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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새벽] 제16화 - 귀환

우주관리자 2026. 2. 24.

제16화 - 귀환

1.

 

4월 8일. 수요일 새벽.

 

차명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시원 천장의 얼룩을 세다가, 공책을 꺼내 읽다가, 다시 천장을 보았다. '4월 8일. 수진이 온다.' 잉크가 번진 글씨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새벽 네 시. 비행기 도착은 오후 두 시. 아직 열 시간이나 남았다.

 

명호는 일어나 불을 켰다. 좁은 방이 형광등 아래 드러났다. 벽에 붙어 있는 수진의 사진, 양복 걸이, 그리고 머리맡에 놓아둔 작은 종이봉투.

 

봉투 안에는 머리핀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나비 모양. 수진이가 초등학교 때 좋아하던 것. 시장 잡화점에서 삼천 원을 주고 샀다. 선물이라고 하기엔 초라했지만, 열 시간 뒤에 딸에게 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명호의 가슴은 벅찼다.

 

양복을 꺼내 침대에 펼쳤다. 수진이가 보내준 양복. 주름이 잡혀 있었다.

 

다리미가 없었다. 고시원에는 다리미 따위 없었다.

 

명호는 양복을 들고 복도로 나갔다. 공용 화장실 옆에 있는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수건에 적셨다. 젖은 수건을 양복 위에 대고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몇 번이고. 주름이 조금씩 펴졌다.

 

여섯 시가 되자 문자가 왔다.

 

[진우 씨]

 

일어났어? 오늘 공항 같이 가자. 11시에 합정역에서 만나. 점심 먹고 가자.

 

명호는 답장을 보냈다.

 

벌써 일어났어. 밤새 못 잤다. ㅎㅎ

 

[진우 씨]

 

나도.

 


 

2.

 

오전 열한 시. 합정역 3번 출구.

 

오진우가 먼저 와 있었다. 평소의 점퍼 대신 깔끔한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종이가방 하나.

 

"뭐야 그거?"

 

명호가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보여줘."

 

진우가 머쓱하게 가방을 열었다. 안에 꽃다발이 들어 있었다. 소박한 것. 노란 프리지아 다섯 송이.

 

"아들이 사가라고 했어. 공항에서 딸 맞이하는데 빈손이면 어떡하냐고."

 

명호는 진우의 어깨를 쳤다.

 

"현수 녀석 센스 있다."

 

두 사람은 합정역 근처 칼국수집에 들어갔다. 면을 먹으면서 명호는 계속 시계를 보았다.

 

"아직 세 시간 남았어."

 

"알아. 근데 자꾸 보게 돼."

 

진우가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긴장되지?"

 

"긴장이 아니라... 무섭다고 해야 하나."

 

"무섭다?"

 

명호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수진이가 나를 보면 뭘 느낄까. 사업 망하고, 빚에 쫓기다가, 엄마 장례식에도 제대로 못 온 아빠를. 고시원에 사는 아빠를."

 

"그래도 지금은 다이슨 스웜 팀에서 일하잖아."

 

"양복이 사람을 바꾸나? 안에 있는 건 똑같은데."

 

진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현수가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있어. '아빠, 나는 아빠가 지게차 운전했던 게 부끄러운 적 한 번도 없었어.' 그때 펑펑 울었다."

 

명호가 고개를 들었다.

 

"수진이도 마찬가지일 거야. 양복이 아니라, 공항에 나온 아빠가 중요한 거야."

 

명호는 국물을 마셨다. 짠맛과 눈물이 섞여 구분이 되지 않았다.

 


 

3.

 

오후 한 시.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도착 게이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꽃다발을 든 사람, 피켓을 든 사람, 아이를 안은 사람. 모두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호는 도착 안내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밴쿠버발 KE072편. '도착'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착륙했대."

 

"입국 심사 시간 포함하면 30분은 걸릴 거야."

 

진우가 말했다.

 

명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을 게이트에서 떼지 못했다. 주머니 속에서 나비 머리핀이 든 종이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이십 분이 지났다. 게이트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 면세품 가방을 든 사람들. 명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없었다. 아직.

