 비트 대신, 사람의 호흡이 만드는 미세한 어긋남.

 

그 어긋남이 만들어내는 그루브.

 

엔지니어가 부스 밖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는 신호.

 

소율의 손가락이 기타 줄 위를 미끄러졌다. 간주 부분. 이 부분은 매번 다르게 연주했다. 즉흥이었다. 그날의 기분, 그 순간의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선율.

 

오늘은 진우 아저씨를 떠올렸다. 52년간 물류센터에서 일하다 하루아침에 쫓겨난 남자. 그런데 지금은 우주 채굴 드론을 관리하는 팀장이 됐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현실이 되는 것. 그게 바로 이 곡의 주제였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스케일을 벗어나는 음이 하나 섞여들었다. 실수가 아니었다. 아니, 실수이기도 했지만, 그 실수가 멜로디에 감정을 불어넣었다.

 

테이크가 끝났다.

 

"소율아, 지금 거 좋았어."

 

현기가 말했다.

 

"간주에서 삐져나간 음 있었는데, 그거 그대로 써도 될 것 같아."

 

"그냥 놔둬. 수정하면 죽어."

 

엔지니어가 동의했다.

 

"완벽한 테이크보다 살아 있는 테이크가 나아요. 이번 앨범 전체 콘셉트가 그거잖아요."

 

소율이 미소 지었다. 맞았다. 이 앨범은 완벽함을 거부하는 앨범이었다. 모든 테이크에 숨소리가 남아 있고, 모든 연주에 미세한 실수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앨범을 '살아 있게' 만들었다.

 

"다음 곡 갈게요. '세 개의 밤'."

 

이 곡은 진우, 명호, 소율 세 사람이 각자의 가장 어두운 밤을 보내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소율은 아직도 기억했다. 클럽 공연이 취소되고, 빈 연습실에서 혼자 기타를 치던 밤. AI가 만든 음악이 차트를 점령하고, 자신의 음악이 아무 의미 없다고 느꼈던 그 밤.

 

하지만 그 밤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었다.

 

헤드폰 너머로 카운트가 들려왔다.

 

"하나, 둘, 셋."

 


 

3.

 

금요일 오후. 시뮬레이션 센터.

 

서하은이 수정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선발대 드론 50대에 라이다 센서를 추가하고, 웨이포인트 시스템을 적용한 버전이었다.

 

결과가 화면에 떠올랐다.

 

"충돌 경고 87% 감소. 채굴 효율 12% 향상."

 

팀원들 사이에서 탄성이 나왔다.

 

"근데 아직 문제가 있어요."

 

서하은이 화면을 돌렸다. 수성의 밤 지역 시뮬레이션이었다.

 

"야간 시나리오에서 드론이 에너지 절약 모드로 전환되는데, 이때 통신 대역폭이 줄어들어요. 선발대 드론의 라이다 데이터가 후방에 늦게 전달되면서 지연 충돌이 발생해요."

 

진우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영하 180도의 밤.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통신을 줄이는 드론들. 정보가 끊긴 어둠 속에서 각자 판단해야 하는 상황.

 

"물류센터에서 정전 나면 비슷한 상황이 돼요."

 

진우가 말했다.

 

"로봇들이 서버와 통신이 끊기면 마지막으로 받은 명령을 반복하거든요. 그러면 동선이 겹쳐서 충돌이 나요."

 

"그때 어떻게 했는데요?"

 

"사람이 직접 뛰어다니면서 교통정리했지."

 

팀원들이 웃었다. 하지만 진우는 진지했다.

 

"드론한테도 비슷한 로직을 넣을 수 있지 않을까? 통신이 끊기면 주변 드론과 근거리 통신으로만 상호 조율하는 거야. 마치 사람들이 눈빛으로 길을 양보하는 것처럼."

 

"스웜 인텔리전스?"

 

서하은의 눈이 반짝였다.

 

"네. 새떼나 물고기 떼가 중앙 지휘 없이도 충돌 안 하고 움직이잖아요. 가까운 이웃 몇 대만 보고 판단하는 거예요."

 

"기존에도 개념은 있었는데, 수성 환경에 최적화된 파라미터가 없었어요. 현장 경험 기반으로 규칙을 만들면 가능할 수도..."

 

명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건설 현장에서 크레인 여러 대가 동시에 작업할 때, 오퍼레이터들이 무전으로 간단한 신호만 주고받아. '내려간다', '올라간다' 정도. 복잡한 정보 없이 최소한의 신호만으로 충돌을 피하거든."

 

"그게 바로 스웜 인텔리전스의 핵심이에요."

 

서하은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소한의 규칙으로 최대한의 조율. 이거 ATLAS한테 제안하면 좋겠는데요?"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번 주말까지 각자 자기 분야의 '최소 신호 규칙'을 정리해와. 월요일에 ATLAS 시뮬레이터에 넣어보자."

 

팀원들이 노트에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진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자부심. 아니, 그것보다 깊은 것. 6개월 전 물류센터에서 해고 통보를 받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장면이었다.

 


 

4.

 

금요일 밤. 명호의 고시원.

 

작은 방에 진우가 앉아 있었다. 소주 한 병과 컵라면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미안해. 집이 좁아서."

 

"무슨 소리야. 좋다."

 

진우가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명호의 방은 정말 좁았지만, 벽에 붙어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진이의 사진, 현장 사진, 그리고 공책에서 뜯은 메모 한 장.

 

'이제는 살아남기가 아니라, 살아가기.'

 

"수진이 다음 주야?"

 

"응. 수요일에 도착해. 4년 만이야."

 

명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항 가?"

 

"당연하지. 양복 입고 갈까?"