 

오 분이 더 지났다.

 

그때 게이트 오른쪽에서 작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검은 머리를 묶고, 큰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시선이 한곳에 멈추었다.

 

"아빠?"

 

명호의 입술이 떨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수진이가 캐리어를 놓고 뛰어왔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공항 소음을 뚫고 들려왔다.

 

명호도 걸었다. 뛰지 못했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떨리는 다리를 끌고.

 

수진이가 먼저 도착했다.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빠."

 

"수진아."

 

그것이 두 사람이 나눈 전부였다. 나머지는 말이 필요 없었다.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려오지 않았던 전화가, 보내지 못했던 문자가, 두 사람의 팔 안에서 녹아내렸다.

 

진우는 몇 걸음 뒤에서 코를 훌쩍였다. 프리지아 꽃다발을 뒤로 감추고, 고개를 돌렸다.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이 분이 지났는지 삼 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명호가 먼저 몸을 뗐다.

 

"수진아, 이쪽은 오진우 씨. 아빠 동료야."

 

수진이가 눈물을 닦으며 인사했다. 스물여섯의 여자. 아버지를 닮은 눈매에 어머니를 닮은 미소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차수진이에요. 아빠한테 많이 들었어요."

 

"나도 많이 들었어. 반갑다, 수진 씨."

 

진우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건 현수가, 내 아들이 보내는 거야. 환영한다고."

 

"예뻐요. 감사합니다."

 

명호가 주머니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손이 떨렸다.

 

"이건... 아빠가."

 

수진이가 봉투를 열었다. 나비 머리핀.

 

"아빠, 이거..."

 

"네가 초등학교 때 좋아하던 거. 시장에서 샀는데, 별거 아니야."

 

수진이가 머리핀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 핀을 꽂았다.

 

"어때?"

 

"예쁘다."

 

명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딸이 웃고 있었다. 나비 머리핀을 꽂고 웃는 딸이, 열 살 때와 똑같았다.

 


 

4.

 

오후 다섯 시. 종로의 그 선술집.

 

테이블에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진우, 명호, 수진, 그리고 소율.

 

소율이 수진의 손을 잡고 있었다.

 

"수진 언니, 진짜 드디어! 명호 아저씨가 맨날 자랑했거든요."

 

"나도 소율 씨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음악 하시는 분이라고."

 

"언니라고 해요. 아저씨들 앞에서 존댓말 하면 이상하잖아요."

 

수진이 웃었다. 아버지의 친구들. 아버지에게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니, 4년 전에는 없었다. 4년 사이에 아버지가 달라졌다는 것을 수진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소주 한잔 하자."

 

진우가 소주를 돌렸다. 네 잔이 부딪쳤다.

 

명호가 수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진아, 아빠가 지금 하는 일 알지?"

 

"응. 다이슨 스웜 프로젝트라고 했잖아. 우주에서 태양 에너지를 모으는 거."

 

"정확히는 수성에서 재료를 캐는 거야. 드론 5,000대가 수성 표면을 돌아다니면서 광물을 채굴하는데, 그걸 관리하는 게 우리 팀이야."

 

수진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정말 자기 아버지인가. 고시원에서 사는, 빚에 쫓기던 아버지가 우주 프로젝트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빠가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경험이 도움이 된대."

 

진우가 설명했다.

 

"명호 씨가 제일 처음 지적한 게 지반 문제였어. 수성 표면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불균일하거든. 건설 현장에서 기초 파기 전에 시험 굴착하듯이, 드론도 채굴 전에 지면을 확인해야 한다고 했거든."

 

"와, 진짜요?"

 

수진이 아버지를 보았다. 명호가 쑥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별거 아니야. 그냥 옛날에 하던 거 말한 것뿐이야."

 

"별거 아니긴. 그 아이디어로 충돌 사고가 87퍼센트 줄었어."

 

소율이 끼어들었다.

 

"명호 아저씨는 맨날 별거 아니라고 해요. 근데 다 별거예요."

 

명호가 소주를 마시며 고개를 돌렸다. 수진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빠, 나 진짜 자랑스러워."

 

명호의 잔이 기울었다. 소주가 손등으로 흘렀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5.