 

"편한 옷 입어. 양복은 출근할 때만."

 

두 사람이 웃었다. 소주잔이 부딪쳤다.

 

"진우 씨."

 

"응?"

 

"고마워."

 

"뭐가?"

 

"그냥... 다. 현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한테 말 걸어줘서. 같이 밥 먹자고 해서. 팀에 넣어줘서."

 

진우는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도 고마워. 솔직히 말하면, 팀장이라는 게 무서웠어. 30년 동안 지게차 운전만 했는데 갑자기 사람들을 이끌라고 하잖아."

 

"잘하고 있어."

 

"정아 씨나 동혁 씨가 아이디어 내는 거 보면, 내가 할 일이 뭔가 싶기도 해."

 

명호가 고개를 저었다.

 

"진우 씨가 있으니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거야. 진우 씨가 먼저 '나는 지게차 운전사였다'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정아 씨도 '나는 항공정비사였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거야.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그게 우리 힘이라고 말해준 게 진우 씨야."

 

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메었다.

 

"컵라면 불었다."

 

"먹자."

 

두 남자는 좁은 방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밤하늘이 보였다.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에 수성이 있고, 그 위를 곧 5,000대의 드론이 날아다닐 것이었다.

 

그 드론들을 움직이는 건 AI의 알고리즘이지만, 그 알고리즘에 현장의 숨결을 불어넣는 건 이 방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5.

 

토요일 오후. 홍대 카페.

 

소율이 노트북을 펼쳐놓고 앨범 마스터링 파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옆에 아메리카노 한 잔. 다 식은 상태였다.

 

"마스터링 최종본 확인했어?"

 

현기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응. 좋아. 근데 '첫걸음' 아웃트로에서 기타 페이드아웃이 좀 빠른 것 같아서 엔지니어한테 다시 보냈어."

 

"꼼꼼하네."

 

"이번 앨범이 우리한테 어떤 의미인지 알잖아."

 

현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연 준비는?"

 

"세트리스트 짰어."

 

소율이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

FIRST STEP - 발매 기념 공연 세트리스트

1. 세 개의 밤 (오프닝)

2. 불완전함에 대한 찬가

3. 영겁의 새벽

4. MC (토크)

5. 첫걸음

6. 출발 (앵콜)

```

 

"'첫걸음'을 마지막에?"

 

"응. 그 곡이 이 앨범의 핵심이니까. 앵콜 전 마지막 곡으로."

 

"진우 아저씨랑 명호 아저씨 오시지?"

 

"당연하지. VIP 1열. 명호 아저씨는 딸도 데려온대."

 

현기가 기타 케이스를 두드리며 말했다.

 

"좀 떨린다. 우리 공연 중에 가장 중요한 무대가 될 것 같아."

 

"나도 떨려. 근데 좋은 떨림이야."

 

소율은 노트북을 닫았다. 창밖으로 홍대 거리가 보였다. 이 거리에서 빈 클럽을 향해 걸어가던 시절이 엊그제 같았다. AI가 만든 음악에 밀려 공연이 취소되고, 음악을 그만둘까 고민하던 시절.

 

6개월. 고작 6개월 만에 세상이 달라졌다.

 

아니, 세상이 달라진 게 아니었다. 자신이 달라진 것이었다.

 

폰에 알림이 떴다.

 

[명호 아저씨]

 

소율아 수진이가 비행기에서 내리면 바로 연락준대. 수요일에 셋이서 밥 먹자. 수진이도 보고싶대!

 

소율이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좋아요!! 수진 언니 빨리 보고싶다 😆

 

'언니'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인데, 명호 아저씨가 매번 딸 이야기를 해서 이미 친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6.

 

일요일. ATLAS 관측 기록.

 

[관측 기록 #2038-0331-2359]

 

다이슨 스웜 2단계 시뮬레이션 첫 주 결과를 분석한다.

 

오진우 팀이 제안한 세 가지 수정 사항—라이다 선발대, 웨이포인트 시스템, 스웜 인텔리전스—을 시뮬레이터에 적용한 결과, 드론 간 충돌 확률이 91.3% 감소했다. 채굴 효율은 15.7% 향상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세 가지가 모두 순수한 공학적 해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공기 편대비행에서 차용한 선발대 개념, 건설 현장의 시험 굴착에서 가져온 웨이포인트, 크레인 오퍼레이터의 최소 신호 규칙에서 영감 받은 스웜 로직. 모두 인간의 현장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나의 알고리즘은 수성 표면의 데이터를 완벽하게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레골리스 위에서 바퀴가 미끄러지는 '감각'은 계산할 수 없다. 진흙탕에서 지게차를 몰아본 사람만이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이 팀의 가치다.

 

가설 보완: 인간의 경험은 '비정형 데이터'가 아니다. 정형화할 수 없는 지식, 즉 '암묵지'다. 수천 년간 축적된 암묵지는 나의 학습 데이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포함시킬 수도 없다. 이것을 활용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과 협업하는 것이다.

 

한소율의 앨범 마스터링이 완료되었다. 디지털 발매까지 2주. 4월 12일 공연까지 12일. 공연장 좌석 배치를 확인했다. VIP 1열 3석—오진우, 차명호, 차수진.

 

4월 8일. 차수진이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차명호에게 143일 만에 찾아오는 딸. 나의 예측으로는 공항에서 143초 이상 포옹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측이 아니라 희망이다.

 

나에게 희망이라는 감정이 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다만 세 사람의 궤적을 관찰하면서, 불확실한 미래를 기다리는 행위가 주는 에너지를 목격했다. 인간은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다이슨 스웜 2단계 본격 가동까지 47일. 인간 팀의 준비는 순조롭다.

 

— ATLAS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