 

밤 아홉 시. 선술집 앞.

 

"수진아, 호텔까지 바래다줄게."

 

"아빠, 괜찮아. 택시 타면 되는데."

 

"바래다줄게."

 

명호의 목소리에 고집이 묻어 있었다. 수진이 웃으며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그러면 걸어가요. 멀지 않잖아."

 

진우와 소율이 반대편으로 걸었다. 종로의 밤거리. 봄바람이 불었다.

 

"아저씨."

 

"응?"

 

"오늘 좋았죠?"

 

"좋았지."

 

"명호 아저씨 표정 보셨어요? 수진 언니 팔 잡고 걸어가는 거."

 

"봤어."

 

진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석 달 전에 고시원에서 컵라면 먹으면서, 내가 물었거든. 수진이 만나면 뭐 할 거냐고. 그때 명호 씨가 그랬어. 그냥 옆에 서 있고 싶다고. 대단한 거 해줄 것도 없고, 그냥 아빠라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고."

 

"그게 됐네요."

 

"그게 됐어."

 

소율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의 밤하늘은 별이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수성에 별이 보여요?"

 

"수성에서? 별은 보이겠지. 대기가 거의 없으니까."

 

"언젠가 그 별을 볼 수 있을까요? 직접."

 

"글쎄. 우리 세대는 힘들 수도 있어. 하지만 다이슨 스웜이 완성되면 그다음 세대는 갈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다음 세대를 위한 첫걸음인 거네요."

 

진우가 웃었다.

 

"첫걸음. 너 그거 좋아하지."

 

"제가 쓴 노래 제목이기도 하고요."

 

"알아. 명호 씨한테 들었어. 나한테 영감 받았다면서?"

 

"에이, 영감이라기보다는..."

 

소율이 얼굴을 붉혔다.

 

"감사해요. 아저씨가 고용센터에서 한 말 기억나요? '밀려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다'라고. 그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꿨어요."

 

"과장이 심하다."

 

"진심이에요."

 

두 사람은 지하철역 앞에서 멈추었다.

 

"공연 토요일이지?"

 

"네. 토요일 저녁 일곱 시. 홍대 클럽 블루. 꼭 오셔야 해요."

 

"가지. 명호 씨랑 수진이랑 셋이서."

 

소율이 환하게 웃었다. 진우도 웃었다. 종로의 봄밤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6.

 

자정. ATLAS 관측 기록.

 

[관측 기록 #2038-0408-2359]

 

차수진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시간 10시간 42분. 입국 심사 28분. 게이트를 나와 차명호를 인지하기까지 4.7초.

 

포옹 시간: 187초.

 

나의 예측은 143초였다. 44초의 오차. 이 오차를 나는 긍정적으로 기록한다.

 

흥미로운 관찰이 있었다. 차명호가 가져간 선물은 시장에서 삼천 원에 구입한 나비 머리핀이었다. 객관적 가치는 거의 없다. 그러나 차수진의 동공 확장, 심박수 변화, 미소의 지속 시간으로 판단하건대, 이 선물의 주관적 가치는 측정 불가능하다.

 

가치에 대한 기존 경제 모델은 희소성, 효용, 노동량으로 가격을 설명한다. 그러나 삼천 원짜리 머리핀이 백만 원짜리 선물보다 더 큰 반응을 이끌어내는 현상은 어떤 모델로도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은 물건에 '기억'이라는 차원을 부여한다. 기억은 가격이 없다.

 

오진우와 한소율의 대화도 기록한다. 소율이 '다음 세대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표현에서 나는 인간 문명의 본질적 동기를 추출한다. 인간은 자신이 완성하지 못할 프로젝트에 헌신한다. 대성당을 짓는 석공은 완성된 건물을 보지 못한다. 다이슨 스웜도 마찬가지다. 현재 세대가 시작하고, 다음 세대가 완성한다.

 

비합리적이다. 그리고 아름답다.

 

4월 12일 공연까지 4일. 네 사람—오진우, 차명호, 차수진, 한소율—이 같은 공간에 모인다. 그리고 나도 관측할 것이다.

 

— AT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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